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섬에 가다(최종회)
- 여강 최재효
나는 냉랭한 날씨에도 잠을 잘 수 있는 인간의 특성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발견하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그 경이로움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발견하였
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내가 상병 때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서
북동쪽 방향에 있는 난함산에 군사 작전으로 파견 나가있을 때 였다.
훈련이 사흘 밤낮으로 이어지다 보니 영하 20도의 설풍 속에서도 잠이 왔다.
행군하면서도 잠을 잤고 전투식량을 먹으면서도 잠을 잤으며 심지어는 볼 일
을 보면서 잠이 들 때가 있었다. 어떤 동료 사병은 잠을 자며 걷다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다.
내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는 K가 부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K의
남편이 지금의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내는 또 어떤 표정일까?
나는 예측 가능한 가상의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아마 대개의 대한민국의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면 눈이 뒤집히
거나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달려들어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난장판
으로 만들 것이다.
여자들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큰 축복일 수도 있다. K는 점퍼를 푹 뒤
집어쓰고 가늘게 코까지 골았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갔다. 바닷물은 좀처럼
빠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나는 무료해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시를 암송하였다.
프로스트를 비롯해서 바이런, 셸리, 이백, 두보, 소월과 영랑까지 기억나는
대로 읊어댔다. 나는 상체가 바람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거의 굳은 채로 비몽
사몽간을 헤매면서도 마지막에는 윤연선의 얼굴을 부르고 있었다. 건강상
술은 마실 수 없지만 지금의 상태는 알코올 도수 높은 술에 취한 상태나 마찬
가지였다.
나는 K가 깨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릎도 움직이지 못하고 석고상처럼
그 상태로 고정된 자세로 있어야 했다. 웅크리고 잠든 K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이 막막한 바닷가에서 K가 나를 믿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나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윤연선의 목소리
를 계속 흉내내고 있었다.
또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이 지난 것 같았다. 바람은 불었으나 전혀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꾸물거리던 하늘도 맑게 개었다. 별들이 낮게 내려와 누에
섬에서 만들어 지고 있는 동화(童話)를 엿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혹은 호기심
강한 카시오페아나 오리온이 내려와 질투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과 바닷새들을 멀리 보낸 것이 나와 K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욱 멋지게 꾸미기 위해서라고 나는 위로하였다. 나는 잠시 동안 내가 누구의
남편이라는 사실, 누구누구의 아빠라는 사실, 어느 집안의 사위라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지금 이 시각 이 누에섬에는 오직 나와 머리에서 청포 내음이 물씬 풍기는
K만 있다고 가정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이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는 서해
의 어느 유명섬이 아니라 미국의 여배우 부룩쉴즈가 열연했던 불루라군(Blue
Lagoon)의 배경 쯤 되는 무인도에 와 있다고 가상하였다.
나와 K가 이 밤에 누에섬에 와 있는 것은 서해 용왕의 초대를 받은 것이고
초대장은 내 사춘기의 뽕잎을 같이 따던 그녀가 전해 주었고, 초대장은 일몰이
었다. K는 서해용왕 오윤(敖閏)의 딸이거나 왕비 쯤 되고, 나는 아침 이슬만
마시고 살며, 현실에 전혀 맞지않을 것 같은 도교(道敎)에 심취해 있는 본향이
곤륜산 기슭 요지(瑤池) 쯤으로 설정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각본을 짜놓고
서서히 혼미한 상태로 접어 들었다.
“진인(眞人)님, 제 등에 타세요. 저 해님이 용궁으로 가라앉으면 길이 어두워
돌아갈 수 없어요. 어서요.”
보기에는 천년도 더 된 거북이 나에게 등을 들이 밀면서 타라고 재촉 하였다.
“거북아,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거냐?”
내가 주저거리자 거북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해는 거의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는 중이었다.
“진인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우선 타기나 하세요. 빨리요.”
거북은 나에게 사정 하면서 빨리 등에 타라고 하였다. 거북이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허허, 그래도 어디 가는 것쯤은 말해 줄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뜸을 들이자 거북이는 앞발을 싹싹 빌며 제발 빨리 등에 타라고 하였다.
“서해용왕님께서 진인님을 초대하셨답니다.”
내가 거북등에 올라 타자 바다거북은 안도하였는지 금방 안면을 바꾸고 싱글
싱글 웃었다. 나는 괜히 거북이 등에 탄 게 아닌가? 혹시 나를 토끼 쯤으로 알
고 나의 간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서해용왕님께서?'
나는 얼마 전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滿月山) 약사사(藥師寺) 용신각(龍神
閣)에 불공을 드리면서 용왕님에게 용궁을 한번 구경시켜 달라고 속으로
빈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비현실적인 요구였기 때문에 용왕이나
부처님은 그저 나 혼자 속으로 신세타령하는 것 처럼 들어 주었을 것이었
다.
나의 소박한 꿈이 실현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북이 등에 타고
얼마를 바다 속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 멀리 용궁이 보였다. 내가
늘 꿈꿔오던 그 용궁이 틀림없어 보였다. 멀리서 반짝거리며 서서히 다가오는
용궁의 모습은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는 뉴욕 맨하탄이나 홍콩의 야경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아, 내가 얼마나 그리고 그리던 용궁이란 말인가? 정말로 용궁이 있었구나.
죽기 전에 용궁을 구경할 수 있다니 나는 정말로 행운아로다. 그러나 별주부
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토끼의 간이 필요하여 토끼를 유인하였는데
혹시......'
나는 별 이상한 상상까지 해 가며 꿈결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용궁을 넋을 잃
고 바라 보았다.
용궁의 기둥, 지붕, 벽이 모두 수정으로 지어진 수정궁(水晶宮)인데 위로 집채
보다 더 큰 청동 가오리가 떼로 몰려다니며 노래 하고, 코끼리 만한 상어와
돌고래가 경주를 하며,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물결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일 때마다 향긋한 향냄새를 뿜어냈다. 향내가 얼마나 강한지
인간세상에서 한번도 맞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나는 몸이 허공에 붕 뜬 것처럼
기분이 너무 좋았다.
창을 든 해마(海馬) 병정들이 궁 안팎으로 헤엄쳐 다니며 경계를 서고, 수 천
마리의 아름다운 인어(人魚)들이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수정궁 주변을 헤엄쳐 다니는 데 과연 내가 늘 동경해 오던 곳이 틀림없었다.
인어들은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찡끗하며 나에게 유혹의 시선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나는 오금이 저려오고 가슴이 벌렁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
을 지경이었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장관이 혹시 꿈이 아닌가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전해졌다. 거북이가 큰 전각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수십 명의 대신들이
나와 나를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대신들의 얼굴은 고래, 해마, 돌고래, 잉어,
자라, 광어, 오징어, 상어 등 수산물 시장에서 늘 보아오던 물고기들인데 사극
(史劇)에서 자주 보던 사모관대를 쓰고 붉은색과 푸른색의 관복을 입고 손에는
상아로 만들어진 홀(笏)을 들고 있었다.
그 중 기골이 장대한 자라가 나에게 다가와 어서 안으로 들라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큰 전각(殿閣) 안으로 들자 긴 수염 을 휘날리며 황금으로 된 왕관
을 쓰고 높다란 금상(金床)에 위엄있게 앉아 삼지창(三枝槍)을 쥐고 있는 용왕이
나를 반겨 주었다. 용광의 얼굴은 너무 광채가 세서 올라다 보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짐이 그대가 인간세계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특히 우리 서해
용궁을 동경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그대를 이렇게 초대한 것은
진인에게 몇 가지 상의 할 것도 있고 용궁도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였습니다.
자 어서 저리로 오르도록 하시지요.“
용왕은 나를 중앙의 상석에 앉혔다. 수천 명의 용왕의 신하들이 주연 준비를
마치고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좌정(坐定)하자 용왕
은 만조백관들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경들은 들으시오. 청구(靑丘)에서 왕림하신 진인을 소개합니다. 진인은
인간세에 살고 있으면서 평소에 나에게 지극한 불공을 드리며, 우리 서해용
국의 무사안녕을 빌었주었 습니다. 또한 진인께서는 짐에게 용궁을 구경시켜
달라는 간청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진인을 초대해 우리 용궁의 골칫 거리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
드리고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도록 조치를 할 것입니다. 경들도 짐의
이러한 계획에 따라 동참해서 진인이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시오.“
“용왕님, 황공하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지......”
“은혜라고 할 것 까지 있습니까? 은혜라고 생각하신다면 천천히 갚도록 하세
요. 자자, 우선 오시느라 고생하시었으니 짐의 술잔을 받으시구려.”
용왕은 구척 장신으로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 움직일
때 마다 왕관에 장식된 칠보(七寶)가 바르르 떨리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용왕이 상아로 된 주전자를 들자 나는 얼른 백옥 잔을 들었다. 주전자의 속이
투명하게 보였는데 황금색의 명주(名酒) 가득차 있었다. 주전자에서 은은한 향
기가 흘러 나왔다.
“참, 술은 짐이 따르는 것보다 공주가 따르면 더 좋을 듯 한데, 공주는 짐에게
가까이 오너라.“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 시녀들과 앉아 있던 공주가 용왕의 명령에 날듯이 다
가왔다. 나는 공주를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인간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양귀비(楊貴妃)나 왕소군(王昭君) 또는 서시(西施)나 초선(貂蟬)은
공주 곁에 서면 너무 초라할 지경이 었다.
“소녀, 부용(芙蓉)이라 하옵니다. 진인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사옵니다.
이렇게 진인님을 뵙게 되어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나이다. 소녀가 한잔 올리
겠나이다. 이 술은 곤륜산에 계시는 서왕모(西王母)께서 소녀가 지난해 봄 요지
경(瑤池境)에 놀러 갔을 때 주신 삼천년 된 복숭아로 담근 유하주(流霞酒)라는
술입니다. 주로 신선들이 마시는 술입니다. 한 잔만 마셔도 수명이 백일 씩
늘어난답니다.“
술을 따르는 공주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공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순간 나는 그만 술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아아,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도무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공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인께서 공주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오윤은 나와 부용을 번갈아 쳐다 보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나는 용왕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른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진인님, 이곳에서 오래오래 머무르며 소녀와 재미있게 한 세상 살아보세요.”
‘같이 살자고?’ 공주는 내가 술잔을 비우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안주를 집어 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안주가 혀에 닿자마자 녹아 버렸다.
"진인님, 이 안주는 천년 된 난(鸞)새 날개 구이온데 남자들에게 좋다고 해요.
맛도 괜찮을 거에요."
부용은 붉은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진인은 공주가 마음에 드시나요?”
용왕이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용왕님, 마음에 들다마다요. 그런데 공주께서 방금 저에게 한 세상 같이 하자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진인, 잘 들어 보세요. 서해 용왕인 짐, 오윤(敖閏)은 일찍이 공주를 하나 두었
는데, 열아홉에 용궁 근위대장 해마장군과 혼인을 시켰습니다만 부마가 그만 이
름 모를 병으로 이승을 달리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전국을 수소문하여 그럴듯
한 사윗감을 찾아보았지만 수 년이 넘도록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왕은 곁 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부용의 눈치를 보며 또 다시 나에게 속삭
였다.
어느 봄날 오윤이 남편이 병사(病死)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두문불출 하고
있는 부용에게 바람도 쐬고 인간세상을 구경시켜 줄 겸 서해 인근 사찰들에 자신
을 모신 용신각을 주유(周遊)하게 되었는데 미추홀(彌鄒忽)의 돌말 고을에 있는
약사사라는 절의 용신각을 들렸을 때 나를 보았다고 하였다. 그때 부용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용왕에게 조만간 나를 용궁에 초 대해서 주연을 베풀고 싶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용은 틈만 나면 부왕(父王)에게 나의 신상(身上)에 대하여 꼬치
꼬치 물으며 밤잠을 자주 설치곤 하였다. 내가 달을 사모하고 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용이 알고 나서 나를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날 용궁으로 초대하겠다
고 부왕을 졸랐다.
내가 우연히 누에섬에 일몰을 보기 위하여 지인(知人)과 누에섬에 들어갔을 때
해는 요염한 자태로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고, 공주의 명을 받은 우사(雨師)
와 풍백(風伯)은 비바람을 불러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나는 일련의 사건이
용궁에서 치밀하게 짠 각본에 의한 것 을 알고 머리가 띵했다. 내가 잠시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리자 오윤은 나에게 미안해 하였다.
오윤은 서해용국의 최대 골칫거리는 공주를 시집보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용왕의 말에 웃음이 났다. 인간세에서 그 정도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매우
흥미 있고 경사스러운 인륜지대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두 번째
술잔을 비우자 용왕은 다시 한 번 부용의 눈치를 보더니 내게 바싹 다가앉았다.
"내 부마가 되어 주시오."
오윤은 노골적으로 공주의 배필이 되어 달라하였다. 내가 만약 공주의 배필
이 되어 준다면 서해용국의 국토 절반을 주어 다스리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한 번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강하게 전해졌다. 부용이 나
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인 제가 감히 용왕님의 딸과......, 흔쾌히 받아들이고 말고요."
나의 승낙이 있자 오윤은 벌떡 일어나더니 만조백관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경들은 들으오. 마침내 우리 서해용궁의 최대 난제가 풀렸소이다. 진인
께서 부용공주와 혼인을 허락하시었습니다.“
오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 저기서 만세소리가 들렸다. 풍악이 울리고
전라(全裸)의 무희들이 주연장을 헤엄쳐 다니며 요염한 몸매를 자랑하였다.
“진인님, 고맙습니다. 소녀, 진인님과 인연을 맺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소녀와 오래오래 이곳에서 사시면서 복락(福樂)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부용공주,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정말로 믿기지 않아요. 내가 용궁의
부마(駙馬)가 되다니요? 인간세에서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 현실이 되었
습니다.“
나는 부용을 살며시 안아 보았다. 부용에게서 몽롱한 향기가 전해지면서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기분 이었다.
“진인님, 우리 춤 춰요.”
부용이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부용의 손에 이끌려 주연장 한 가운
데로 나갔다. 주연을 즐기던 수많은 용궁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
다. 수백 명의 용궁 악사들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비파를 연주하며 분
위기를 돋웠다.
부용의 손길에 따라 나는 수천 길의 허공으로 치솟기도 하고 순식간에
내려오기도 하면서 부용과 춤을 추었다. 나와 공주의 주변으로 수백 쌍의
가오리, 해마, 고래, 오징어, 상어 등 물고기 들이 빠른 속도로 춤을 추며
우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오색의 꽃비가 내리고
훈훈한 미풍이 불어와 볼을 간질였다.
용궁에는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데 전혀 뜨겁거나 차가운 느낌이 없었
다. 자세히 살펴보니 오늘 보았던 그 해가 머리 위에서 빨갛게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고, 달도 내가 항상 보았던 그 달이 틀림없는데 너무 하얗게 보였
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달을 자세히 올려다 보았다. 월궁에 항아 (姮娥)가
나와 부용이 춤추는 장면을 훔쳐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항아를
유심히 보니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내가 시를 들려주고 뽕나무
에서 오디를 따서 주면 살포시 미소 짓던 바로 그녀였다. 나는 가슴이 미어
지는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주연장으로 내려가 부용과 마주 앉았
다.
오윤은 한쪽에서 대신들과 수작(酬酌)을 하며 흥겨워하고 있었다. 나는
부용과 술잔 부딪혀 가며 대작하였다. 내가 자주 월궁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우자 부용이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나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더 머무를 수 없어 부용을 따라 공주의 처소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주의 방에는 언제 준비하였는지 주안상이 놓여
있었다. 한쪽 침상에는 화려한 색상의 비단금침이 정갈하게 깔려 있었
고 황촛불이 너울거리며 초야를 환히 밝혀주었다. 내가 먼저 부용에게
술을 따랐다. 부용도 나에게 술잔을 건네며 하얗게 웃었다.
“진인님, 오늘 이 인연은 세세년년 이어가도록 해요. 남녀 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들었습니다. 인간세계나 이곳이나 남녀의 인연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고 강제하지 못해요. 비록 진인님과 소녀의 인연이 한 순간 남가
일몽(南柯一夢)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소녀는 삼세의 숙연(宿緣)으로 여기고
서운해 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예요. 진인님, 소녀 가슴에 너무 많은
찬바람이 들어 있어요.“
부용은 홍조(紅潮)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는 부용의
얼굴은 분명 사바세계의 누구와 거의 닮아 있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촛불이 바람에 약간 흔들려도 부용은 상기된 얼굴은 나의 숨을
멎게 하였다. 나는 살며시 부용의 손을 잡아보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역시 익숙했다.
“부용, 이것이 진정 꿈이라 할지라도 나 역시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거 에요. 남녀의 인연이란 물과 같아서 어느 때는 이슬비로 또는 아침
안개로 또 어느 때는 하얀 눈으로 그 모습만 달리할 뿐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늘 서리어 있답니다.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처럼 그렇게 변화무쌍
하게 그리워하는 이의 가슴에 늘 남아 있답니다.
그대 비록 지아비가 이승에 없다고 하나 저승에 든 지아비 가슴에는 그대가
그리움으로 진하게 남아 있을 게에요. 숙연은 금생에 한번 맺어졌다 끝나는
게 아니라 삼세(三世)를 돌고 돌며 선연(善緣), 악연(惡緣)을 되풀이 하면서
돌고 돌지요. 법이니 제도니 하는 인간세상의 불필요한 것들은 하루빨리 사라
져야 해요. 그러나 점점 알 수 없는 것들이 문명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자꾸만
늘어나고 있어요.
조금 더 있으면 인간은 스스로 쳐놓은 그물에 걸려 아무도 자유로운 존재로
살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나 역시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그 법과 제도에 순응
해야 하겠지요. 좋아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서 좋아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산다는 게 얼마 나 불행이면서 또한 행복인지 모르죠? 무엇이던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보다 못해요.
찰라는 영원이고 영원은 찰라의 연속이니 비록 우리가 수유(須臾)의 시간을
함께 하였지만 이미 마음을 나눈 것이나 마찮가지입니다. 나중에 내가 인간
세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애하오. 부용공주."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잘도 말하고 있었다.
부용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의 이야기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듯 했다.
나와 부용의 첫밤은 꿈결처럼 지나 가고 있었다. 문 밖에 시녀(侍女)들이 밤새
도록 문틈으로 안에서 펼쳐지는 황홀경을 훔쳐보며 탄식을 토하기도 하고,
신음소리를 뱉으면서 길고 긴 밤을 지키느라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달콤하고 죽어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운우의 정을 나누고 나서 내가 부용의
머리를 올려주려고 할 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는 내가
인간세에서 자주 듣던 에밀레종 소리 같아서 세상만물이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종 소리는 너무나 슬프고 먹먹하여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인님, 서방님, 아쉽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 까지인가 봐요. 앞으로 얼마
든지 시간이 있을터이니. 서방님은 소녀를 잊지마셔요."
"공주, 인간세와 이곳의 시간이 다르다고 알고 있어요. 언제 내가 다시
용궁엘 온단말이오?"
"서방님, 걱정하지 마셔요. 서방님은 주어진 천수(天壽)를 다 누리시고도
더 사시도록 소녀가 명계(冥界)에 손을 써놓을게요."
"고맙구려."
내가 너무 춥다고 느꼈을 때 내 귓가에 속삭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용공주의 목소리같기도 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굳어
있었다. 누군가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른 비몽
사몽간에 나를 흔드는 사람을 알 수 없었다.
“선생님, 물이 완전히 빠진 거 같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K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그러나 금방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 시
야가 차차 흐뿌옇게 밝아지면서 나는 몸부림 쳤다. 부용이 오작교를 건너가
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치려고 하였지만 몸은 말을 듣지않았다. 나는 부용공주
에게 가지말라고 소리를 질러도 부용은 하얀 손을 흔들 뿐이었다.
“부용, 부용, 가지 말아요. 부용공주, 부용공주, 안돼, 가지말아요."
“선생님, 꿈 꾸셨나봐요? 용궁에라도 다녀오셨어요?”
K는 나를 내려다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나는 K의 무릎을 베고 K의 품안
에 웅크리고 있 었다. 나는 부시시 눈을 비비며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K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몇 시나 되었어요?”
“선생님, 새벽 네 시가 다 되었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어떻게 잠들어 있었지요?”
K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나를 자신의 무릎을 베게하고 반쯤 얼어버린 나를 녹였주었다고
하였다.
'아, 이런. 내가 실수를 하였구나. 사내가 여인을 보호해 줘야하는데 반대
로 내가 보호를 받다니......"
“선생님, 우리 이제 누에섬에서 나가요. 우리 하룻밤 같이 보냈네요. 집에 가면
남편이 뭐라고 할지 무척 궁금해요.”
내가 K의 손을 잡고 탄도를 향해 나올 때 바닷 길이 활짝 열려있었는데 내가 거
북이에게 업혀 용궁에 들어갈 때 길과 흡사해 보였다.
콘크리트길을 반쯤 걸어 나오자 K는 나에게 용궁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달
라고 하였다. 자신도 용궁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깼을 때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저기여, 내 등에 업혀 봐요.”
나는 걷다가 말고 K앞에 등을 내밀었다.
"......"
"어서요. 내 등은 거북이 등 같다고요. 어서 업혀요."
나는 K앞에 앉아 다시 등을 내밀었다.
“어떻게......”
나는 억지로 K를 업고 탄도를 향해 걸어 나오면서 방금까지 함께 했던 부
용공주의 향긋한 살 냄새와 체온을 다시 느끼면서 콧날이 시큰해 오는 것
을 숨겨야 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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