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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비(終)

* 창작공간/중편 - 부의 비

by 여강 최재효 2019. 7. 3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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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父)의 비(妃)






                                                                                                                                                          - 여강 최재효



                                   終



 원나라 연경에서 칩거 생활을 하던 폐위된 전 고려왕 왕장은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원나라 황실의 유력한 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면

서 한편으로는 이름 있는 문사(文士)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무료한 세

월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연경에 사는 그의 비(妃) 보탑실련은 그녀의 친정 진왕부(晉王府)

에서 두문불출하며 왕장하고는 공식적인 행사 이외에는 일절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경에 머문 지 1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숙창원비는 고려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왕의 제2비로 있는 정화원

비(貞和院妃)는 이미 나이가 많아 왕의 눈에 들지 못하고 별채에 기거하

는 불쌍한 신세였다. 그녀는 죽은 제1비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이전에는 왕거와 금슬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제1비의 감시와 질투로 40여 년 가까이 왕과 떨어져 지

내야 했다. 숙창원에는 조정의 중신들뿐만 아니라 중신의 부인들과 벼슬

을 원하는 시정잡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숙창원비는 재물 창

고에는 날로 쌓여만 가는 금은보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친정 오라비인 첨의시랑찬성사 김문연의 집에도

역시 고려 전역에서 몰려든 파락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집 창고 10여 동(棟)에는 각종 곡식과 값비싼 재화(財貨)로 넘쳐났고 장

롱 속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그에게 재물을 바치는 자에게는 미관말직이라도 제수되었다. 김문연은

고려에서 왕 이외에는 누구도 두려워할 자가 없었다. 개경의 모든 사람이

김문연과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어 하였다. 그는 날로 거만해져서 조정의

재추(宰樞)도 우습게 보았다. 


 “전하, 장작에 불을 붙이다 말고 잠이 드셨습니다. 소첩, 이 길고 긴 밤

을 어찌하라고요. 매일 같이 보약을 드시고 정력에 좋은 온갖 것을 드셨

는데도 부실하시니 소첩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원비야, 과인이 무척 피곤하구나.”


 늙은 왕은 돌아눕자 곧 코를 골았다. 그의 평생은 주색으로 점철된 황음

(荒淫)으로 굴곡진 한심한 역사였다. 왕이 아무리 몸에 좋다는 보약을 들

여도 좀처럼 정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숙창원비는 늙은 몸뚱이 옆에 누워

탄식을 토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나의 하해와 같은 육신의 욕망을 누가 시원하게 채워줄까? 전하는 이제

틀렸어. 방사를 가지면 뭘 하나. 일을 치르기도 전에 양물이 사그라지니.

아, 왕장, 당신, 지금 어디서 무얼 하시나요? 그날 첫 정사는 너무 짜릿했

습니다. 소첩은 죽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소첩이 수십 명의 사내를 대했지만, 당신 같은 절륜한 야생마

(野生馬)는 처음이었습니다. 소첩과 약속하셨죠? 십 년 안으로 저에게 다

시 오시겠다고요. 어언 십 년 세월이 아무런 의미 없이 흐르고 있답니다.

어서 오셔서 밤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소첩의 육신을 어떻게 좀 해주

셔요.’


 왕은 이미 60 중반이 훨씬 넘어 사내구실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한창나

이의 숙창원비는 채워지지 않는 정욕의 불꽃을 부정을 저지르며 피우기

보다 재물을 긁어모으고 사치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김씨 남매가 권력

의 맛에 취해 있을 때 대륙에서 이상한 조짐이 감지되고 있었다. 


 원나라 티무르(鐵木耳) 황제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여가고 있었다. 황

제의 건강이 악화하자 황실에 암운이 드리웠다. 티무르 황제에게 아들이

없었다. 티무르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황후 브르간(卜鲁罕)은 야망

이 있는 원나라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황제의 종제(從弟)인 안서

왕 아난다(阿難達)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의 방계 인척의 즉위로 기득권을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원

나라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황후와 아난다를 살해하였다. 귀족들은

멀리 몽골 고원에 나가 변방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죽은 황제의 조카

카이산(海山)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다.


 고려왕에서 폐위된 왕장(王璋)은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를 지

지하였고, 고려왕 왕거는 아난다를 지지하고 있었다. 부자지간의 운명

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왕장은 새로운 원나라 황제 카이산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경에

머물고 있던 그의 비(妃) 보탑실련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어 있다가 그만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원나라 황제는 그에게 충렬왕(忠㤠王)이란 시호를 내렸고, 고려 조정은

경효대왕(景孝大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왕장은 죽은 부왕과 자신

을 이간질했던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참살(斬殺)하였다.


 “전하, 복위를 감축드립니다.”


 “오, 숙창원비. 오랜만이오.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구려. 아

니요. 그대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더욱 예뻐졌소. 과인은 연경에 십여 년

간 있으면서도 늘 그대 생각만 하고 있었소. 정말로 반갑구려.”


 지아비 왕거가 붕어한 뒤로 친정에 갔던 숙창원비는 왕이 즉위하는 날

잠시 인사차 대전에 들렀다. 좌우에 중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옥좌에서 내려와 숙창원비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였다. 중신들은 눈살

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전하, 소첩에게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은 암흑의 시기였답니다. 이제

소첩의 어두운 시기가 끝난 것인지요? 소첩에게는 하루가 여삼추 같았

습니다. 매일 밤 전하의 복위를 위하여 소첩은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

명께 빌고 또 빌었답니다. 이리 전하를 뵈니 소첩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숙창원비는 비단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왕은 울고 있는 숙창

원비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오늘

따라 더욱 요염했다. 왕은 주위에 중신들이 없다면 그녀를 꼭 껴안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이제 원비의 우울한 인생은 가고 밝은 날이 이어질 겁

니다. 그동안 늙은 몸뚱이를 받아내느라 고생하시었습니다.”


 왕과 숙창원비는 곁에 중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큰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중신들은 가살스러운 숙창원비의 행동에 기가 막

혔지만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전하, 여기는 신성한 대전입니다.”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숙창원비는 선대왕의 미망인일 뿐

입니다. 숙창원비를 멀리하시고 선대왕의 제2비이신 정화원비(貞和院

妃)를 대비로 맞이하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소서.”


 중신들은 왕의 행동에 일침을 가하였다. 그러나 왕은 중신들의 말을

묵살하였다.


 “그대가 지금 오라비 김문연의 사가에 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인

이 오늘 밤 찬성사(贊成事)의 집으로 갈 테니 기다려 주시구려.”


 왕은 숙창원비가 앵돌아질까 봐 왕이라는 체통도 잊은 채 설설 기다시

피 하였다. 왕은 행여 중신들이 자신과 숙창원비 사이를 흥글방망이놀

까 무척 걱정하는 눈치였다. 중신들은 왕의 빙충맞은 행동에 기가 막혔

다.


 “전하, 소첩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숙창원비는 왕에게 대비(大妃)가 되는 지위에 있었지만 여러 중신이

있는 가운데에도 소첩이라고 하였다.


 “앞으로 숙창원비 때문에 조정에 분란이 일게 생겼구려.”
 “저 요물(妖物)을 절대로 궁궐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충렬대왕은 저 여인에게 정기를 모두 빼앗겨 일찍 훙서하셨습니다.”
 “새로운 왕과 원비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하오. 이거 큰일 났구려.”


 “우리 중신들이 저 요녀(妖女)를 왕과 만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신들은 숙창원비 김씨가 물러난 뒤에도 삼삼오오 모이면 그녀의 궁궐

출입을 막을 방도를 숙의하였으나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왕은 이미 마음이 숙창원비 김씨에게 가 있었다. 만월대에 땅

거미가 내려앉을 때쯤 왕은 내관을 불렀다.


 “지금 즉시, 숙창원비가 기거하고 있는 찬성사 김문연의 집으로 갈 것

이다. 시끄럽지 않게 채비하렷다.”


 “전하, 오늘 밤은 의비(懿妃) 마마님 처소로 드실 순서입니다.”
 왕에게는 현재 보탑실련과 원나라 출신 의비(懿妃), 고려인 정비(靜妃)

 왕씨, 순화원비 홍씨(洪氏) 그리고 최근에 맞이한 궁인이 있었다.


 “오늘은 과인이 궁밖에 긴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알려라. 의비에게는

나중에 천천히 가마.”


 왕은 개경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김문연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문연의

집은 대궐처럼 으리으리했다. 왕도 저택의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

였다. 궁에서 미리 기별을 넣어 김문연의 집은 부산했다.


 김문연은 그의 처에게 별채를 깨끗하게 단장하고 비단 금침을 깔아 놓

으라고 언질을 주었다. 젊은 아낙들과 동자미치들이 연신 주방을 들락

거리며 정신이 없는 듯 했다.


 “마마님, 좋으시겠어요? 전하께서 사가에 인사까지 오시니.”


 궁에 있을 때부터 늘 숙창원비 김씨의 수발을 들던 이상궁이 숙창원비

의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녀는 왕이 밤에 사가를 방문한다는 의미

를 잘 알지 못했다.


 숙창원비는 대비의 신분이니 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왕이 온다면 당연

히 왕비들이 함께 갈 거로 생각했다. 어떻든 왕이 밤에 사가에 온다는 뜻

은 사가에서 밤을 새우고 간다는 뜻으로 왕을 밤새 모실 여인이 있어야

했다. 


 ‘아, 오늘은 진정으로 사내를 맞이하는 것인가? 십 년 가뭄에 대우를

만나는 기쁨을 맛봐야 하는데……. 그리고 전하께서 나에게 무슨 선물

을 주시려나. 나는 나이가 많지 않다. 아직 수태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여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전하가 오늘 밤 나를 찾는 이유는 단순히 술을 마시려고 오시는 게 아

닐 터. 오늘 나의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거야. 지금까지의 화려했던

생활을 이어가려면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지. 왕의 마음을 홀리지

못하면 내일 나는 비참한 아침을 맞이해야 할 거야.’


 숙창원비가 경대 속의 입술 붉은 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생

각에 잠겼다. 늙은 지아비가 훙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

아비의 친자(親子)를 또 지아비로 맞아야 하는 그녀의 마음속이 무척

복잡했다. 그녀는 눈 한번 질끈 감고 지난 일들은 한낱 신기루일 뿐이

라고 스스로 치부하였다.


 “마마님, 왜요? 전하께서 오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요?”
 “이상궁은 내가 만일 붕어한 선대왕에 이어 새로운 전하의 후비(后妃)

가 된다면 어떻게 볼 거야?”


 “어머나, 망측스러워라. 어찌 한 몸으로 부자를 모실 수 있어요?”


 ‘평범한 여인들이 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을까? 너는 평생 윗전의 수

발이나 들어야 할 처지로구나. 타고 가던 말이 병들었으면 당연히 갈

아타야지. 말을 타던 고고한 습성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야.’


 숙창원비는 지아비가 죽은 후에 대비(大妃)로 대소신료들과 왕실 종

친들로부터 대우를 받으며 궁궐에 있어야 하지만 젊은 나이에 왕보다

어린 대비로 있는 것이 쑥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10년 전 왕과 얼떨

결에 가진 첫 정사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때 왕과 했던 언약을 굳게

믿고 있었다.


 “마마,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김문연이 여동생인 숙창원비에게 왕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왕가의 법

도 상 명색이 대비인지라 왕이 된 아들이 방문한다고 함부로 집 밖에 나

가 맞을 수는 없었다. 집 밖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금방 왕이 숙창원비

가 들어있는 별채로 들었다.  


 “전하, 어서 오시어요. 소첩, 눈이 빠지는 줄 알았사옵니다.”
 “낮에 잠시 그대를 보고 나서 과인의 목이 십 리는 더 늘어났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10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지난 10년 세월 동안 무수

한 일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오롯이 10년 전 처음 만

났을 때의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황홀감만 남아있었다. 


 “원비, 보고 싶었소. 지난 십 년은 나의 인생에 가장 암흑 같은 시기

였소. 나는 연경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첫 정사를 잊을 수 없었소. 그 노

인네가 쓸데없이 명줄이 길어 그대와 과인의 만남이 지연되었습니다.

진작 죽었어야 할 늙다리였습니다.”


 왕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숙창원비를 꼭 끌어안았다. 어찌나 우악스

럽게 안는지 숙창원비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전하, 약속을 지키셨어요. 십 년 전 저를 처음 안아주실 때 한 약속을

소첩은 잠시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제 소첩을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셔요. 지난 십 년은 소첩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어두운 세월이었답니다.


 이제 소첩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뼈만 앙상하고 비린내 나는 늙은

이의 품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답니다. 미워요. 전하께서

연경으로 떠나시고 삼사 년 지나면 자객을 보내서라도 그 늙은이의 명줄

을 끊어놓을 줄 알았답니다.”


 숙창원비는 왕의 품을 파고들며 아양을 떨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서는 차마 나와서는 안 되는 말들이 쏟아졌다. 왕은 금방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춘심이 발동하였다. 숙창원비가 촛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별채는 금방 열기로 휩싸였다. 눈치 없는 이상궁과 숙창원비 오라비가

하인들에게 산해진미를 산처럼 쌓아 올린 교자상과 술을 들게 하고 앞장

서서 별채로 들었다. 


 “여봐라. 잠시 멈추어라. 너희들은 다시 부를 때까지 안채에서 대기하

고 있거라.”


 김문연이 불 꺼진 별채를 살며시 둘러보았다. 그가 별채 가까이 다가갔

을 때 내실에서 젊은 남녀의 끈끈한 음성이 뒤섞인 채 조용히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얼른 되돌아 나왔다. 


 “찬성사(贊成事) 어른 왜요? 전하와 마마님께서 시장하실 텐데요.”
 “이상궁, 별채에 불이 꺼졌지 않소.”
 “거참, 이상하네. 전하께서 조금 전에 별채로 드셨는데.

왜 컴컴하지?”
 “상궁이 되어서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물러났다 다시 듭시다.” 


 서너 식경이 지나서 별채로 산해진미가 차려진 상이 들어갔다. 별채 밖

에서는 무장한 내관과 김문연 그리고 이상궁이 밤새 번(番)을 섰고 왕과

숙창원비는 밤새 산해진미를 들며 감주를 마셔댔다. 두 사람만의 향연

은 새벽닭이 울 때쯤 끝이 났다. 


 “찬성사 어른, 전하를 어느 방으로 모셔야 하죠?”
 “아니, 이상궁 정말로 궁궐에서 수년간 상궁을 지낸 거 맞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


 “나와 이상궁 그리고 대전 내관들은 내일 전하와 원비 마마께서 기침하

실 때까지 두 눈 부릅뜨고 하늘에서 별이 별채로 떨어지는지 아니면 봉황

이나 황룡이 날아들지는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아셨습니까?”
 김문연이 눈치코치 없는 이상궁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전하께서, 전하께서 대비마마와 동침을……. 아, 안 되는데. 보탑

실련 왕비님께서 아시면 난, 난 죽은 목숨이야. 그러나 어쩌나, 전하와 원

비 마마께서 함께 주무시는데 들어가 깨울 수도 없으니. 참으로 알 수 없

는 것이 남녀의 연분이로구나.’


 장시간 폭풍우가 휘몰아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정적 속에 여인의 비음

(鼻音)이 길게 여운을 남기고 방안에 가득했다. 왕도 오랜만에 몸속에 가

득했던 욕망의 덩어리들을 모두 잘게 부수어 흩뿌린 느낌이었다. 10여 년

전 조비(趙妃)를 원나라에 보내기 전에 자주 느꼈던 희열이었고 니르바나

였다.


 왕은 평온한 상태에서 지금쯤 대륙 어딘가 있을 조비를 떠올렸다. 왕은

미끈한 숙창원비의 육신을 끌어안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왕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자 숙창원비는 왕의 품을 파고들며 왕의 춘심을 건

드렸다.


 또 한 번의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결전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치러졌다.

간간이 참지 못하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원비의 묘음(妙音)이 이상궁과

김문연의 오감을 자극하였다. 김문연은 자주 헛기침을 하며 어서 날이 밝

기를 고대하였다.


 “숙창원비에게 숙비(淑妃) 첩지를 내리고, 과인의 후비에 봉한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선대왕의 비는 대비가 되옵니다. 어머니인 대비를

그 아들이 다시 비로 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짐승들

이나 하는 짓이옵니다.” 


 청천 벽력같은 왕의 발표에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많고 많은 여인

중에 하필이면 부왕인 충렬왕의 후비를 그의 아들이 비(妃)로 들인다니

개경사람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왕의 조치에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숙비의 미모는 막 피어나 아침 이슬을 머금은 연꽃 같았다. 중신들의 거

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은 아버지의 비(妃)였던 숙창원비 김씨에게 숙비

의 첩지를 거두지 않았다. 숙비는 충렬왕에 이어 그의 아들인 고려왕 왕장

(王璋)의 후비가 되었다.      


 “전하, 아들이 아비의 비를 또다시 비로 삼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처사

이옵니다. 당장 김씨 녀에게 내린 숙비(淑妃) 첩지를 거두시고 숙비를 궁

에서 내치십시오. 이는 차마 일국의 지존이 할 일이 아니옵니다.”


 조정에서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재직하고 있던 양광도 단양 사람 역동

(易東) 우탁(禹倬)은 흰옷을 입고 대전 앞에 엎드려 고했다. 그의 곁에는

날이 시퍼런 커다란 도끼가 놓여 있었다. 우탁의 충정 어린 지부상소(持

斧上訴)에도 왕은 숙비의 첩지를 거두지 않았다. 이에 우탁은 벼슬을 버리

고 낙향하였다.


 “전하, 소첩은 전하를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전하의 하해와 같

은 성은(聖恩)을 어찌 다 갚아야 할까요?” “숙비는 늘 과인의 곁에만 있

으면 된답니다. 잠시라도 숙비가 보이지 않으면 과인은 불안합니다.”


 “전하, 염려 마시어요. 소첩은 전하가 계시는 곳 그 어디라도 늘 함께할

것입니다. 먼 훗날 전하께서 천경(泉扃)에 드시더라도 소첩은 마땅히 함

께할 것이며, 지옥이든 극락이든 소첩은 영원히 전하 곁에 있을 것입니

다. 소첩은 전하께서 소첩을 내칠까 걱정입니다.”


 “고맙소, 과인이 진정한 선인(仙人)을 만난듯 합니다.”


 왕은 보탑실련, 정비, 의비, 한 궁인이 있었지만 오로지 숙비의 처소만

드나들었다. 숙비는 점차 안하무인이 되어 갔다. 궁궐 내에서 그녀의 오만

한 행동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왕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개경 저잣거리에도 숙비의 오빠 김

문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있었지만, 그 역시 숙비의 권세에 묻히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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