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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내린 눈(5)

* 창작공간/장편 - 유월에 내린눈

by 여강 최재효 2009. 1. 2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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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에 내린 눈(5)

 

 

                                                                                                                                              - 여강 최재효

 

 

 

 박씨녀와 덕칠이는 오랑캐의 심장부인 심양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평양성에

도착했다. 병자년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성 밖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생겨났고 불타고 폐허가 된 민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백성

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성 인근 산에 있는 소나무는 거의 껍질이 벗겨져 송진이 흘러내리다 굳어

버려 검게 변해 있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야들야들한 소나무 속껍

질을 벗겨 먹은 탓이었다. 어떤 백성들은 고운 진흙과 풀로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가 병에 걸리기도 했다.

 

 성으로 통하는 문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십여 명씩 보초를 서서 통행하는

조선 백성들의 감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평양성은 아직도 오랑캐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백성들은 오랑캐의 매의 눈초리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비실비실 마치 병든 강아지처럼 굴었다.

 

 '이 나라가 도대체 누구의 나라란 말이냐? 그 잘난 벼슬아치들의 코빼기는

보이지 않고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만 보이니......’

 박씨녀는 불쌍한 평양성 백성들의 몰골에 가슴이 아팠다.

 

 성민들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고, 패배의 아린 상처만이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매사에 의욕도 상실한 듯 해보였다. 입이 굳게 닫힌 성민들에게 길을

물어보기 조차 겁이 났다. 성 한복판에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덕칠이는

박씨녀에게 시장 구경 좀 하고 가자고 제의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시장에 오랑캐들이 버리고 간 칼, 창,

마구(馬具)등 병장기들도 물건으로 나와 있었다. 아직 조정의 단속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장은 활기에 넘쳐있었다. 먹는 것 빼고는 대부분 청나라

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많았다. 비단, 도자기, 가죽신, 화장품, 거울, 노리개,

모자, 호복(胡服), 만두가게, 과자류 등 전쟁은 오랑캐 문화를 강제로 이식하 듯

 보였다.

 

 “아씨, 시장하시죠?”

 “응, 약간”

 “저기 만두점에 들려 간단히 요기하시죠?”


 아침부터 시장은 북새통이었다. 만두점은 청국풍의 음식으로 가득했다. 박씨

녀가 아무리 남장(男裝)을 하여도 빼어난 미색(美色)을 감출 수 없었다.

 

 상점 안의 손님들과 종업원들은 남루한 덕칠의 행색과 반듯한 용모의 양반 복색

을 정제한 박씨녀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자기네끼리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했다.

얼른 요기를 마친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서둘러 만두점을 나와

다시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낮의 땡볕이 두 사람의 발길을 자꾸 더디게 했다. 박씨녀의 마음은 이미 한양

에 가 있었다. 한양에 가면 그동안 못했던 어미로서의 정을 두 자식들에게 베풀고,

시부모와 남편 정진경을 예전처럼 섬기며 살리라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

했다.

 

 박씨녀는 오랑캐에 잡혀 청국에 있는 동안에도 가족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가족은 자신과 가문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지탱 시켜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쟁을 통해 절실하게 느꼈다.

 

 남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차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평양성을 떠나온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발이 부르튼 박씨녀를 덕칠이 업고 냇가를 건너다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물속에 뾰족한 돌이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밟고 말았다. 피가 몹시 흐르자 박씨녀는 자신의 치마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주었다.

 

 '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덕칠아, 오늘은 그만 가고 어디 쉴 만한 장소를 찾아보자.”

 주변에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박씨녀가 오히려 기골이 장대한 덕칠이를 부축하고

천천히 걸었다.

 

 “아씨, 죄송해유. 제가 칠칠치 못해서 그만.......”

 “아냐, 나 때문인걸 뭐. 많이 아프지?”


 “괜찮아유. 금방 낳을 텐데유. 너무 걱정하지마세유 아씨.”

 “여름이라 상처가 덧날까 걱정이 돼.”

 

 얼마 쯤 가니 기괴스럽게 생긴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골이 나타났다. 사람

인적이 없는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듯한 산이었다. 천지가 생기 이후로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을 것 같은 험하면서도 산세가 수려해

보였다.

 

 좁은 산길 사이로 난 나무 위에서 두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산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또 숲속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짐승

들이 도망가는 소리도 들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와도 길가에 마왕처럼 도열해 있는 고목나무가지들이 아우

성이다. 가냘픈 박씨녀가 장승같은 덕칠이를 부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

스러운 일인지 누가 뒤에서 봤다면 웃음이 저절로 나올 만 했다.

 

 “아씨, 저 혼자 걸을게요. 걸을 만 해요.”

 “난 괜찮은데. 정말 혼자 걸을 수 있겠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드리워졌을 때 멀리 허름해 보이는 집이 한 채가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아담한 너와집이었다. 담장도 없는 산골 화전민이나

심마니가 사는 집 같았다.

 

 “아씨, 저기…….”

 “아, 집이구나. 아휴, 이제 살았다. 오늘은 저 집에서 좀 쉬었다가자.

 ”박씨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두 사람의 발길이 빨라졌다.

 

 “계세유?”

 “계세유?”

 “아무도 안계세유?”

 덕칠이 큰 소리로 불러봐도 방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안사는 집 같네유. 아니면 주인이 멀리 나갔나봐유.”

 “덕칠아, 그래도 모르니 기다려 보자구나. 혹시 금방이라도 주인이 멀리 나갔다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르잖니.”

 

 덕칠이 호기심이 일어 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운데 부엌이 있고 좌우로

방이 있는데 좌측은 주인이 기거하는 방 같고, 우측 방은 작은 것으로 보아 손님

이나 아이들이 사용하는 방같아 보였다.

 

 집 뒤로 조그마한 창고처럼 된 통나무로 지어진 창고 같은 것이 있는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나 하고 들여다보았지만 컴컴해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집 추녀 끝에 토끼, 담비, 살쾡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각 종

산짐승의 가죽이 걸려있다.

 

 한 식경 쯤 지나서 멀리서 두런두런 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사방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고, 은하수가 곧 하얀 소금이 되어 뿌려질 듯 머리

위로 길게 흐르고 있다. 덕칠은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이 무엇하는

자들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마주치는 것은 큰 위험이 다를 수 있었다.

 

 “아씨, 이리 오세요.”

 덕칠이 박씨녀의 손을 잡고 집 뒷산으로 몸을 숨겼다.


 “왜 그러니, 덕칠아?”

 

 “쉿! 아씨 저 사람들 아무래도 예사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유. 우선 여기 몸을 숨

기고 동정을 살펴봐야겠어요. 산삼이나 화전을 일궈 농사짓는 사람들 같지 않아

유. 뭔가 좀 수상해 보여유.”

“그래? 그럼 잠시 저 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보자.”

 

 덕칠은 전쟁 통에 겪은 여러 가지 정황이 생각났다. 물론 지금은 전쟁이 끝났지만,

인심은 흉흉해져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물건을 훔치거나, 힘센 자가 약한자의

식량을 강탈하는 사건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험한 산마다 산 도적

들이 들끓고 있어서 많은 백성들이 그들에게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험한 세상을 헤치며 살다보니 느낌으로 대충 주변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건장한 남정네 세 명이 무언가 한 꾸러미씩 짊어지고 집으로 들어

섰다. 한 남자가 마당에 내려놓은 하얀 자루에 무슨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는 듯

세 남자들은 조심조심해서 자루를 풀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다루 듯 세심하게

다루었다. 남자가 자루를 풀자 웬 여인이 나타났다.

 

 “이야, 고 에미나이 아직도 싱싱하구만 기래. 오늘밤은 심심치 않갔어.”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걱정말라우 내레 너를 듁이디 않을 테니끼니 걱정말라우.”

희뿌옇게 보이는 여인은 목소리로 보아 20대 여인같아 보였다. 남자들이 보쌈을

해온 듯 했다. 두 손이 뒤로 묶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보쌈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나리, 제발 저를 집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제발

저를 풀어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나리.”


 “이, 에미나이 입닥치라우 썅. 오늘 밤은 네 년을 천당과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해 줄 테니 가만있으라우.”

우악스런 남정네 한 명이 여인의 등을 후려 갈겼다.

 

 “나리, 제발, 제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이 에미나이, 여기가 어딘지 알간? 여기는 한 번 들어오면 제 발로 걸어 나가기

 힘든 곳이지비…….”

 

 분명 그 남자들은 산도적패들이었다. 덕칠은 자신 보다 더 큰 덩치의 사내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더구나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무식한

산 도적들 아닌가.

 

 “아씨, 큰일 났구먼유. 산도적 소굴을 들어왔어유. 어떻게 해야 할지유......”

 덕칠이 박씨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만약 자신들도 재빨리 몸을 숨기지 않았다

면, 저들에게 큰 욕을 당할게 뻔했다. 덕칠과 박씨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덕칠아,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응. 저들이 잠들 때 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별 수 없을 것 같구나.“

 “네, 아씨. 그렇게 할게유. 지금 나가다가는 저들에게 들켜 봉변을 당할 것 같네

유. 제가 저놈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 볼게유. 아씨는 안심하시고 계세유.”

 덕칠이 집 가까이 다가가 납작 엎드려 산 도적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두목, 먼저 저 에미나이 맛 좀 보시구 얼른 넘겨주시구려.”

 “이놈들아, 좀 참아라. 네놈들이 어지간히 굶주렸나보구나.”


 “우선 목부터 추기시기요.”

약간 덩치가 작은 남자가 부엌에서 술병과 안주를 내와 마당에 차려놓았다.

 

 “오늘은 그 구두쇠로 소문난 윤영감을 박살냈으니, 한 세월 편히 살 수 있겠구

나. 으흠.”

 두목인 듯 한자가 점잖은 체를 하며 큰 사발에 가득 찬 술을 마셨다.

 

 “고 생쥐 같은 윤가 놈이 지금쯤 저승길을 가고 있겠지요?”

 “두 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이 칼로 세동강이를 냈으니 끼니......”

 두목인 듯 한자가 칼을 번쩍 들어 허공을 갈랐다.

 

 “저 년한테도 먹을 걸 주어야 안 되나?”

 “내버려 두시라요. 우리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얼른 두목님이 이뻐해주면 되지

 않갔시오?”

 산 도적들은 술을 마시면서 좋아라 늦도록 떠들어댔다. 덕칠이 다시 박씨녀

곁으로 가 산 도적들을 감시했다.

 

 병풍처럼 둘러쳐있는 산들이 거대한 귀신의 형상 같기도 하고, 호랑이 머리

같기도 하였다. 가끔 마른번개가 쳤다.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영롱하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박씨녀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덕칠이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이렇게 어여쁜 아씨를 죽을 때까지 아내로 맞이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덕칠이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박씨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양에서 청국으로 다시 조선으로 지금은 한양으로 자신의 주인을 찾아

가는 자신과 박씨녀,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가는 곳 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덕칠은 박씨녀와의 정사를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이 뛰었다.

 

 ‘아, 아씨. 고맙구먼유. 아씨가 이놈에게는 첫 여인이구먼유. 한양으로 돌아

가지 말고 이대로 깊은 산속으로 돌아가 아씨와 천년만년 살고 싶구먼유. 아씨,

한양으로 가지 말어유. 저와, 저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어유.’

 

 덕칠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박씨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조선이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법이 없다면 자신도 박씨녀처럼 선녀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계급차별은 고려시대

보다 더 엄격하고 가혹했다. 양반들의 권위에 도전을 할 경우 가차없이 처단

하거나 씨를 말리려 했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면 떼를 지어 붕당(朋黨)

을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중인(中人)이나 하층민 중에서 재주가

있어 보이거나 학문에 뛰어난 자가 있을 경우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들어 죄를

뒤집어씌우고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지 못하게 했다.

 

 중의 어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종이 되어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처럼 종이 되어야 하는 조선의 수많은 하층민들은 함부로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종은 자기의 주인을 위하여 뱃속에 있을 때부터 무덤 속에 들어갈 때

까지 충성을 다하여야 했다. 주인은 종의 목숨을 쥐고 있었다.

 

 ‘아, 나 같은 종놈 주제에 언감생심 이렇게 고운 양반가문의 여인을 얻는

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지금 내 품에 꿈속에서나 안아 볼 수 있는

여인이 잠들어 있으니 나는 참으로 복 많은 남자로다. 그래, 이렇게라도 내 신세

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지. 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한번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보다 나와 아씨는 행복한 사이지. 늘 이렇게 붙어있으니......’

 

 덕칠이 머리 위로 은은히 흐르는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즐거운 상상을 할 때 쯤

마당에서 술을 마시던 산 도적 중 한명이 일어나더니 담장에 대고 오줌을

갈겼다.

 

 “두목, 이제 얼른 일을 보시구려. 우리도 급하구만유.”

 “이 놈들아, 좀 천천히 하자. 저 에미나이가 어디 가겠냐?”

 

 “벌써, 아랫도리가 욱신거리우.”

 “허, 그 놈들 어지간히 굶주린 모양일세.”


 두목인 듯한 자가 두 손이 묶인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던 여인을 덥석 안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발버둥 거렸지만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품에서는

병아리 같았다. 솔개가 먹이를 낚아채 듯 여인을 안고 방에 들어 간 사내는

여인의 옷을 찢듯 강제로 옷을 벗겼다.

 

 “두목, 살살 다루기요. 그래야 우리들 차지까지 오지 않겠소.”

방에 호롱불이 켜지더니, 젊은 처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 안돼요. 안돼요. 제발, 제발 날 보내주세요. 이러지 마세요.”

 “이 에미나이 가만 있우라우 썅.”

 

 “안돼요. 안돼요.”

 사내가 앙탈하는 여인의 옷을 찢어버리자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사내의 퉁방울

같은 눈이 커지면서 입맛을 다셨다.


 “히야, 고거이 쥑이누만 기래.“

 “안돼요. 이러지 말아요.”


 발가벗겨진 여인이 너덜너덜한 이불로 몸을 감쌌지만 사내의 솥뚜껑만한 손이

이불을 휙 젖치고 여인의 몸뚱이를 안았다.

 

 “안돼요. 안돼.”

 “이 에미나이. 메가 안된다는기야 썅.”


 찰싹 - 찰싹 -

 남자가 여인의 뺨을 때리는지 밖에까지 큰 소리가 났다.

 

 “저, 저놈이 여인을 죽이겠네.”

 덕칠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돼요. 안돼, 제발…….”

 금속성의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계곡과 하늘로 메아리 쳤다. 비명소리는

 처절하다 못해 듣는 사람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다.


 “내레 환장하갔시오. 두목 형님이 날래 일을 마쳐야 할 텐데.

 마당에 있던 두 산 도적들은 문틈으로 두목이 처자를 능욕하는 장면을 들여다

보며 시시덕거렸다.

 

 전쟁 통이 끝난 뒤라 조정의 치안 공권력이 깊은 산속까지 미치지 못했다.

 평시에도 당파싸움으로 날이 지새는 형국에 평안도나 함경도 깊은 산골까지

조선 조정(朝廷)의 공권력은 거의 미치지 못했다.

 

 가엾은 한 마리 암평아리는 무자비한 솔개 앞에서 맛있는 먹이가 되었다. 일방

적인 솔개의 완력 앞에 병아리는 날갯죽지 한번 펴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성욕의

제물이 돼야 했다. 덕칠은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이 눈에 선했다.

 

 술 취해 해롱거리는 도둑놈들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불쌍한 처자를 구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3대1이라는 힘의 불균형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덕칠이 가슴에 곤히 잠들어있던 박씨녀도 가련한 처자의 비명소리에 잠이 깬 듯

눈을 뜬 채 조용히 있었다.

 

 “덕칠아.”

 박씨 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네, 아씨.”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옥 같은 일을 그냥 두고 봐야하니?”

 박씨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어찌해야 하나. 죽을 각오를 하고 저 놈들에게 달려들어 저 불쌍한 처자를

구해야 하나’


 덕칠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낮에 박씨녀를 엎고 냇물을 건너다 발을 다쳐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처지 아닌가. 평소 같으면 날랜 덕칠에게 술 취한 산 도적 서너

명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방안에서 가련한 처자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좋다. 죽든 살든 저 처자를 구해보자.”

 덕칠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씨, 도저히 이대로 보고 있을 수 없구만유. 제가 저 놈들을 때려눕히고, 저 처자

를 구해내야 겠어유.”

 “아니, 덕칠아 너도 발을 다친 몸인데, 어떻게?”


 “저 놈들은 모두 대취해 있어서 문제 없어유. 아씨는 여기 계시면서 구경이나

하세유.”

 

 “덕칠아, 만약, 만약 네가 잘못되는 날이면, 난, 난 어떻게 하니.”

 “아씨두 참, 걱정 마세유.”


 덕칠은 살금살금 내려가 창고 옆에 있던 절구공이를 집어 들었다. 밖에 있던

두 산 도적들은 문틈으로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래, 기래. 형님 죽이 누만, 기래. 좀 살살 다루지 않고 말이야.

 “형님, 다음에 내레 먼저 합세다. 나 죽갔시오.”

 “이 간나, 무신 소린메? 장유유서도 모른메?”


 처자는 거의 실신상태가 되어 죽은 송장처럼 널브러져고 두목은 그런 여인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며 열을 올렸다.

 사내가 단말마의 신음을 내며 일을 마치고 벌러덩 나가 떨어졌다.


 “고 에미나이, 사내 여럿 죽이갔어. 아주 졸깃한 게 사내들이 사족을 못쓰겠구만.

 험 -”

 두목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막 옷을 챙겨 입을 때였다.

 

 퍽, 퍽 -,  으악 -.

 갑자기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술에 대취한 두 명의 산도적들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했다. 덕칠이 있는 힘을 다해 방안을 들여다보던 두 산도적의 뒤통수를 내려

갈겼다. 머리가 박살이 난 두 도적이 마당으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덕칠이

이번에는 얼른 문 옆으로 서서 두목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보라우. 밖에 무슨일임메?”

 방안에 있던 두목이 비명을 듣고 문을 벌컥 열고 나오자, 단단한 절구공이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딱-.  으악-.

 머리통이 깨진 깍짓동만 한 두목이 피를 흘리며 땅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

다. 순식간에 세 사내가 송장으로 변했다.


 “안심하세요. 난 처자를 구하러 온 사람이오. 안심하시오”

 방으로 들어선 덕칠이 놀라 벌벌 떨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붙였다.

 

 호롱불빛에 비친 처자는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무명 이불에 홍반(紅斑)

점점이 묻어 있었다. 얼마나 격렬한 강간이었는지 헝클어진 머리와 찢어진

옷가지와 이불이 증명하고 있다.

 

 “욕보셨오. 얼른 옷을 입으시오.”

 흐느끼던 처자에게 덕칠이 옷을 던져주고 방을 나왔다. 어느새 박씨녀가 마당에

내려와 죽어 나뒹구는 세구의 송장을 보고 떨고 있었다.

 

 “아씨, 모두 해치웠구만유. 이제 안심하세유. 방에 그 처자가 울고 있어유.

아씨가 달래 주세유”

 덕칠은 은근히 자신의 완력을 자랑하였다.

 

 “처자, 난 병자년 전쟁 때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듯한데…….“

  무지막지한 산 도적에게 강간을 당했던 충격으로 인해 처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박씨녀는 같은 여자로서 늑대 같은 남정네들에게 능욕을 당한 처자가 측은하고

가련했다.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이 좁은 방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처자가

울음을 그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물 좀 마시고 싶어요.”

 앳된 목소리였다. 처자는 일어 날 힘도 없어 보였다.


 “응, 그래. 알았어. 가만히 누워있어. 얼른 떠 올게.”

 물 한 그릇을 비운 처자는 다시 흐느꼈다. 방금 전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처자,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나를 언니라고 생각하고 해봐요.”

 “저는 황해도 황주에 사는 윤 초시의 막내 딸 봉희라고 해요. 올해 열아홉이

고요. 그런데 어제 새벽녘에 산 도적 열 명이 저희 집을 덮치더니 아버님을

비롯해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 해 갔답니다. 저는 얼결에 그만

저 놈들에게 보쌈을 당했답니다.

 

 생각하건데 산 도적 여러 패가 합심해서 저희 집을 턴 것 같아요. 아버님은

전쟁 통에도 다행히 큰 재산손실을 입지 않으셨답니다. 인근 주민들에게도

선심을 많이 쓰셨고요. 그런데, 그런데 저 못된 산 도적들이 저희 집안을 풍비

박산을 냈답니다.“

 여인은 강제로 능욕을 당한 입장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짐승 같은 놈들, 사람들 죽이고도 모자라 시집도 안간 처녀를 이 지경으로 만

들다니…….”

 박씨녀 입에서 욕이 나왔다.


 “봉희, 이름도 예쁘구나.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 언니네.”

 박씨녀는 봉희를 진정시킨 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었다.

덕칠이 만약을 위해서 세구의 시체를 집 뒤쪽 헛간에 숨기고 거적때기로 덮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아씨,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새벽 일찍 길을 떠나는 편이 좋을 듯합

니다.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밤길이 위험합니다. 또 산 도적들을

만날지도 모르고요.“

 

 “그래 덕칠아, 네 말대로 해야겠다. 내일 새벽일직 길을 떠나자. 그런데

봉희는 어쩌지?”

 박씨녀가 봉희 처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봉희 처자가 입을 열었다.

 

 “저도 두 분을 따라가겠어요. 고향에 가야 사고무친인 제가 혼자 살아가기가

두렵답니다. 또 언제 산 도적들이 들이닥쳐 나에게 해코지 할지도 모르고요.

부탁이에요. 언니,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봉희는 박씨녀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봉희는 고향이 이 곳 황주인데 우리는 한양으로 가는 길이고. 혹시 한양에

누가 있어? 일가친척이라도?“

 “없어요. 한양에는 아무도…….”

 

 “아씨, 봉희 아가씨를 거두어 주시지요. 함께 한양으로 돌아가서 그 후 일은

상의해 보도록 하시고요.”

 박씨녀는 자색이 고운 봉희를 마치 집 나간 여동생이 돌아 온 것처럼 흡족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덕칠이 문 앞에서 망을 서고, 박씨녀와 봉희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기

도 전에 세 사람은 집을 나섰다. 날이 밝아 올 때쯤 두 서너 채의 민가가 보였

다. 그러나 그 민가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몰라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

다. 어제부터 끼니를 굶은 박씨녀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아씨와 봉희 처자는 여기서 기다리세유. 내가 저 민가에 가볼게유.”

 “덕칠아, 조심해.”

 “걱정마세유.”

 덕칠이 한 손에 박달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민가에 들어가자마자 덕칠이 뛰어 왔다.

 

 “아씨, 얼른 가세유. 다행이 착한 사람들이네유.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아침

밥을 줄 수 있다고 하네유. 정말 다행이에유.”

 “그래? 다행이구나.”

 “봉희처자도 얼른 가세유.”

 

 세 사람은 허겁지겁 촌로들이 차려 준 밥으로 시장기를 면했다. 집을 나오면서

박씨녀는 촌로에게 엽전을 건네주면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촌로는 보자기에

찐 옥수수며 찐 감자 등 먹을 것을 싸주었다.

 

 한 여름의 땡볕은 세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덕칠이 다리가

성하지 못한 관계로 자연 세 사람의 남행(南行)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봉희는

산 도적들에게 강간을 당한 후유증으로 말이 없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단란했던 집이 전쟁 통에 산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멸문지화를 당한 사실이 봉희 처자는 믿기지 않았다.

 

 산 도적에게 죽임을 당한 부모형제들의 장례를 치러드리지 못하고 도망가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한 순간 산 도적들에

게 유린당한 아픔 때문이기도 했다. 한양이 가까워 올수록 박씨녀는 마치 어린

아이가 되듯 자주 웃기 시작했다. 곧 만나 볼 가족들 얼굴이 자꾸 눈에 어렸다.

 

 낮에는 죽을힘을 다해 걷고, 밤이면 주인 없는 민가나 허름한 사찰에 몸을

의지했다. 하루 한 두 끼로 겨우 허기를 면하고 걷고 또 걸었다. 평양성을

떠난 지 열흘째 되는 날 마침내 세 사람은 개성에 도착했다.

 

 개성도 평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전쟁 통에 불타버린 민가가 아직 정리

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한양에서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혀 이춘연을 따라 청국으로 떠날 때 보았던 끔찍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개성시가지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성 밖 야산에는

임자 없는 무덤들이 즐비했다. 모두가 자신들에게 착취와 충성을 강요하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의 한 맺힌 주검들이었다.

 

 신흥강국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긴 결과는 선량한 백성들의

떼죽음뿐이었다. 20만 명이 넘는 조선의 백성들이 전쟁 중 포로로 잡혀 갔고,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

갔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강토는 초토화 되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전국 곳곳에서 도적떼들이 기승을 부렸지만 조정에서는 공권력이

미치지 못했다.

 

 고을이나 마을에서는 힘 있는 자가 주인이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붙잡아 와서 매를 치거나 재물을 빼앗아 갔다. 힘없는 백성의 아내가

반반하면 힘 있는 토호(土豪)들은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남자를 불구로 만들

거나 두들겨 패서 반병신을 만들어 그의 여인을 취하기도 했다.

 

 해가 서산 아래로 기울자 세 사람은 주막을 찾았다. 박씨녀는 얼마 전 청천강

나루터 근처 주막에서 당했던 일이 생각나자 몸서리를 쳤다. 또다시 낯선 남정

네들과 한방에서 밤을 새는 일은 절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주막이 아닌 민가에 돈 며푼 주고 쉬고 싶었다.

 

 “덕칠아, 우리 주막 말고 다른 곳에서 쉴 수 없을까?”


 박씨녀의 속을 모르는 덕칠은 주모에게 주막 말고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곳을

물었지만 그런 곳은 없다고 했다. 마당 평상 위에서 술을 마시던 남정네들이

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으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눈치들이다.

 

 “고 계집 참하게 생겼구만…….”


 구레나룻이 성한 남정네 하나가 봉희를 보며 농을 걸었다. 순간 덕칠이 눈을

흘기며 그 사내를 쳐다보자, 그 사내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보시오, 주모. 여기 국밥 좀 내오시오. 그런데 이곳에 웬 날짐승 냄새가 진동

할까? 아직 몽둥이맛을 못 봤나?”

 

 덕칠이 마당에 놓여있던 장작개비를 잡고 허공을 가르며, 일부러 큰 소리로

주모와 대여섯 명의 남자손님들을 번갈아 보며 외쳤다.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

들을 깔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전쟁 통에 덕칠은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동네 깡패 같은 남정네들 서너 명이 기골이 장대한

덕칠이의 호탕한 행동에 기가 죽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탁주잔을 비우고 있다.

 

 “이보시오, 주모. 방 하나 좀 내주시오.”

 “아이구, 손님. 방이 모두 찼는데. 다른 분들하고 함께 묵으면 안 될까요?”

 주모는 겁을 집어먹고 덕칠이에게 두 손을 비벼가며 헤프게 웃었다.


 “돈을 더 줄 테니, 방을 비워주시구려.”

 “그럼 잠시 기다려 봅쇼.”


 “아씨, 봉희처자 많이 드세요. 하루 종일 걷느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 일찍 쉬셔

야지요.”

 덕칠이 탁배기 두어 잔을 게 눈 감추듯 하자, 박씨녀는 걱정이 되는 눈치다.


 “덕칠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텐데. 술을 마셔도 되겠어?”

 “괜찮아유, 아씨. 이제 다 아물었어유.”


 주모는 깨끗해 보이는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달래어 다른 방으로 옮기

도록 하고 박씨녀 일행에게 내어 주었다. 주모는 기골이 장대한 한 남자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한 방에 들자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참, 이상하단 말야. 부부와 딸 사이도 아닌 것 같고. 오누이들도 아닌 것

같고?”

 주모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중얼거렸다. 박씨녀는 다른 사람 없이 덕칠이와

봉희, 세 명이 단출하니 한 방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덕칠은 문 앞에서 새우잠을 청했고 봉희와 박씨녀는 아랫목에서 편히 잠자리

에 들었다. 박씨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양은 개성에서 이삼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곧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잔잔한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근영아, 근수야 이 엄마가 곧 너희들에게 간단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조금만.”

 박씨녀는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주막 앞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있노

라니 송악산 위로 둥근달이 떠올라 세상만물을 은빛으로 물들여 놓고 있다.

 

 그동안의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 꿈결 같았다. 남산에서 오랑캐군사에게

포로가 되어 오랑캐 군관 이춘연을 만나 심양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보낸 세월

과 일들이 일장춘몽이었다.

 

 “그래 인생은 어쩜 저 달님처럼 변화무쌍해와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우리가 이제까지 모르던 진리를 저 달님은 무언의 행동으로 우리 어리

석은 인간들에게 은연중 알려주고 있는지도 몰라.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이

인간의 생로병사와 무에 다르단 말인가.“

 박씨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즉석에서 시를 지어 조용히 읊어보았다.

 

  黃圓入眼裡(황원입안리) 휘영청 밝은 달 눈 속에 비치니

  愁心出樂滿(수심출락만) 근심걱정 달아나고 즐거움이 가득하네

  萬事如流水(만사여유수) 세상만사 흐르는 물 같을지니

  森羅不知限(삼라부지한) 우주의 현묘한 이치 그 끝을 알 수없네

 

 눈물이 주르르 박씨녀의 볼을 타고 내렸다. 하루만 더 부지런히 걸으면 꿈에

그리던 한양에 도착할 수 있다는 벅찬 감격에 박씨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이슬을 흠뻑 맞고 있을 때 덕칠이 박씨녀가 걱정되어 개울가로 나왔다.

박씨녀의 하얀 다리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보였다.

 

 “아씨, 밤공기가 서늘한데 이제 그만 들어가세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야

내일 밤 안으로 한양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유.”

 “덕칠아, 이리와 앉아라.”


 “......”

 “이리와 앉으래도. 왜 장승처럼 서 있는 거야?”

 

 “어서 들어가셔야지유. 밤이슬 맞으면 몸에 안 좋아유.”

 “잠깐만 이리 앉아봐.”


 덕칠이 머뭇거리며 박씨녀 곁에 앉자 박씨녀는 덕칠이의 손을 잡았다. 덕칠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살폈다.

 

 “아, 아씨......”

 따뜻한 박씨녀의 체온이 손을 타고 덕칠이에게 전해지자 덕칠은 야릇한

감정에 빠졌다. 자꾸만 박씨녀와의 첫 정사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제 하루만

더 가면 한양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처럼 상전과 하인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아, 이대로, 이대로 아씨를 모시고 하삼도(下三道)로 줄행랑을 쳐버려?

아니지. 안 될 일이야 절대로. 한양에는 서방님과 도련님들이 계시니 아씨를

어서 집으로 안전하게 모시고 가야지. 그것이 내 소임이고 할 도리이니까.’

 덕칠은 박씨녀에게서 나는 여인 특유의 향긋한 냄새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박씨녀가 덕칠이의 어깨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 바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덕칠아.”

 노래를 부르다 말고 박씨녀가 조용히 덕칠이를 불렀다.


 “네?”

  “이제 내일이면 너와 나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 가야돼. 지난 일 년 동안 나를

위하여 너무 고생 많았어. 이 은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두고두고 갚을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한양에 다시 돌아 올 수 있었겠어?”

“아, 아씨......”

 

 박씨녀가 손을 들어 덕칠이 뺨을 어루만져주자 덕칠이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박씨녀는 절터에서 덕칠이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갚기 위하여 통정했던 날이

생각났다. 이제 내일 조선의 철저한 상하 신분관계로 돌아가면 지난 날 전쟁

통에 덕칠과 애틋했던 관계를 모두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박씨녀와

덕칠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덕칠아.”

 “네, 아씨.”


 “나, 나 좀 안아 주겠니?”

 “아씨.”

 

 “나 추워. 어서 좀 안아줘.”

 덕칠이 산바람이 불자 한기를 느끼고 있는 박씨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개울가 근처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에 고막을 찢어질 정도였다.

 

 ‘아아, 내일이면, 내일이면 하늘처럼 올려다봐야 할 아씨를 이렇게 안고 있어도

되는 걸까?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덕칠이 박씨녀에게서 나는 향긋한 내음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팔에 힘을

주자 박씨녀가 깊게 안겨왔다.

 

 “아씨, 저 이제 어째유? 내일이면 종놈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제는

죽어도 아씨를 이렇게 안아 볼 수도 없을 텐데유. 아씨를 하루도 못 보면 미칠 것

 같어유.”

 “덕칠아,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해. 한양에 돌아가서도 상하의 구분이

없이 지금처럼 지내면 우리는 제 명에 못 죽을 거야.”

 

 “아씨......”

 “울지 마 바보처럼 다 큰 어른이 울면 어떻게 해?”


 마침 송악산 위로 떠올라 세상 만물을 환하게 비추던 달이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젊음은 지척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인 가보다. 박씨녀의 숨이 가빠지더니

덕칠이 가슴을 파고들며 덕칠이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덕칠이 박씨녀를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박씨녀의 달콤하고 촉촉한 입술을

훔치기 시작했다. 덕칠이의 단단한 두 팔에 힘이 들어가고 뜨거운 혀가 박씨녀의

입안을 어지럽혔다.

 

 ‘그래, 험난한 전쟁 통에 나의 목숨을 보호해 준 대가로 한 번 더 내 마음을 줄게.

한 번만 더 ......’


 박씨녀는 덕칠이에게 심신(心身)을 맡기기로 하고 덕칠이가 원하는 대로 응해 주

었다. 덕칠이 두툼한 오른 손이 박씨녀의 젖가슴을 지분거리고 왼손은 박씨녀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엉덩이를 애무하였다.

 

 아 -. 박씨녀가 가볍게 비음(鼻音)을 내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박씨녀의 신음에

덕칠은 더욱 몸이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정상을 향해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숲속 개울가에서 정사(情事)를 갖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만일 부랑자들이 숨어서 볼 수도 있고 한참 고지(高地)를 향해 달려갈 때 불의의

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아씨-”

 “......”

 “아씨, 방으로 들어가유. 여긴 아무래도 위험해유.”

 한참 열락(悅樂)을 향해 달리던 박씨녀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가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은 박씨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방으로 가자.”

 “아씨, 어서 방으로 가세유.”


 ‘방에는 봉희가 있는데......’

 “아씨, 봉희 처자는 아까 제가 나올 때 이미 잠이 들어 있더라구유.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유.”

 

 덕칠은 이쯤에서 박씨녀와의 정사를 멈춰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박씨

녀와 자신을 스스로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돌아오면서도 뒤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다시 송악산 위로 보름달이 나오더니

다시 산하의 만물들에게 뽀얀 은빛가루를 뿌리며 은총을 베풀었다. 야심한 시각

에도 불구하고 숲 속에서 꿩들이 짝짓기를 하는지 푸드덕 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

기도 하고 이산 저산으로 날아다니며 행복에 겨워하는 날갯짓을 해댔다.

 

 박씨녀와 덕칠이 봉놋방으로 들어 왔을 때 봉희처자는 아랫목에서 가늘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가운데 박씨녀가 눕고 그 옆으로 덕칠이 몸을 뉘였

다. 두 사람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달아오르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이었

다. 두 사람은 컴컴한 방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정신을 또렷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자야할까?’

 박씨녀가 몸을 좌우로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자 덕칠은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속

으로 고민하였다.


 ‘아, 어쩌나? 곁에 봉희 처자도 있으니......’

 덕칠이 역시 뒤척거리며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에 창호지 문이 하얗게

물들더니 방안까지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봉희 처자는 여전히 가늘게 코를 골았

다.

 

 “덕칠아, 자니?”

 박씨녀가 덕칠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안 자유.”

 덕칠이 봉희처자를 의식해 모기소리만하게 속삭였다.


 “......”

 박씨녀가 덕칠이 곁으로 몸을 움직여 다가갔다. 박씨녀의 보드라운 손이 덕칠이

가슴을 쓸어 내리자 덕칠이 호흡이 빨라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씨......”

 “가만히 있어.”


 박씨녀의 손길이 닿자 덕칠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다시 달이 구름 속으로 모습

을 감추었는지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워 졌다. 동시에 주막 뒷산에서 암수 꿩의 울음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세 사람은 해가 뜨기 전에 걷기 시작했다.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덕칠이 앞서고 덕칠이 그림자를 밟으며 박씨녀와 봉희가 뒤따랐다. 박씨

녀의 걸음걸이가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간밤의 정사(情事)로 인하여 피곤이 엄습

했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박씨녀는 졸다시피 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점심도 주먹

밥으로 걸어가면서 해결한 세 사람은 쉬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해가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 박씨녀 일행은 겨우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했다.

 

  “아씨, 어쩌지유? 오늘 임진강을 건너야지유?”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강만은 건너가야 해.”

  “네에 알겠어유.”


  덕칠이 날이 저물어 안 가겠다고 하는 뱃사공을 겨우 설득해 배에 오르게 되었다.

사공이 박씨녀와 봉희의 행색을 자꾸만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아니, 사람 첨봐유? 왜 그렇게 우리 아씨를 뚫어지게 봐유? 노나 잘 젓지않구유?”

  덕칠이 중늙은이 사공에게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보아하니 대국에서 오시는 분 같으신데?”

  “아니에유. 우리 아씨는 개성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시는 길이구먼유.”

 덕칠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요? 하긴 요즘 청국에 포로로 잡혀 갔다 오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개성 아니면

 평양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지. 청국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명도

못보았수다. 내가 이 강에서 뱃사공으로 평생 먹고살지만 병자년 때 말고 강 건너

개성에 간다는 여인들이 별로 없던데 이상하게 요즘 많은 여인네들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단 말이야.”

 사공은 박씨녀 일행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떨들어댔다.

 

  “사공님, 이 강을 건너는 처자들이 많던가요?”

  “많다마다요. 하루에도 열댓 명은 되지요.”


  “아, 그래요?”

  “그런데 강을 건너가면 뭐합니까?”

 

 “네에? 무슨 말씀인지요?”

 “내가 강을 건네준 여인들 중 젊은 것들은 대부분은 집에도 못 들어가고 들병이가

되어 주막이나 유곽(遊廓)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합디다.”

 

 ‘들병이? 유곽?’

 박씨녀는 점점 알 수 없는 사공의 말뜻이 궁금했다.


 “사공님, 그 여인들이 왜 집에 못 들어가지요?”

 “집에 가보니 이미 서방님은 다른 여인을 들였고,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는 오랑캐들

에게 몸을 버린 며느리를 집으로 들일 수 없다하여 내친다고 하지요.”

 사공은 마치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면서 노를 저었다.

 

 ‘아아, 그럴 수가 어찌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가족에게 그리 대할 수가 있단 말인

가? 아냐, 아닐 거야. 나를 찾겠다고 속가를 짊어지고 심양까지 다녀갔던 서방님은

그럴 리가 없겠지.’

 

 “아씨, 저 사공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유. 그런 일은 못돼 먹은 집에서나

일어나겠지유. 서방님이나 노마님은 절대 그럴 분들이 아니니 그런 걱정일랑 붙잡아

매세유. 서방님이 아씨를 데려가겠다고 심양까지 다녀갔잖아유.”

 

 “그렇지 덕칠아? 나에게는 아무 일 없겠지?”

 “그럼유. 아씨처럼 고운 분을 서방님과 노마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유?”

 “그럴 거야 시어머니 시아버지 그리고 서방님과 두 아이들이 나를 보면 반가워서

눈물을 흘릴 거야.”

 

 “그럼유. 당연한 일이지유. 그 험한 오랑캐 나라에서 살아 돌아오셨는데유. 아마두

 노마님께서 아씨를 붙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실거에유. 두고보세유.”


그러나 박씨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면서 먼 산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둠이 완전히 대지를 집어삼켰다. 강변에 주막으로 보이는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아씨, 방을 알아볼까유?”

 “아니. 덕칠아, 우리 밤새 걸으면 안 될까? 봉희도 있고 하니 우리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밤길을 걸으면 새벽녘이면 구파발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아씨, 저야 상관없지만 아씨와 봉희 처자는 다리도 아프시고 힘이 들텐데유?”

 “저는 염려하지마세요. 밤길은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묵묵히 뒤따르던 봉희처자가 입을 열었다.

 

 “아씨, 그럼 우선 요기나하지유. 시장하실텐데유.”

 “그래, 저기 주막으로 들어가자.”


 임진강 나루터라 그런지 주막 두 채가 나란히 지붕을 맞대고 있는데 제법 커 보이는

한 채는 기와집으로 되었고 또 한 채는 초가지붕이었는데 기와집 주막은 좀 중인

이나 양반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제법 비용이 꽤 들것처럼 보였다.

 

 “덕칠아, 저기 저 기와집 주막으로 들자.”

 수백 년 되어 보이는 수양버들이 실버들을 가지를 마치 여인네들이 창포에 머리를

감고 난 뒤 머리를 말리듯 바람이 조금 불어도 살살거렸다. 겉에는 주막이라고 써

붙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생집 같기도 했다. 대문 좌우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방마다 붉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봉당에 짚신 두 켤레

가 있는 것으로 보야 남녀가 들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간간히 젊은 여인의 교성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보였

다. 안채 커다란 마당에 평상이 서너 개 있는 데 갓을 쓴 양반과 패랭이를 쓴 장돌

뱅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대개가 젊어보였다. 박씨녀 일행을

본 주모가 반색을 하면서 맞아 주었다.

 

 “아이구. 어서오시구랴.”

 “주모, 우리는 요기만 하고 갈거요.”

 “그래유? 여긴 좀 비산데?”

 

 “아, 비싸야 얼마나 비싸겠어? 외상으로 먹지 않을 테니 어서 국밥하고 탁배

기나 내오구려.”

 “알겠수. 그런데 저 처자들은 누구유?”

 

 “주모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유?”

 “제법 얼굴이 반반한 게 행하채는 두둑이 받을 수 있겠는데......”


 “예끼, 단 소리 말고 어서 밥이나 내와유.”

 “우리 주막에는 처자들이 스무 명 정도 있는데 돈을 잘 번다우. 다른 데 찾지 말고

우리 집에서 일해보지 않으려우?”

 

 “어허, 이 주모가 정말 못하는 말이 없네. 감히 양반집 아씨한테 엉뚱한 수작을

 걸다니. 어서 밥이나 내오래두.”

 “알겠수. 댁은 무슨 성미가 그리 급하우?”

 

 주모는 박씨녀가 청국에서 돌아오는 것을 눈치로 감을 잡고 박씨녀와 봉희에게

자신의 주막에서 들병이나 뜨내기 남자 손님들을 상대로 몸을 팔면 어떠냐고 은근히

의중의 떠보는 말투였다.

 

 평상에 오른 세 사람은 국밥이 나올 때까지 멍하니 붉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쪽방

들을 유심히 살폈다. 젊은 남자들이 방으로 들면 환했던 방안에 빨간 불빛이 새어

나왔고, 곧 이어 요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손님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였다.

 

 “주모, 저 방은 뭐하는 방이우? 그리고 웬 여인들이 방마다 한명씩 들어있는

거유?”

 덕칠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모의 눈치를 보았다. 주모가 소리없이 웃었다.


 “왜 웃어유?”

 “객고 좀 풀라우? 아니지. 곁에 항아님들 두 분이 계시니 그럴 필요가 없겠지.

......”

 주모는 상을 내려놓고 깔깔거렸다.

 

 “저긴, 들병이들이 심신이 피곤한 나그네들을 위로해주는 방이라우.

 “나그네를 위로해주는 ?”

 덕칠이 주모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르고 탁주잔을 들었다.

 

 “아씨, 다리 아프지유?”

 “응, 걸을만해.”

 “봉희 처자는유?”

 

 “저도 괜찮아요.”

 주막에서 나와 쉬지 않고 밤길을 걷던 세 사람은 별을 헤며 남녘으로 향했다.

술이 어량한 덕칠이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렸다.

 

  아리랑 ~ 아리랑 ~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청천 하늘엔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꿈도 많다

 

 그때 달이 떠오르면서 세상을 환히 비추었다. 약간 오른쪽이 이지러진 것으로

보아 보름이 이삼일 지난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말없이 일정 간격을 두고 걷고 또

걸었다. 산을 넘을 때는 세 사람은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혹시 승냥이나

산도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변고는 없었지만 새벽부터 걷기 시작한 세 사람은 차차 피곤이 몰려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지만 산 넘고 개울을 건너기를 수십여 차례 박씨녀는

다리가 아픈지 두서너 번 쉬자고 하였다. 달이 서산으로 넘어가자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야 했다.

 

  “아씨, 힘드시지유?”

  “응, 좀.”


  “좀 쉬었다가세유.”

  “아냐. 조금이라도 더 가야지.”

  “조금만 더 가면 벽제에 도착하고 거기서 좀 더 가면 구파발이에유. 아침이면 족히

구파발에는 도착할 것 같네유.”

 

  “그래. 어서 길을 가자구나.”

  “아씨는 여인네 몸으로 저보다 더 강하네유.”


 덕칠이 농담을 건네자 박시녀는 덕칠이 등을 툭치며 배시시 웃었다. 세 사람은 벽제

를 지나 구파발에 도착 했을 때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주막에 들려 잠시

쉬면서 아침을 들었다.

 

  “아씨, 드디어 한양이네유.”

  “그래. 꿈에 그리던 한양이구나.”

  한양에 들어서자 덕칠이 흐느꼈다.

 

  “덕칠아, 왜 그러니?”

  “너무 기뻐서유. 아씨 모시고 청국에 갈 땐 다시는 한양에 못 오는 줄 알았어유.

그런데 이렇게 아씨모시고 다시 한양에 돌아오니 눈물이 나네유.”

 

 박씨녀 역시 이춘연을 쫓아 눈보라 속을 뚫고 청국으로 갈 때 다시는 조선 땅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박씨녀는 국밥을 먹으면서도 임진강을 건널 때

사공이 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속으로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사공의 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한양성 역시 전쟁의 상흔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성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보였고 거리에는 전쟁 통에 용케 살아남은 고아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양반처럼 보이거나 말끔한 차림의 사람들이 지나가면 구걸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거지 아이들을 피해 사람들이 도망 다니는 광경이 곳곳에서 목격

되었으며, 불탄 민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쟁통에 도로 위에 잔뜩 쌓여있던 한양백성의 시체는 말끔히 치워졌으나 어디서

나는지 악취가 진동했다. 종로통의 육의전등 상가는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전쟁의 상처를 빨리 잊으려고 몸부림치 듯 했다. 박씨녀는 곧 바로 꿈에 그리던 집을

찾았다. 다행히 집은 전쟁 중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구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씨, 드디어 집에 왔네유.”


 박씨녀와 덕칠이 감격해 하면서 집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덕칠이가 큰 소리로 대문을 두드리자 남자 하인 칠보가 나왔다. 칠보는 죽은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면 덕칠을 끌어안고 반가워했다.

 

 "칠보야, 아씨도 오셨어. 어서 가서 노마님께 여쭈어줄래?"

 박씨녀는 비록 청나라에서 돌아왔지만 집안의 어른인 시어머니 김씨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참 만에 칠보가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박씨녀의 눈치를

보며 칠보가 덕칠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순간 덕칠이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덕칠이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덕칠아, 왜 그러니?"

 순간 박씨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씨, 으흐흐흐……."

 덕칠이는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씨, 노마님께서……."

 덕칠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덕칠아, 말해봐 왜 그래? 괜찮아."

 "아씨, 이렇게 원통할 데가, 노마님께서 아씨를 집안에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계셨

답니다."

 박씨녀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 지며 그 자리에 쓰려

졌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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