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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내린 눈(9)

* 창작공간/장편 - 유월에 내린눈

by 여강 최재효 2009. 1. 3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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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에 내린 눈(9)

 

                                                                                                                                                                         - 여강 최재효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어떻게 하시다 무역상이 되시었는지요? 무역상

이라면 청국과 왜는 물론이고 더 많은 나라를 다녀보셨을 텐데요.”

 “나는 내 누이동생을 찾기 위하여 국제무역상이 되었단다.”

 “누이동생이요?”

 

 “그래, 지난 병자년 때 한양에서 제법 뼈대가 있는 김씨 가문의 총각과 약혼

까지 올린 내 누이동생이 병자년 호란 때 오랑캐들에게 잡혀갔었지. 내가 멀리

안남(安南)이란 나라에 있을 때 조선에 오랑캐들이 쳐내려와 내 늙은 어머니를

죽이고 하나 밖에 없는 내 누이동생을 포로로 잡아갔단다. 그래서 나는 심양

으로 북경으로 다니며 인간시장이란 시장은 모두 뒤졌지만 끝내 누이동생을 찾을

수 없었지.”

 박대서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닦았다.

 

 ‘아아,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구나.’

 “나으리, 누이동생이 참으로 고왔겠어요?“


 “으응, 참으로 예뻤지. 아마도 그 애가 예뻐서 청나라 잡혀가면서 오랑캐들

에게 더욱 고초를 당했을지도 모르지. 그 놈들이 조선 여자라면 환장을 하니.”

 추랑은 자신이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어, 나으리, 혹시 누이동생 이름이 어찌되는지요?”

 “이름을 말하면 무엇 하겠나? 이제는 이승에 없거나 멀리 이역만리 타국으로

팔려갔을 텐데. 누이동생 이름은 소연이라고 하지. 본명은 박아지인데 집에

서는 보통 소연이라고 불렀어.”

 

 ‘가만, 소연? 소연? 그렇지. 내가 심양에서 이춘연의 집에 기거할 때 노예시장

에서 사와 함께 있던 처자도 이름이 소연이었지.’

 “나으리, 그 소연 처자가 어찌 생겼는데요?”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갸름하며, 눈썹이 초승달처럼 생기고, 키는 추랑이

정도 되고 웃을 때마다 오른쪽 볼 아래 보조개가 패이곤 했어. 참으로 마음도

곱고 예쁜 아이였는데......”


 “나으리, 호, 혹시 소연 처자 왼쪽 팔뚝에 불에 데인 자국이 있는지요?”

 “추랑아,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 사실을 아느냐?”

 

 “그리고 오른쪽 이마에 큰 점이 하나 있고요?”

 “그래, 그래 맞어. 내 누이동생 오른쪽 이마에 분명 큰 점이 있어.”


 “어떻게 네가 그 애에대하여 그리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냐?”

 박대서는 어린 시절 누이동생과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정실부인의 자식들에게

당한 참담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놈아, 너와 저 계집은 우리 가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 다시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거라. 다시 한 번 우리들 눈에 띄면 그땐 오늘보다 더

처참한 일을 당할 것이니 명심하거라. 저 계집 팔뚝을 인두로 저 정도 지져놓은

것도 황송하게 생각해. 다시 또 나타나면 네 놈도 저 꼴이 될 것이다. 이놈,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박대서는 어머니를 건드려 남매를 낳게 하고 남의 이목이 두려워 어머니와

남매를 박씨 문중 근처에 살도록 한 아버지의 처사가 원망스러웠다. 박대서가

세상물정에 어느 정도 눈이 띄었을 때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아버지 집에

찾아갔지만 정작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정실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입고

쫓겨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박대서는 적서(嫡庶)차별하는 조선의 양반

사회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 빌어먹을 조선에 태어난 것이 원통하구나.”

 “나으리, 고정하소서.”


 갑자기 박대서는 옛 생각에 방바닥을 내리치며 통곡하였다. 추랑은 박대서

역시 호란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 슬픈 가족사가 있음을 알고 동병상련(同病

相憐)의 정을 느꼈다. 한참동안 흐느껴 울던 박대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스스로 술을 따라 연거푸 석잔을 들이켰다.

 

 “내 어머니는 박씨 가문에 종이셨어.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당파싸움에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당하였지. 남자들은 삼족(三族)이 멸(滅)하고

여인들은 하루 아침에 반대편에 섰던 진짜 역적 놈들 육욕(肉慾)의 노리개로

전락되었지. 이것이 조선의 현 실태라네. 쳐 죽일 놈들......”


 박대서는 두 주먹을 쥐더니 부르르 떨었다. 방금 전 미성(美聲)으로 창을 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복수의 화신처럼 박대서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소연이 이 분의 누이동생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어찌해야하나. 지금 심양에서

이춘연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줘야하나? 아니면 모른 체

할까? 아니야, 나도 이산(離散)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 그냥 숨기기에는

내 양심이 용서치 않아. 그러나 알려 준다면 이 분의 성정(性情)으로 보아 당장

이라도 심양으로 달려갈게 뻔한데. 어쩌나?’


 추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다시 온화한 얼굴로 심기를

다잡은 박대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추랑아, 다시 한 번 묻겠다. 네가 어떻게 내 누이동생 왼팔에 난 화상

(火傷) 자국을 아느냐?”


 “소첩, 절을 받으소서.”

 추랑이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박대서에게 공손이 절을 올렸다.

 

 “추, 추랑아? 왜, 왜 그러는 거야?”

 “나으리, 소첩, 지난 병자년부터 오늘까지 저에게 있었던 꿈같은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시간도 많은데 나와 수작(酬酌)하면서 천천히 이야기 해보거라.”

 

 추랑이 병자년 한 겨울 정진경의 고모 댁으로 오랑캐들의 전화(戰禍)를 피해

목멱산으로 피란가다 오랑캐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어 이춘연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사지를 탈출하여 현재 다동 태흥관의

기생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추랑이 소연과 이춘연의 여인이 되어 친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냈던 이

야기와  지금은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하자 박대서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추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눈에서 빛이 났다.

 

 “아, 추랑아, 정말로 고생이 많았구나. 네 말대로라면 내 누이동생이 이춘

연과 부부의 연을 맺고 지금 심양에 살고 있겠구나.”


 “나으리, 소첩이 들려드린 이야기에 하나의 거짓됨이 없사옵니다.”

 긴 시간 추랑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박대서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추랑이에게

절을 하였다.

 

 “아, 아니. 나으리.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대는 나의 은인이오.”

 “......”

 

 “만약, 그대가 그때 내 누이동생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엄동설한에 동상

에 걸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백골이 되었을 거요.

목숨을 잃을 뻔 한 내 누이동생을 살려주어 정말로, 정말로 고맙구려. 내 그

대가 누이동생을 사는데 든 돈 삼백 냥의 천배를 내놓겠소. 정말, 너무 고맙

구려.”

 

 ‘삼십만 냥을?’

 추랑은 돈의 액수에 충격을 받았다. 심양에서 자신이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서 소연이란 처자를 사려고 하였을 때 이춘연의 노모가 300냥을 지불하였고,

추랑은 금가락지를 이춘연의 노모에게 건넸다. 박대서는 눈물을 훔치고 일어

나더니 다시 한 번 추랑이에게 절을 하였다.

 

 “나으리,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대는 나에게 있어 큰 은인입니다.”

 박대서는 이제 말까지 존대를 하면서 추랑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였다.

 

 박대서는 자신이 박씨성을 쓰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아버지를 가까운 거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집에 가서 일만 해야 했다. 겨우 일하고 얻어온 음식으로 어린 남매를

지극정성으로 키우면서 아무 불평 한마디 없이 일만하는 어머니가 밉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였다. 또한 영특한 누이동생 소연이와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적실의 자식들에게 당한 상처는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누이동생은 

그 사건 이후로 늘 말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누이동생을 바라보는 박대서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졌고 그 통한(痛恨)은

결국 적서차별과 양반 이외의 하층민을 마치 벌레 취급하는 조선의 제도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박대서는 일찍 상업에 눈을 떠 외국으로 무역업을 하여

큰돈을 벌었지만 늘 가슴 한구석은 텅 비어있었다. 장사를 위하여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남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돈이 없어 청운의

꿈을 펴보지 못하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학비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아, 무서운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단 말인가?’

 추랑은 심양에 있을 때 소연이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자신

을 친 언니 이상으로 믿고 따르는 소연이를 두고 덕칠이와 한양으로 돌아오는

발길도 가볍지 못했다. 만약 박대서가 그때 소연이 이춘연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으로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청국의 고급 군관의 정실부인이 되어 아이까지 낳고 사는 마당에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내 어쩐지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뭔가 끌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대서가 추랑에게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자 추랑은 갑자기

자리가 어색하게 보였다. 누이동생이 청국에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대서는 처음보다 안색(顔色)이 좋아졌다. 그리고 처음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주전자를 들었다.

 

 “제 잔 받으시지요?”

 “나으리, 처음처럼 말씀 놓으세요. 소첩 이러시면 어색하와 자리가 불편하옵

니다.”

 “아닙니다. 어찌 제 은인에게 그리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으리, 아닙니다. 저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선의 제도와 제 한을 풀고자

기녀가 되었습니다. 그냥 기녀로 대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박대서가 한참 추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차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대의 바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존댓말을 받아

주세요.”

 “아이, 나으리.”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묘한 인연은 처음입니다. 나는 이곳

태흥관을 찾기 전부터 이미 그대와 인연이 맺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으리 -”

 "내, 그대를 인애하면 아니 되겠는지요?”


 “......”

 “내 듣자하니 아직 그대는 머리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밤 내 그대의

초야권(初夜權)을 살 수 있는지요?”

 

 “나으리, 소첩 이미 마음속으로 초야권을 나으리께 드렸습니다.”

 “고, 고맙소.”


 “나으리 -”

 “기분전환 할 겸 그대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좋은 밤이 백년,아니지

천년동안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대와 나는 숙연(宿緣)인가 봅니다. 이미 누이동생을 통해서

인연이 닿았으니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추랑이 살며시 얼굴을 들어 박대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 대면

할 때보다 다소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박대서와 추랑이 시선이 마주치자 동시에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나으리, 그럼, 이번에는 나으리가 창을 하시고 소첩이 춤을 추면 어떻겠

습니까?”

 “오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나으리, 말씀 놓으셔요. 이 소첩 자꾸만 움츠려드옵니다.”

 

 “그, 그래도 어찌......”

 “괜찮사옵니다. 처음처럼 추랑아, 하고 부르소서.”


 “그, 그래도.”

 “자꾸 그러시면 소첩 흥이 안 나옵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내가 창을 할 테니 자네가 춤을 추시게나.”

 

 “네에, 서방님.”

 “서방님?”

 “네에, 서방님.”

 

 처음 박대서가 추랑이 방에 들 때부터 태흥관의 할 일 없는 기생들이 추랑이

방 앞을 기웃거리면서 안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하였다. 춘매도

박대서가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추랑이와 박대서가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느새 태흥관 기생들 모두가 추랑이 방 앞에 모여들어

추랑이를 부러워하며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이고, 나는 언제 저런 미남자와 어울려 밤을 새워 볼꼬?‘

 ‘아아, 같은 여자가 보아도 추랑이 정말 멋진 여자야. 어떻게 술 한 잔에

일만 냥, 아니 십만냥을 받아 낼 수 있단말인가? 내일 아침이면 한양에 내로라

하는 기생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오게 될지도 몰라. 좀 전에 저 처사님께서

술값으로 십만 냥 아니, 백만 냥을 술값으로 준다고 했으니 다는 아니어도

반은 줄 테지. 그렇게 되면 한양의 기녀들은 모두 풀이 죽을 텐데. 추랑이,

참으로 뛰어난 여인이야. 너무 부러워.’

 

 ‘염병, 기생생활 십 수 년이 지났건만 맨 송사리만 덤벼드니 나도 한심하구나.

저런 월척이 내 생전에 한번만이라도 걸려들면 얼마나 좋을까?’

 ‘빌어먹을, 허구한 날 내 밑구녕만 탐하는 놈들이나 찾아드니 내 인생이 언제

한번 저리 꽃을 피워볼꼬?’

 

 ‘아, 추랑 언니는 오늘 밤 봄물에 홍수가 나겠구나. 얼마나 좋을꼬? 아이고

부러워라.’

 추랑의 방 앞에 모여든 기생들은 제 각기 망상 속에 빠져 추랑이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준비되었소?”

 “네에, 서방님.”


 추랑이 일어서서 하얀 비단 깁을 오른손에 길게 늘어트리고 춤 출 준비를

하고, 박대서 역시 오른 손에 부채를 들더니 발성 연습을 하였다. 황촛불이

더욱 빛을 발하더니 두 그림자를 벽에 드리웠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다른 악기의 반주도 없이 길게 짧게 그리고 초연하게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순식간에 녹이는 듯한 박대서의 구성진 창에 추랑이는 물론 추랑이 방 앞에서

방안의 광경을 상상하며 엿듣던 기생들은 콧등이 시큰해지며 목이 메었다.

 

 추랑이 춤사위는 너울너울 춤추는 황촛불에 창문에 그림자를 만들며 사뿐히

이어졌다. 추랑이와 박대서가 시선이 마주치면 추랑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

고 박대서는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응대하였다.

 

 추랑의 하얀 비단 깁이 천정으로 솟으며 추랑이 미끄러지듯 몸을 돌릴 때

마다 박대서의 창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의 창과 몸짓은 천상(天上)의

신선과 선녀의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랑이 박대서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을 살짝 내밀면 박대서는 추랑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하얗게

웃었다. 분명 칠월칠석 날 밤 견우와 직녀가 만나 일 년간의 이별의 정한(情恨)

을 몸으로 풀어내는 의식 같았다.

 

 ‘아, 정녕. 황진이가 환생하였도다. 어떻게 내 이런 여인과 인연을 맺었을꼬?’

 박대서는 창을 하면서도 추랑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감탄하였다.


 ‘이 밤이 하얗게 다 타도록 내 새로운 인연과 길고긴 연을 쌓고 싶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단 말인가?’

 추랑은 박대서의 듬직한 어깨와 등을 보면서 심양에서 소연과의 인연 그리고

지금 한양에서의 기연(奇緣)에 대하여 몸서리 쳤다.

 

 ‘아, 어쩜 남정네가 저리도 노래를 잘 부른단 말이냐?’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이로다. 난, 언제 저런 호사를 누려볼꼬?’

 ‘아아, 오금이 저려 못 듣겠다. 무슨 남정네가 기생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른 단

말인가? 내 기생생활 이십년이 무색하구나.’ 


 문 앞에 기생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차마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마다

추랑이가 되어 방안의 광경을 상상해보고 부러워하였다.

 

 박대서가 황진이의 시조를 마치자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다시 한잔을

따라 추랑이에게 건넸다.


 “내 두 곡조 더 하리다.”

 “서방님, 좋습니다. 소첩, 밤이 새도록 춤을 추겠사옵니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추랑과 박대서는 황진이 홍랑(洪娘) 그리고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을

차례로 불러내어 숭고한 의식을 치렀다. 비록 기방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하지만 박대서의 창은 명창을 뺨칠 정도로 빼어났고 추랑이의 춤사위는

하늘과 땅의 음양의 조화를 서러운 몸짓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추랑이의 방

앞에서 도저히 방안의 모습이 궁금해 견디지 못한 어떤 기녀는 침으로 창호

지에 구멍을 뚫어 방안의 모습을 보고 전율하며 오줌을 지리기도 하였다.

 

 “오, 선남선녀로다. 내 생전에 이 같은 장면은 처음이로다. 내 사람

하나는 정말로 잘 보았도다.”


 창호지에 난 구멍으로 방안의 모습을 엿보던 춘매는 탄성을 질러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추랑이 창을 마친 박대서의 품에 안겼다. 박대서는 마치

수백 년전부터 이 밤의 인연을 위하여 기다려 온 사람처럼 추랑이 등을 어루

만지며 감격해 했다.

 

 ‘아, 진정한 기예(技藝)를 아는 여인이로다. 내 이런 여인을 찾아

수십 년을 헤매었건만 드디어 그 인연을 만났어. 이 귀한 인연을 이승에서

끝나더라도 저승까지 잇고 싶구나.’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마치 석물(石物)처럼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서로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만 천둥처럼

들리고 있었다.

 

 “서방님,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술 한 잔 더 하시고 침수 드셔야죠? 어디

가실 데라도 있으신지요?”


 “응,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내가 그대를 여기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초야권

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요 서방님? 그럼, 소첩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한 잔 드시고 주무셔요.”

 

 “괜찮겠소?”

 “네에.”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무의미 할 것 같았다. 추랑과 박대서는 이미 일심

동체가 되어 장성(長城)을 쌓고 있었다.

 

 “서방님, 소첩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되겠는지요?”

 “물론이지요. 아무것이라도 상관없으니 주저하지 말고 물어봐요.”

 “저를 믿으시는지요?”

 

 “......”

 “서방님께서 소첩을 믿으시는지요?”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내 그대를 처음 볼 때부터 누구를 속이거나

배신할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어본다는 것이 그것 뿐이오?”

 

 “아니옵니다. 서방님, 제가 서방님의 누이동생을 구할 때 삼백 냥이 들었

사옵니다.”


 “......”

 “그 삼백 냥의 천배를 진정으로 주실 수 있사옵니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내 어찌 아녀자에게 허언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그대는 내 누이동생을 구해 준 은인이오. 천배 아니라 만 배라도

전혀 아깝지 않아요.”

 

 “그럼, 소첩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청?”

 “네에, 서방님.”


 “무엇인지 말해보오.”

 “아직도 청나라 여러곳에는 조선에서 잡혀간 수많은 사람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

 “소첩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돈만큼 멀리 타국에서 신음하는 조선의 불쌍한

백성들을 사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아, 애국자로다. 삼정승 육판서보다 훌륭하고 자비로운 마음이로다. 조선

천지에 이 같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이 여인 말고 어디 있단 말인가?‘

 잠시 박대서와 추랑이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대서가 자작을

하더니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좋습니다. 내 심양에 가서 누이동생을 만나보고 누이동생의 남편인 이춘

연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담판을 지어 보겠어요.”

 “서방님, 고맙사옵니다.”


 “아니오. 나 또한 그대의 말에 느끼는 바가 많아요. 나는 내 누이동생 하나

찾기에만 급급했지 다른 동포들 구하는데 까지 미쳐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내 다음 달에 심양에 들어가 그대의 뜻대로 하리다. 그대가 참으로 대견하오.”

 

 “고마워요. 소방님, 소첩, 서방님을 모시겠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추랑이 박대서에게 술 한 잔 비우게 하고 비단 금침을

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대를 잊지 못할 것이오. 정말로 고맙구려.”

 “서방님, 소첩, 이제 모든 것을 서방님께 맡기겠사옵니다.”

 

 “추랑.”

 “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서방의 것이옵니다.”

 “추랑, 고맙소.”

 

 박대서가 황촛불을 끄려고 하자 추랑이 끄지 못하게 하였다. 추랑은 분명

밖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방안을 훔쳐보는 기녀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기녀들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추랑이와 박대서의 은밀한 정사(情事)훔쳐

보려고 몰려 있다가 춘매가 호통을 치자 아쉬움을 남기며 하나 둘 흩어졌다.

기녀들이 모두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간 뒤 춘매는 방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춘매가 사라지자 어둠속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살며시 추랑이 방 앞으로

접근하였다. 남자는 방안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쥐어

뜯기도 하고 길게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부르르 쥐고 전율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기도 하였다. 방안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추랑의 가늘고 길게

이어는 끈적끈적한 신음소리에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인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추랑, 그대를 만나려고 수십 년간 이 세상을 헤매고 다녔구려.”

 “서방니임 -.”

 박대서의 뜨거운 입술이 추랑 입술을 살며시 누르며 정염의 불꽃을 지피기

시작했다.

 

 박대서는 추랑이 소녀경에서 익힌 용번(龍飜)의 자세로 팔천이심(八淺二深)의

노련한 수법으로 추랑을 하늘과 땅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였다. 계속되는

박대서의 절묘한 기법에 추랑은 계속 비음(鼻音)을 토해냈다.

 

  아-.

 용호상박이었다. 추랑이 호랑이라면 박대서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

하는 용이었다. 용이 호랑이를 이리저리 굴리기도 하고 약이 오르게 살짝

살짝 은밀한 곳을 건드리기도 하였다. 용의 거대한 기세에 눌려 몸을 움츠

리고 있던 호랑이는 용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기가 살아 용의 등을

타고 포효하기도 하고 용의 가슴을 물어뜯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다 용은 하늘 높이 솟다가 직하 비류하며 호랑이의 목덜미를

물어 하늘 높이 던져 버리자 호랑이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 소리가

얼마나 애절하고 처절하던지 장성의 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다시 감쪽같이 원상복구 되기도 하였다. 용이 호랑이의 가슴팍을 물어뜯더니

갑자기 천둥소리를 냈다. 이어 질세라 호랑이는 벌렁 뒤집어진 자세에서

마지막 비병을 질러대며 네 발을 버둥거렸다. 이윽고 용의 조화에 호랑이는

비에 흠뻑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동안 기방에는 단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용은 거대한 몸통

으로 호랑이를 칭칭 감고 꼼짝하지 못하도록 했다. 호랑이가 비에 젖어

이성을 잃을 정도가 되자 호랑이는 어흥 어흥 하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용은

그런 호랑이가 가워여 보였던지 칭칭 감았던 몸을 스르르 풀며 호랑이의

부드러운 몸통을 애무하였다.

 

 흑-.

 “서방님, 절륜하시옵니다.”


 “아니오. 내 이제까지 그대 같은 여인은 처음이오. 어떻게 궁합이 이리도

잘 맞을 수가 있단 말이오?”

 “서방님, 이것이 이승에 사는 진정한 기쁨인가 봅니다. 소첩, 이대로 숨이

멎어 죽는다하여도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추랑은 이춘연을 생각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야생마 같은 이춘연과

박대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대서의 섬세한 손길과 몸놀림이

추랑을 형언할 수 없는 나락의 끝으로 빠트리자 추랑은 이대로 죽어도 좋

다고 생각했다.

 

 이춘연이 황량한 벌판의 고삐 풀린 야생마라면 박대서는 잘 길들여진

천마(天馬)처럼 거칠기도 하면서 부드럽고 동시에 섬세한 고급 비단결

같았다. 박대서는 국제 무역을 하면서 중국, 왜, 아라비아, 안남, 인도 등

황색인종 백색인종 심지어 흑색인종의 여인까지 모두 섭렵(涉獵)한, 방사

(房事)에 있어서 전문적인 기술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추랑의 열락에 겨워하는 소리는 문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사내의

음욕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의 그것을 꺼내 자위(自慰)로

그 음심을 다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금 쌓은 만리

장성이 오래오래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견고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장성이 될 거라 믿고 싶었다. 땀에 범벅이 된

용호(龍虎)는 서로의 가슴에 맞대고 격정적이었던 몸부림과 절정을 서서히

삭히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서방님, 고맙습니다. 소첩 비로소 오늘 진정한 여인으로 태어난 것 같습

니다.’

추랑이 촉촉한 젖가슴을 박대서에게 밀착시키며 너럭바위 같은 사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단한 여인이로다. 지칠 줄 모르는 옹녀 같은 여인이로다. 내 이제까지

이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여인은 처음이다.’

 

 박대서 역시 활화산처럼 토해낸 열정이 너무도 아쉬워 추랑이의 끈적한

육덕을 꼭 안으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이런 분과 한 평생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랑은 두 눈을 감았다. 잔잔한 호수 수면 위를 사랑하는 임과 함께 쪽배를

타고 미풍에 미끄러지듯 편안함을 느끼며 박대서의 팔베개를 베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황촛불은 방금 전 뜨거웠던 정사가 잔잔하게 마무리되자

안심이 되는 듯 불꽃이 정지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타들어 갔다.

 

 추랑이 홀로 어느 깊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산길 좌우로 기화요초(琪花瑤草)

가 피어 있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추랑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추랑이 앞을

왔다갔다며 아름다운 소리로 추랑을 반겼다. 추랑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발걸음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산속 깊이 들어갔을 때 산길이 없어

지고 말았다.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난 추랑이 덕칠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덕칠아, 덕칠아, 어디 있니?”

 “......”

 “덕칠아, 나 혼자 두고 어딜 간 거야

? 덕칠아-,”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추랑은 다시 한 번 있는 힘을

다하여 덕칠이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자세히 보니 추랑이 서있는 곳은

천 길 낭떠러지 였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나가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빨간

불구덩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변이 서서히 캄캄해지기 시작하면서

까마귀들이 울기 시작했다.

 

 까악 -, 까악 -.

 “덕칠아, 덕칠아, 덕칠아, 어디 있어? 나 무서워.”


 “이년, 네년이 더러운 몸으로 우리 가문을 먹칠을 하려고 하는구나. 어째서

제 낭군을 찾지 않고 종놈을 찾는 거냐? 네년이 필시 그놈과 붙어먹은 것이 틀림

없으렷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시어머니 김씨가 험상궂은 얼굴로 나타나 추랑이에게 손가

락질을 하며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전 , 전 살기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랬어요.”

 “이년,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절개이거늘 아무 놈에게 함부로 몸을 줘? 에이,

더러운 년같으니.”

 시어머니 김시는 몽둥이를 치켜들더니 추랑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악-.

 시어머니 김씨의 몽둥이찜질이 무자비하게 이어지자 금방 어디서 나타났

는지 정진경이 껄껄 거리며 박수를 쳐댔다.

 

 “네년이, 술 한 잔에 만 냥에 팔았다는 그 유명한 추랑이라고?


 “서, 서방님, 어서 어머님을 말려주세요. 소첩, 지은 죄가 없어요.”

 “뭐라고? 죄가 없다고? 지나가는 강아지가 웃을 일이구나. 네년이 전쟁포로

가 되었다는 빌미로 오랑캐나 도적놈, 장사치 그것도 모자라 종놈에게까지 몸

을 던져. 에이 더러운 년. 퉤 퉤.”

 

 “서방님, 아닙니다. 소첩 더러운 년이 아닙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어요. 소첩이 자진해서 몸을 받치지 않았어요. 제발, 소첩의

말을 믿어주세요.”

 

 “네년을 찾기 위하여 내 심양에 갔을 때 네년은 그 오랑캐의 씨앗을 잉태했

었어. 그러고도 네년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지금 네년이

어떤 놈에게 몸을 주고 단잠을 자고 있는 거냐? 에이, 더러운 년. 퉤 퉤.”

 정진경은 시어머니 김씨에게 몽둥이를 달라고 하더니 추랑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악-.

 “에이, 더러워. 당신 같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가 하늘을 볼 수가 없다고.

 에이, 퉤 퉤.”


 “아니야, 그, 근영아, 근수야, 이 어미는 더러운 여자가 아니야. 엄마는 너희

들이 보고 싶어서 먼 오랑캐의 나라에 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단다.

이 엄마는 결코 더러운 여자가 아니란다. 근영아, 근수야, 이 어미를 믿어다오.

근영아, 근수야.”

 

 “필요 없어요. 다시 오랑캐의 나라로 돌아가요. 우린 당신처럼 오랑캐의

발싸개 같은 더러운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어요.”

 둘째 아들 근수가 추랑이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아, 근영아, 근수야. 이 어미를 두고 어디를 가니? 이 불쌍한 어미를

놔두고 어디를 가는 거니?”


 두 아들 뒤에서 시아버지 정갑영과 시어머니 김씨 그리고 남편 정진경이

싸늘하게 웃고 있었고, 칠보와 쇠돌이가 추랑이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깔깔거렸다. 그러나 덕칠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헴, 나는 한때 네 시아비였던 정갑영이다. 네년이 한양에서 빈천(貧賤)한

시문으로 간사한 혓바닥을 놀려가며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한다고? 에이,

더러운년 같으니. 내 네 애비의 입장을 생각해 문중 어른들이나 내 주변에

네년을 좋게 말해주려 하였건만 이제는 우리가문을 들먹거리며 함부로

더러운 음부(陰部)를 아무 놈에게 휘돌린다고? 에이, 더러운 년이로고.”

 “아버님, 아닙니다. 아버님도 제 입장이 되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네, 이년, 어디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지금 네 년이 베고 있는

그 팔은 누구의 팔이더냐? 네년은 요부(妖婦)의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느니라.

네년을 우리 정씨가문의 족보에서 영원히 파내어 버릴 것이니라. 에이,

더러운 년. 퉤 퉤.”


 정씨가문의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무조건 추랑이를 몹쓸

여자로 매도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서방님, 아닙니다. 소첩 정씨가문에 누를 끼친 적이

추호도 없사옵니다.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세요..”

 “네 이년, 네년이 그래도 그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고 있구나.”

 

 시아버지 정갑영이 갑자기 몽둥이를 들고 추랑이에게 달려들더니 내리치

려고 하는 순간 추랑은 뒷걸음치다 그만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악-.

 “추, 추랑아? 왜 그러느냐? 악몽을 꾼 게로구나?”

 

 추랑이의 비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박대서가 물수건으로 추랑이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찍어냈다.


 “서방님, 무섭습니다.”

 

 “추랑아, 안심하거라. 내 이렇게 네 곁에 있지 않느냐?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그 어느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야. 비록 저승사자가

찾아와도 절대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야.”

 

 “서방님, 고맙사옵니다.”

 추랑은 꿈속에서 본 가족들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고 생생하여 방금 전

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 아들들이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취급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흑-.

 “추랑아, 울지말거라. 그 못된 시집 식구들 꿈을 꾼 게로구나. 내 내일

날이 밝으면 아이들을 풀어 운종가에 있다는 그 정가네를 박살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니옵니다. 서방님,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 집에는 제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 어린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흠-,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이 갸륵하구나. 알았다. 그렇

다면 내 가만히 있으마.”

 “고마워요. 서방님.”

 새벽닭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곧 날이 밝을 것입니다. 서방님께서 소첩이 머리를 올려주세요.”

 “오, 그래, 하마터면 내 그냥 갈 뻔 했구나. 마땅히 올려줘야지.”

 추랑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경대 앞에 앉아 단장을 하자 박대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추랑이 단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서방님께서 초야권을 사셨으니 소첩의 머리는 당연히 서방님께서 얹어

주셔야 마땅하옵니다. 소첩, 여기 비녀와 큰 머리를 새로 준비하였습니다.”

 추랑이 마음에 맞는 사내가 나타나 자신의 머리를 얹어 주겠다고 할 것을

대비하여 금박이 입혀진 옥비녀와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쓰는 큰머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마.”

 이미 수많은 기생들의 초야권을 얻고 그녀들의 머리를 얹어본 경험이

풍부한 박대서는 곱게 빗어 임시로 쪽을 진 머리를 풀어 천천히 감아 올린

뒤 옥비녀를 꽂고 큰 머리를 정성을 다해 얹어 주었다.

 

 “서방님, 이제 소첩은 죽는 그날까지 하루 한시도 서방님을 잊지 않을 것이

옵니다.”

 추랑이 일어나 박대서에게 큰 절을 하였다.


 “그래, 그래 고맙구나. 내 누이동생을 구해준 일도 고맙고, 나에게 큰 희망을

주어 정말로 고맙고 감사하구나.”

 

 “서방님, 죽는 그날까지 절대로 잊지 않겠나이다. 소첩을 버리지 마소서.”

 “그럼, 내 저승에 들더라도 절대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야.”


 “서방님......”

 “추랑아......”


 동창에 여명이 희뿌옇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이제 가면 언제 또 박대서를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추랑은 가슴이 미어졌다.

 

 “서방님, 언제 다시 오시겠는지요?”


 “내 아침이면 내 수하들과 함께 부산, 목포, 개성, 평양으로 다니며 조선의

특산품과 인삼을 수거한 뒤 그 물건들을 싣고 청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청국에 들어가서 그 물건을 다 팔면 청국에서 대식국과 안남 인도에서 수입

된 특산품을 싣고 왜국으로 건너가 물건을 반쯤 팔고 다시 조선으로 올 것

이니라. 대충 오륙 개월은 족히 걸릴 듯 하구나.”

 

 “서방님, 너무 긴 시간입니다. 소첩 그 긴긴 날을 어찌 견디라고요?”

 “미안하구나. 그러나, 어찌하랴. 내 팔자가 그리된 것을 ......”


 “서방님, 꼭, 꼭 다시 돌아오셔야 하옵니다. 소첩, 서방님이 다시오시는 그날

까지 그 어떤 사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사옵니다.”

 

 “미안하구나.”

 “서방님, 소첩을, 소첩을 한번만 더 안아 주시옵소서.”

 “추랑아, 미안하구나. 단 하룻밤을 자고 너에게 길고 긴 고통을 주게 되었

구나.” 


 “아니옵니다. 소첩, 일년이던 백녀이던 서방님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고, 고맙구나.”

 

 박대서는 추랑을 비단금침위로 눕히고 다시 격정의 불꽃을 지피기 시작

하였다. 박대서의 뜨거운 혀가 추랑이의 달콤한 입안을 휘저었다. 큼지막한

사내의 손이 추랑이의 둔부를 쓰다듬자 추랑은 허리를 비비 틀었다. 천년바위

같은 사내의 단단한 가슴이 추랑의 뽀얀 젖가슴을 지그시 누를 때 추랑은

이 상태로 바위가 되어 천년만년 서있고 싶었다.

 

 아-.

 추랑의 끈적하고 촉촉한 신음이 다시 창밖으로 새어나가면서 여명은 더욱

뽀얗게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늘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집안 안 마당과 뒷곁을 청소하던 덕칠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당을 쓸다

추랑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심음소리에 귀를 쫑끗세우고 살며시 추랑의 방 가

까이 다가갔다.

 

 아으-.

 귀에 익숙한 아씨 박씨녀의 신음소리였다. 덕칠은 잠이 확 깨면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그리고 아씨, 추랑과 첫 정사를 생각하였다.

 

 ‘아, 아씨, 이놈 아씨를 인애하고 있습니다. 이 무지렁이 같은 놈은 생각

하지 마시고 아씨께서 마음에 드시는 사내대장부가 있으며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하세요. 이놈, 아씨와 비록 두 번의 인연을 맺었지만 너무 행복하고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알게 되었답니다. 아씨, 이 놈은 이제 염두에 두지

마세유.’


 마당을 쓸던 덕칠은 흐느끼면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행랑채로

향하였다.

 

 끙-.

 사내의 크고 짧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추랑의 방안에 가뿐 숨을 고르는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잠시 이어졌다. 박대서는 추랑의 보드랍고 풍덕한

육덕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사그라져가는 희열(喜悅)의 여운을 만끽하였다.

 

 “서방님, 소첩, 이제 서방님 없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소첩, 이제 어찌해야

할지 답답하옵니다. 빨리 돌아오셔요.”

 “미안하구나. 내 괜히 너와 인연을 맺었나보구나. 나를 용서해다오.”

 

 “아니옵니다. 소첩 이제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서방님처럼 남자다운 남자는

처음이옵니다. 이제 그 어떤 남정네가 황금을 산더미처럼 가저온다고 하여도

소첩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고맙구나. 가능하면 내 빨리 너를 보러오마. 정말로 미안하구나.”

 

 ‘서방님......“

 박대서는 추랑이의 가슴이 으스러져라 꼭 안아주었다. 진정한 여인을 만난

것도 잠시 또 언제 올지 모를 해후를 손꼽아 기다리며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안타깝기만 했다. 이미 동창이 환하게 밝았다.

 

 “추랑아, 간밤에 너에게 한 약조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내 꼭 지킬

것이야. 심양이나 북경 그리고 안남, 인도를 다니다가 노예시장에서 조선의

불쌍한 백성들을 보면 네에게 약조한 금액만큼 조선 백성을 사서 그들을 고향

으로 돌아가도록 하마.”

 “서방님,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사옵니다.”

 

 “아니야, 이 약조는 사내로서 내가 하늘에 맹세코 꼭 지킬 것이야. 네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닭게 해주었어. 지금도 위정자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가문

만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백성들이 죽어가던 말던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데,

일개 기녀인 네가 나랏님보다 더 큰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너와 한 그 약조는 꼭 이행할 것이야. 이제 기루의

사람들이 보기 전에 이곳을 떠야겠다.”


 “서방님은 역시 큰 사내이옵니다.“

 “차암, 그리고 내 너와의 약속은 약속이고 너의 머리를 올린 값으로 삼만냥을

놓고갈 터이니 받아 두거라.”

 “서방님, 아니옵니다. 그리하면 소첩, 비참하게 되옵니다.”

 

 “아니야, 이건 행하채가 아니고 자네를 만나 천지신명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내 누이동생을 구해 준 은인에게 주는 내 마음이니 받도록 하여라.”

 “아니옵니다. 서방님, 그리하시오면 아니되옵니다.”

 “허, 이건 행하채가 아니라니까.”

 

 ‘서방님......“

 박대서는 자신의 명의로 발행한 삼만냥 짜리 약속어음을 즉석에서 수결(手決)

하여 추랑이에게 건네주었다.


 “서방님, 고, 고맙습니다. 이 돈은 소첩이 좋은 곳에 쓰겠사옵니다.”

추랑이 일어나 다시 박대서에게 큰절을 올리자 박대서는 콧날이 시큰하면서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박대서가 떠나고 흉몽을 지울 수 없었던 꾼 추랑은 덕칠이와 운종가의

시댁을 찾았다. 두 아이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

하여 견딜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덕칠이 칠보에게 미리 연통을 넣어

두 도련님들을 점심 때 쯤 집 근처 음식점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칠보는 두 도련님들이 요즘 큰 병에 걸려 몸져 누워있다고 귀띔하였다.

 

 “뭐라고? 그, 그게 정말이야? 근영이와 근수가 아프다고?”

 “네에, 아씨. 며칠 전부터 매일 의원이 다녀간답니다.”


 “그래, 어느정도라고 하니? 아이들이 많이 아프대?”

 “칠보가 그러는데 도련님들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열이 높아 하루 한끼

식사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고 하네유.”

 ‘아, 근영아, 근수야...... 이 어미를,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다오.“

 

 “아씨, 울지마셔유.”

 추랑의 두 아들은 마진(痲疹)이라는 급성전염병에 걸린 듯 했다. 마진은 한번

퍼졌다하면 10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호란 뒤라 특별한 처방이나

약이 없어서 한번 전염되면 십중 팔구는 목숨을 잃었다.


 “덕칠아, 어서 가자.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내 두아들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고

말것이야. 어서 가보자.”

 “네에, 아씨.”


 시댁의 문은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두 아들이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다금해진 추랑은 대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근영아, 근수야, 엄마다. 엄마가 왔어. 어서 나와보렴. 엄마야, 엄마가 너희

들이 보고싶어서 왔단다. 어서 나와 보렴. 어서.”

 

 "얘들아, 엄마야. 어서 문을 열어다오. 엄마가 너희들이 보고싶어서 왔단다.

어서, 어서 문을 열어다오.”

 

 하인들로부터 박씨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보고를 받은 시어머니

김씨와 시아버지 정갑영은 깜짝 놀랐다. 일 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다가 두 손자

들이 마진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집안이 뒤숭숭한 판에 박씨녀가 찾아와 대문을

두드린다는 보고에 화가 끝까지 난 김씨는 쇠돌이를 불렀다.

 

 “네놈은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노마님, 아씨께서......”


 “네 이놈, 이 집안에 아씨가 어디 있느냐? 어서 가서 저 미친년을 죽도록 패서

내쫓지 못하고 무얼하는게야? 이번에는 저 미친년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여라. 만약 내 명을 이행치 못하면 네놈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니라. 알겠느냐?”

 

 “네에, 노마님.”

 쇠돌이 칠보를 비롯하여 남자 하인들을 모두 불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쇠돌아, 칠보야, 나를 집안으로 들어가게 해다오. 근영이, 근수가 마진에

걸려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서 나를 그 애들 있는 곳으로 인도해

다오. 어서.”

 “여봐라, 이 미친년을 죽도록 패라.”

 

 퍽-. 퍽-.

 전에는 빈 가마를 씌워 박씨녀에게 몽둥이찜질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치마

저고리만 입은 상태의 박씨녀를 하인들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두들겼다.

 

 “안돼유, 안돼유, 왜 불쌍한 아씨를 패는 거유. 안돼유.”

 덕칠이 박씨녀를 감싸 안으며 보호하려하자 하인들의 덕칠이도 인정사정 없이

두들겼다.

  

 추랑이, 박씨녀의 머리통이 깨지면서 피가 튀었고, 덕칠이 역시 이마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박씨녀와 덕칠이는 기절하여 축 늘어졌지만 쇠돌이는 어린 하인들에게 계속

몽둥이찜질을 하라고 눈짓을 했다.

 

 “쇠돌이 성님, 이제 그만 해유. 이러다가 두 사람 잡겠어유. 그만해유. 나중에

두 도련님들이 이 사실을 아시면 우리들은 죽은 목숨이에유. 이제 그만해유.

아씨이......”


 칠보가 하인들을 제지하며 몽둥이찜질을 멈추게 하였다. 쇠돌이는 칠보가

방금 한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두 도련님들이 이 사실을 아시면?’ 아,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구나.‘

 “얘들아, 그만 멈추고 이 두 사람을 가까운 의원으로 데리고 가자.“

 

 박씨녀와 덕칠이는 의원에서 터진 머리부위를 긴급히 수술을 받았다. 하마

터면 과다한 출혈로 두 사람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다. 다음날 간신히 깨어난

추랑이 박씨녀와 덕칠이는 머리에 하얀 천으로 칭칭 감은 상태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어떻게 제 자식을 찾아온 어미를 이렇듯 개돼지 잡듯 할 수 있단 말인가? 어

떻게?” 

 “아씨, 아씨, 송구하구먼유. 이놈이 아씨를 지켜주지 못해 죽을 죄를 지었구

먼유.”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로 저 집안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아씨, 그만 우세유. 머리에 난 상처가 덧 날 수 있어유. 어서 회복하시고

태흥관으로 돌아가셔야지유. 아씨를 기다릴텐데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저 못된 집안을 그냥 두지않을거야.

절대로......‘

 추랑은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다시 봄이 되었다. 한양은 호란(胡亂)의 상흔이 차차 가시면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청태종에게 상감이 삼전도에서 군신(君臣)의

맹(盟)을 맺는 치욕을 치렀지만 상당수 국제 정세에 어두은 위정자들은

속으로 청국을 여전히 오랑캐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아직 청국에 볼모로 잡혀 있어서 조선은 청국의

명에 하나의 어긋남도 없이 이행하여야 했다. 두 왕자의 세상을 보는 시각

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소현세자가 서양의 각종 문물을 받아들여 눈부신

자국의 문명의 한층 세련되게 만든 청국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인조의 성정을 비슷하게 닮은 봉림대군은 청국의 문물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청국을 정벌하겠다는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는 발상은 이후 아버지의 호감을

사게 되면서 소현세자는 의문의 독살을 당하게 되고 아우인 봉림대군이

권좌에 앉게 된다. 정국은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추랑의 미모에 반한 수많은 고관대작들의 발길이 태흥관 문지방을 닳도록

했다. 여성 편력이 심해 늘 시어머니 김씨로부터 경계의 눈초리를 받아 온 시아

버지 정갑영의 귀에도 다동 태흥관에 빼어난 기생이 있다는 소문이 들어갔다.

 

 호조에서 당상관(堂上官) 벼슬까지 지내고 나이가 들어 퇴직하고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워낙 여성편력이 심해 한양과 평양 개성등지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은 모두 건드리고 다니는 위인이었다. 정갑영은 가까운 시일 내로 태흥

관을 찾아가 추랑과 함께 수작(酬酌)을 하며 밤을 지새우고 싶어 했다. 그러던

유월 중순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시각 단아한 차림의 두 명의 노선비가 태

흥관을 찾았다.

 

 "이 집에 추랑이란 절세가인이 있다고 들었다. 그 녀와 함께 한바탕 놀며 시간을

보낼까 하고 왔노라. 어서 안내 하렸다.“


 춘설이 두 노선비들을 추랑의 방으로 안내하고 춘매에게 알렸다. 춘매는 다른

기녀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던 추랑에게 손님 맞을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또 어떤 정신 나간 양반들이 이리도 일찍 오셨을까?"

 박씨녀는 은근히 멋지고 풍류를 아는 선비가 들기를 기대했다. 분홍색 삼회장

저고리와 남색치마에 큰 머리를 얻고 산호용잠 비녀로 한층 멋을 내고 진한

화장에 속곳이 살짝 보이도록 치마를 약간 걷어 올린 추랑의 모습은 너무 요염

하였다. 단장을 마친 추랑이 두 노선비들이 들어 있는 기방으로 들어갔다.

 

 "나으리, 소첩 인사 올립니다."

 박씨녀가 큰절을 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었다. 동시에 눈앞이 캄캄

해져옴과 동시에 현기증이 일었다.


 "오, 그래 네가 추랑인가 보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느냐?"

 

 호란당시 동지섣달 목멱산으로 피난 가는 길에 헤어졌던 시아버지 정갑영이었

다. 추랑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한번 자세히 보았지만 앞에 앉아있는 노선비

중 한명은 분명 자신의 시아버지가 분명했다. 추랑은 후둘 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소첩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있어 잠시 다시 들겠사옵니다."

 "에헴. 그러려무나."


 추랑의 시아버지 정갑영은 헛기침을 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다행이 정갑영은

요염한 기녀가 된 자신의 며느리인 박씨녀 추랑을 알아보지 못했다.

 

 

 

 

 

                                                                                   - 계속 -

 

 

 

 

 

 

 

                  _()_ 그동안 긴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한편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본 작품은  2007년 출간한 제 소설집에 중편으로 실려있던 것을

                        이번에 장편으로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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