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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X(4)

* 창작공간/장편 - 엑스

by 여강 최재효 2008. 11. 28.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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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X(4)

 

  

                                                                                                                                               - 여강 최재효

 

 


 신나는 미영이가 쉽게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위협용으로 구입한

것이지만 막상 나의 마음도 무거웠다. 도시락만한 작은 통에 들어 있는 인화

성이 강한 물질이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살상용(殺傷用)으로 사용

될 수도 있다. 살며시 미영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홀에 미영이는 보이

지 않았다. 방금 전 내가 앉았던 테이블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은 당겼다.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고 연기를 허파에 담았는데 금방이라도 기침이 날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려 더 참지 못하고 천정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담배 한 가치를 억지로 다 태웠을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정미야, 너 지금 어디 있는 거니?”
 “미진이구나. 나, 미영이 호프집에 있어.”


 “그래? 그 계집애 결국 만났구나. K시장 근처라고 했는데 나 지금 택시타고

너있는 데로 가려고 해. 차가 좀 밀리기는 하지만 30분이면 그곳에 도착할거 같애.

도착하면 전화할게. 가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미진이는 내 답변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진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라도 미영이에게서 20년 전의 진실만 알면 바로 나가려고 하였다.


 10분이 지나도 미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영이가 오기 전에 나는 신나통의

마개를 열었다. 휘발성이 강한 신나의 특유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만약 내가

다시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키거나, 심심해서 라이터를 만지작

거리다 자칫 불똥이 튈 경우 상상하기 싫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시너를 내프킷에 조금 묻혀 바닥에 떨어 트렸다. 그리고 시너통 마개를 단단

히 닫았다. 내가 이런 저런 망상에 빠져 있을 때 미영이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일어나 시너통 위에 라이터를 갖다 댔다.


 “아니, 너 아직도 안 간 거야?”
 미영이는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미영, 잠깐 그 자리에 서. 꼼짝하지 마. 이거 보이지 이게 뭔지 알아? 이건

인화성이 강한 시너야. 폭탄이라고 할 수도 있지. 네가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 라이터를 킬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너와 나 그리고 이 호프집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겠지.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년아, 살고 싶으면 꼼짝하지 마.”
 내가 두 손을 모아 라이터를 키는 흉내를 미영이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정미야, 안 돼. 알았어. 내 알았으니까 먼저 그 신나통부터 치우자.

얼른. 라이터는 이리 주고.”


 “미친년, 진작 그럴 것이지. 꼭 내가 이런 방법을 동원해야 되겠니?”
 “정미야, 제발 그 신나통부터 치워. 얼른.”


 “미안하지만 그렇게 못하겠어. 이 순간 이 후부터 네가 죽고 사는 건 순전히

네 입에 달렸어.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너를 찾아 왔어.”


 “정미야, 난 너에게 말해 줄 것이 없어. 정말이야. 믿어줘.”
 “뭐야? 너 정말 끝까지 나를 속일 셈이야. 오늘 밤,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는

 거니?”


 나는 홀 바닥에 던져진 내프킷에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퍽하고 치솟았다.

대부분  증발된 상태라 불꽃은 미미했다. 불꽃을 본 나도 가슴이 떨렸다.


 아악-. 미영이 제 자리에 서서 비명을 질러댔다. 불길이 한번 치솟더니 금방

꺼져버렸다. 만약 바닥에 흔건히 시너가 뿌려졌다면 생지옥이 될 뻔했다. 미영

덜덜 떨며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만, 거기서. 죽고 싶지 않으면 거기서.”
 내가 얼굴을 험상궂게 한 다음 순간 시너통의 마개를 열며 라이터를 키는 시늉을

하자 미영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가만, 너, 거기 가만히 있어. 이 가게 홀라당 태우고 싶지 않으면 너 그 자리에

꼼짝말고 서 있어.”


 “정미야, 제발. 그 신나통 마개 좀 닫고 저리 치워. 이 가게는 내 생명이야. 내가

살아야 하는 최후 보루라고.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거 모두 말해 줄 테니 어서 그 라

터와 신나통 저리 치워. 응 ? 정미야.”

 미영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나에게 두 손을 싹싹 비러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럼, 너 이리와 앉아 봐.”
 내가 시너통 마개를 닫고 라이터를 내리자, 그제야 미영이 내 눈치를 보며 테이

블에 앉았다.


 “미영아, 제발 부탁이야. 진실로 말 좀 해줘. 너, 내 편지 어떻게 했니?”
 “정미야,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편지가 무슨 의미가 있니? 한때 불장난

한거라고 생각해. 제발 정미야.”


 나는 ‘불장난’이라는 말에 미영이의 뺨을 후려 갈겼다. 갑작스럽게 나에게 뺨을

맞은 미영이는 한참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년에게는 그 편지가 불장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냐. 어쩌면

내 인생이 지금의 이 상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너는 나를 배신했어. 나를

배신하고도 뻔뻔스럽게 만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어.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거니?”


 “......”
 “이 계집애야, 무슨 말 좀 해봐.”


 “정미야, 너 이제 와서 그 편지 내용에 대해서 왜 그리 궁금해 하는 거니?”
 “넌, 알 필요 없어. 넌, 내 인생에 있어서 방해꾼이야. 딴 소리하지 말고 그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고, 왜 나에게 전해 주지 않았는지 어서 말해. 어서.”
 미영이는 목이 탄타며 병맥주 한 병을 가져왔다.


 “자, 너도 마셔.”
 “필요 없어 계집애야. 수작부리지 말고 어서 내가 물은 말에 대답이나 해. 어서.”


 미영이는 순식간에 맥주 한 병을 비우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부였다.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뱃불이 어쩌면 불꽃처럼 살아왔을 미영이의 삶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미영이는 눈을 감고 무언가 고뇌하는 표정이었다.


 “정미야, 너 만약에 기성이의 진심을 알았다면 어떻게 할 거니? 지금의 네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홀아비 신세가 된 기성이에게 달려가기라도 할 거니?”
 “그렇게 하지 못할 것도 없지.”


 “뭐라고? 넌 과거와 현재의 괴리도 전혀 없는 애 같다. 20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

밤에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나 보구나?”
 “시끄러워. 어서 내가 물은 말에 대답이나 해.”


 “그래, 네가 어렵게 나를 찾아 왔으니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


 “그때, 나도 너 만큼이나 기성이를 좋아했었어. 그러나 네가 대놓고 기성이와 열애

빠진 것을 보고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는지 아니?”
 “뭐라고?”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기성이를 좋아하고 가슴앓이를 했을지도 몰라. 나는

밤마다 기성이에게 편지를 썼었으니까. 그러나 밤마다 편지를 쓰면서도 너 때문에

한 통도 붙이지 못했어. 그 당시엔 네가 내 인생에 훼방꾼이었어. 죽이고 싶도록

네가 미웠어.”


 “…….”
 “그런데, 너희 엄마는 나에게 기성이가 너한테 보내 온 편지를 전해주라고 했지.


 “울 엄마 욕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써있었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는지 어서 말해보라고.”
 나는 미영이를 계속 다그쳤다.


 “20년이 지난 현재 내가 십여 통이 넘는 편지 내용을 기억하라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난 녹음기가 아냐. 솔직히 그 내용이 무엇인지 가물가물해. 참, 한 가지

분명히 기억나는 게 있어. 너에게 보내는 연시(戀詩)인데 그 내용이 하도 좋아서

너 대신 내가 암기했지. 다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그 시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 지금도 가끔 그 시를 되뇌곤 하지. 비나 눈이 내리는 밤, 손님도 없을 때

나 혼자 술에 취해 그 시를 읊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지. 너, 한번 들어 볼래?”


 “그래, 그럼, 그 시라도 어서 읊어봐.”
 “그럼, 술이 있어야지.”
 미영이 일어나더니 맥주 두 병을 가져왔다.


 “권주가를 들으려면 술이 있어야지. 자, 받아. 술값은 안 받을 테니까. 내 뇌가

늘 알코올에 절어 있지만, 내 첫사랑 소년의 시는 영원히 잊지 못하지.”
 ‘뭐, 내 첫사랑? 아니 이년이 정말.’


 “좋아. 그 호의가 가상해 마셔주지. 어서 낭송해봐.”
 미영이 연거푸 맥주 세잔을 비우더니 잠시 명상에 잠기는 듯 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여!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도 나 때문이라면 좋겠습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사연과 저 초승달이 매양  슬픈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저 별과 달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년은 별바라기가 되거나 혹은 달바라기 되어 

   밤을 지새우다 바위가 되어도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대를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랍니다. 

   비록 세월이 흘러 한 점 티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대 이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미영이는 울먹이며 시를 읊었다. 비록 처음 들어 본 기성이의 시였지만 기성이가

시를 쓸 때 나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영이의

낭송에 나는 그만 분노의 마음이 눈 녹듯 사그라졌다.

 
 ‘아아, 기성씨. 이십 년 만에 당신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비록 당신의 눈물이

아롱진 편지는 아닐지라도 이제야 나를 향한 당신의 붉은 마음을 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이제 그대의 마음을 알았으니 내가 어떻게 답시(答詩)를 보내야 할까요?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합니다. 울고 싶습니다.’


 나는 맥주를 손수 따라 한 번에 마셔버렸다. 내가 우울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에 미영이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또 하나 생각나는 거 있어.”
 “…….”
 “기성이가 너에게 청혼하는 내용이었어.”


 ‘청혼?’
 “자세히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미영이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훅 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반사적

으로 핸드백에서 방금 전 피우다 남은 담배 한 가치를 빼물었다.


 “어머나? 너도 사회 물 좀 먹었나 보구나?”
 미영이 라이터를 키고 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캑-. 내가 담배 한 모금을 빨다 기침을 하고 가슴을 두드리자 미영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쳐댔다.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더구나. 세상에 아무도 모르게 먼 훗날을 약속하는 둘만의

약혼식을 올리자고. 그게 가당하기나 한 말일까? 너는 재수생 입장인데.”

 미영이는 분명 당시의 나와 기성이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만약 그 편지를 받았다면 나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둘 만의

약혼식을 올리고 몇 년 후 기성이 아내가 되어있을 테고, 혹은 운명의 장난으로 비

적인 결말을 보았을 수도 있을 테고.’


 내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분명 미진이가 이 근처

어디서 전화를 했을 것이다. 나는 얼른 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진아, 어디쯤이니? K시장에 내린 거야?”
 “여보, 나야. 나 미진이가 아니라고.”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목소리였다. 이 시각 나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지구 반대편에서 개미처럼 일만하고 있는 남편이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뭉쿨했다.


 “여보 저예요. 오랜만이네. 잘 있는 거지요?”
 “그럼, 보름 후에 서울에 들어가. 휴가냈어. 당신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그렇지. 나에게도 남자가 있었지. 바보같은 남자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호방한 웃음소리였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비로소

나에게도 남자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불쌍한 사람. 여편네는 첫사랑을 찾겠다고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데…….’
 남편과 통화를 끝내기 무섭게 미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미진아, 얼른와. 네가 내린데서 길 건너 골목으로 이십미터 쯤 들어오면 호프집

간판 보일거야. 얼른 와라.”


 미진이가 온다는 말에 미영이는 별로 반가운 낯빛이 아니었다. 나에게 ‘왜 쓸데없

이 동창 애들을 불렀느냐?’고 항의 하는 표정이 었다.


 나는 얼른 거울을 꺼내 대충 내 얼굴 상태를 살폈다. 빈속에 마신 맥주 때문에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립스틱을 꺼내 대충 바르고 방금 전까지 미영이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점잔을 빼고 앉았다. 내가 립스틱을 새로 바르자

미영이도 거울을 꺼내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야, 정미영. 이년아,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서 왜 연락을 끊고 사는 거야? 너 때

문에 정미하고 부산까지 갔다 왔잖아.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알아?”
 미진이가 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영이게 욕부터 해댔다. 


 “부산은 왜 간 건데?”

 “어머? 저년이 정말로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네. 뻔뻔스럽게도.”
 “미진아, 그만해. 미영이에게 다 들었어.”


 “그래? 20년 전 배달사고 났던 그 편지 내용을 다 알아 냈다고?”
 “그래, 미진아.  그러니 이젠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어제일 생각하면 저년 머리를 몽땅 뽑아버리고 싶어. 나쁜 년 같으니라고.”
 미진이는 씩씩거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우리는 만난 이유야 어떻든

간에 맥주를 박스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마셔대기 시작했다. 미영이에게서

더 이상의 편지에 대한 말은 없었다.


 미영이는 10년 전 이혼하고 홀로 전국을 떠돌며 술 장사를 해왔는데, 그 사이에

서너 명의 남자를 만나 정을 주었지만 하나같이 꿀맛을 본 뒤에는 종적을 감췄

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도 남자의 정에 목 말라하는 미영이의 태도에 분노심이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미영이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영이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시공을 초월한 나의 존재를 그려

보았다. 20년 전 나에게 연시와 청혼의 편지를 보내 놓고 아직까지 서운해 있을

기성이를 생각해 보았다. 첫날 기성이는 나와 다시 맺고 싶어서 현재의 처와

이혼을 했다고 했지만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결핍되었

거나 또 다른 말 못할 이유로 이혼을 해 놓고 나에게 그럴 듯 하게 말했을 것이다.

기성이의 20년 전 마음을 확인 했으니 나는 20년 만에 답장을 써야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남편을 생각해 보았다. 시아버님의

완고한 성정과 가정교육으로 남편은 한 눈도 팔지 못하고 일벌레처럼 오로지

가족을 위하여 일만하는 머슴 같았다. 결혼하고 15년 동안 늘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가 있어야 하는 처지라 부부의 금슬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생각해 나는 돈 한 푼 함부로 쓰지 못했다.

또한 친목회니 동창회는 하는 모임에 나가 본적도 없이 가정에서 여왕벌처럼

남편이 물어다 주는 먹이로 두 아이들만 지극 정성으로 교육시키는 것에

몰두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생활하다보니 가정 이외의 활동은 어색했다.


 가끔 기성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내가 싫어 나에게 연락조차 끊었는줄 알았다. 그런 그가 20년이

지난 어느 날 거짓말 처럼 내 앞에 나타나 옛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며칠이 나에게는 백 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경대 앞에 앉아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잔주름 하나 없는 뽀얀 내 얼굴이 마치 온실

에서 영양분 많은 장양분을 먹고 자란 백합 같았다.


 ‘남들도 나를 백합이라고 봐줄까?’
 거울속의 또 다른 나는 30대도 아니고 40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어중

간한 여인의 모습으로 비쳤다.


 일 년에 두세 번 찾아오는 남편은 나에게 가뭄에 단비였다. 제대로 부부관계

한번 맺어보지 못하고 이대로 나이만 먹어 간다면 무슨 흥미가 있을까? 하는 회

의가 자주 일곤 했다. 한때 ‘사랑과 전쟁’이라는 불륜을 그린 TV 프로그램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내가 만일 바람난 유부녀라면 드라마의 주인공들보다 더 불꽃

처럼 피어 날 수 있을 거라고 위험한 상상에 빠지다가도 혼자 씩 웃곤 했다.


 어떻게 기성이에게 20년 만에 뒤 늦은 답장을 써야할지 점점 고민이 깊어갔다.

그냥 미영이 말대로 불장난이라 치부해 버리고 기성이를 만나지 않으면 그 뿐이

다. 그러나 20년 동안 나를 원망했었을 기성이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했다.


 물론, 내가 고의적으로 답장을 안 보낸 것은 아니지만 미영이에게 편지의 내막을

들은 이후로 하루 종일 어떻게 멋진 답장을 기성이에게 보내야 할까 골몰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현재의 재미없는 남편하고 기성이를 비교해 보면 당연 모든 면에서 기성이가

월등하게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외모나 성격, 비록 20년 전이기는 하나 성적(性

的)인 면에서도 현재의 남편은 기성이의 적수가 못 될 것 같았다. 어쩌다 부부관계

를 가지면 맹물같이 본인 욕심만 채우고 여자에게 배려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목석

같은 남자였다. 시아버지를 판박이 한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며 늘 근엄한 자세

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나에게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같았다.


 그렇다고 가정을 뛰쳐나가서 20년 전 사랑의 불을 활활 지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에게 어떤 동기

가 부여되면 나는 불같이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하

게 처신하고 싶었다.


 밤이나 낮이나 나는 기성이와 남편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마음은 이미 기성이

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지만 자칫 나 스스로 불나비가 될 것 같아 함부로 다가

갈 수도 없었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미진이를 따라 동창회에 나간 것이 후회가 되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10일

전 쯤으로 후퇴하고 싶다. 밤이면 나는 독한 양주 잔을 만지작거리며 늦은 밤

까지 홀로 거실에 앉아 있기 일쑤였다.


 밤잠이 없어진 나의 행동을 두 아이들은 유심히 살피며 되도록 이면 나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한

내 지나간 20년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심연(深淵)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이 되고 창문에 희뿌옇게 여명이

밝아 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소량 복용해야 나는 그 나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보름후 남편이 귀국하면 나는 또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남편의 sex요구에 나는

로보트처럼 아무 저항없이 응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소설 '인형의 집'에서 처럼 나도 주인공 ‘노라’가 되어 볼까하는 불량한

상상도 해보았지만 차마 스스로 나갈 수 없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래, 내일 기성씨를 만나. 20년 전의 사랑을 확인해봐야겠어. 미영이 년이

말해준대로 아직도 나에 대한 미련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봐야겠어. 나는 사육

되는  돼지가 아니야. 맛있는 먹이를 잔뜩 갔다준다고 아무 생각없이 먹어대는

돼지가 아니란 말이야. 나도 여자이고 싶다고. 여자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고.

이렇게 집에 처박혀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유한 마담이 되어가는 바보

가 아니라고.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신물이 나. 나는 여자야. 피 끓는 여자라

고.’


 기성이에게 내일 오후 5시 쯤 종로에서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를 띄웠다. 새벽 3

시가 넘은 시각인데 5분도 안 돼 답신이 왔다. 

 ‘무엇 때문에 이 늦은 시각까지 잠을 안자고 있을까? 그도 이 밤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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