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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내린 눈(8)

* 창작공간/장편 - 유월에 내린눈

by 여강 최재효 2009. 1. 2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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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에 내린 눈(8)

 

 

                                                                                                                                                - 여강 최재효

 

 

 

 “나으리, 그 애를 데리고 왔습니다요.”

 “어서 들어오시오.”


 나지막하면서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춘매가 문을 열자 방안에 두 명의

남자가 춘매와 추랑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두 남자 모두 이십세 후반으로 보이

는 동안(童顔)으로 귀티가 흘렀다. 그중에 얼굴이 갸름하고 피부가 하얀 남자가

추랑의 모습에 얼이 빠진 듯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나으리, 먼저 부탁하신 그 애 입니다요. 우리 태흥관에서 제일 미색이며 시화

(詩畵書)는 물론 노래와 춤, 가야금 탄주 등 못하는 게 없는 보물덩입죠. 헤헤

헤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오?”

 춘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추랑이와 두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어허, 답답하구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이오?”

 “이 얘가 밤에는 더욱 더 뛰어난 구석이 있습니다요.”


 “그, 그래요?”

 “추랑아, 뭐하고 있니. 두 분 나리께 인사 올리지 않고서?”

  추랑이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도 곁눈질로 잘생긴 사내의 얼굴을 훔쳐보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소, 소첩 두 분 나리를 뵙습니다. 추랑이라 하옵니다.”

추랑이 미소를 지으며 차례로 절을 하자 두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오, 과연, 과연 경국지색이로다. 그 옛날 황진이, 아니 양귀비 아니지 아냐,

달님도 그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초선(貂蟬)이가 환생하

였구나.”

 약간 붉은빛이 도는 비단 도포를 입은 잘 생긴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감, 초선이가 아니라 날던 기러기들이 그녀의 미모에 날갯짓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왕소군(王昭君)이 환생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번에는 푸른 비단 도포를 걸친 약간 얼굴이 길쭉한 남자가 추랑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여포의 애간장을 녹인 초선이가 환생한 게 틀림없어.”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왕소군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두 남자는 서로 자신의 주장이 맞다 며 추랑을 보고 넋이 나가 옥신각신 언쟁을

벌였다.

 

 “추랑아, 왼쪽에 약간 붉은빛 비단도포를 정제한 분은 왕실 종친이신 이대감님

이시고, 오른쪽 푸른 비단의 도포를 정제하신 분은 김참판 대감이시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두 분이시니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 한다.“

 

 “내 기방출입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이렇듯 빼어난 절세가인은 처음이로다. 오늘

내가 횡재를 했구나.”

 이대감이 흡족한 듯 추랑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곧 이어 산해진미 가득한

주안상이 들어오고 또 한명의 기생이 들어왔다.

 

 “나으리, 소첩, 소월이라하옵니다. 예쁘게 봐주사이다.”

 “너는 물러가도 되겠다. 나는 추랑이만 있으면 된다.”

 김참판이 소월이를 밖으로 내보내자 소월이 창피한 듯 가슴을 치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김참판, 추랑이는 내가 예전부터 점찍어 놓은 아이오. 그러니, 욕심내지 마시

구려.”

 

 ‘염병, 왕실 종친이라면 다냐? 한양에 이름 난 기생은 모조리 건드리고 다니면

서......’

 “험-, 아, 그러셨습니까? 난 저애가 마음에 들어 머리를 올려 주고싶습

니다요.

 김참판이 이대감의 위상에 눌려 할 수 없이 추랑이를 이대감 곁으로 앉게 했다.

 

 “두 분 나으리, 소첩이 즐겁게 해드릴 테니 그만하세요. 우선 소첩이 잔부터 올리

겠사옵니다.”


 자신을 두고 두 남자 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추랑이 얼른 주전자를

들어 이대감과 김참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 따르는 순간에도 두 남자는 추랑이

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아깝도다. 태흥관에 이런 가인(佳人)이 있었다니. 내 진작 찾아왔어야 하는 건데......’


 김참판은 첫눈에 반한 추랑이를 이대감에게 빼앗긴 것이 원통했다. 그러나 함께 온

이 대감이 상감의 친척이 되는지라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혹시 추랑이 이대감

에게 관심이 없으면 추랑이를 후려 보려고 추랑이 눈치만 살폈다.

 

 “자자, 추랑아, 뭐하느냐. 김참판 대감 술잔이 비었느니라.”

 “참판대감님, 송구하옵니다.”


 이대감의 따가운 시선에 추랑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서너 달의 기생 수업을 마치고

처음 기방에 들어 지체 높은 대감들을 대하자니 자칫 실수할까 걱정이 되어 정신이

없었다.

 

 “듣기에 네가 노래를 제법 한다지? 오늘 네 노래를 들려 줄 수 있겠느냐?”


 이 대감이 술잔을 비우고 씩 웃으며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추랑이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이 대감도 추랑이에게 정신이 나가있어 앞에 앉아 있는 김참판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추랑이 얼른 일어나 방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가야금을

가져오더니 조율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백성들의 삶에 애환과 현실 도피적 성격이 강한 고려의 청산별곡을 추랑이

애절한 목소리로 가야금 연주에 맞춰 부르자 두 남자는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추랑의 노래를 음미하였다. 추랑이 가슴에 한을 노래에 실어 촉촉한 음정으로

노래를 하자 이대감은 계속 술을 마셔댔다.

 

 ‘아, 진정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로다. 왜 진작 이 여인을 만나지 못했을꼬?’

 이대감이 노래하는 추랑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추랑이 부르는 노래를 권주가로 생각하고 마시니 술 맛이 기가

히구나. 안 그렇소이까 김참판?”

 “아, 그럼요. 정말로 술 맛이 기가 막힙니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쟝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오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추랑이 노래 부르면서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고 원통해서 목이 메었다.

추랑이의 노랫소리가 더욱 애절해지자 두 남자도 마음이 울적해져 추랑이를 뚫어

져라 바라보았다. 추랑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양 볼을 타고 떨어지자 이 대감이 얼른 수건을 들어 추랑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나보구나. 아니면 감정이 풍부한 탓일까? 점점

알 수 없는 여인이로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 여인에게 첫눈에 반했을까? 참

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계집들을 모두 취해 보았지만

이 여인 만큼은 함부로 범접하기 힘들 듯 하구나.’


이대감은 연신 술잔을 들어 입으로 옮기면서 추랑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

다. 첫 눈에 반하기는 김참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을 취할 수 있을까? 왕실 종친인 이대감과 정면으로 맞설

수도 없고......, 거참, 환장할 노릇이네. 어째서 저 여인이 이제서 나타났을까?’

 김참판은 태흥관에 이대감과 아무 생각 없이 와서 술이나 한잔 마시려고 하였다

가 추랑이에게 한 눈에 반해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옳거니, 바로 그거다. 추랑이 시를 잘 짓는다고 하니까 시의 대구 맞추기 놀음

으로 내기를 해보는 거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방법이라고 판단한 김참판이 혼자서 싱글벙글 술잔을

기울이며 어서 추랑이의 청산별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니, 저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왜 혼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싱글벙글하지?’

 이대감은 김참판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불안해했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오늘 괜히 저 작자를 데리고 왔어. 나 혼자 와서 추랑이하고 질펀하게 술이나

마시는 건데. 내 괜히 저 작자를 데리고 와서 신경전을 벌리게 되었네. 염병할,

저 구렁이 같은 김참판을 어떻게 해야 추랑이에게 추파를 던지지 못하게 하지?

그래, 맞아 그거야. 김참판이 술에 약하지. 술내기를 하는 거야. 지는 쪽이

두 배로 술잔을 비우게 하는 거야. 

 

 그런데 뭐로 내기를 한다? 팔씨름? 작시(作詩)? 노래? 춤? 아니야 시는 저 작자

가 잘 짓기로 한양에서 소문났으니 안 되고......, 수수께끼 맞추기야. 수수

께끼에는 내가 일가견이 있으니 자신 있어. ‘

 

 ‘아니, 이대감이 왜 갑자기 미소를 짓지? 무슨 간계를 부리려고 그러나? 그렇

지만 간계부리는 데에는 나도 만만치 않지. 오늘 어떻게 하던지 추랑이를 내 여자

로 만들어야 해. 내 심심풀이 여인으로 말이야.’


 추랑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추랑이를 두고 두 남자의 두뇌 싸움이 치열했다.

서로 추랑이를 취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추랑이의 가야금 탄주에 두 남자는 수작(酬酌)을 하면서 겉으로

웃고 있었다. 이 대감은 자꾸만 잔을 들어 김대감에게 건배하자고 손짓을

하였고 김 대감은 마지못해 술잔을 들었다. 이 대감과 김참판은 오랜 지기(知己)

로 조정에서도 우정이 돈독했다.


 그러나 추랑이를 앞에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수십년간의 우정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연적(戀敵)이 되었다. 두

남자의 부친들도 친한 사이라 자주 왕래가 있었다.

 

 병자년 오랑캐의 침입이 있을 때도 두 집안은 함께 멀리 충주까지 피란을 갔다

올 정도로 두 집안은 막역한 사이였다. 최근에는 조정에서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人事)가 있을 예정이어서 김참판은 이 대감에게 가급적 잘 보여 좋은 보직을

부탁할 셈이었다.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스미 짐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추랑이 노래를 마치자 두 남자는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최고로다. 내 이제까지 들어 본 노래 중에 최고로 뛰어 난 가야금 탄주로다.”

 이대감이 가야금 연주를 마친 추랑이에게 술잔을 건넸다.


 “나으리, 소첩 아직 술을 배우지 못해서......”

 “앞으로 기루에서 이름값을 올리려면 술은 필수이니라. 자, 사양하지 말고

한 잔만 받거라.”

 

 “......”

 “그래, 추랑아, 노래하느라 수고했으니 목을 축여야지. 어서 이대감님의 잔을

받고 술잔을 돌려 드려.”


 “......”

 기생 수업을 받으면서 춘매에게 술 마시는 법과 빨리 취하지 않는 비법을 전수

받은 추랑은 기방에 들기 전에 기름떡 두서너 개와 물을 마시고 들어왔다.

   

 “대감, 술만 마시지 말고 우리 한시나 지어 봄이 어떻겠습니까?”

 김참판이 느닷없이 작시에 대하여 말을 꺼내자 이대감은 긴장했다.

 ‘아니, 저 사람이 나에게 도전을 하겠다는 거로군. 그러나 내가 김참판에게 비하면

불리한데......’

 이대감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김참판, 작시(作詩)도 좋지만 이런 술자리에서는 음담패설이나 수수께끼 맞추기

내기 같은 것이 더 어울리지 않겠소?”

 

 “두 분 나으리, 그럼 먼저 시를 짓고 나중에 수수께끼 내기를 하시면 어떻겠는

지요?”

 ‘옳거니, 추랑이 나를 돕는구나.’

 김참판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그렇지. 사대부란 우선 시서(詩書)에 능해야 제 구실을 하지.”

 김참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 대감의 눈치를 보았다. 이대감보다 멋지게

시를 지으면 시화서에 능한 추랑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될 거라고 판단하였다.

제 아무리 왕실 종친이라 하지만 여인의 마음까지 강제로 취할 수 없었다.

 

 “소첩이 칠언절구(七言絶句) 중 기구(起句), 전구(轉句)를 지으면 두 분 나으리

께서 승구(承句)와 결구(結句)를 지으심이 어떠하신지요?”


 “거 아주 좋은 생각이로다. 이대감, 어떠세요? 추랑이 아주 좋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 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이 대감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추랑의 제안에 동의는 했지만 마음에 썩 내

키지않았다.

 

 “그럼 시제(詩題)는 무엇으로 할까요?”

 추랑이 두 남자를 보고 묻자 김참판이 마치 준비라도 한 듯 말했다.


 “오늘이 보름이니 가을 달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그렇게 하십시다.”

 이대감이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추랑이 창문을 열자 보름달이 기루의

처마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럼, 소첩이 기구를 지어보겠습니다.”

 “에헴, 승구는 내가 지어보겠소. 이대감께서는 결구를 하시지요.”

 “......“

 김참판이 여유 만만한 태도로 술잔을 들면서 이대감 눈치를 살폈다.

 

 추랑이 한지와 필묵(筆墨)을 준비하고 기구를 써 내려갔다. 김참판이 잠시 눈을

감더니 승구를 써내려 갔고, 이어서 추랑이 막힘없이 전구를 지었다. 그러나

이대감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얼굴이 벌게지며 헛기침만 해댔다. 한참 만에

무엇을 생각해냈는지 이대감이 붓을 들었다.

 

 

    秋宵穹空星群宿(추소궁공성군숙)

    텅 빈 가을 밤하는 별들이 졸고

    虛思胸溢汝笑盈(허가흉일여소영)

    그리움 사무친 텅빈 가슴에 그대 미소 가득하네

    可能互遇前霜菊(가능호우전상국)

    저 국화 찬 서리 맞기 전에 그대 볼 수 있을지

    一杯故友失枕永(일배고우실침영)

    한 잔 술에 옛 벗은 깊은 잠을 잊었다네

  

 


 “커억 -, 좋구나.”

 “두 분 나으리 수고하셨습니다.”

 “가만.”


 김참판이 시를 면밀히 검토해보더니 머리를 갸우뚱 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추랑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대감님께서 지으신 결구 맨 끝자인 영(永)가 평성(平聲)이 아닌 상성(上聲)으로

 압운(押韻) 하셨습니다. 승구 마지막자인 영(盈)자가 평성이니 결구 마지막자 역시

동운(同韻)인 평성으로 하셨어야 했습니다. 영(永)자 대신 영(盈)의 동운(同韻)인

경(經)자 정도로 마무리 하셨으면 좋을 걸 그랬습니다. 아마 나으리께서 약주를 좀

과하게 드셔서 그리하셨을 것이에요.”

  추랑이 말에 이 대감은 얼굴이 빨개졌다. 이 대감이 무안해하자 김대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이번에는 내가 이겼도다. 이렇게 되면 추랑이 나에게 마음을 주겠지.’

 

 ‘아아, 추랑이 보통 여인이 아니구나. 수천 자나 되는 평상거입(平上去入) 운자를

모두 알고 있다니 대단한 여인이 분명해. 잘못하면 추랑이를 김참판에게 빼앗기

겠는걸.’


 이대감은 침통한 표정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첫눈에 추랑이 자기의 여인이 될 거

라고 자신 있어 했지만 김참판의 덧의 걸려 그만 보기 좋게 망신을 다하자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이대감이 시서에 약하구나. 잘하면 내 마음대로 이대감을 주무를 수 있겠어.

그리고 이 두 남자가 나에게 혼을 빼앗긴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두 남자를

나중에 별도로 불러야지.‘

 

 “나으리, 이제 한잔 더 하시고 소첩과 놀아보세요.”

 “응, 그, 그래 놀아야지.”


 “나으리, 그럼 이번에는 두 분 나으리께서도 익히 잘 아시는 시를 소첩이 읊어 볼

테니 두 분 나으리께서 승구와 결구를 채워 주세요.”

 

 “응? 그 거 좋지. 어디 한번 읊어 보거라. 험-, 험-.”

 이대감의 자존심을 망가트린 김참판이 추랑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제 정신이 아닌

했다.


 ‘아, 이런 젠장. 오늘 완전히 체면 다 구기게 되었구먼. 염병.’

 이대감은 추랑이 점점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속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으리, 괜찮으신지요?”

 추랑이 이대감의 얼굴을 보자 이대감은 다시 긴장하는 얼굴빛이 역력했다.


 “그, 그럼. 어서 시작해 보려무나.”

 추랑은 자신만만했다. 한시라면 한(漢)나라 시인부터 명나라 중기까지 웬만한 유명

한 한시는 거의 다 꿰고 있었다.


   十五年前花月底(십오년전화월저) - 십오 년 전 달빛 어린 꽃 아래서


 추랑이 기구를 읊었지만 두 남자는 서로 눈치만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추랑이 두 남자의 잔에 술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두 남자는 여전히

대구가 없었다.

 

 “소첩이 기구, 승구, 전구 그리고 결구까지 채워야 할까봅니다. 두 분 나으리께

서는 국사(國事)에 몰두하시느라 아시던 것도 잊어버리신 듯 하네요.”

 “그, 그렇지 뭐?”


 “그, 그래. 추랑이 네 말이 맞다. 그렇게 하려무나. 어험-”

 두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相從曾賦賞花詩(상종증부상화시) 함께 그 꽃 보며 시도 지었었지

   今看花月渾相似(금간화월혼상사) 그 꽃 그 달 옛날 그대로이건만

   安得情懷似往時(안득정회사왕시) 이내 마음 어찌 옛날 같을 수 있으랴

 


 자존심을 구긴 두 남자는 한양에서 이름 난 기루를 다니며 얼굴 좀 반반하고

재주가 많다는 기생들을 섭렵하고 다니던 위인들이었다. 왕실종친이라는 명함

하나로 이름난 기생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다니던 이대감은 추랑이 만큼은

어쩌지 못하고 첫 대면부터 쩔쩔매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김참판

역시 화려한 가문에 태어나 승승장구하며 마치 제 세상만난 듯 한양의 기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던 위인이었지만 추랑이를 만나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네가 제법이구나. 그래 그 시는 누가 지은 시이더냐?”

 이대감이 쓰린 속을 억지로 다스리며 추랑이에게 물었다.


 “나으리, 소첩이 읊은 시는 송(宋)나 시대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가 지은 우성

(偶成)이란 시입니다. 사랑하는 임과의 지나간 호시절을 그리며 지은 시인데

소첩의 심금을 울리는 시인지라 소첩이 아주 애송하는 시입니다.

 

 “그러냐? 이청조란 여류시인의 이름을 한번 들어보긴 했다만 그 시인의

시를 오늘 태흥관에서 들어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 여인은 일명

이안거사(易安居士)거사라고도 한다지. 중국 산동성 제남사람으로 윤택한 집안

에서 태어났으며, 조명성이란 가문 좋은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금(金)나라와의 전쟁

통에 피란을 가다가 남편은 죽었고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들었

다만? 네 시문이 실로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구나.”

 이대감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추랑을 보며 이청조에 대하여 아는 체 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김참판은 이번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를 내세워

추랑이를 골탕 먹일 셈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무릎을 쳤다.


 ‘그래, 네가 아는 시가 대개 여류풍이렷다. 이번에는 무겁고 우울한 남성풍의 

시로 시험해 볼까?’

 “추랑아, 이번에는 내가 좋아 시를 읊어볼 테니 네가 승구와 결구를 읊어 보도

록 해라.“

 

 ‘저, 저놈이. 나를 아예 제쳐놓고 추랑이와 놀아보자는 속셈이군. 내 이럴

 알았으면 평소에 술을 덜 마시고 시문(詩文)에 열성을 보여야 하는 건데......’


 이대감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추랑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돈이나 벌기 위해 변변치 않는 잡기(雜技)나 보여주는 하찮은 기생으로 생각

하였으나 이제는 추랑이 존경스럽기 까지 하였다.

 

 “에헴-, 내 그럼 시작하마.”

 김참판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旅館寒燈獨不眠(여관한등독불면) 여관의 차가운 불 아래 잠 못 이루는데

 

 김참판이 기구를 읊고 추랑이 눈치를 보았다. 추랑이 짐짓 잘 모르는 체 하며 머뭇

거리자 김참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나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는 웬만해서 여인들이 알지 못하리니.’

  

 김참판이 여유 있는 모습으로 술잔을 들었다. 이대감은 두 사람 사이에서 참담했다.

창피하다 못해 등골에 식은땀이 송알송알 배어 나왔다.

 

   客心何事轉凄然(객심하사전처연) 나그네의 마음은 웬일인지 더욱 처연하다

 

 추랑이 빙끗 미소를 지으며 승구를 읊자 김참판은 술이 확 깨는 눈치였다.


 ‘아니, 이 계집이 정말 시문에 달통했나보구나. 어디 전구를 읊어볼까.’

 추랑이 얼른 김참판의 잔에 술을 채웠다. 김참판의 얼굴이 갑자기 울그락 불그락

하더니 얼른 술 한 잔을 따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故鄕今夜思千里(고향금야사천리) 고향에서 이 밤 천리 밖 나를 생각하겠지

 

 어흠-, 흠 -.

 김참판이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 헛기침을 해댔다. 추랑이 또 일부러 멈칫거리며

뜸을 들 였다.


 ‘그럼 그렇지. 네가 간신이 승구를 이엇다마는 결구는 잘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추랑이, 이번에는 내가 이긴 듯하구나. 내가 이기면 네 머리는 내가 올려도 무방하겠

구나.”

 


     霜鬢明朝又一年(상빈명조우일년) 하얗게 센 귀밑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해가 가겠구나


 ‘아니, 저, 저 계집이 보통이 아니구나. 내 한양에서 시문에 능하다는 기녀를 모두

상대하여도 이 시를 정확하게 아는 기녀가 없었는데. 참으로 시문에 조예가 있는

계집이로다.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이 지은 제야작(除夜作)이란 시를 어찌 알고

있었을꼬? 허, 보통 내기가 아니로다.’

 

 김참판은 속으로 놀라며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계속 있다가는 추랑이에게 더 큰

망신을 당해 그 소문이 한양에 퍼지면 자신의 체면이 심하게 구겨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이, 두 분 나으리, 뭘 그리 생각하세요.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응? 그, 그래. 술집에 왔으니 술을 마셔야지. 그런데 추랑아, 네가 시도 잘 짓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번에는 너의 시조 한 수를 듣고 싶구나. 어디 내 앞에서 시 한수

지어보지 않겠느냐?”

 

 한시 대구 끼워 넣기에서 추랑이와 김참판에게 보기 좋게 당한 이 대감이 이번에는

추랑의 시조를 보고 싶어 했다. 김참판 역시 추랑이에게 창피를 당한 뒤 어떻게 하면

골려줄까 생각하던 참에 직접 시를 짓는 것을 보고 싶었다.

 

 “소첩, 그럼 시 한 수 지어 올리겠습니다. 나으리, 시제를 내려주소서.”

 “으흠-, 시제라? 뭐가 좋을꼬?”


 “추랑아, 네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가슴이 텅 빈듯하구나. 네 참한 외모로 보니

첫 정인(情人)이 있을 터. 그 정인을 그리며 한수 지어 보거라.”

 

 “그, 그래 그거 좋겠구나.”

 이번에도 역시 김참판이 끼어들어 시제의 방향을 말하자 이대감은 김참판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럼, 소첩 한수 지어보겠습니다. 소첩 평시조는 별로라 소첩의 붓가는 대로 지어

보겠나이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평시조의 그 잘난 법칙인 마흔 다섯 글자 내에서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풍부하게 이입되게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 네 생각대로 한번

지어 보거라. 엇시조도 좋고 사설시조도 좋으니라. 아니면 그 비슷한 거도 좋으

니라.”

 

 험 -, 험 -.

 이번에도 김참판이 나서서 아는 체를 하자 심기가 불편해진 이대감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헛기침만 해댔다.


 ‘그놈, 더럽게 아는 체하네. 술 맛 떨어지게......’

 이대감은 김참판이 자꾸 나서자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추랑이 붓을 들더니

막힘없이 언문(諺文)으로 써내려 갔다.

 

 

   달 밝은 가을밤

   텅 빈 방에

   베개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네

   임께서 지난 봄 밤의 언약을

   벌써 잊은 신 것은 아닌지

   여인은 창가에 앉아 별을 세며

   조용히 임의 이름 불러보네

   행여 하는 마음에 여인은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봄밤의 붉은 미소는 간데없네

   창문이 흔들려 혹시하는 심정으로

   얼른 문을 열어보지만

   야속하게 추풍에 낙엽만 흩날리네

 

 

 추랑이 하얀 종이 위에 날아갈 듯 수려한 필체로 써서 이대감에게 공손히 올리자

이대감은 추랑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며 무릎을 쳤다.


 “오, 여인의 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구나. 그래, 이 시의 제목을 무엇으로 생각

하고 지었느냐? 그리고 그 가슴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정인이 누구더냐?”

 

 “대감, 어디 나도 좀 봅시다.”

 추랑이 잠시 머뭇거리자 이대감은 점점 시조의 주인공이 궁금했다. 김참판이 추랑이

쓴 시를 역시 읽고 또 읽으며 시와 추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 절묘한 시로다. 그 추풍 속을 뚫고 우리가 오지 않았더냐?”

 ‘음, 이 계집을 한 번에 꺾어보려 했건만 마음대로 안 되겠구나. 오늘은 일단 물러

갔다가 후일을 도모해야겠구나.’

 

 이대감은 추랑을 만만히 보았으니 함부로 대하다가는 더 망신만 당할 것 같았다. 

추랑이 가야금을 탄주하더니 방금 지은 시를 노래하였다. 그 가락과 음성이 얼마나

처연한지 두 사람의 가슴에 울컥하는 그 무엇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 보통 계집이 아니로다. 한양에서 최고의 기녀로다. 분명 황진이가 환생하였

음이 분명하도다. 저렇듯 경국지색의 미색에 노래, 시, 글에 빼어난 재주를 지닌

기녀를 내 본적이 없었어. 그러나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더욱 가슴을

타게 하는구나. 어찌할꼬? 이 불타는 가슴을 어이할꼬?’


 이대감은 가야금 연주하며 방금 자작한 시를 연주하는 추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 속으로 탄식했다.

 

 ‘그럼, 이 계집이 좋아하는 사내가 있다는 거 아니가? 허, 괜히 뒷북만 치게 생겼

구나 이거. 그래 오늘은 일단 물러났다가 날 잡아서 몰래 와야겠어. 보통내기가

아닌 걸.’

 김참판은 속으로 추랑이를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애첩으로 삼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듯

했다.

 

 “두 분, 나으리.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셔요? 소첩의 술 한 잔 받지 않으시고요?

 “응? 그래, 그래 추랑이가 따라주는 술이 기가 막히게 달콤하구나. 그러나 내

오늘은 선약이 있는 것을 깜빡했구나. 내 먼저 일어날 테니 김대감하고 한잔 더 하

거라.”

 

 “아닙니다. 이 몸도 집에 급한 일이 있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김대감께서는 추랑이가 마음에 드시는 눈치 같은데 더 마시고 오시지요?”

 

 “아, 아닙니다 대감. 집에 장인어른이 오시기로 한 것을 그만 제가 깜빡했습니다.”

 “그래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추랑이 같은 가인과 밤새 술을 마셔야하는 건데.

오늘 술값은 내가 내지요. 추랑아, 오늘 술값은 얼마를 내면 되는고?”

 

 “아이, 대감, 벌써 가시면 소첩 긴긴 가을밤을 어찌 홀로 지새우라고요?”

 추랑이 이대감의 소매를 잡고 눈을 흘기자 이대감은 전기가 통한 듯 갑자기 기분이

몽롱해졌다.

 

 “대감, 오늘은 제가 처음으로 기방에 든 날입니다. 웬만하면 소첩의 머리를 얹어

주시지  않고요?”

 “아, 아니다. 날짜는 아직 많이 있지 않느냐? 내 후일 다시 와서 네 머리를 꼭 얹어

주마.”

 

 “소첩은 누구든 상관없사옵니다. 소첩이 마음에 드는 분에게 머리를 올려달라고 하

겠습니다. 두 분 나으리께서 정 바쁘시다면 다음에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오세요.

그때까지 머리를 올리지 않겠나이다.”

 “고, 고맙구나.”

 

 “오늘 술값은 만 냥이옵니다.”

 “뭣, 뭐라고? 마, 만 냥?”

 이대감과 김참판은 동시에 놀라며 낮게 비명을 질러댔다. 만 냥이라면 짧은 시간

술값치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추랑아, 지금 만 냥이라고 했느냐?”

 “네, 나으리. 만 냥이옵니다.”


 ‘아니, 뭐 이런 계집이 다있나? 내 별일을 다 겪는구먼. 술 서너 잔에 만 냥이라니?’

 이대감은 추랑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속으로 추랑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

파악하느라 골몰했다.

 

 “아니 왜요? 설마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두 분 나으리께서 만 냥이 없으셔서 술값을 외상으로 하시겠다는 말씀을 아니시죠?”

 “그, 그럼. 그렇고말고. 추랑아, 마, 만 냥을 낼 터이니 다음에 내가 오면 머리를 올려

 수 있는 거지?”

 이대감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추랑이 눈치를 보았다.

 

 “추랑아, 오늘 술값은 내가 내마. 그러니 너는 나에게 술값을 받도록

하여라. 나중에 네 머리도 내가 올려주마.”


 “소첩, 어느 분이 내셔도 상관없습니다.”

 왕실종친이라고 거들먹거리다 추랑이에게 당한 이대감, 기생 하나쯤 품어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판단한 김참판, 두 남자들은 지금 어서 이 기방을 빠져나

가고 싶어 했다.

 

 “대, 대감. 먼저 일어나겠으니 천천히 오시구려.”

 김참판이 벌건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이대감도 마시던 술잔을 그냥 둔 채 비틀

거리며 일어나 얼른 의관(衣冠)을 정제하였다.


 “아니, 나으리, 벌써 가시게요? 소첩, 너무 심심하옵니다. 더 있다 가시지않구요.”

 

 “아, 아니다. 내 집에 일도 있고 어제 먹다 남겨둔 꿀떡이 갑자기 그립구나.”

 이대감이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내, 오늘 마신 술값은 내일 사람을 보내 치를 것이니 그리 알거라. 꼭 갚을 테니 거,

걱정하지 말고. 어이구, 요 이뿐 것......”

 김참판은 추랑이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기방을 나갔다.

 

 “그럼, 두 분 나으리 멀리 나가지 않겠사옵니다. 조만간 다시 들려주사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양반 두 명을 보기 좋게 망신을 준 추랑은 배꼽을 잡고 한참 동안

웃었다. 두 남자가 태흥관을 나서자 춘매와 춘설이 추랑이 있는 방으로 쪼르르 달려

왔다.

 

 “얘, 추랑아, 저 두 분은 한양에서 유명한 대감들이란다. 혹여 저분들 심기를 불편

하게 해드린 것은 아니니?”

 “언니, 어떻게 술 세 주전자에 일만 냥을 받아내실 수 있어요? 그리고 왜 저 두 분이

꼬리를 내리고 혼비백산 도망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시 몇 수 읊어 주고 시 한수 직접 지어주었더니 저렇듯 꼬리를 내리고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도망가는구나.”


 “아이고, 추랑아, 저분들한테 뭐 잘못한 거 없는 거지? 그리고 술 몇 잔에 일 만 냥이라니? 일 만냥이면 웬만한 한량 몇 년 치 술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란다. 한 번에 일만 냥을 벌게 해주어 고맙긴 하다만 어째 맘이 편치 못하구나.”

 

 춘매는 혹시 추랑이 처음 기방에 들면서 두 대감에게 밉보였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소에 이대감은 태흥관에 들리면 밤새도록 음담패설과

잡기로 흥에 겨워 기생들과 어울려 대취하곤 했었다. 당연히 그런 날은 마음에

드는 기생의 수청을 들고 다음 날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행하 채를 듬뿍 안겨

주고 했었다. 행하채라야 기껏 돈 일이백 냥이었다.

 

 며칠이 지나 한양에 내로라하는 기루와 주막 그리고 허술한 주점에 추랑이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난무(亂舞)했다. 태흥관은 일약 한양의 최고 기루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고 이름 좀 있다하는 기녀들은 억울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문은 기녀들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 한 인물한다는 한량들에게도 파다하게 퍼졌다.

 

 “어이,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아니 이 사람은 한양사람 아니가 벼? 그 유명한 추랑이 소문도 못 들었단

말이야?”

 

 “아, 들었지. 그 계집이 그 옛날 송도의 명기 황진이를 능가한다더군. 나도

돈 좀 모아 그 계집 한번 보러가려고 하네.”

 "에이, 이 사람. 꿈도 꾸지 마시게.“

 “꿈도 꾸지 말라니?”

 

 “추랑이 얼굴 한번 보려면 돈 만 냥과 시문(詩文)에 통달해야 한다네. 이태백이나

두보 쯤 돼야 추랑이와 수작할 수 있다고 하네. 자네처럼 천자문 겨우 알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저 먼발치에서 추랑이 그림자만 보아도 송구하지.”

 “아니, 추랑이가 그 정도래?”

 

 “그 왕실종친 이대감과 한양의 기생은 모두 건드리고 다닌다고 소문난 바람둥이

김참판이 추랑이와 시문 대결에서 무참히 깨졌다고 하지 않나? 그리고 술 몇 잔에

일만 냥을 냈다고 하지?”

 

 “그 두 놈들, 멋지게 한방 먹었구먼. 내 속이 다 후련하이. 그놈들 밑구녕에서 눈

물을 뿌린 기녀들이 부지기수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황진이가 울겠구먼. 그리고 그 태흥관은 한양에서 돈 좀 있고 재주 좀 피운다는

남정네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겠네.”

 

 “그럼, 우리 같은 작자들은 애지녘에 추랑이 볼 생각을 접어야 겠군.“

 “이보게, 추랑이 한번 품어보는 자는 복이 터진 놈이로세.”

 “어이쿠, 추랑이, 추랑이, 내 사랑 추랑이......”

 

 주막에서 탁주로 목을 축이던 두 한량들이 추랑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추랑이에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었다. 주막과 기루 그리고 한량들이 모이는 곳마다

추랑이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날이 갈수록 추랑이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개성이나 평양 심지어 남도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첫 눈이 내리는 어느 날, 태흥관에 중년의 사내가 찾아왔다. 차림새로 보아 중인

(中人) 신분 같아 보였다. 그러나 기골이 장대하고 생김새가 보통 사내 같지 않았다.

눈썹이 팔자로 생기고 두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기가 셀 것 같았다. 때는 호란이

끝나 민심이 수습되어 가는 과정이었고 전쟁 통에 청국에 상업에 길을 튼 몇몇

상인들은 소금, 비단, 인삼 등을 밀거래 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러한 상인중에는 돈으로 벼슬을 사거나 조정의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

신분을 세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봐라, 여기 추랑이라는 기녀가 있다고 들었다. 냉큼 그 계집을 들게 하라.”

 “어서 오세요.”


 “어서 추랑인가 뭔가 하는 계집을 불러 오래도. 웬 노계(老鷄)가 나와 기분을

잡치게 하느냐?” 

 춘매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자 사내는 춘매를 쏘아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

다.

 

 “에구, 알겠습니다요. 금방 추랑이를 내 보낼 터이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춘매가 추랑이 방으로 달려와 방금 대기실에 든 사내에 대하여 귀띔해 주었다. 

 "얘, 추랑아, 돈 좀 있어 보이는 중인 같은데 좀 거만해 보이는 구나. 그 작자 코 좀

납작하게 만들어 줘야겠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요리해 볼게요.”

 

 “그래, 난 너만 믿는다. 준비 다되었으면 내 그 손님을 네 방으로 모실 테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거라. ”

 

 처음 기방에 들 때 불안해했던 춘매는 첫 손님에게 술 몇 잔에 일만 냥이라는 거금

 뜯어낸 추랑이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 춘매는 다른 기녀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추랑이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혹시나 추랑이 잘못 될까 전전긍긍

했다. 며칠 전 이대감과 김참판이 다녀간 이후로 하루에도 열댓 명의 지체 높은 양반

들과 돈 좀 있다고 으스대는 중인들이 다녀갔으나 그들 대부분은 추랑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도 본적 없는 추랑이에게 연서(戀書)를 써놓고 돌아가기도 하고

또 어떤 졸부(猝富)는 엽전 꾸러미를 춘매에게 맡겨놓고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사라

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문 좀 안다고 하는 한량들은 추랑이에게 망신만 당하고 쫓겨

나기 일쑤였다. 또 어떤 시답지 않은 양반은 추랑이 아직 머리를 올리지 못했다는

소문을 듣고 집문서까지 가져와 추랑이에게 머리를 올려주겠다고 치근덕대기도 하

였으나 추랑은 머리가 텅 빈 것을 알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망신을 주고 스스로

주가를 높이기도 하였다.

 

 양반, 중인 할 것 없이 추랑이에게 술 한상 받으면 최소 이, 삼천 냥의 돈을 지불

하여야 했다. 그러나 아직 기생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지 수개월이 되어도 추랑이

머리를 올려준 남자가 없었다. 수많은 남정네들이 돈을 싸들고 덤벼들었지만 도도한

추랑이 콧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추랑은 손님의 등급을 돈,

외모, 성격, 사회적 지위, 시화서(詩畵書) 등 품격 높은 사람 아니면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춘매가 그 사내를 추랑이 방으로 안내했다.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아 보였다. 비록 차림새는 중인의 신분이었지만 한 눈에 추랑이 감히 접근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사내 역시 추랑이를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서서히 만면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난 그대가 천상의 선녀가 아니었다면 그냥 가려고 했소이다.”

 “소첩, 나으리께 인사 올립니다.”

 추랑이 날듯이 사내에게 절을 하자 사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과연, 과연 소문대로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로다. 내 지금까지 한 평생 찾아 헤맨

여인을 이곳에서 보는구나.”

 사내는 호탕하게 웃더니 추랑이의 외모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음-, 반쯤 걷어 올려진 붉은 치마, 녹색 저고리 그리고 큰머리에 산호비녀가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오늘은 오랜만에 술 맛이 나겠구나.”

 “소첩, 나으리를 잘 모시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상하게 추랑은 처음 본 사내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내, 익히 네 손문을 들었다. 네가 조선팔도에서 시화서 가무에 제일로 뛰어나다고

하는데 내 오늘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소첩, 비천한 재주 몇 가지로 그러한 소문이 났다면 그것은 당연히 헛소문이 분명

하옵니다. 소녀는 그저 노래하고 춤추는 하찮은 재주 밖에 없사옵니다.”

 “거기에 겸손한 미덕까지 갖추었구나. 내 오늘 네가 마음에 들면 술값으로 십 만냥 아니라 백만 냥이라도 낼 터이니 그리 알거라.”

 

 ‘십만 냥? 아니 백만 냥?’

 밖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던 춘매는 십만 냥과 백만 냥이라는 말에 그만

기절할 뻔 했다.


 “......”

 “왜? 십만 냥이 적어서 그러느냐?”


 “아니옵니다. 소첩은 마음에 맞는 분이 계시면 한 푼도 받지 않겠사옵니다.”

 “무어라? 공짜로 술을 주겠다는 말이냐?”

 

 “어디 술 뿐만 이겠사옵니까?”

 ‘계집이 미색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배포 또한 웬만한 사내보다 크도다. 내가

제대로 된 계집을 만났구나.’

 

 “과연 추랑이로다. 나는 청국과 왜 그리고 조선을 오가며 국제무역을 하는 박대

서란 사람이다. 나는 조선팔도를 다니며 수많은 기생을 보아왔지만 너처럼

경국지색은 처음이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듣자하니 네가 시문이 뛰어나 많은

양반 나부랭이들이 너에게 수모를 당하였다고 들었다. 나에게는 그런 장난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면서 답답한 시국(時局)에 대하여 이야기나 나눠 보자구나.”

 

 ‘시국? 장사하는 분이 웬 시국을 논한단 말인가?’

 “왜? 시국을 논하자니 재미가 없는가 보구나.”


 “아, 아니옵니다. 나으리.”

 “그럼, 어서 술이나 따라 보거라. 입안이 어째 깔깔하구나. 그리고 네 가야금 솜씨도

일품이라고 들었다. 한 곡조 타보거라.”

 추랑이 박대서에게 술을 따르고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달하 노피곰 도샤 /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졈그셰라 /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애절한 가락에 애끓는 추랑의 목소리는 박대서의 단단한 마음을 순식간에 봄 눈

녹듯 녹였다.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옛 정인을 생각했다. 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품안에서 별의별 해괴한 짓과 웃음을 흘렸지만 아직까지 박대서의 마음을 훔친

여인은 없었다. 길게 이어지는 애끓는 추랑의 가락에 박대서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먼데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읊은 백제가요 정읍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원초적 본능과 함께 마음을 편안히 해주면서도 어떤 슬픔을 느끼게

했다.

 

 ‘아, 과연 소문대로구나. 저런 여인이 이런 기루에서 썩기에는 참으로 아깝도다.

그러나 나같이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어디 한군데 마음 붙을 수

없으니 내 백만 냥의 돈을 주고 이 여인의 마음을 훔친다 한들 어디다 숨겨 놓으리.’

 

 “과연, 과연 네 노래 솜씨는 사내의 얼음덩이 같은 가슴을 녹여 내리게 하는구나.”

 “부끄럽사옵니다.”

 “추랑아, 이리와 술이나 한잔

 더 따르거라. 그리고 술 한 잔 마시고 내 창(唱)을 한번

해볼 터이니 네가 가야금이나 북으로 추임새를 넣어 보거라.“

 “네에? 나으리께서 창도 하시나 봅니다.”

 

 “그저 조금 흉내만 낼 뿐이다.”

 추랑은 박대서가 창을 한다는 말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대개의 양반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노래와 춤을 시키기만 하였지 직접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커억-, 이 술이 무엇인데 이리 맛이 좋으냐?”

 “그 술은 개성에서 빚은 태상주(太常酒)라는 술인데 감초를 약간 넣어 달착지근하게

데웠습니다. 노독을 푸시는 데에는 그 만큼 좋은 술이 없을 듯하옵니다.”

 “오, 그러냐? 예전에 마신 던 술과는 사뭇 다르구나.”

 

 “나으리, 많이 드세요. 술은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오, 그래, 추랑이 권하는 술이니 내 오늘은 마음껏 마셔보마.”

 박대서와 추랑은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태상주 세 주전자를 비웠다. 흥이 난 박대서

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추랑아, 준비되었느냐.”

 “네, 나으리. 한 곡조 뽑으소서.“


 추랑이 북을 잡고 북채로 탁 탁 두들겨 호흡을 정리하고 박대서의 창을 기다렸다.

 박대서는 일어나더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이 기골이 장대한 외모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추랑은 숨을 죽이고 박대서의 창을 기다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탁 - , 얼씨구 -

 추랑이 정확히 박대서의 창에 추임새를 먹이자 박대서는 더욱 신이 났다. 박대서의

창은 남성미가 있으면서도 여인네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애절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추랑은 박대서의 창에 그만 울컥하면서 금방이라도 무엇을 쏟아내고 싶었다. 추랑은

박대서가 양사언(楊士彦)의 시조 한수만 창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어서 숨을 잠시

고르더니 다시 이조년의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창을 하는 박대서의 얼굴에 비장

함이 서려 있었다.

 

   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탁-, 탁-, 얼쑤 -.

 추랑은 지금까지 살면서 남정네가 이렇듯 애간장을 녹일 듯 창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박대서의 창에 추임새를 먹여가며 이심동체(二心同體)가

되어 보긴 처음이었다. 추랑의 눈가에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박대서의 창에 감동

되어 눈물이 어리었다.

 

 ‘아, 세상에 이렇듯 멋진 남자가 다 있구나.’

추랑은 추임새를 먹이면서 짧은 순간에 자신을 스쳐간 많은 남자들을 생각해 보았

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두 아이를 낳기까지 오로지 정진경이라는 남자 하나만을

보아왔다.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병자년 호란을 만나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돌아

오고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남자를 받아 들여야 했다.

 

 지금 이 순간 또 한 남자를 가슴에 새겨야하는 운명이 펼쳐지고 있음에 호기심과 두

려움이 동시에 교차하면서 박씨녀, 추랑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박대서는 외모와 걸

맞지 않게 연달아 두 곡을 뽑아놓고 앉더니 자리에 앉았다.

 

 “추랑아, 너 울고있지않느냐? 왜 그러느냐?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느냐?

 

 추랑이 그만 박대서의 애절한 가락에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약속함과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서러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자 박대서는 조용히 술잔을 들고 추랑

이 서러움을 모두 토해 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음-, 추랑이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로구나. 저리 곱고 착한 여인에게도

사바세계의 번뇌가 있단 말인가?’

 

 박대서는 자작을 하며 잠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그 품은

뜻은 컸지만 청운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나라를 원망하고 전국팔도와 청나라,

왜 그리고 안남까지 돌아다니며 국제 무역을 해야 하는 자신이 마치 허균이 지은 소설

속 주인공 홍길동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추랑이 눈물을 멈추고 경대를 보며 화장을

고쳤다.

 

 “나으리, 죄송하옵니다. 소첩이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소서.”

 “아, 아니다. 괜찮다. 울 일이 있으면 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생기게 마련

이지.”


 “소첩, 나으리의 창에 가슴이 울렁거려서 그만......”

 “내가 추랑이 마음을 아프게 했나보구나. 미안하구나. 나나 너나 사연이 많은 듯하

구나. 사람은 누구나 인연에 따라 태어났다, 인연에 따라 어느 날 아침 이슬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단다. 내, 네가 너무 마음에 드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소, 소첩도 나으리가......”

 “나는 중인신분인데 양반네만 대하던 네가 내가 마음에 있겠느냐?”


 “양반이던, 중인이던, 천민이던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지요? 어차피

왕후장상이나, 천민이나 한 세상 사는 것은 매 한가지인걸요. 그저 한 세상 마음

맞으면 되는 거 아니겠는지요?”


 “오오, 맞다. 과연 네 말이 맞다. 나에게는 시문(詩文)을 시험하지 않으려느냐?”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이미 소첩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오, 그렇다면 내 오늘은 너와 긴긴 밤을 지새워야하겠구나. 고맙구나. 내 술값은

 네가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소첩, 오늘은 술값을 받지 않겠나이다.”

 

 “아니, 그럼 나보고 외상을 하란 말이냐?”

 “아니옵니다. 먼 훗날 저승에서 소첩을 만나시거든 주소서.”


 “추, 추랑아......”

 박대서는 추랑의 ‘저승’이란 말에 그만 눈물을 찔끔 쏟고 말았다. 그리고 추랑이

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아주었다. 황촛불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자 두 사람의 그림

자도 따라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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