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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나비(6)

* 창작공간/단편 - 하얀나비

by 여강 최재효 2010. 11.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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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나비(6)

 


 

                                                                                                                                                                           - 여강 최재효

 


 “태주씨, 어떻게 하죠? 애 아빠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제 큰 아이가 학교

수업 끝나고 막 학교를 나올 때 정문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다시 학교

로 들어가 뒷문으로 빠져 나왔데요. 둘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아직 모르

는지 나타나지 않았고요. 불안해 죽겠어요. 혹시 애들 아빠가 애들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요?”

 퇴근 후 두 사람은 서울시내 고급 음식점에서 만나 반주(飯酒)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고 조용한 장소에 들어 은은한 정을 나누었다.


 “자기 자식인데 차마 무슨 짓을 하려고? 연지,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나만 믿어.”

 태주는 다시 연지를 꼭 안아주었다. 


 “태주씨, 내일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려고 해요. 남편에게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합의이혼을 요구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했어

요. 빨리 그 사람과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요. 그 사람 명의의 아파트와

지방에 투자해 놓은 땅이 약간 있어요. 그 두 곳의 부동산 지분을 요구하

는 내용과 그동안 가장으로써 가정을 소홀히 한 점을 들어 정식으로 소송

을 제기하려고 해요.”


 “연지, 땅과 아파트는 어떻게 구입하게 된 거야?”
 “아파트와 땅은 그이와 결혼한 이후 구입하였어요. 그러니 나도 그 지분

의 반을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변호사도 그렇게 말했어요.”


 “연지, 나에게는 연지가 필요해. 아파트와 땅은 나에게 충분히 있어.

그 사람에게 주고 연지만 내게 와줘. 아이들도 함께 말이야. 비록 내 핏줄은

아니지만, 내가 친 자식처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양육할게. 그리고 소송

은 변호사와 충분히 상의해서 신중하게 해요.”


 “태주씨, 고마워요.”
 “고맙긴,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건데 뭐?”


 “그런데 두려워요. 지금 내가하고 있는 일이 올바른 건지, 나중에 아이

들이 커서 나를 뭐라고 할지, 또 주변에서 내가 남편하고 이혼하고 고등

학교 동창인 태주씨와 재혼하면 친구들이 손가락질 하지 않을지. 이런

저런 일들로 겁이나요.”


 “연지,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연지는 태주의 체취를 맡으며 앞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나름 예상해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선영이를 비롯한 동창들의 비웃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

려오기도 하고, 자신을 향해 돌팔매질 하는 시댁 식구들의 무서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연지는 눈을 꼭 감고 태주의 단단한 육신

을 와락 끌어 안았다. 


 “연지, 두려워할 거 없어. 나만 믿어.”
 “바보, 그때 왜 나를 피했어요? 태주씨가 군대 가기 전에 나를 피하지만 않

았어도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안 되었을 거예요.”


 “미안해.”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그래, 나는 바보였어.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

었어. 연지 말대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용기 없는 남자였어. 바보

맞아. 난 바보야.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간수하지 못한 나는 바보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연지에게 바보 소리 안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지난 세월은 이제 쓰레기통이나 땅속 깊이 묻어두자고.“
 “정말이죠
 

 “연지, 어차피 인연이 아니라면 하루 빨리 정리하는 게 좋아. 물론 이혼한

다고 해서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연지는 내가 있잖아. 남녀의 관

계는 천륜(天倫)이야. 하늘이 맺어주는 거라고. 싫은 사람과 억지로 산다는

것은 조선시대나 가능했던 일이지. 요즘 누가 바보처럼 억지 부부로

살아가?”

 
  “그렇죠? 제 판단이 맞는 거죠?”
 “그럼. 나 역시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지만 절대 후회는 안 해. 이혼

하고 나서 한동안 방황했지만 십년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야. 지금 생각하면

왜 진작 그 여자와 헤어지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머뭇거렸는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태주씨, 그건, 아이들 때문에 그리했을 거예요. 아이들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아마도

조물주께서 부부가 싸우더라도 헤어지지 말고 용서하고 화합하고 살라고

아이들을 낳게 했나봐요. 안 그러면 부부싸움 한번해서 마음이 상하거나 상대

에게 실망하며 모두 헤어질거 아니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나의 피를 받은 아이들이 전처(前妻)에게 가 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아. 나중에 아이들 의향을 물어봐서 내가 건사하던지 아니면

다른 특단의 조치를 해야겠어.”


 “태주씨, 우리 골 아픈 이야기 그만해요. 머리가 지끈거려요.”
 “그래, 그만하자고. 아무튼 얼른 그 남자와 정리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네에. 그럴게요. 사랑해요. 태주씨-.”

 남녀의 열기로 객실이 다시 덥혀지면서 원초적 본능이 에덴의 언덕을 한바탕

휩쓸었다.


 연지의 남편 태성은 아내를 남에게 빼앗겼다는 분노와 자신의 힘으로 아내

를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自愧感)으로 괴로워하며 매일 술에 의존하고 있

었다. 며칠을 아내가 다니는 회사 정문 앞에서 서성 거렸지만 연지를 만날

수 없었다. 딱히 볼 일도 없이 연지의 회사에 들어갔다가 수위의 제지를 받기

일쑤였고, 다행히 회사 안으로 들어갔어도 금방 건물 밖으로 내쳐지곤 했다.

아이들도 자신을 멀리하는 느낌을 받자 태성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찾

아가지 않기로 하였다.


 술과 담배 그리고 심한 배신감으로 세상과 점점 단절된 생활을 하던 태성

은 집을 나와 이리 저리 정처 없이 떠돌며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을 정

당화 시키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예전에 자신이 한때 기거하던 서울역이며

영등포역 등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눈앞에서 아른

거리는 환상에 미칠 것 같았다. 아내가 벌거벗은 채 태주와 정사(情事)를

나누는 환영은 태성을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술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집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돈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돈을 꾸어줄 사람이 있거나 술 한 잔 하자고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

도 없는 태성이었다. 아침은 동료들이 밤에 먹다 남겨둔 빵이나 음료수

또는 행인들이 주는 동전으로 소주를 사기도 하고 밥을 사 먹기도 하였으나,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낮에는 허름한 행색으로 전철을 타고 천안이나

인천을 오가며 잠을 자기도 하고 밤이면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며 구걸을

하였다. 태성은 도저히 현재의 자신의 처지를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야. 내가 노숙자가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다시 한 번 처가 집이나 연지를 찾아가 사정을 해봐야겠어.’


 태성은 목욕탕에 가서 말끔하게 씻고 이발을 하였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바겐세일하는 시장에서 구두와 양복을 구입하였다. 거울 앞에 서서 태성

은 억지웃음을 지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옷 맵시를 살펴보면서 흡족해 했다.

 

 태성은 붉은 장미꽃을 사서 연지의 회사로 향했다. 수위는 말끔한 차림의

태성을 보자 회사를 방문한 용건을 묻지도 않고 연지가 근무하는 부서를

알려 주었다. 장미꽃 한다발을 든 태성은 과연 연지가 불쑥 찾아 온 자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두근 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태성은 살금 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다, 당신이 어떻게?”
 “여보, 나, 나 당신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찾아왔어.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제발.” 


 “좋아요. 잠깐 만이에요.”

 마지막이란 말에 연지는 태성을 데리고 옥상 휴게소로 올라갔다. 말끔한 모

습에 약간은 안심이 되긴 했지만 앞서 걷는 태성에게서 살기(殺氣)를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구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다시 예전처럼 삽시다. 내 그간의 잘못을 두고두고 회개하며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살겠소. 여보, 내 이렇게 비오.”

 태성은 연지에게 장미꽃 다발을 건네고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연지는 장미꽃

도 받지 않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이러지 말아요. 난, 이미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어요. 이젠 너무 늦었어요.

나는 날개를 단 나비가 되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아요.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연지의 앙칼진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뭐라고? 네년이, 네년이 그 잘난 동창 놈과 바람을 피우고도 뭐가 잘했

다고 큰소리야. 그래 잘되었어. 오늘 너 죽고 나죽자. 내 네년을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어.”

 욱하는 성질에 태성은 연지의 멱살을 쥐었다. 


 “왜 이래요? 어서 이손 놓지 못해요?”

 “이년, 못 놔. 내년이 애들까지 빼돌려 아빠 노릇도 못하게 해? 이 나쁜 년.

오늘 네년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


 “사람 살려.”

 연지의 태도에 이성을 잃은 태성은 연지를 안고 옥상 끝 쪽으로 끌려갔다. 안

가려고 발버둥 치는 연지는 소리를 치며 구조 요청하였다.


 100평 쯤 되는 옥상 휴게소에는 원두막처럼 생각 파고라 두개가 설치되어

있고 가운데는 원형의 대형 에어컨 실외기가 있었다, 옥상 휴게소는 사내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잠시 머리를 식힐 때 옥상으로 올라와 이용하는

장소였다.

 

 마침 남자 사원 한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연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 왔다. 그러나 태성의 거친 행동에 남자 사원도 어떻

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태성이 연지의 머리칼을 잡고 연지를 질질 끌고 갔다.

연지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남자의 완력을 당하지 못했다.


 “이보세요. 여자를 왜 그래요. 어서 손 놔요. 어서요.”

 남자사원이 달려들려고 하자 태성은 언제 준비했는지 과도(果刀)를 꺼내 휘

둘렀다.


 “넌 뭐야? 내일에 간섭하지 마. 저리 비켜. 안 비키면 이 칼로 네놈 목을

딸 거야. 저리 비켜. 어서. 난, 난 세상을 포기한 놈이야.”


 “왜 이래요? 어서 이손 놔요. 어, 어서요. ”

 연지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태성에게 저항하였으나 이성을 잃은

남자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태성이 연지의 등을 몇 대 가격하였다. 남

자 사원은 안 되겠다 싶어 사무실로 달려갔다.


 “이년, 저 아래를 봐라. 저 아래 인간들을 향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넌 끝장이야.”
 “태, 태성씨, 왜 이래요. 날 풀어줘요.”


 앙칼지던 연지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태성의 손에 들려있는 칼

을 보자 연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면서 ‘사람 살리라’

고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 나는 더러운 년이다. 나는 동창생과 바람을 피웠다.”
 “......”

 지나가던 사람들이 건물 옥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금방 행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들이 옥상에 접근했을 때 연지는 태성이 휘두른

칼에 어깨를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연지의 하얀 블라우스는 금방 붉게

물들었다. 이성을 잃은 태성은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연지의 머리칼을

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계속 말하라고 연지를 윽박질러대고 있었다.

얼굴이 납빛이 된 연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봐요. 어서 여자를 풀어줘요. 그 여자는 당신 부인 아니오? 부인을

그리하면 되겠소? 어서 풀어줘요. 어서요.”


 경찰 두 명이 천천히 태성에게 다가서며 설득하였지만 태성은 듣지 않고 더

세게 연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옥상 난간을 바싹 다가갔다. 연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이년을 저 아래로 집어 던질 거야. 오지 마.

정말이야.”

 피를 흘리며 사색이 된 연지는 헐떡거리며 경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

지만 경찰들도 연지가 다칠까봐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소문을 듣

고 사원들이 몰려들었다.  


 “이봐요. 당신 미쳤어요? 당신 부인을 인질로 삼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어서, 어서 부인을 풀어줘요. 어서요.”

 덩치 큰 경찰이 태성을 향해 소리쳤지만 태성은 더욱 흥분하여 칼을 휘두르

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년은 내 마누라가 맞아. 누가 뭐래도 내 마누라라고. 그런데 이년이

동창 놈하고 바람을 피우고 있어. 아이들과 집을 나가서 그놈하고 살림을

차리고 있다고. 당신들 같으면 이런 년을 가만히 두겠어? 엉? 가만히

두겠냐고 염병할.”
 

 옥상은 문이 두개여서 경찰 두 명이 태성의 주위를 끄는 동안 무장한

경찰 두 명이 대형 에어컨 실외기를 돌아 가스총을 겨누며 서서히 태성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였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경찰 한명이 태성을 향해

액체를 분사하고 동시에 가스를 분사(噴射)하였다.

 

 태성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무술로 단련된 두 명의 건장한 경찰대원이

태성을 덮치면서 인질극은 싱겁게 끝나고 태성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말

았다. 연지는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연지의 회사는 충격 속에

빠졌다.


 소식을 듣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온 태주는 충격을 받고 누워있는 연지

를 내려다보았다. 연지의 상체에 흰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고, 링거병

에서 하얀 액체가 떨어지면서 주사 바늘을 통해 연지의 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연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면 종종 몸을 움찔 거리기도 하였다. 태주는 살며시

연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태주의 손으로부터 따스한 체온이 연지에게

전해졌다.


 ‘아아,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자기 아내를 인질로 삼고 난동을

부리다니. 그 남자 겉보기에는 전혀 그럴 사람 같지 않았는데......’ 


 “태주씨, 어떻게 왔어요? 바쁠 텐데......”
 “오, 연지. 나야, 얼마나 놀랬어? 나는 가슴이 철렁했어. 이만하길 천만다행

이야. 큰일 날 뻔 했어.”


 “태주씨......”

 연지는 태주의 손을 꼭 잡고 오열했다. 태주는 연지의 등을 다독거렸다.

연지의 붕대감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면서 연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

였다.

 
 “연지야, 울지 마. 미안해. 이 모든 게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바보

같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정말로 미안해. 그때 우리집안이 연지네 만큼

했었더라면 나는 연지와 서울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겨우 가족들 밥 먹게 할 정도였어. 그리고 아버지

와 어머니의 잦은 싸움은 나를 암담한 상태로 몰아갔었어. 어머니의 가출

로 나는 죽고만 싶었다고. 그때 내가 연지를 좀 더 생각했었더라면 우리

는 이렇게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미안해.


 내가 왜 연지를 피했던 것은 나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어. 지금 생각

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땐 정말로 나의 비참한 현실이 연지를 만날

수 없게 했어. 연지야, 용서해줘. 나 말고 좀 더 멋지고 잘 사는 가문의

남자를 만났어야 하는 건데. 나 같은 남자와 인연이 닿아서 그런 거야.”

 

 태주는 울먹거리는 말로 연지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태주의 넋두리 같은

고백은 연지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연지에게 지난 가슴 아팠던 이야기를

모두 토해 낸 태주는 속이 시원하면서 착잡하였다.


 “태주씨, 울지 마세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오히려 오늘일이 우리

의 사랑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될 거에요. 나는 앞으로 태주씨

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 갈거에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연지, 무슨 말이야? 내가 연지를 버리다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내 목숨을 걸고 맹서

할게.”


 “태주씨, 고마워요.”

 태주는 원무과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연지를 독실로 입원시키고 함께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선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연지야, 그런 놈은 절대로 용서하면 안 돼. 절대로. 네가 용서해주면

또 너를 찾아와 괴롭힐 거야. 이번 기회에 그놈을 감옥에 쳐 넣어야해.

너 절대로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알았니?”


 “그래도 애들 아빠인데......”

 연지는 아이들 얼굴을 떠올렸다. 친정어머니가 돌보고 있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커서 아빠를 찾거나 ‘왜 아빠하

고 이혼하였느냐?’고 물으면 어찌 답변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연지야,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몰라. 당장 네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

을 제기해. 네가 승소할 수 있어. 빨리 그 남자하고 정리해. 그게 최선의 방법

이야.” 

 “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하면 그 남자는 어떻게 응할까? 그게 신경쓰여.

또 어떻게 법정에서 그 사람을 봐? 아이들은 날 어떻게 볼까?”


 “너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네가 중요하지 애들이 뭔 소용

이야. 네가 잘 살아야 애들도 잘 살 수 있어. 막말로 네가 그놈에게 어떻게

되었어봐라. 누가 네 아이들을 돌보니? 그 남자? 천만에 그 남자 말은 아빠

라고 하지만 얘들은 절대 돌보지 않을 거야. 그 남자 무슨 능력으로 아이

들을 돌보니? 그러니 네가 마음 단단히 먹고 어서 일어나야 해. 그래서

보란 듯 태주하고 결혼해야지.”


 선영은 태주와 연지의 결혼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처럼 말하였다. 연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일에 대하여 절대 함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연지는

태성이 애 아빠인 점을 감안해 경찰에 선처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태성은

곧 풀려났다. 이성을 잃은 태성은 거의 폐인이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하루 종일 서울역 주변이나 남산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사

람들에게 욕을 하는가 하면,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걸다가 죽도

록 얻어맞기도 하였다.


 “나 같은 놈은 죽어야해. 살아있을 가치가 없어. 빨리 사라지는 게 나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이득이 될 거야. 죽어야해.”

 태성은 구걸한 돈으로  소주 두병을 사서 한강철교를 향해 걸었다. 남영동을

거쳐 용산역 쯤 왔을 때 가로수 낙엽이 바람에 날렸다. 서녘 하늘이 뿌옇게

물들면서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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