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父)의 비(妃)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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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왕은 이미 김양감의 여식이 고려 최고의 미색이라는 풍문을 듣
고 있는 터라 오늘 밤 안으로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김씨 녀가 나타나지 않자 그는 부러 측근 중 성질이 난폭한
송방영을 대전으로 내려보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그냥 넘기면 김씨 녀를 취하지 못할 거란 불안한
예감이 태상왕의 머리를 스쳤다. 태상왕은 아들의 여성 편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놈이 제 애비에게 보낼 여인을 미리 간품해보나? 고얀 놈이로다. 지
금이 이경(二更)이 넘은 시각인데 늙은 애비를 이리 지루하게 만든단 말
인고. 하기야, 그놈도 여인 후리는데 이골이 났을 테지. 애비에게 바친다
는 여인은 어찌 소식이 없는고. 과인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구나.’
태상왕은 계속 헛기침을 해대며 조속히 김씨 녀가 들기만을 바랐다. 대
전의 임시 침전을 훔쳐보던 나인들이 침전을 향해 몇 번이나 아뢰었지만,
안으로부터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왕이 여인과 동침하고
있는 침전을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전하, 태상왕전에서 사람이 나왔사온데 어서 김씨 녀를 태상왕전으
로 들이라는 분부입니다.”
젊은 내관이 큰소리로 침전 안을 향해 고했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
다. 송방영이 일부러 침전 가까이 다가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태상왕전에서 나왔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 김씨 녀를 눈이 빠
지게 기다리고 계시다. 전하께서 김씨 녀를 오늘 밤 안으로 보낸다고 약
속하셨는데 어찌 된 일인가?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신가.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다.”
송방영이 막무가내로 침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나인들과 내관
들이 달라붙어 그를 말렸다.
“나리, 그게, 그게 좀 그리되었습니다.”
대전 내관이 말을 더듬었다. 내관들도 지금 상태에서 송방영을 밀막을
방도가 없었다.
“뭐가 그리되었다는 게야? 오랜만에 부자지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전하께서 노력하신다는 것을 태상왕 전하께서 아시고 무척
기뻐하고 계시오. 어서, 전하께서 오늘 밤 안으로 태상왕전으로 들이겠다
고 약속한 김씨 녀를 내어 주시오.
태상왕 전하께서 김씨 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
라고 하셨소. 어서, 김씨 녀를 인계하시오. 태상왕 전하 성질이 급하고 자
발없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소. 초저녁에 김씨 녀가 궁에 들었다는 것을
태상왕 전하께서도 다 알고 있소이다.
너무 늦으면 태상왕께서 경을 칠 것이오. 내가 지금 남의 물건을 소드락
질하러 온 게 아니지 않소. 한시가 급하오.”
태상왕의 명을 받고 달려온 송방영(宋邦英)이 대전의 상황을 거니채고
또 한 번 다급한 듯 소리쳤다. 꺽지게 생긴 그의 모습을 보고 내관과 나인
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홑진 성정이면서도 안하무인이며 더펄이인
그의 성질을 잘못 건드리면 주먹을 휘두르기로 유명한 송방영이었다.
내관과 나인들은 왕이 부왕에게 화해의 조건으로 바칠 여인을 먼저 탐
하고 있는 상황을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내관 중에서 나이
든 내관이 송방영을 잡고 사정하였다.
“알겠소. 알았으니 밖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김씨 녀는 이미 와 있습
니다. 지금 대전에서 전하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 김씨
녀에게 태상왕 전하를 모시기 전에 몇 가지 일러둘 말이 있어서 그런 것
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제가 얼른 들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관이 송방영의 성질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왕은
대전 앞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전하, 태상왕전하께서 김씨 녀를 빨리 들이라는 분부이옵니다. 속히
조처하셔야 하옵니다.”
내관이 침전 문을 약간 열고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한번 태상왕전의
전갈을 알렸다.
‘노인네가 잠도 안 자고 기다린다고? 이를 어찌하나 중신들도 다 알
고 있는 일이니, 잘못하면 과인이 부왕에게 바칠 여인을 빼돌렸다고 비
난을 받게 생겼구나. 그렇지만 오랜만에 과인과 궁합이 딱 맞는 여인을
발견하였도다. 좋다, 일단 부왕에게 보내고 나중을 기약해야겠다.’
“미안하구나. 너는 지금 즉시 태상왕에게 가야 할 것 같구나.”
왕이 잠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면서 땀에 젖은 김씨 녀를 내려다보았
다. 본인이 진작 김씨 녀를 불러 살펴보지 못하고 덜컥 부왕에게 보내겠
다는 약속부터 한 것에 속이 쓰렸다.
“전하. 소녀는 이미 전하의 침첩(寢妾)이 되었사온데, 어떻게 태상왕
전하께 갈 수 있습니까? 소녀가 어디 부족한 데가 있어서 내치시는 것입
니까? 소녀, 오늘 밤에는 전하만 모시고 싶습니다.”
김씨 녀가 왕에게 안겨 왔다.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그녀의 이마를
왕이 비단 손수건을 들어 닦아주었다. 몽고 공주 보탑실련과 야속진 그리
고 다른 고려 출신 후비(后妃)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짜릿함이 김씨 녀
의 온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왕은 후회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를 태상왕에게 보내는 과인의 마음이 그 옛날 한나라 원제(元帝)가 왕
소군(王昭君)을 흉노왕 호한야(呼韓邪)에게 보내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부
왕은 이미 예순이 넘었다. 길어야 십 년이다. 그 안에 노인네가 저승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다. 잠시만 기다리면 과인이 반드시 너를 다시
취할 것이다. 과인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왕은 오랫동안 손아귀에 있던 파랑새가 창공으로 날아가는 것만 같아
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잠시의 운우지정이었지만 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정을 나눈 사이 같았다.
“전하,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소녀는 이 순간 이후부터 전하의 품
에 다시 안길 때까지 일심으로 전하만 생각하겠습니다.”
왕은 흐느끼는 김씨 녀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길고 긴 비음(鼻音)이
침전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한 식경이 지나고 나서 김씨
녀는 태상왕전으로 향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멀리 송악산으
로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감추며 떨어지고 만월대 뒷산에서 귀촉도(歸
蜀道)가 서럽게 각혈하고 있었다.
“태상왕 전하를 뵙습니다. 소녀 위열공(威烈公) 김취려의 증손녀이고
전 위위윤을 지낸 김양감의 여식입니다. 전하의 부름을 받고 이 밤에
달려왔나이다. 소녀는 이미 출가한 몸이 옵니다. 그러나 지아비가 급서
하는 바람에 혼자 사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삼경(三更)이 조금 지난 시각에 태상왕전에 한 미인이 나타났다. 그녀
가 날아갈 듯 태상왕에게 절을 하자 왕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
게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더니 황촛불을 가져와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태상왕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깊은 신
음을 토해냈다. 김씨 녀의 눈두덩이 약간 부어 있었다.
“오, 과연, 과연 김취려의 손녀로다. 김양감이 여식 하나는 제대로 만들
었구나. 너를 과인과 인연을 맺게 하려고 네 지아비 최문이 일찍 저승에
들었나 보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과인 앞에 나타났느냐?
과인이 그동안 무척 적적하고 외로웠느니라. 잘 왔다. 참말로 잘 왔어.
하늘에서 강림한 항아도 너의 미모를 보면 질투할 것이다. 너 같은 귀물
(貴物)이 어찌 일개 진사(進士)와 몸을 섞었단 말이냐. 말이 안 될 소리
다. 그놈이 더 빨리 죽었어야 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감히 과인의 여인이 될 가인을 가로챘었다니. 그놈,
아주 잘 죽었다. 저승 가서도 천벌을 받은 게야. 암, 진작 죽었어야 할 놈
이다. 망할 놈 같으니.”
태상왕은 죽은 최문을 한참 동안 욕을 하고 나서 침이 마르도록 김씨
녀를 칭찬하였다. 오랫동안 자신의 수발을 들던 총비 시무비가 비명횡사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김씨 녀를 보자 태상왕은 첫눈에 반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태상왕 전하, 늦었지만 이렇게 전하께 왔으니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마셔요. 소녀가 정성을 다하여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오냐, 오냐.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과인의 목이 십 리나 나왔구나.”
“전하, 소녀가 전하께 술 한 잔 올리겠나이다.”
김씨 녀가 태상왕의 금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철철 넘쳐도 태상왕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잔이 넘치자 김씨
녀가 술잔을 날름 자신의 입술에 댔다. 김씨 녀가 술을 입에 한 모금 물
고 태상왕 곁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젊은 왕에게 눈물을 보이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한 요녀
(妖女)가 예순이 넘은 태상왕의 뼈만 앙상한 가슴팍에 안겼다. 그녀의
입술이 늙은 태상왕의 입술에 닿자 그녀는 따뜻하게 덥혀진 술을 태상왕
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오, 새로운 주법(酒法)이로구나. 술맛이 기가 막히다. 내가 늘그막에
호사하게 생겼구나. 시무비가 갑자기 절명하는 바람에 과인의 가슴에
큰 상처가 남았는데 네가 속히 과인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려무나.”
태상왕은 김씨 녀를 앙상한 무릎에 앉히고 그녀의 풍덕한 육신을 어루
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태상왕의 희떠운 소리가 이어졌다.
“태상왕 전하, 염려 마시어요, 소녀, 정성을 다하여 태상왕 전하를 모
시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소녀를 예뻐해 주셔야 해요.”
김씨 녀는 태상왕에게 비나리쳤다.
“과인이 너에게 숙창원(淑昌院)을 하사해야겠구나. 태상궁 옆에 있는
작은 전각인데 사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정원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이
란다. 그곳은 주인이 없이 오래 방치되었었다. 당장 새롭게 단장해서 너
에게 하사할 테니 그곳에서 기거하도록 해라. 그럼, 이제부터 너를 숙창
원비라 불러야겠다.”
파격적인 일이었다. 궁궐에 엄연히 법도가 있음에도 태상왕은 김씨 녀
를 보자마자 비(妃)에 봉하였다. 중신들의 반발은 안중에도 없었다. 새롭
게 주안상이 들어왔다. 태상왕은 이미 김씨녀 숙창원비에게 마음을 빼앗
겨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들어 줄 것만 같았다.
늦은 밤에 악사(樂士)들이 태상왕전으로 불려갔고 태상왕의 측근들도
몰려들었다. 태상왕에게 정확한 시간관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뜨면 낮이고 잠자리에 있으면 밤이었다. 태상왕전에 있는 나인들과 내관
그리고 태상왕 측근들의 생태(生態)도 태상왕 왕거와 같았다.
세월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태상왕은 온종일 숙창원비 무릎을 베
고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에게 원나라 출신 공주 보탑실련이 제1비였다. 그녀는 안하무인이
었다. 왕장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였지만 그녀는 늘 왕
장을 우습게 보았다. 그러한 왕비의 태도에 왕과 비는 자주 말다툼을
해야 했다. 왕에게는 즉위하기 이전에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왕은 3명 중에 특별히 조비(趙妃)를 총애하였다. 그의 아비는 사도시
중참지광정원사 조인규였다. 보탑실련이 뒤늦게 왕과 혼인하고도 제1
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친정 위상 때문이었다. 그녀는 원나라
황제의 질녀(姪女)이며, 아버지는 황제의 형으로 진왕 카말라(甘麻剌)였
다.
그녀가 왕과 혼인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자 마음이 급했다.
왕자를 생산해야 고려 왕실에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부동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왕과 보탑실련 사이는 갈수록 점점 더 소원해졌다. 이에
보탑실련은 원나라 황태후에게 편지를 보내 왕이 자신을 구박하고 조비
만을 위해준다고 하였다.
이때 왕은 은근히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추구하여 원나라 황제의 경계
를 받고 있었다. 보탑실련은 음모를 꾸며 조비를 음해하기로 마음을 먹
고 사재감 소속의 종7품 주부 윤언주(尹彦周)를 시켜 벽서를 써서 만월
궁 주변과 개경 저잣거리에 붙이도록 하였다.
[조비의 어머니가 지존이 조비만 총애하도록 무당을 시켜 왕비를 무
고(巫蠱)한다.]
“전하, 기회가 왔습니다. 전하께서 고려왕으로 복위하실 수 있습니다.”
호군(護軍) 송균이 태상왕에게 아뢰었다.
“어찌하면 내가 고려왕에 다시 앉을 수 있단 말이오?”
“전하, 이리하시면 어떨지요?”
송균이 태상왕 왕거에게 속살거렸다. 왕거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
서 손뼉을 쳐댔다. 개경의 친원파들은 벽서사건이 터지자 자신들을
핍박해온 조비의 아버지 조인규를 제거하고 조비까지 쫓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코자 하였다.
왕비 보탑실련은 또 조비무고사건의 전말을 적은 편지를 원나라 황태
후에게 보냈다. 가뜩이나 원나라 황실의 눈 밖에 나 있던 왕은 원나라
황태후와 황제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고려를 포함한 원제국의 제후국 왕의 임면은 원 황제의 권한이었다.
조비무고사건이 원나라에까지 보고되자 원나라 조정 중신들은 두 파
로 갈라져 고려왕의 폐위를 두고 자주 설전을 벌였다.
이때 고려 태상왕 왕거가 원나라 태후에게 밀서를 보냈다. 밀서의
내용은 지금의 고려왕이 실정을 거듭하니 조속히 폐위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원나라 황실은 왕거의 밀서를 받고 한참 망설였다.
결국, 원나라 황제는 고려왕 왕장을 고려왕에서 폐하고 태상왕 왕거
를 다시 고려왕에 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원나라 사신들이
황제의 칙서를 들고 고려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왕 왕장, 이지리부카를 고려의 왕위에서 폐하고 대신 그의 아비
태상왕 왕거(王昛)를 고려의 왕에 복위시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원제국의 일개 제후국인 고려로
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고려왕 왕장은 눈물을 뿌렸고 태상왕 왕거와
그의 측근들은 춤을 추었다. 태상왕전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태상왕의 측근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왕과 태상왕 사이를 기웃거리
던 간신배들까지 모두 모여들었다. 숙창원비는 가장 화려한 비단옷
을 입고 태상왕전에 나타났다. 태상왕전에 모여 있던 중신들은 그녀
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탄성을 질러댔다.
“태상왕 전하, 소첩 전하의 복위를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고빗
사위를 잘 넘기시고 뜻을 이루셨사옵니다.”
숙창원비가 태상왕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살거렸다.
“모두가 숙창원비가 과인을 위하고 염려해준 덕분이니라. 이제 혹
덩어리가 사라졌으니 나와 천년만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자
꾸나.”
“전하, 소첩은 죽을 때까지 전하를 모실 것입니다. 죽어 저승에 가
더라도 전하를 그리워하며 일부종사(一婦從事)할 것이옵니다. 왕장
이 고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셔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과인은 원비가 없으면 단 하루라도 살 수
없을 것 같구나. 나중에 과인이 죽으면 원비도 함께 저승으로 갈 테
냐?”
“전하, 당연합지요. 소첩은 전하의 것이옵니다. 주인이 가는데 당연
히 따라가야지요. 염려하지 마셔요.”
태상왕은 숙창원비 김씨를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 앙상한 노구(老軀)
에도 불구하고 왕은 여인의 실팍한 육덕을 쓸어내렸다.
“태상왕 전하, 숙창원비 마마, 두 분의 무운장구를 비옵니다. 고려의
억조창생은 두 분의 미소에 웃고, 눈 찡그림에 고개를 숙이나이다. 신
들은 오늘 같은 경사가 곧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나이다.”
야지랑스러운 송균이 달콤한 말로 왕 부처에게 아부하였다. 이에 질세
라 간신들은 앞다투어 왕 부처에게 온갖 감언(甘言)으로 자신들의 존재
를 알리려고 혈안이 되었다.
음주가무가 태상왕전 뿐만 아니라 왕실 곳곳에서도 밤이 새는 줄 모르
고 이어졌다. 왕실 종친들은 왕장의 반원정책과 혁신정책에 은근히 반기
를 들고 있었다. 곰상스러운 왕실 종친들과 고려왕 왕장 사이에 동기간
의 의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왕실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도 왕장
에게 속으로 강하게 반대하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다시 고려의 왕위를 되찾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부
왕을 지지했던 놈들을 모조리 박살 낼 것이야. 어디 두고 보자.”
왕장은 이를 갈았다. 보탑실련은 왕을 혼내주고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계획이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 나자 크게 당황하였다. 그녀와
폐위된 왕장은 원나라 연경으로 돌아갔다. 왕장에게는 고려보다 원
나라가 편했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였고 원나라 황실의 일족으로 고려보다 원나
라에서 더 우대를 받았다. 사가(私家)의 과부에서 하루아침에 왕비의
자리에 앉게 된 숙창원비 김씨는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있었다. 그녀의
오라비 김문연은 서른 살에 정2품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에
제수되고 그의 가문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