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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섬에 가다(4)

* 창작공간/중편 - 누에섬에 가다

by 여강 최재효 2010. 1. 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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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에섬에 가다(4)

 

 

                                                                                                                                                                         - 여강 최재효

 

 


 

 어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막내 아들에게 커다란 빈 포대를 건네면서

빨리 배실 으로 가라고 하였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배실 밭은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면 30분 정도 걸리는 집에서 제법 먼 거리에 있었다. 아버

지는 해마다 배실 밭에 구마, 콩, 고추를 심었고 여름부터 늦가을 까지

형들은 아버지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막내인 나는 허약한 체질과 공부에 열성을 보인다는 명분하에 늘 가장

쉬운 뽕따는 일이 맡겨졌다. 환금작물(換金作物)이 변변치 못했던 농촌

에서 일 년두번 단기간에 목돈을 만져 볼 수 있는 일은 누에를 치는

일이 유일했다. 마을에서 제법 규모가 큰 농사를 짓는 집은 거의 누에를

치고 있었다.

 

 뽕밭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사에 전념하던

그녀가 해마다 봄 여름이면 우리 뽕밭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검고 탐스러운 머리와 늘 해맑게 웃어주는 그녀의 모습은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하였다. 배실과 벌더구

니에 있는 밭에는 조상님들이 심어 놓은 뽕나무가 탐스러웠다.

 

 아버지는 조상님 덕분에 해마다 두 번 짭짤한 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뽕나무 두 세 그루면 빈 포대 두 세개는 뽕잎으로 꽉 채울 수 있었다. 높은  

가지에 까지 올라가 뽕잎을 딴다는 것은 여자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에

석잠 정도 자고 나면 왕성한 식욕을 제때에 해결해 주어야 했다. 어머니는

누에를 자신 보다 더 애지중지 하는 것 같아 나는 자주 성질을 부리곤 했다.  

 

 넉잠 자고 나면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 두 세분과 남자 일꾼 한 두명을 더

고용했다. 누에가 넉잠 자기 까지 나의 밀월(蜜月)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유지될 있었다. 그녀도 학교에서 돌아와 뽕 따는데 투입 된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조용히 뽕잎을 따고 있다가도 내가 뽕밭에 도착하면 마치 내가 오기

전부터 부르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났던 하얀 그때 꿈은…. 

 

 나는 그녀의 노래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곤 했다. 그녀가 뽕나무의 낮은 곳에 있는 뽕잎을 거의 다 따면 어른 키

이상의 높은 곳에 있는 뽕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뽕을 따면서도 그녀의

얼굴과 앞뒤 좌우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서 건네주면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빨간 입술

사이에서 반짝 거리는 그녀의 하얀 치아가 참으로 예뻐 보였다. 뽕밭에서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디 말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매일 학교에서 배운 시를 들려주기로 하였다.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내가 더듬거리며 읊는 시에 그녀는 하얀 미소로 응답해

주었다.

 

 그녀에게 멋없는 소리로 시를 들려주게 된 게기로 나는 시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되었고 먼 훗날 시인이 되리라고 포부도 지니게 되었다. 나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할애하여 국어 교과서뿐만 아니라 누이의 국어책

까지 뒤져가며 새로운 시를 찾아내 외워야 했다. 그때 암기한 시가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다. 

 

 나는 그녀가 아닌 K를 품에 안고 조용히 얼굴을 불렀다. 비바람 치는 바닷

에서 이성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옛 여인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부조리하다는 생각이들기도 하면서 한편  K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K는 영문도 모르고 콧노래로 박자를 맞추었다. 노래를

부른 때 만큼은 사람들의 마음은 가장 순수하게 된다. 나와  K는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윤연선의 흉내를 내느라 신경을 곤두 세웠다.

 

 두 육신은 비록 냉각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일체가 되어 합창하고 있었다.

집에서 누에를 키우던 시절이 몹시 그리웠고 일방적인 사랑으로 끝나버린

그녀가 몹씨 보고 싶었다. 그녀도 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어떤 사내의 여인

이 되어 노곤한 몸을 뉘이고 있을 것이다. 옛 소년이 이밤 자신를 그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어쩌면 그 시절이 그리운 내 마음이

나를 누에섬으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K의 이미지가 비슷했다.

 

 “선생님, 이 노래 좋아하세요?”

 내가 얼굴을 서너 번 흥얼거리고 나서 잠시 침묵이 흐르자 K가 물었다. 조

용히 물었다.


 “네에, 아주 좋아해요.”
 “혹시, 선생님 가슴 속 깊은 곳에 그 얼굴의 주인공이 계신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죠. 누구나 중년이 되면 과거로의 회귀본능이 강해지나 봐요."

 

 "선생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저도 요즘 부쩍 먼 남쪽 하늘을 바라

보는 시간이 부쩍 늘었는 걸요?"

 "남녘에 그리운 이라도 계신가봅니다?"


 "저의 첫사랑이 부산에 있어요. 그런데 요즘엔 통 연락도 없네요. 그 사람

곁에 어떤 여인이 있으니 연락하기 쉽지 않겠지요."

 

 K는 나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당황하여

헛기침 몇 번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한 여인을 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여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칫 한 여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위선

자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물론 K역시 어떤 사내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보여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잠시 K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좀 약해지긴 하였지만

마음을 놓을 상태는 아닌 듯 했다. 나는 양 팔에 힘을 빼고 나와 K의 사이

넓혔다. 숨쉬기가 한결 쉬웠다. 크게 심호흡 몇 번 하고 멀리 탄도 쪽을 바

라보았다. 나의 눈치를 보던 K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에. 첫사랑의 여인이 아직도 선생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 같아서요.”

 K는 속삭이듯 말하고 나서 큰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자신이 잘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맞아요. 그대가 잘 보았어요. 나는 한때 그 여인을 그리며 내 인생의 반을

허비하였어요. 얼핏 들리는 소문에 그녀는 홀로 되어 서울 동쪽 하늘아래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해요. 그러나 이미 갈 길이 정해진 사람들이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나는 그것이 더욱 화가 나고 견딜 수 없어요. 첫사랑은 대개가

깨진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아요.

 

 첫사랑은 나에게 생명수 같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해요. 생각해 보세요.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하루하루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편안한가요? 차라리 연속적인 노동이 더 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목을 잡는다는 말보다 한동안 내 인생 전체를 총괄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어머나, 그 정도였어요? 선생님, 그 여자 분을 정말로 깊이 사랑하셨나 봐요?”
 “사랑이요? 나는 지금까지 사랑이란 걸 모르고 살았어요. 사
랑이 어떤 색깔이

고 무슨 맛이에요?”


 “네에?”

  K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의 엉뚱한 질문에 어떤 답변을 해야 하나하

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체가 비록 얼얼할 정도 차갑기는 하겠지만

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K는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에는 사랑을 밥 먹듯 말하죠. 사랑이란 말을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크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부부간 또는 연인간의 애정의 척도가 되고 행복을

다지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하지요. 길가에 개똥처럼 흔한 그런 사랑은

이제 신물이 나요.”


 “저도 아직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사랑을 못 해봤어요. 죽을 때

까지도 요원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미완의 사랑만 하다 말았어요. 진정으로

참 사랑을 하고싶기도 해요. 더 눋기전에......"


 “아니 왜요? 아저씨를 사랑해서 결혼하신 거 아니에요?”

 나는 K의 의외의 말에 점점 더 흥미가 일었다.

 

 “사랑했었지요.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그런데요. 살 비비고 살다보니까 제가

꿈꾸었던 사랑은 빛바랜 연애편지 처럼 변했고요. 이제는 저도 누가 사랑이란

이야기만 꺼내도 신물이 올라 올 거 같아요.”

 K의 억양에 강세가 들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괜히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망친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왜 여성들은 사랑이란 말에 순식간에

빠져 들기도 하고 맹목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내기도 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저런,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사세요.”

 나는 마치 서당의

훈장처럼 멋 없는 말을 토해 놓고 속으로 다시 후회했다.


 “선생님, 처음 신혼 일 년 동안은 그래도 ‘이게 사랑이라고 하는 거구나’

하고 저 나름대로 만족해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엄마 노릇하랴,

아내 노릇하랴, 딸 노릇, 며느리 노릇 하려니까 어느새 사랑이란 무지개는

온데 간데없더 라고요.

 

 아이들 똥걸레 빨면서 사랑이란 말이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렇게 10년을

정신없이 살다 보니까 이제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씁쓸한 미소를 짓거나 

아예 외면해 버려요.”

 K는 그동안 속에 싸놓고 있던 사랑이란 야누스의 얼굴을 폭로하고 있었다.

 

 나는 K의 부부애에 대한 결정(結晶)이 궁금했다. 물론 결혼 15년차라고

한다면 부부의 금실이 다이아몬드나 수정은 아닐지라도 최소 금이나 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만약에 우리가 집에 전화 한통 안 하고 이 누에섬에서 하룻밤 보내고

아침에 집에 간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K의 의중을 떠 보았다. 물론 희망사항이겠지만 어떤 답변이 나올지 무

척 기대되었다.


 “선생님, 우리 정말로 그렇게 해 볼래요?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꼼짝 않고

있기로 해봐요. 아마 우리 남편은 제 친구들에게 밤새도록 전화를 걸어서

닦달할거에요. 친구들은 남편에게 그럴듯한 핑게를 만들어 둘러대고 영문도

모른채 나를 원망할 거고요. 생각만 해도 재미있어요.

 

 여인의 속은 정말로 복잡해 보였다. K의 몸무게까지 지탱해야 하는 나의

무릎에서 이상 신호가 전달되었다. 장시간 짓눌려있던 탓에 감각이 마비된

듯 했다. 나는 K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리를 빼서 편안하게 하고 주물렀다.

금방 감각이 살아났다. K는 나에게 미안해 하였다.

 

  K역시 젖은 청바지를 계속 입고 있어야 하는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K에게 바지를 벗게 하여 물기를 꼭 짜서

입히고 싶었다. 잠시 K의 S 라인과 뽀얀 속살이 상상되어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또 악마의 기운이 꿈틀 댈 것 같았다. 비바람이 잠시 잠잠해진

듯 했다.

 

 “바지가 젖어서 더 춥죠?”
 “그러나 어쩌겠어요. 여기서 벗을 수도 없으니.”


 “나 볼일 좀 보고 올게요. 10분쯤 걸릴 거 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에섬 왼쪽으로 걸어 제부도 방향으로 향했다. 나

와 K의 거리가 100미터 정도 될 때까지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K는

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빨리 걸어서 일 보기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했다.

 

 바다건너 제부도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도 누에섬에서 얼른

나와 제부도에 갔더라면 지금쯤 따뜻한 국물에 평안한 자세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고고 있을 터였다. 뜨겁게 데워진 오줌 줄기가

시원했다. 짧은 배설의 즐거움은 긴 허탈감을 맛보게 했다. 나는 배설을

하면서 K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지금쯤이면 K도 배설의

유혹을 받고 있을터였다. 뱃속에서 부정기적으로 전해지던 시장기는

이제 잠잠했다.

 

 ‘밤 열두시까지 어찌 견디고 있어야 하나? 나 보다도 K가 잘 견뎌줘야 할

텐데......’

 나는 갑자기 한기를 느끼고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대략 15분쯤 지난 듯 했

다. 다리가 후들 거리기 시작하면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바람은 잠잠해졌으나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다. 고생을 일부러 사서하고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마누라의 비웃는 듯 한 얼굴이

스쳤다.  K가 있는 곳에 다 왔을 때 K가 일어나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흰색 팬티에 감춰진 K의 둥그렇고 탐스러운 둔부가 무척 자극적이었다.

아마 내가 나가고 난 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 물에 젖은 청바지를 벗어

물기를 짜내어 막 입으려는 찰라 같았다. 나는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 처럼

잠시 숨을 죽였다. K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아 가슴이 두근 거렸다. 

 

 나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만약 내가 눈치

없이 K에게 다가 갔더라면 K는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할 것 같았다.


다시 10여분이 흘렀다. 늦가을 고향 집 지붕에서 보았던 잘 익은 박처럼 K의

뽀얀 둔부가 자꾸 아른 거렸다. 내가 다시 돌아가서 앉자 K는 내가 영영

안 돌아 올 것 같아 무척 걱정하였다고 했다. K가 입고 있던 청바지가 가벼워

보였다.

 

 “배고프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거고요. 조금 고파요.”


 “어쩌죠? 내가 오늘 저녁 맛있는 거 산다고 했는데……."

 나는 머리를 굵적거리면서 방금전에 목격한 외설적인 장면을 떠 올렸다.

그 장면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힐 게 뻔했다.


 “저는 오늘 선생님에게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보다 더 맛있는 걸 얻어먹

었는걸요? 정말로 달콤하고 멋진 음식이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맛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어요.”

 K는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기가 충분히 빠진 바지가 K를 기분

좋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차암, 내 가방에 초콜릿이 있어요. 속에 땅콩과 호두가 버무려져 있는 건데

고소하고 맛있어요.”


 나는 휴대전화를 찾으면서 전에 카메라 가방에 비상용으로 넣어두었던 초콜

릿 세개를 발견했다. 초콜릿 두 개가 금방 동났다. 


 “오늘 저한테 얻어먹은 지상 최고의 음식하고 이 초콜릿하고 어떤 게 더 맛있

어요?”

 나는 K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어머나? 지금은 이 초콜릿이 더 맛있는데요.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면 처음

것이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거예요.”

 

 나는 하나 남은 초콜릿을 K에게 강제로 떠맡기듯 건넸다.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초콜릿이 허기를 해결해 주었다. 허기도 해결하고 여유를 되찾았으나 여전히

날씨는 냉냉했다. 음양은 합쳐져야 불꽃이 튀는 법이었다. 오히려 K는 안정을

되찾은 듯 하였다. 나는 밀려드는 공허와 공복감으로 속에서 부터 떨려왔다.

내가 좀 전의 K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자 K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 라이터 있으세요? 담배를 안 피우시니 없겠네요. 라이터가 있어도

모닥불을 피울 수 없겠어요. 불쏘시개가 없으니......“

 K는 내가 계속해서 덜덜 떨어대자 내가 했던 것처럼 나를 안아주겠다고 하였다.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 몇 시나 되었어요?”


 “이제 10시 좀 넘었어요. 바닷물은 빠질 생각을 안 하니 그냥 이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체력이 많이 떨어진 내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 윗니가 딱딱 소리를 내

고 기침까지 해대자 K는 어쩔줄 모르다가 나에게 바싹 

다가와 앉았다.


 “선생님,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이리 오세요. 이번에는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선생님, 안 돼요. 이러다가 큰일나겠어요. 제가 선생님을 보호해 드리는 것은

이성의 자격이 아니라 단순히 간호사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차가워진 신체를

녹이기 위한 임시방편이에요."


 '임시방편? 그렇지 임시방편이지. 임시방편이 아니라면 안 돼지. 맞아 나를

위한 K의 임시방편이야.'

 

 나는 말과는 반대로 K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체가 넓은 남자가

여자를 안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되었다. 처음처럼 K는 나의 품에

안겼다. 이상하게도 한기는 금방 사그라졌다. 한기가 사그러들자 사악한

기운이 아래로 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몸이 부들거리는 와중에도 요사스러운

혈기는 점점 더 기세가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숨소리가 가빠지자 K도

은연중에 나의 이상 징후를 느낀 것 같았다.

 

 나는 K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 였다.

벌레같은 것이 내 등으로부터 시작해서 내 가슴 그리고 아래 위로 스멀

거리며 혈관속을 기어다녔다. 벌레가 급소를 기어 다닐 때 나는 부르르

떨기도 했다.

 

 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자 K역시 혈관에 피 흐르는 속도가 빨라지는 듯

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하였다. 심신에 평온을

찾은 것 같다고 느꼈을 때 검은 욕망은 다시 심장의 박동수를 급하게 증가

시키곤 하였다. 초콜릿은 미약(媚藥)이라고 하더니 그 약효가 나타나는 게

아닌싶었다.

 

 “선생님, 이렇다 아침까지 못가겠어요. 전 아침까지 있다가 집에 가고 싶은

데. 아침까지 있으면 제가 까맣게 타버릴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열정이 너무

센걸요.”


 K는 우회적인 수사법으로 느낌을 전했다. 차가운 해풍으로 부터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이지만 엄연히 타인의 여인을 끌어 안는 다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

었다. 물론 K 역시 똑같은 입장이었다.


 “그건 나 혼자만의 열정으로는 불가능해요. 불이란 존재는 물에서 나오죠.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요. 불은 음과 양이 부딪혀야 일어나요. 구름 속에서

불이 나오는 거 보셨지요? 내가 아무리 열정이 강하다고하나 그건 한 쪽일

뿐, 상대의 열정이 가미 돼야 진정한 불이 일어나는 거예요.”  

 

 K는 나의 법문같은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거렸다. K가 지니고 있던 온기의 대부분이 나에게 옮겨온 것인지

아니면 음양의 조화에서 새로운 온기가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

에게 상당한 양의 온기가 축적되었다. 나의 알쏭달쏭한 법문은 장시간

지루하게 이어졌다.

 

 모든 사물의 내면에서는 양이, 밖에서는 음이 작용하고 있어요. 천체는

태양인 양을 중심으로 음의 행성들이 돌아가고, 나무의 속은 뻗어 나가는

기운 양이지만 나무의 껍질은 딱딱한 음이고, 남자의 정기는 양이지만

여자의 음기 속에 들어가서 자란답니다. 사람의 정신은 양이지만 음인

육체 속에 있습니다. 물은 음이지만 물의 내면은 항상 동(動)하려는 기운

양의 성질입니다.

 

 그런데 타오르는 불은 양이지만 불의 내면은 음의 성질이 있습니다. 

우주의 운동은 물의 분열과 통일운동 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물 에너지의 다른 모습들 이지요. 우리가 먹는 맛있는 사과나 딱딱한

호두와 밤, 그리고 나무와 바위, 쇠와 화석 등은 바로 물의 자율성인 액체,

응고성인 고체, 조화성인 기체에 의해 만들어진 물과 불의 작품들 이에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의 열기와  달의 차가운 한기에 의해 모든 생명체

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답니다.

 

 나의 엉터리 법문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K는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숨소리는 고르게 들렸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초콜릿이 K의

전신에 에너지를 골고루 전달하였고 나의 자장가 같은 이야기가 길게 이어

지자 K는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든 듯 했다. 나는 아쉽지만 K를 나의 무릎에

편히 눕히고 점퍼를 벗어 덮어 주었다. K에게서 얻은 온기가 다 소진 될

때까지 나는 그대로 있기로 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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