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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나비(1)

* 창작공간/단편 - 하얀나비

by 여강 최재효 2010. 10. 1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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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나비(1)

 

 


                                                                                                                                                         -: 여강 최재효

 

 

 

 

                                                 1


 “태주씨, 왜 시간을 끄는 거예요? 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어젯밤


에도 죽은 그이가 칼을 들고 저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깼어

요.”



 “연지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미안해.”


 “나 이렇다 정신병자가 될 거 같아요. 태주씨도 빨리 마음의 결정을


내리세요.”

 


 “미안해. 곧 결정을 내릴 거야.”


 “태주씨, 사랑해요. 태주씨......”


 여인은 다시 사내의 품을 파고들자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핑크빛

조명이 촉촉이 내려앉은 여인의 뽀얀 어깨가 마치 정육점 쇼윈도에 진열된

살덩이 같았다. 여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태주는 점점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강이 마치 어머니 품처럼 마을을 감싸고돌면서 강 양편으로 기름진


들판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사시사철 몸을 바쁘게 놀려야


했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야 했으며, 가을이면


한데 어울려 하늘에 감사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겨울이면 농사일로 미처 손길이 가지 못한 집안의 구석구석을 수리


해야 했다. 여유가 생기면 동네 회관에 수시로 모여 윷놀이를 하면서


아래, 윗동네로 패를 나눠 막걸리 내기도 하고, 눈 쌓인 산으로 토끼


몰이를 나가기도 하였다.

 


 수십 년 동안 한 가족처럼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은 국가의 난개발 정책에 따른 댐 건설 때문이었다. 마을 인근


도시에 대규모 공장지대와 아파트 밀집지역이 들어서면서 용수량의


절대 부족에 직면한 지방정부의 고육지책으로 2개 군(郡) 10개면(面)


단위가 수몰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부분 누대에 걸쳐 농사만 짓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댐을 건설


할 거란 소문에 불안해했다. 농사일 밖에 모르던 순박한 사람들에게


댐 건설 소문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이면 댐


건설 이야기뿐이었다.


 

 그해 추수가 끝난 10월, 관청에서 댐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웅성거렸다. 동네 젊은 측들


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연일 군청 앞마당에 모여


 ‘댐 건설 결사반대’ 구호 외치며 지방정부의 무분별한 난개발정책에


항의하는 행동에 돌입하였다.


 

 군청 공무원들과 정보과 소속 형사들의 번뜩이는 눈빛은 곧 국가


정책에 항거하는 순박한 마을 주민들의 의지를 약화시켰다.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마을 사람들이 공룡 같은 지방정부를 상대로 반대 시위를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최태주와 장연지가 오랜 이별을


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대학 입시반이였던 두 사람은 읍내 빵집


에서 자주 만나 댐건설로 불안해진 주변상황과 얼마 후면 치러질 학력


고사에 대하여 논의해 보았지만 댐 건설은 어른들 일이어서 특별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장연지의 아버지는 K면 소재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장연지


는 도시에서 태어나 중학교 까지 공부하다 아버지의 농촌지역 전근


(轉勤)으로 할 수 없이 S군으로 전학을 오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입학


하면서 둘은 같은 학급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2년간 서로의 얼굴만


알고 지냈을 뿐 두 사람관계는 지극히 교우(交友)이외의 특별한 관계


는 없었다.

 



 3학년이 되면서 두 사람은 입시관계로 자주 만나면서 사랑하는 관


계로 발전하였다. 주변에서는 최태주와 장연지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


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장연지는 매사 발랄하고 재치가 넘치며,


사람 사귀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뚱하게 생긴 최태주는 농사일


에 찌든 선머슴 같아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주변 친구들이 알면 충


격을 받을 게 뻔했다.

 



 하얀 피부에 날씬하고 예쁜 장연지가 뭉턱하게 생긴 최태주를 사랑


한다는 일은 개와 닭이 친구가 되는 사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었다. 댐 공사 착공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농성을 하고 항거를 해보아도 공무원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 다는 것


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이후 30년 만에 마치 피난길을 방불케 하는 슬픈 광경이


늦은 봄날부터 펼쳐졌다. 10개면에서 날마다 수십 가구씩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로 산골 마을은 시끌시끌했다. 연지 아버지는 고등학교


3학년인 연지를 서둘러 D시로 전학을 시켰고, 태주는 아버지의 의중


이 무척 궁금하였으나 묵묵히 입시에 전념하였다.



 

 초여름 태주 네는 태주의 큰 아버지가 살고 있는 J시 변두리로 이사


하였다. 태주 아버지는 농토를 지방정부에 넘겨주고 받은 보상금으로


20여 평 되는 허름한 아파트를 구입하였다. 농사일 밖에 모르던 태주


아버지는 집을 사고 남은 돈 덕분에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태


주는 대학입시 공부를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싸움을 자주 목격해야


했다.



 

 외아들인 태주는 가문을 빛내고 친인척들에게 아버지가 배우지 못


하고 별로 가지 것이 없어서 천대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좋은 대학에 합격해야 했다. 또한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


면 연지와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 내년에 서울


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연지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가정교사를 불러 대학입시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입수하며,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 연지는 공부하는 중간에도 태주가 보고 싶었지만 얼마


후면 태주를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세상은 본래


공평하지 않았다.



 

 세상 만물이 무사공평 하다면 살맛이 없어서 일찍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연지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


지 않고 서울 Y대 법학과에 무난히 합격하였지만, 태주는 지방에 있는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뒤로 연지는 태주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태주로 부터 답장은 없었다. 답장을 기다리다 못해 병이 날 정도가


된 연지는 태주를 만나기 위해 J시를 갔었지만 태주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연지를 만나지 않았다. 반년 후 연지는 태주로부터 장문


의 편지를 받고 오열했다.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곧 군대를 지원


하여 입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고 연지는 다시 J시로 달려갔


으나 이미 최태주는 입대한 뒤였다. 어떤 날 연지는 태주가 보고 싶어


태주네 집으로 찾아가 태주의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였지만 태주 부모


는 알려주지 않았다.



 

 연지는 무작정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 찾아가기도 하였지만 누구도


태주가 어느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돌아 온 연지는 오랜 동안 태주를 가슴에서 지워내느라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대학생활 내내 연지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발랄하던 성격도


차분하고 말이 없는 여학생으로 변했고, 친구도 별로 사귀지 못했다.


연지는 태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게 되


었다.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서야 연지는 고등학교 친구들로부터 최


태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태주 부모가 황혼 이혼을 하자 태주는 학업을 포기하고 술주정뱅이


가 된 아버지와 부산으로 갔고, 태주 어머니는 재혼을 하였다고 했다.


연지는 태주를 꼭 한번 보고 싶었지만 만날 방법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장연지는 국내 굴지의 H그룹에 입사하였다. 태주


라는 이름을 거의 잊어갈 무렵 연지는 사내에서 만난 박태성이란 남자


와 결혼하였다. 박태성은 비록 명문대학 출신은 아니지만 탁월한 실무


능력과 성실함으로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 하였다.



 

 이듬해 연지는 딸을 낳았고, 박태성은 대리로 승진하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박태성은 연지를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요구하였고 연지는


남편의 집요한 요구에 항복하고 말았다. 연지는 아이가 세 네 살이


되면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싶지


않았다. 



 

 잘나가던 박태성이 상사의 잘못된 유혹에 빠져 회사공금 10억 원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박태성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연지는 세상 살 맛을 잃


고 방황하였다. 어린 딸을 친정에 맡기고 연지는 법률회사에 취직하여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박태성이 5년의 형기를 채우고 나올 때 까지 연지는 태성을 원망하


였다. 출소 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장연지는 남편의 옛 상사를 찾아


갔으나 헛수고였다. 폐인이 되다시피 한 박태성은 연지를 볼 면목이


없다며 가출하고 말았다.

 



 수소문 끝에 연지는 서울역에서 구걸하며 힘겹게 살고 있는 박태성


을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딸의 아빠이며 법적으로 남편인 태성


이 어쩌다 검은 마수에 걸려 세상을 버리게 된 데에는 장연지 자신이


남편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장연지의 지극 정성으로 박태성은 재활치료를 받고 사회 적응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박태성은 여러 회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태성을


받아주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남편이 다시 방황의 길로 접어들


까 걱정이 된 연지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주며 삶의 의욕


을 북돋아 주었다.

 



 연지는 아는 사람을 통해 박태성을 서울 시내에서 제법 큰 택시회사


에 기사로 취직하게 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태성은 차차 안정을 찾


아가게 되었고, 시댁에서 맡아 키우던 딸도 데리고 왔다. 아침마다


남편이 딸을 택시에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광경을 보며 연지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곤 하였다.



 

 남편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딸도 잘 자라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연지는 밤늦게 퇴근 하는 태성을 포옹하며 늘 고


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차차 안정을 찾아 가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연지는 나이에 비해 또래에 비하면 훨씬 젊어보였다. 사내에서


남자들의 은근한 유혹이 있었지만 연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의심 많은 태성과


의 관계가 점점 긴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자 연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태성은 태성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연지에게 알 수 없는


것들을 무언으로 암시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태성은 택시 기사


가 적성에 맞지 않는 다며 지방에서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건설회사


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



 

 박태성은 한 달에 한번 또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서울에 올라왔고


연지는 서서히 냉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남편과 서먹해진 관계,


자신의 꿈이 남편으로 인하여 뒤틀어진 일, 시댁의 보이지 않은 간


섭, 대학동창들의 화려한 사회생활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 회사


상사의 집요한 유혹, 친정 부모에 대한 불효 등 여러 상황이 겹치


면서 연지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여만 갔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연지와 태성은 허물 수 없는 높고 견고한 장성(長城)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어느 날, 연지는 고등학교 동창인 선영이


로 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반창회(班窓會)


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연지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D시로 전학


갔기 때문에 동창이 아니라며,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선


영이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 거의 3년 내내


같은 학급에서 함께 공부하던 터라 연지는 선영이의 요청을 거절

하기 어려웠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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