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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소래에 서다(1)

* 창작공간/단편 - 비류, 소래에 서다

by 여강 최재효 2020. 10. 7. 22:22

본문

 

 

 

                  기원전 19년 가을, 소서노(召西弩)는 두 아들 비류, 온조 그리고 십제(十濟)와

                  어하라국 백성 2만여 명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인천 남동구 소래 지역에 도착

                  한다. 소서노는 모두 부아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지만 비류는 소래 지

                  역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 한다. 토착 세력인 기존의 마한(馬韓)은 두 형제의

                  나라 건국을 방해하지만, 결국 형제는 나라를 건설한다. 두 나라 건국 후부터

                  형제간 비극이 시작되는데…….

 

 

 

 

 

 

 

                                       비류, 소래에 서다

 

                                                                                                                                      - 여강 최재효

 

                                               1

 

 조물주는 형제에게 동질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질성(異質性)은 문자적 의미로 본다면 부정, 반대, 불합리, 비협조라는 유추를 연상케 한다. 모든 사물의 성정이 같다면 그것은 창조주가 의도한 바가 아닐 것이다. 음이 있으면 양(陽)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으며, 물이 있으면 불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야 비로소 삼라가 존재할 수 있다. 만상(萬象)의 면면을 세밀히 살펴보면 같은 것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에게는 부언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가끔은 이질적인 존재들도 역경이나 고난에 처하였을 때 의기투합하는 예가 있기는 하다.

 

형제를 따르는 어하라(於瑕羅) 지역 백성들은 발해와 황해를 건너 마한의 소래에 도착하였지만, 석 달째 포구 근처에서 발이 묶인 상태였다. 형제를 따르는 백성의 수가 대략 이만 명이었다.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의 위임을 받아 사실상 어하라의 군주 역할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어하라 백성들을 남삼한 땅으로 이주시키는 일에 그다지 반가워한 편은 아니었다.

 

어하라를 떠나면서 가져온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몰려든 이방인으로 인하여 소래 지역은 북새통으로 다소 혼란스러웠다. 이만 명이 먹고 마시며, 거주하는 임시 공간이 생겨나면서 가설 시장이 들어서고 마한 전역에서 소문을 듣고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소래는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우체모탁국(優体牟涿國)에 포함되는 영역이었다. 우체모탁국은 산동반도를 통해 소래로 들어온 동이(東夷)들이 세운 나라였다. 조선이 고열가 단군 때 진(秦)에게 멸망하면서 *삼한관경제로 운영되던 조선 제국이 사분오열 되어 많은 유민이 남삼한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때 산동반도에 모국(牟國) 이외에 여러 동이의 소국들이 있었다. 산동 지역 북쪽에서 제(齊)나라가, 남쪽에서는 노(魯)나라가 동이의 소국들을 정벌하거나 압박하였다. 두 나라의 침략을 견디지 못한 동이들이 바다를 건넜다.

 

* 삼한관경제 – 조선은 진한(辰韓-만주 지역)), 마한(馬韓-한반도), 번한(番韓-북경 지역) 등으로 분할되어 진한은 대단군이 다스렸고, 마한과 번한은 부단군이 다스렸다. 이때를 북삼한 시대라고도 한다.

 

“비류 형님, 우리가 소래에 도착하여 움직이지 않자 백성들이 동요하는 듯합니다. 속히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아우야, 어머니와 십제(十濟)하고 *욱리하를 거슬러 오르며 나라를 세울 마땅한 지역을 살펴보지 않았느냐? 어머니와 신하들은 *부아악과 위례를 꼽고 있지만, 나는 이곳 소래가 마음에 든다. 나는 장차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나의 뜻을 펼칠 것이다. 땅에 소금기가 좀 있기는 하지만 장차 해양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곳이 적합한 지역이다.”

 

비류와 온조는 장차 진출할 지역의 선정을 두고 벌써 석 달째 갈등을 겪고 있었다. 답답하기는 형제뿐만 아니라 어머니 소서노(召西弩)와 십제도 마찬가지였다. 비류만 고집을 접으면 만사가 술술 풀릴 듯도 한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백성들까지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비류(沸流)는 동생 온조가 자신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류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라면 온조는 외향적이며, 달변으로 주변에 늘 무리가 모여들었다. 어머니와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이 혼인하여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비류는 주몽왕에 이어 고구려를 이끌어 후계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주몽은 졸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동부여에서 예씨(禮氏)와 혼인한 상태였으며,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주몽의 친자(親子)라는 유리(琉璃)와 주몽의 전처 예씨가 나타나면서 비류와 온조의 운명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주몽왕은 유리를 공식적으로 고구려의 태자로 삼으면서 비류 형제는 설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비류의 제의로 소서노와 형제는 졸본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옛 번한(番韓) 지역의 어하라로 이주하였다. 모자는 어하라에서 땅을 개간하고 염전을 일구었다. 소서노는 이웃 나라들과 소금과 철(鐵) 등을 거래하면서 거금을 벌어들였다.

 

 

그녀가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주몽에게 통보하자 그는 기뻐하며, 소서노에게 ‘어하라’라는 왕의 칭호를 내리고 고구려의 *노객(奴客)으로 삼았다. 주몽이 붕어하고 나면서 어하라국의 사정은 달라졌다. 한나라의 거센 압박과 고구려 유리왕의 내정 간섭이 날로 심해졌다.

 

 

* 욱리하 – 욱리하(郁里河)는 현재의 한강의 명칭, 고구려는 아리수(阿利水)라 불렀다.

* 부아악 – 부아악(負兒岳)은 현재 북한산

* 노객 – 고구려의 재상에 해당하는 관직

 

 

“형님, 우리 형제를 믿고 따라온 신하와 백성들은 바닷가가 아닌 아늑하고 물이 풍부하며 땅이 비옥한 내륙 지역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형님과 다녀온 부아악 일대가 저는 마음에 듭니다. 저와 백성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시지요. 이곳 소래는 농사짓기에는 적합한 토질이 아닙니다.”

 

“아우야, 남삼한이 들어 있는 한반도는 너무 비좁은 지역이다. 반도의 서쪽은 마한 54개국이 마치 벌집처럼 들어서서 복닥거리며 사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가 살길은 대륙과 열도 그리고 반도를 잇는 해양 강국 건설뿐이다.

지금은 우리 형제가 고구려 유리왕(琉璃王)과 한나라 세력에 쫓겨 우체모탁국의 작은 포구에 거주하고 있지만, 우리 형제는 장자 나라를 세워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 아우가 농업 국가를 경영하고 싶다면 백성을 양분하여 동쪽으로 진출하거라. 나는 이곳에 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해양 국가를 만들 작정이다.”

 

소래라는 지명은 비류와 온조 형제가 어하라 백성들을 이끌고 오기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불리는 명칭이었다. 춘추오패 중 하나인 제환공(齊桓公)이 집권하면서 제나라는 주변 소국을 정벌하거나 강제로 복속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국력이 점차 약화하여 전국7웅(戰國七雄)의 이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진(秦)나라가 본격적으로 대륙 통일 전쟁에 나서면서 번한(番韓) 즉, 조선이 멸망하였다.

 

이때 요서와 산동 지역에 널리 퍼져 살던 동이의 분파인 우이, 화이, 서이, 거이, 풍이(風夷), 내이(萊夷) 등이 탈출을 모색하다가 한반도 중심부로 대거 이주하였다. 또한, *소국(蘇國)을 다스리던 풍이의 후손 중 소백손(蘇伯孫)이 소국의 신하들과 백성들을 인솔하여 대거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소래를 통해 들어왔다. 소국의 백성들과 그들을 이끌던 소씨들은 한반도 중부를 가로질러 동남부로 진출하여 진한 연맹의 소국들을 세웠다. 소국의 소씨들과 내이족이 들어온 연유로 마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소래(蘇萊)라고 불렀다.

 

“형님, 그 옛날 동이의 영화는 조선이 망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옛 역사를 잊고 저와 한반도의 중앙에 나라를 건국하고 대륙에서 접은 꿈을 펼쳐봅시다. 형님이 왕이 되고 이 아우가 형님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어머니도 저와 같은 생각이십니다.”

 

온조는 비류가 자꾸만 알 수 없는 논리를 펴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비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많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먼 장래를 생각하면 비류의 주장이 합당했다.

 

“아우야, 당장의 평안함을 추구하면 안 된다. 우리는 대륙으로 건너가 단군께서 다스리던 지역을 회복해야 한다. 고구려가 조선의 고토(故土) 회복을 위해 다물(多勿)을 외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구나. 우리 대(代)에서 못하면 다음 대에서 하고 다음 대에서 못하면 또 그다음 대에서 하면 되는 것이다. 조상의 땅을 포기하고 나 혼자만 편안하게 살 수는 없다. 나는 반도의 왕보다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제국의 통치자가 되고 싶구나.”

 

* 소국 – 현재 중국 길림성 지역

 

형제가 고구려와 어하라에 있을 때는 여러 면에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각자의 장래를 놓고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절망감을 안겨 줄 수도 있었다. 고구려와 어하라에서부터 소서노와 비류 형제를 보필하던 십제인 오간, 마려, 을음, 해루(解婁), 조성, 전섭(全攝), 곽충, 한세기, 범창, 흘간 등도 형제의 의견 충돌에 난감한 입장이었다.

 

 

십제 중 부여 출신인 해루는 비류의 오른팔 노릇을 하며, 충성을 다했다. 그는 비류의 속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십제도 형제의 결단이 장기화하자 두 파로 나뉘어 설전을 이어가기도 했다. 소서노와 비류, 온조 그리고 십제가 자리를 함께하였다.

 

“비류 왕자님, 저를 비롯한 십제는 형제 분의 의견을 충분히 수긍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동요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고 한곳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판단합니다. 소신은 온조 왕자님의 의견에 따라서 욱리하 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일이 장차 한반도에서 강국이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저희와 함께 욱리하로 가셔서 새 나라를 여소서.”

늘 눈치만 보고 있던 전섭이 비류에게 고했다.

 

“신, 한세기 아룁니다. 비류 왕자님의 웅지(雄志)대로 장차 해양 제국을 건설할 요량이라면 지금의 이곳 소래 미추홀(彌鄒忽)이 적당합니다. 그러나 당장은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의식주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역을 정해 나라를 세우는 일이 시급합니다.”

한세기는 비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대놓고 온조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신, 오간(烏干) 감히 세 분께 아뢰옵니다. 이만 명의 백성들이 고구려에서 어하라로 이주하였고, 다시 바다를 건너 천신만고 끝에 이곳 마한의 소래에 도착하였습니다. 소신이 여러 차례 소래산에 올라 주변 일대를 살펴보았고, 살 만한 곳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소래산 남쪽은 들녘으로 오곡이 충분히 자랄 수 있습니다. 다만, 땅에 염분이 포함되어 있어 대풍(大豐)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만조(滿潮) 때에는 농작물이 심각한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소래산 북동쪽 지역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을 수는 있지만, 이미 우체모탁국 백성들이 경작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을 정벌하든지 아니면 목지국의 진왕(辰王)에게 협상하여 매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오간의 말에 비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소서노와 온조 그리고 일부 십제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간의 말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신, 흘간도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식량입니다. 한 달 정도면 어하라를 출발할 때 가지고 온 식량이 바닥날 것 같습니다. 추위가 닥치기 전에 겨우내 소요될 양식을 구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또한, 소신은 당장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욱리하 하북의 부아악이 좋고, 장차 해양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곳 소래도 나쁜 위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정은 빨리할수록 좋습니다.”

 

흘간(屹干)은 졸본부여 사람으로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의 수족 역할을 했다. 주몽 왕이 비류 대신 유리를 고구려의 태자로 세우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하다가 감옥까지 다녀온 경력이 있기도 했다.

 

“신, 곽충(郭忠) 아룁니다. 두 분 왕자님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하라에서 함께 온 신하와 이만의 백성을 양분하여 각각 나라를 세우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다를 선호하여 고기잡이를 원하는 사람들은 비류 왕자님을 따르고, 산이나 강을 좋아하는 부류들은 온조 왕자님을 따르면 될 것 같습니다.”

 

곽충은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자 양분론(兩分論)을 들고 나왔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소래에서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서노와 온조는 마음속으로 이미 욱리하 하류의 하북 땅 부아악을 도읍지로 정하기로 굳힌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곽충이 백성들을 둘로 나누자는 의견이 나오자 신하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십제는 온조가 점찍어 놓은 부아악 쪽에 마음을 두는 눈치였다. 소래에 남기를 원하는 신하나 백성을 추린다면 몇 명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곽충 대신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소신은 곽충 대신의 의견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백성들이 쏠리면 안 됩니다. 하여, 백성들을 반반 나누어 비류 왕자님께 일만, 온조 왕자님에게도 일만의 백성이 분배돼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세가 크면 작은 쪽은 불평과 불만을 품게 되옵니다. 어차피 두 나라가 건국 된다고 하여도 모두 소서노 어하라 님의 나라이오니, 양국의 세력도 균등해야 합니다.”

 

전섭이 곽충을 지원하고 나섰다. 소서노는 묵묵히 십제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녀는 십제 중 그녀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해루를 노려보며 무언의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해루는 그녀와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소서노를 향해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우리가 어하라를 떠나기 전에 비류 왕자님은 어하라를 통치하신 경험이 있습니다. 어하라는 해양 국가로 바다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하였습니다.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생산하여 한나라와 고구려 등 이웃 나라에 매매하여 많은 이문(利文)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두 분 왕자님의 뜻이 분명하니 더는 소모적인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즉시, 백성을 양분하여 온조 왕자님은 부아악으로 떠나시고, 비류 왕자님은 이곳 소래를 도읍지로 삼고 나라를 세우는 길이 최적의 묘안인 줄로 아옵니다.”

 

해루의 의견에 십제는 만족한 듯 했다. 소서노는 십제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열 명 중 두세 명이 반대한다면 나중에 후환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사전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안은 해결해야 했다. 잠시 침묵이 좌중을 지배하는 듯했는데 눈치 빠른 마려(馬藜)와 을음(乙音)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소서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가만히 앉아 만 있을 수 없었다.

 

“소신들은 해루 대신의 의견에 두손 들어 환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곳 소래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그동안 소신들은 소래 그리고 욱리하 인근 지역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비류 왕자님께서는 이곳에 나라를 세우시고, 온조 왕자님께서는 부아악에 나라를 건국하시어 형제 분의 나라가 서로 돕고 발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체모탁국의 *신지(臣智)와 험측(險側)이 어찌 나올지는 더 두고 볼 일입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근다면 지나가는 강아지가 웃을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천 명의 막강한 군대가 있습니다. 또한, 비정규인 젊은 백성들까지 병장기를 쥐어주면 이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한을 다스리는 목지국은 군사가 별로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소서노는 미소를 지었고 비류와 온조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십제의 뜻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조성과 범창이 좌중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신지 - 왕이 없는 남삼한 마한, 진한, 변한의 지배자에 대한 호칭 중 하나이다. 각 나라의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견지(遣支)·읍차(邑借)로 불렸다.

 

“신, 범창(笵昌)과 조성(趙成)도 마려와 을음 대신의 뜻과 같습니다.”

 

열 명의 신하 중 한세기, 오간, 흘간은 대체로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나머지 일곱 명의 십제는 백성들을 나누어 두 왕자에게 배속하는 것을 원했다. 그것은 소서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당초에 두 아들과 모든 신료 그리고 백성들과 부아악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비류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소서노는 십제의 의견처럼 일단 비류와 온조가 각자 나라를 세우고 나라의 발전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며, 어하라의 여왕으로서, 그리고 비류와 온조 왕자의 친모(親母)로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비류는 이곳 소래에 나라를 건설하고, 온조는 부아악에 나라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십년 후에 내가 직접 두 나라를 평가하여 월등히 뛰어난 문물과 제도 그리고 백성들 삶의 질 등을 비교하여 열등한 나라는 우수한 나라에 통합시킬 것입니다.”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의 명령에 감히 이의를 달 수 없었다. 형제가 어머니 소서노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석 달을 끌어온 두 왕자 간의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비류와 온조 형제는 각각 백성 일만 명 씩 나누어 통솔하기로 했다. 그 일만 명에는 군대와 남녀 비율을 균등하게 조정하여 포함했다.

 

옛 번한 지역에는 나이 많은 어하라 백성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소서노는 일단 군대를 포함 젊은 백성 이만 명을 선별하여 소래 지역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우체모탁국의 신지와 목지국의 진왕은 온조가 일만의 백성을 인솔하여 욱리하를 건너 하북(河北)의 부아악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받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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