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엑스X(3)

* 창작공간/장편 - 엑스

by 여강 최재효 2008. 11. 26. 23:32

본문

 

 

 

 

                         

 

 

 

 

 

 

 

             엑스X(3)

 

 

                                                                                                                                                                  - 여강 최재효

 

 

 
 “정미야, 내가 너에게 알려준 정보가 신빙성이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간다고 미영이를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나에게 알려 준 미영이 관련 정보는 누구한테 얻은 거니?”


 “응, 그건 동창회 총무일 보는 태호가 알려준 거야. 그 애도 내가 부탁해 겨우 알아

건데 정확치가 않은 것 같애. 얘, 우리 그냥 대전쯤에서 내려 다시 서울로 돌아

가자. 괜히 헛걸음치지 말고, 응? 정미야.”


 나는 미영이가 부산 W동에서 ‘오륙도’라는 호프집을 운연하고 있다는 막연한 정보

가지고 미진이에게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게 한 뒤 함께 부산행 KTX에 올랐다.

창밖으로 전봇대며 철도변 건물들이 흭흭 지나갔다. 5월 초지만 온난화 현상으로

초여름처럼 무척 더웠다. 옆에 앉은 미진이는 자꾸만 정미에게 서울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는 못들은 체 하며 창밖만 응시했다.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 하나 가지고 부산가서 미영이를 찾는다는 것은 어쩜 한강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 찾기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몇 날

몇 달이 걸리리더라도 미영이를 꼭 찾아내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다졌다. 처음

타보는 KTX의 빠른 속도감에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기성이를 만난 뒤 부터 밤마다 찔끔찔끔 혼자 마신 술이 벌써 서너 병은 족히 될

것이다. 술을 마시다가 미영이를 생각하면 괘씸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아

이들은 생전 혼자 술을 마신 적이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심 무척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미영이를 찾는 것도 문제지만 막상 미영이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난감

했다. 만나자 마자 무턱대고 20년 전 기성이가 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왜 기성이의 편지를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느냐고 미영이의 머리채를

잡고 한바탕 싸움을 벌려야 하는지 얼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진이는 코를 골며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  열차는 동대구를 지나 남쪽으

로 거의 날아갈 듯 내 달렸다. 마치 정력이 가득한 거대한 물뱀이 수면 위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가는 부산이다. 아가씨 때는 마음에 맞는 친구 몇몇이 어울려

해운대해수욕장, 태종대, 자갈치시장, 용두공원, 영도다리 등 부산의 이름 이름난

곳을 찾기도 했다. 결혼이 뭐 길래 나의 젊음을 송두리 채 앗아가 버렸는지 가끔은

원통하다고 생각들 때가 있다가도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내가 괜한

망상에 빠졌구나’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부산역에 내리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평일이지만 부산역은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

음들로 몹시도 붐볐다. 우선 역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택시를 타

무작정 W동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시기사에게 행선지에 ‘오륙도’

호프집을 아느냐고 묻자 택시 기사는 껄껄 웃으면서 그런 이름은 부산에 수백 개

도 더 될 거라 했다. 택시기사의 웃음소리에 나는 낙담하고 말았다.


 “아저씨, 우리는 W동에 있다는 오륙도 호프집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아저씨가 한

번에 찾아주신다면 사례금도 드리고 올 때 이 택시 다시 부를게요. 호호호.”
 미진이가 택시기사에게 농을 걸었지만 택시기사는 백미러로 한번 흘깃 볼 뿐이었다.

부산의 택시 기사들은 모두 재미없을 것 같았다. 호프집은 보통 저녁 5시나 돼야 여

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 가면 두 여인이 어디 마땅히 들어갈 데도 없었다.

 
생각보다 W동은 상가 밀집 지역이었다. 명성에 걸맞게 대낮부터 많은 젊은 남녀들이

삼원색의 현란한 복장으로 거리를 누볐다. 이런 거리를 헤매며 오륙도를 찾는 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수반돼야 할 것 같았다. 미진이와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

을 붙잡고 오륙도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으며, 어떤 남자들은 음흉한 시선으로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찾다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W동의 유흥음식점을 관할 구청에 가서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진이와 해당 구청 위생과를 방문하여 W동에 있는 오륙도에 대하여 물어 보았

지만 사십 중반의 퉁퉁한 여자 담당공무원은 컴퓨터에 등록된 업소를 찾아보고 허

가대장을 뒤져보더니 그런 업소는 신고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주저앉을 뻔 했다. 그렇다면 미영이는 무허가 업소를 운영하거나 우

리가 틀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담당 공무원에게 ‘정미영’이란 이름으로 업주의 이름의 허가대장을 찾아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담당 직원은 W동에 정미영이란 호프집 여주인의 이름은 없

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찾아봐 달라고 사정하였지만 그런 업소와 업주 이름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런다면 우리가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크게 낙담한 우

리는 구청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진이 동창회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무야, 나 미진인데 네가 저번에 나에게 알려준 미영이 관련 정보가 안 맞는데

어찌 된거니? 나, 미영이 만나려고 지금 부산에 내려왔어. W동에 오륙도라는 호프

집이 없대. 구청 위생과들러 부탁해 보았지만 정미영이란 호프집 업주도 없다고 그

러는데 지금 네가 미영이하고 연락이 될 만한 애들한테 알아보고 빨리 전화 좀 줘.

일부러 부산에 내려왔는데 허탕치게 생겼어.”


 미진이는 화가 나는지 전화를 끊고도 씩씩대며 총무 이름을 불러가며 투덜댔다.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W동으로 향했다.


우리는 걸어 다니며 오륙도 호프집을 찾아 다녔다. 두 시간 이상을 걸어 헤매도

륙도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마땅히 쉴만한 장소

없어서 햄버거 가계에 들어가 억지로 햄버거 하나씩 먹고 다시 W동을 헤매고

다녔지만 오륙도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공중전화에 매달린 부산지역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오륙도라는 상호를 가진

업소 두 곳이 눈에 띄었다. H동과 B동에 각각 한 곳씩 있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얼

른 전화번호와 위치를 메모했다.


 “기사님, 여기서 H동과 B동중 어디가 가까운가요?”
 “H동이 가깝습니다.”


 “그럼, H동으로 가주세요.”
 “정미야, 또 허탕치는 거 아니니?”
 “그래도 가보자. 서울에서 내려와 그냥 돌아갈 수 없잖아.”


 “그런데, 총무 녀석은 왜 전화가 없는 거야.”
 “총무도 더 이상의 미영이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나보지 뭐?”
 내가 택시 안에서 두 업소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아직 영업을 개시

시간이 안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물어물어 오륙도라는 업소를 찾았지만 횟집이었다. 그만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B동으로 달렸다. 겨우 오륙도라는 호프집

을 발견하고 마치 집 나간 자식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러나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미진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래 총무야, 나 미진이야. 미영이에 대하여 뭣 좀 알아낸 게 있니?”
 나의 온 신경이 미진이의 입으로 쏠렸다. 미진이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

했다.


 “뭐라고? 미영이가 한 달 전 호프집을 그만 두었다고? 그럼, 시방 그 계집애는 어

있대?”
 나는 미진이의 통화를 엿듣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화가 났다. 아침부터 미영이를 찾자고 서둘러 내

려온 부산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니 너무

성질이 나 무엇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정미야, 어떻게 하니? 미영이년이 호프집을 그만 두고 서울 어딘가에 살고 있다

하는데.”
 ‘서울?’


 이런 경우를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겨

찾아 낸 오륙도를 두고 그냥 갈 수 없었다. 나는 미진이와 호프집 앞 인도에 멍

하니 앉아 호프집 주인이 오기만 기다렸다. 오후 5시 반 쯤 되자 40초반의 여인이

양손에 시장 봐온 물건을 들고 나타났다.


 여인은 자신의 가게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우리를 보더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

았다. 여인이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호프집으로 들어가 병맥주 두병을 주문했다.

아직 실내 청소도 하지 않은 상태 였지만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금방 맥주 2병을

해치웠다. 주인은 청소를 하면서도 우리를 흘끔 흘끔 쳐다보았다.


 “사장님, 몇 가지 여쭤봐도 되죠?”
 “네, 말씀하시이소.”


 “사장님은 여기서 영업하신지 얼마나 되었어요?”

 여주인은 ‘당신들이 그런 것을 알아서 뭣하게?’ 하는 눈빛이었다. 


 “한 오년 좀 넘었심더, 와 그라는데예?”
 뜸을 들이던 여주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오륙도라는 이름이 간판도 예쁘고 사장님도 상당히 미인이라 서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밤늦게 서울로 돌아오면서 미진이는 비상연락망을 펼쳐 놓고 초등학교 동창 애들

전부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미영이의 근황을 캤다. 대부분의 동창들은 미영이의

소식을 모른다고 했지만 영등포에 사는 미숙이란 동창이 미영이의 가장 최근의 소

식을 알려 주면서 절대 자신이 알려주었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고 했다.


 “정미야, 미영이년 찾았어.”
 “그래? 어디 있대?”
 “K시장 근처에서 호프집 한대.”


 ‘흥, 제 버릇 어디 가겠어?’
 “정확히 어디냐고 물어봐, 상호하고. 그리고 미영이 전화번호도 함께”


 부산서 허탕 친 것을 또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 미진이에게 시켜 다시 미숙이

에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 나는 미영이가 서울서 호프집을 운영한다는 말에 한편으

로는 쾌감을 느끼면서 미영이의 생활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여고시절부터 동창애들 중에서 유독 남성 편력이 심했던 미영이는 지금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못할 것 같았다. 미진이 다시 미숙이와 한참 통화를 했다.


 “정미야, 미영이년이 K시장이란 것만 말하고 정확히 안 알려준대. 동창애들 찾아

오는 거 달갑지 않게 생각한대나 ? 그래서 지년이 필요한 거 있으면 꼭 공중전화로

한 대.”

 
  “미진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 정도하자. 내가 내일 저녁에 K시장 근처를 찾

볼거야. 너도 내일 저녁에 시간되면 나하고 한 번 더 찾아보자.”


 “내가 회사일 끝나는 시간이 불규칙해서, 암튼 시간 나는 대로 너에게 전화할게.”
 부정확한 정보를 믿고 부산까지 갔다가 허탕 친 것이 너무 원통하고 억울했다. 

영이가 서울에 살고 있다니까 천만 다행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니 두 아이들

삐쳐있었다.


 다음날 저녁 6시쯤 나는 K시장으로 달려갔다. 시장이 사방팔방으로 길이 뚫려있

고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시장

과 시장 주변 상가를 이 잡듯 뒤졌다. 호프집이 몇 군데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지만

미영이는 없었다.


 ‘아아, 내가 또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헛걸음 하는 게 아닐까?’
 발바닥이 아팠다. 다리도 아프고 기운도 점점 빠지기 시작하여 나는 무턱대고 눈

 띄는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나는 호프집에 들어서면서 그만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미영이였다. 내가 그

리도 애타게 찾던 정미영이가 분명했다.


 “너, 너 정미영 맞지?”

 20년 전 보았던 미영이 분명했다.


 가름하고 예뻤던 모습은 간데없고 빠글빠글하게 파마한 머리가 마치 흑인들의

곱슬머리를 연상하게 했다. 얼굴은 퉁퉁하게 살이 올라 있으나 예전의 윤곽은 그

대로 있었다.


 “공주님이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물론 부산도 다녀왔을 테고.”

 미영이는 마치 내 행적을 손바닥 보듯 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는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미영이 너무 미워 뺨이라도 갈겨주고 싶었지만 속으로 꼭

참았다. 예전의 미영이가 아니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간의 세파에 꽤나 시달

린 듯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만약 내가 미영이를 보면 두들겨 패주겠다고 결심

했었다.

 

 미영이를 보는 순간 언젠가  TV에서 본 ‘선풍기 아줌마’가 생각났다. 그 선풍기

아줌마는 처녀시절에는 상당히 미인이었지만 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결국 스스

로 괴물이 되게 하였다. 


 이상했다. 미영이를 보면 내가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미영이에게 폭력을

휘두를까 걱정했었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하고 나는 테이블에 앉

병맥주를 달라고 했다.

 

 ‘미영아, 그동안 어떻게 지낸거니? 너 왜 이렇게 변한거야? 요즘 하는 일은 잘되

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가지각색의 욕들이 길게 늘어서서 주인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내가 부산을 다녀왔을 거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거

니?”

 미영이는 웃으면서 담배 한가치에 꺼내 불을 붙였다.


 “너도 한 대 피워라. 여기까지 올 정도면 나하고 일전(一戰)을 각오하고 왔을 텐데.

자, 한 대 피워봐.”

 미영이 내 코 앞에 담배 곽을 들이 밀었다.


 “아냐, 난 여태껏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어. 너나 많이 피워.”
 “피이-. 온실 안 화초가 다 그렇지 뭐.”


 ‘아니, 이년이 나를 뭘로 보는거야?’
 나는 나오는 욕을 억지로 참고 미영이에게 쓴 웃음을 보였다. 우선 마음을 진정

키고 싸움을 시작해야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퇴(白

不退)고, 부지피부지기(不知皮不知己)면 백전필패(白戰必敗)‘란 병법이 불현 듯

올랐다.


 “마님. 나에게 뭘 알고싶어서 오셨습니까?”

 "미영아, 지금부터 나는 너를 동창으로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

할테니 너도 나를 순수하게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그래 뭐든지 말해봐. 우리 귀여운 공주님.”
 “미영아, 너에게 딱 하나만 물어볼게. 제발 진심으로 답변해주면 좋겠어.”


 “…….”
 “20년전 내가 서울서 재수하고 있을 때 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어. 그건 나

너나 부인하지 못할거야. 그때 나에게 양심에 찔리는 일 한거 없었니?”
 “…….”


 미영이는 나의 직설적인 질문에 아무말 하지 못하고 담배 연기만 천정을 향해 뿜어

대고 있었다.


 “미영아, 뭐라고 대답 좀 해봐.”
 “…….“


 “얘, 미영아.”

 담배 꽁초를 재털이에 비비 꼬아 버리면서 미영이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내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길 바라는 거야?  도대체 왜 나를 괴롭히는거

니? 지난 20년 동안 너는 줄곧 나를 괴롭혀 왔어. 이제 나를 그만 괴롭혀. 정미야,

제발 부탁이야. 내 이렇게 빌게.“
 미영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에게 두 손을 싹싹 빌며 눈물까지 보였다.


 “미, 미영아.”
 갑자기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왜 이 시각에 이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지 분간이 안 갔다. 미영이는 한참 동안 바닥에 앉아 흐느꼈다.


 ‘그래, 이런 걸 두고 혹 떼러 왔다가 오히려 혹을 더 붙이고 간다고 하는 걸까?’
 “야, 이 계집애야. 너 연극하지마. 그 당시 네가 했던 이야기만 해.”
 빈속에 맥주를 마신 나의속은 평소의 내 속이 아니었다. 


 “정미야, 너 왜 이래? 난 너에게 별로 해줄말이 없어. 네가 요즘 나를 찾아 다닌다는

말을 동창애들에게 들었을 뿐이야. 너에게 특별히 해 줄말은 없어. 정말이야.”
 “이년아, 너 끝까지 나를 속일거야?”


 나는 반쯤 딸다 남은 맥주 병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병이 깨지면서 수백 조각의 파

편이 사방 팔방으로 튀었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미영이 혼백백산하면서

충격을  받은 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미야, 난 정말이야. 너에게 미안 해 하거나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한게 없다고

생각해. 정말이야.”
 “너 계속 이럴거야?”


 나는 더 이상 분을 삭일 수 없어 테이블을 미영이 쪽으로 엎어 버렸다. 늘 나를

수줍은 소녀로만 보아왔던 미영이에게는 분명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미영이는

나의 단호하고 격정적인 태도에 더 이상 진실을 왜곡했다가는 어떤 불길한 결과

가 초래될 지 모를 것 이라 판단 했는지, 테이블을 다시 세우고 닦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정미야, 너 오늘 나에게서 무엇을 얻고싶은거니?”
 “너 정말로 몰라서 그런거야?”


 “…….”
 “20년 전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전해주라고 너에게 맡긴 기성이 편지 어떻게 했

어? 어떻게 했냐고?”


 나는 내가 지금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 누구에게 소리를 질러 본적이 없었다. 나의

분노에 찬 모습을 본, 방금 까지도 뻔뻔스럽던 미영이 아무도 없는 가계의 좌우를

살피며 다시 담배 한 가치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정미야, 인생이란 참으로 미묘하지? 왜 내가 너하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

에 태어나 한 남자를 두고 연적(戀敵)이 되었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지만 그 때는 그애가 내 생명과도 같았었어. 물론 너에게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뭐, 생명?”
 “그래.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내 생명.”


 ‘아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나도 여자, 미영이도 여자. 다만 기성이만 남

였지. 그래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권리는 있는거야.'


 “미영아, 마직막으로 부탁하마 내말 빙빙 돌리지 말고. 그때 우리 엄마가 나에게

전해주라고 너에게 준  기성이 편지를 어떻게 했어. 빨리 그 대답부터 말해.”
 “너 정말 웃긴다. 20년이 지난 일인데 이제와서 그 편지가 있다 한들 뭘 어쩌게?”


 “내말에 똑바로 대답만해줘으면 좋겠어.”
 “바보같은 년. 네년만 기성이를 좋아했는줄 알아? 나도 너 이상으로 기성이를 좋

아했어. 학교 다닐 땐 기성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너무 뜨거웠었다고. 바보같

은 년아, 착각하지마.


 “너, 이년 죽고싶어?”

 "그래 어쩔건데?"


 나는 미영이가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게 너무 미워 참을 수가 없었다. 미영이

호프집을 나와서 나는 ‘어떻게 하면 미영이 입에서 진실이 나올 수 있게 할까’하는

묘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아무리 묘책을 생각해 내도 뾰족한 방법이 떠 오르지 않

았다. 근처 수퍼에 들려 담배와 라이터를 사고 페인트 가게에서 신나 한통을 구입

했다.


 대학 다닐 때 오빠와 남학생들이 담배를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쪽쪽 빨아대는 모

습을 보고 나는 몰래 담배 한곽을 사서 피워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담

한 모금 빨고 기침만 해댔었다. 그런 담배를 나는 20년만에 내 손으로 돈을 주

고 답배를 샀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까봐 으슷한 골목을 찾았다.


 ‘허참, 요즘 담배가 모두 이렇게 맹물같은가? 그래, 내 지나간 20년의 잃어버린

세월이 이런 맛이 었을거야. 내 욕망을 철저히 잠재우고 오로지 재미없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내 욕구를 잠재운 거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의미한 시간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도 않지 두 아

이들이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그러나 남편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비참해. 일년에

10개월을 독수공방하는 여인이 이 땅에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밍밍한 물처럼 흐른 내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담배 세가치를 으슥한

골목 길에 앉아 캑캑대며 피우고 나서 나는 신나 한 통을 들고 미영이 호프집으로

향했다.

 

 



 


 

                                                                                            - 계속 -

 

 

 

 

 

 

 

 

 

 

 

 

 

 

 

 

 

 

 

 

 

 

 

 

 

 

 

 

 

 

 

 

<

'* 창작공간 > 장편 - 엑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엑스X(6)  (0) 2008.12.04
엑스X(5)  (0) 2008.12.02
엑스X(4)  (0) 2008.11.28
엑스X(2)  (0) 2008.11.24
엑스X(1)  (0) 2008.11.23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