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격황소서(2)

* 창작공간/중편 - 격황소서

by 여강 최재효 2018. 10. 14. 22:33

본문












                                                                 

                                                                  고운 최치원 선생 존영








                                  격황소서



                                                                                                                                                                 - 여강 최재효



                                                                                     2





 9세기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대격변의 시기였다. 안록산과 사사명의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유행처럼 봉기하는 반란군과 군벌들의 대립

그리고 환관들의 전횡(專橫)은 200년 역사의 당나라를 마침내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8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신라 왕조 역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지는 길목으로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했다.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 후손

이 왕위를 계승해 오면서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배타적인 골품제도로 200여년 넘게 6두품 이하

관리들의 불만을 쌓이게 하였다.


 신라는 귀족들의 권력투쟁으로 지배 체제가 흔들리면서 전국에서 도

적 떼와 농민의 반란이 횡행했다. 오랜 동안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은 헐벗고 역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등 민심이 날

로 흉흉해졌다.


 836년 오달지지 못한 김응렴(金膺廉)이 신라 제48대 왕으로 재위하

면서부터 신라의 국운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왕은 중앙의

귀족 모반과 지방으로 내려간 귀족과 지방 세력들의 반란을 평정하기에

힘썼으나, 완벽하게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


 6두품인 최견일(崔肩逸)은 신라가 건국될 무렵 6촌 중 하나인 돌산 고허

촌(高墟村)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

라벌 사량부(沙梁部)에 살고 있던 그는 귀족 측에는 들지 못했지만 득난

(得難)이라 불리는 6두품의 신분으로 대대로 관직 생활을 해온 세신(世臣)

이기도 하였다. 그는 원성왕(元聖王)의 넋을 비는 원찰(願刹)인 숭복사(崇

福寺) 재건에 관여하기도 했다.


 숭복사는 선덕왕 이전에 파진찬(波珍飡) 벼슬을 하던 김원량(金元良)

서라벌 외곽에 창건하였다. 이 절은 본래 ‘곡사(鵠寺)’라 하였는데, 원성왕

이 붕어하자  이곳에 그의 능을 만들고 절의 위치를 지금의 장소로 옮겨

숭복사라 하였다. 이때 견일이 절을 새로이 짓는데 관여하여 큰 공을 세

우고 한동안 사찰을 관리하였다.


 857년 헌안왕(憲安王) 1년 최견일은 둘째 아들을 얻었다. 그는 장자(長子)

인 현준(賢俊)이 최씨 가문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하였으나, 현준문필(文

筆)에 그다지 재주를 보여주지 못해 견일의 속을 태웠다. 그러던 차에 차남

이 태어나자 견일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빛낼 아들이라며, 내심 기대하

는 바가 컸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최씨 부인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견일만삭

의 부인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견일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거대한 짐

승이 부인을 물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견일은 그 괴물이

 ‘일알령’이란 산에 자주 출몰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수하들과 산으로 달려

갔다. 그는 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에 구멍이 나 있는 것

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 굴속에서 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견일은 굴속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넓은 골짜기가 보이고 숲이 무성하였

다. 사방에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피어 있었으며, 아름다운 새들이 날

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견일은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굴 안으로 더 깊

이 들어가 보았다.


 “아, 여기는 신선의 세계가 틀림없다.”
 주위의 경치에 홀린 견일은 계속해서 굴속을 걸으며, 부인의 행적을 찾았

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10여리 쯤 더 걸어갔을 때 화려한 저택이 나

타났다.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가 온통 금빛이었고 기둥은 붉은 색이었으며, 

정원에는 나무들이 있는데 가지에는 처음 보는 과일이 탐스럽게 달려 있었

다. 


 견일은 숨을 죽이며 저택 안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거대한 황빛 돼

지가 웬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고, 그 여인의 주위에는 선녀이 근

심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견일이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은

바로 그록 애타게 찾던 자신의 부인이었다. 황금돼지는 천년을 산 요물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하기도 하였다.


 ‘아, 서방님이 나를 찾아 오셨구나. 그러나 이 괴물이 나의 무릎을 고 있

으니 어찌 피해야 한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와 태중의 아기뿐만

아니라 서방님 목숨까지 위태로운 수 있다.’


 견일 역시 잠든 돼지를 깨우면 부인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심하였다. 견일은 부인을 보며 애를 태웠다. 그때 수하 중 한명

이 견일에게 속삭였다.


 “돼지는 사슴을 무서워합니다. 마침 제 허리끈이 사슴가죽으로 들어 졌

으니 이것을 부인께 던져 잠든 돼지 입안으로 쑤셔 넣으라 하십시오. 가죽

끈이 입안으로 들어가면 녹으며 돼지의 기도(氣道)를 막을 것입니다.”


 견일은 수하가 건넨 사슴가죽 끈을 부인에게 건네고 손짓으로 돼지 목구

으로 집어넣으라고 하였다. 견일의 부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슴가죽 끈을 돼지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대한 황금 돼지는 잠을 자면

서도 부인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사슴 가죽 끈을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꽤액-,하는 소리와 함께 돼지가 발버둥 치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견일은

무사히 부인을 집으로 데리고 왔고 얼마 후에 옥동자를 낳았다. 견일은 부

인이 돼지와 잠을 잤다는 괴소문이 나자 아기를 바다에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극진히 보살피는

게 아닌가.


 “여보, 그 아기는 하늘이 내린 아이입니다. 버리시면 천벌을 받습니다.

어서 데리고 오십시오.”
 “미안하오. 빨리 아기를 찾아보리다.”


 부인은 울면서 견일에게 하소연 하였다. 견일도 뒤늦게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하인들을 풀어 아기를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다. 며칠헤매고

찾아 다녔지만 아기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견일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아기를 버린 바닷가를 다시 찾아가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린 아이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앗, 이 소리는 분명 내 아들이 글을 읽는 소리렷다.” 
 “나으리, 저 바다에 있는 바위섬에서 소리가 들립니다요.”
 “어서, 아기를 안고 나와라.”


 하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갔을 때 이상한 노파가 나타나 을 꾸

짖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엄숙하던지 견일은 범상한 노파가 아니

라고 생각하여 얼른 자리에서 엎드렸다.


 “저 아이는 북두칠성 중 네번째 별인 문창성(文昌星)의 화신인 것을

버리려 하였더냐? 하늘이 최씨 집안에 고귀한 인연을 맺게 주선하였느니

라. 그 아이는 삼한뿐만 아니라 만국(萬國)에 그 문명(文名)이 창대할지니

귀히 여기라. 황금돼지는 심상(尋常)한 영물이 아니니라.”


 “소인이 몰라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견일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하였다고 빌었다. 한참 있다가 견일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보려고 하였는데 노파가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견일은 아기가 문창성의 화신이라는 말에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

며, 수 없이 절을 하였다.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견일은 아기의 이름을

치원(致遠)이라 지었다.


 치원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다. 일람첩기(一覽輒記)란 말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무슨 책이든 한번 읽으면 모두 기억하였다. 10살도 안 되

어 어른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하여 스승뿐만 아

니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치원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글씨를 잘 쓰기로 이미 평판이 자자하였다.

스승도 치원의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이해하는 신동(神童)이 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


 최견일은 아들을 가르칠 다른 스승을 찾아 다녔다. 서라벌에서 제법 이름

난 선생들도 치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고는 모두 고사하였다. 명민한

아들을 보며 견일은 여러달을 두고 고민하다 결심을 하였다. 그는 전라도

옥구(沃溝) 지역의 지현사(知縣事)로 있었다.


 그는 비록 변방 지방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으나 진골이 아닌 이상 더 이

상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음에 절망하였다. 견일은 영특한 아들 치원의 앞

날이 걱정되었다. 아들이 아무리 영특하다고 하나 벼슬 길에 나가면 6두품

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직책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밖에 오를 수 없

었다.


 견일은 골품제에 묶여 더 이상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귀족 중심의 배타적

이고 이상한 신라 조정의 제에 좌절하였다. 또한 득난인 6두품 관등에

오르기 위해서는 배경있어야 했다.


 ‘치원이를 당나라로 보내야 겠어. 아들에게 나의 전철(前轍)을 밟게 할 수

는 없는 노릇이야. 신라에서는 아들이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좌절하

고 방황하게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왕권에 도전하려는 진골세력들에게

이용만 당할 수 있어.’ 


 신라 조정에서는 매년 견당유학생(遣唐儒學生)을 뽑는 시험을 치렀다. 선

발은 상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하는데 신라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

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전액 국비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제도였기 때문경쟁

이 무척 치열하였다. 당나라에 유학가려고 선발시험에 10번 응시하였으나

10번 모두 낙방하여 자살하는 청년도 있었다. 그러나 치원은 겨우 12살에

처음 치른 선발시험에서 최상급으로 선발되어 당나라 국학에 입학할 수 있

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선발시험과거(科擧)나 마찬가지였다. 12살짜리

가 최상급으로 선발된 경우처음이었다. 서라벌에서는 어린 치원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다.


 “네가, 견일의 아들 치원이로구나. 장하도다. 듣던 대로 하늘에 있던 문창

성(文昌星)이 신라에 잠시 내려온 게 틀림없도다. 짐이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단다. 너는 세신(世臣)의 가문에 태어났으니, 당나라에 유학 가거든 조국

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폐하,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신라왕 김응렴(金膺廉)은 어린 천재 치원을 궁으로 불러 다과를 베풀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일부 진골출신 중신들과 고관대작들 그리고 그들의 자

식들은 치원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였다. 


 868년 봄, 치원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장보고가 세운 완도(莞

島)에 있던 청해진(淸海鎭)이 851년 문성왕(文聖王) 때 혁파된 후 서해의 중

심부인 당은군(唐恩郡)의 당성진(唐城津)이 대당 무역의 전진기지로 번성을

누리고 있었다.


 견일과 부인 그리고 치원의 형 현준이 당성진항에 나타났다. 치원과 함께

견당유학생에 뽑혀 당나라로 향하는 학생 수십여 명이 부모 형들과 작별

의 인사를 나누느라 항구는 부산했다. 유학생 중에서 치원이 가장 어리고

키도 작았다. 아직 부모 품에서 한창 귀여움을 받으며 뛰어 놀 나이였다.


 “에구 치원아, 너를 당나라로 떠나보내고 내가 어이 살꼬? 집걱정일랑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치원의 어머니는 치원의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소자 걱정은 마세요. 오직 일심으로 공부만 하겠습니다.”
 치원은 오히려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며,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안심시

켰다.


 “나무아미타불. 치원아, 부디 몸조심해야 한다. 미안하구나. 내가 장자가

되어 할 일을 네가 하는구나. 너에게 언제나 부처님의 가호(加護)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마.”


 “형님, 고맙습니다. 부처님과 불제자인 형님께서 저를 지켜주실 테니 안

심이 됩니다. 부모님과 가문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형님, 제

가 신라에 없으니 형님께서 가끔 어머님과 아버님을 찾아뵙고 위로의 말씀

을 드리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아우야, 고맙구나. 그리고 부모님 걱정은 말거라.” 
 형 현준은 얼마 전에 머리를 깎고 불제자가 되었다. 아버지 견일은 지금도

큰아들 현준만 보면 서운함과 안타까움으로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 소자, 이제 당나라로 떠납니다. 부디 존체(尊體) 만안하심을 빌겠

습니다.”


 “치원아, 당나라에는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 왜나라, 토번(吐蕃), 월국(月

支國), 거란(契丹), 서역의 대식국(大食國) 등 많은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려들 것이야. 당나라 안은 네가 상상도 못해 본 곳이다. 그곳은 세상의 모

든 악과 선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단다. 오직 한 곳만 보고 정진하거라.


 “십년불제 즉비오자야 행의면지(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네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 꼭 성공하기 바란

다.”


 견일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12살 밖에 안 된 아들에게 할 말이 아니

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호한 자세로 말하였다. 매정하지만 견은 나라

와 가문을 위하여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치원이 유학을 떠나기도 전에

신라 왕실과 서라벌에서는 치원이 꼭 빈공과에 장원급제 할 것이라는 기

대가 팽만해 있었다. 견일은 그 같은 기대가 오히려 부담스럽고 마음에

짐이 되었다.


 만약 아들이 왕실과 고국의 동포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자신 뿐

만 아니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절 받으십시오.”
 치원은 배에 오르기 전에 부모에게 절을 하였다.
 “치원아, 부디 몸 건강해야 한다.”


 “이 아비의 당부를 잊지 말거라.”
 ‘아들이 당나라로 공부하러 가는 마당에 꼭 그런 말을 해야 하는가?’
 견일은 어린 아들에게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지어미

는 그런 지아비가 얄미웠다.


 “나무석가모니불. 아우야, 십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보자. 그때는 네가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있겠구나. 나라와 가문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해야

한다. 잘 다녀오거라. 미안하구나.”


 치원을 태운 배가 항구를 빠져 나갔고 치원의 어머니와 형 현준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부두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견일은 모자(母子) 몰래

눈물을 훔치며, 치원에게 모질게 한 말을 후회하였다.






                                                                                                                                                         - 계속 -















           % 본 작품은 픽션과 넌픽션이 혼합된 창작물입니다.

              오로지 소설로만 읽어 주세요.

































'* 창작공간 > 중편 - 격황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황소서(5)  (0) 2018.10.20
격황소서(4)  (0) 2018.10.17
격황소서(3)  (0) 2018.10.15
격황소서(1)  (0) 2018.10.13
격황소서 원문  (1) 2018.04.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