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어하라 미추홀 도래기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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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후, 지금 뭐라고 하였소? 짐의 곁을 떠나겠다고요? 짐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짐과
영영 헤어지겠다고요?”
아침상을 받고 있던 추모왕은 소서노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추모왕은 자신
의 유일한 핏줄인 유리에게 대통을 잇게 하기 위하여 소후에게 말을 하였지만 기분이 퍽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폐하, 소첩의 결단을 흔쾌히 허락하여 주세요. 그동안 소첩이 곰곰이 생각하였사온데 저
희 모자(母子)가 고구려를 떠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직계 혈통이 황위(皇位)를 물려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어 저희
모자는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려 합니다. 부디, 저희 모자의 뜻을 받아
주세요.”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소서노의 두 눈동자에는 빨갛게 핏발이 서있었다. 소서노
곁에 있던 비류와 온조 두 왕자들은 고개를 조아리면서 추모왕의 눈치를 살폈다.
“소후, 그건 아니 되오. 내 어찌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되어 나라를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대를 내보낼 수 있단 말이오? 허락할 수 없소. 지금처럼 졸본성에서 짐과 함께 살아
가길 바라오. 비류와 온조도 짐의 아들이나 다름없소. 비류와 온조는 유리를 도와 고구려가
더 융성하고 만세반석에 올라 천년제국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합니다.”
소서노는 추모왕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두 아들들이 떠나
면 추모왕이 흔쾌히 승낙할 줄 알았다.
“폐하, 소자들은 그동안 하해와 같은 성은(聖恩)을 입어 복락을 누리며 잘 살아왔습니다.
이제 유리태자께서 고구려의 대통을 잇는데 소자 형제들이 있으면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
다. 저희 형제는 어머님을 모시고 옛 진번(眞番)의 땅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려
합니다. 부디, 어머니와 소자들의 뜻을 받아주소서.”
비류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고하자 추모왕은 왼쪽 눈을 찡그리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온조야, 네 뜻은 어떤고?”
“폐하, 송구하오나 소자 역시 유리태자님께서 고구려의 대통을 잇고 큰 뜻을 펼치는데 걸림
돌이 될까 걱정하고 있나이다. 하오니, 소자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멀리 떠나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소서.”
추모왕은 두 왕자의 응대에 무언가 한참 골몰하는 듯하였다. 잠시 침묵이 대전을 휘감았다.
네 사람의 숨 쉬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드디어 추모왕이 입을 열었다.
“흠-, 이렇게 하면 안 되겠느냐?”
추모왕은 세 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반대한다고 될 일이 아님을 간파하고 다른 제안
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폐하, 어떤 말씀이 시온지?”
“소후는 짐의 곁에 있고 비류와 온조 둘만 진번 땅으로가 새 나라를 개척하여 나중에 짐에
게 그 나라를 받쳐라. 짐이 너희들에게 군사들을 내주겠다. 진번 땅은 지금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지만 한나라 오랑캐들이 끊임없이 침범할 수 있는 땅이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
을 것이야. 군대도 없이 간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아, 이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떠나겠다는 사람에게 나라를 만들어 바치라고
하다니......’
소서노는 추모왕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 소첩과 비류, 온조는 비록 혈통은 다르다 하나 분명 폐하의 자식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소첩과 비류, 온조는 대승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고구려를 떠나 좀 더 넓고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자가 고구려에 남아
있는 한 유리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또한 장차 소첩을 따르는 계루부의 무리들과 폐
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이제 고령이오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부디, 저희 모자들이 마
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조처하여 주세요. 자식들이 미래에 벌어질지 모를 불상사를 피하여
형제간 우의를 돈독하게 한다는데 막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 모자가 진번 지역을
개척한다면 당연히 그 땅도 폐하의 땅이지요.
지금 군사를 데리고 소첩이 패대(浿帶)를 건너간다면 한나라가 긴장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
도 있습니다. 소첩은 두 아이들과 무리를 이끌고 조용히 진번으로 건너가고자 합니다. 군사
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사를 대동하면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폐하,
깊이 굽어 살피소서.”
소서노는 반드시 고구려를 떠나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약 차기 황위 계승문제로 양
측 간에 갈등이 조성된다면 추모왕을 지지하는 계루부와 자신을 믿고 따르는 계루부가 충돌
할 경우 애써 가꿔온 고구려는 한 순간 풍비박산(風飛薄散)이 나고 말 것이란 사실을 잘 알
고 있었다.
물론 소서노가 불순한 마음을 먹는다면 두 아들을 조정하여 추모왕과 유리를 삽시간에
제거하고 자신이 고구려의 대권을 차지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두 아들이 추모왕에 이어 황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고구려를 깨고 싶지
않았다.
소서노는 추모왕 주몽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유리와 추모왕의 첫째
부인인 예씨가 졸본성에 찾아오기 전까지 추모왕은 소서노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물론 현시점에서도 추모왕의 소서노를 향한 사랑이 아주 식은 것은 아니었다.
‘응? 계루부가 두 편으로 갈라져서 싸움을 한다? 그리고 짐이 고령이라? 진번지역을 개척
하면 짐의 땅이 된다고? 그렇지 이참에 짐이 모른 체하고 소후와 두 아이들을 떠나가게
한다면 유리가 짐의 뒤를 이어 황위를 계승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지. 소후의
말대로 세 모자를 떠나가게 해야겠어. 요즘 들어 짐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여 짐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흠-’
소서노의 진정으로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말을 듣고 추모왕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아침상 위에 있던 국이 식자 시녀들이 두 번이나 뜨거운 국을 올려놓았다. 아침 봄 햇살이
창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소후, 짐이 소후말대로 하리다. 짐이 생각이 모자랐던 것 같소. 소후가 비록 두 왕자들
을 대동하고 진번 땅으로 간다 하여도 소후는 여전히 짐의 정비(正妃)입니다. 이점은 간
과하시면 안 됩니다.”
추모왕은 다 식은 밥을 수저로 뜨면서 소서노와 비류, 온조를 살펴보았다. 비류와 온조는
추모왕과 눈이 마주치면 주눅이 들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은혜가 태산 같사옵니다.”
“또한 너희들 역시 짐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되느니. 어디를
가더라도 짐을 생각해서라도 어머니를 잘 보필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추모왕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저희 소자들은 지엄한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비류와 온조는 가늘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망극하옵니다. 소첩은 어디를 가나 죽을 때까지 폐하 한분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소서노의 말에 추모왕은 흐뭇해 하였다.
“소후, 한 가지 청이 있어요.”
“폐하, 하명하소서.”
“짐은 오늘부터 닷새 동안 소후와 함께 지내고 싶으오.”
“네에? 닷새 동안이나요?”
“짐과 소후는 부부입니다. 부부가 함께하는 게 이상할 게 없어요. 그동안 짐이 소후에게
너무 격조(隔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오.”
“폐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소후는 추모왕의 명이 퍽 내키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분이 노망이라도 나셨나? 한동안 나의 처소를 찾지도 않던 분이 무슨 연유로 닷새
동안이나 함께 지내겠다는 것일까? 이제 내가 멀리 도망가겠다니까 나를 어찌 해볼 심산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왕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섯 밤이 아니라 백일을 함께 밤을 보낸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리라.’
소서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추모왕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
였다. 비류와 온조는 불안하였다. 닷새 동안 추모왕과 어머니 소서노가 함께 있으면 어떤 일
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형님, 아버님이 왜 어머님과 닷새 동안 함께 계시려 하는 걸까요? 이상합니다. 아버님이
우리 모자가 떠나간다니까 어머님을 설득하려는 것 아닐까요?”
“온조야, 어머님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어머님은 웬만한 사내보다 담대하고 어려
운 일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하시는 분이란다.
내 생각에는 아버님이 어머님과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같이 있고 싶어
서 그런 걸 거야. 아우야, 우리는 아버님의 뜻에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비류 왕자는 아우 온조 왕자의 등을 다독거리며, 추모왕의 행동을 애써 외면하려 하였다.
추모왕과 어머니 소서노의 최근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비류왕자였다.
추모왕의 명에 의해 별궁에 동방(洞房)이 꾸며졌다. 의전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밤낮없이 작업하여 아름다운 신방(新房)을 꾸몄다. 화려한 침방(寢房)에 비단 금침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신방에 은은한 향이 피워지고 늙은 시비 대신에 젊고 아리따운 시비(侍婢)들이
배치되었고 주변은 완전무장한 군사들이 이중으로 철통같이 경계를 섰다.
“뭐라고? 폐하와 소후가 신방을 꾸몄다고? 소후는 폐하보다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다고
하는데 신방이라니? 폐하 또한 요즘 들어 부쩍 밤낮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사시는
터라 그 어느 때보다 건강이 말이 아닌데 신방이라니?”
추모왕의 첫째 부인인 예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니, 너무 걱정 마소서. 두 노인 분들이 무슨 열정이 있겠어요. 이제 두 분은 꺼져가는
촛불같은 신세인걸요. 닷새입니다. 닷새만 지나면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도 어머님께서 대
고구려의 황후가 되시는 겁니다. 소자 또한 대 고구려의 황태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걸요.
그동안 비류와 온조 때문에 소자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답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자들이 스스로 제발로 졸본을 떠나간다는데 아버님께서는 자꾸만 말리는
것 같사옵니다.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찾아뵙고 소서노와 닷새가 아니라 하룻밤만 보내고 빨
리 떠나보내라고 해보세요. 신하들에게 창피하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참말로 아버님은 주
책이세요.”
유리태자는 어머니인 예씨를 곁에 두고 떠나겠다는 소서노 일행을 붙잡고 닷새 밤을 새우
겠다는 아버지 추모왕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야, 너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닷새만 지나면 너는 이 나라의 존귀한 신분이 된단다.
물론 지금도 존귀하지만 닷새 후에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졸본성을 떠나가면 너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지 않느냐. 닷새는 백년 세월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보다 못한 시간이
야.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하느니. 알겠느냐?”
“네에, 어머니. 잘 알겠습니다.”
두 모자의 정겨운 이야기는 감주(甘酒)를 마시면서 밤늦도록 이어졌다. 예씨는 주몽이 동
부여를 떠날 때 유리를 복중(腹中)에 담고 있었다. 예씨 부인은 유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온
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유리를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웠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먹으면서 예씨는 유리를 올바르게 키우는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예씨는 지금의
호사(豪奢)가 이전의 동부여에서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여봐라. 고구려에서 가장 맛있는 산해진미(山海珍味)와 금준미주(金樽美酒)를 대령하렷
다. 짐이 오늘부터 닷새 동안 소후와 더불어 주지(酒池)에 목욕을 하고 육림(肉林)에 누워
세월을 잊고자 한다. 주변의 잡인들을 물리고 젊고 아름다운 궁녀들이 짐과 소후의 편의를
위하여 밤낮으로 번을 서야할 것이야.”
“소인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겠나이다.”
별궁으로 고구려의 최고 진미가 태산처럼 쌓이고 명주(名酒)가 호수를 이루었다. 아무도
추모왕의 뜻을 모르고 신방을 꾸몄다. 봄기운이 졸본성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멀리
소쩍새가 울고 봄꽃의 향기가 성 안으로 퍼지면서 젊은 궁녀들의 가슴이 뛰고 궁을 호위
하는 젊은 병사들은 궁녀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뜻 모를 행동을 하며 환심을 사려하였다.
해가 지고 보름달이 졸본성안을 대낮같이 비추었다. 추모왕이 별궁을 찾았다. 소서노 황후는
이미 꽃단장을 하고 추모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오늘밤은 소첩이 성심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서노는 칠보단장을 하였다. 움직일 때마다 옥잠(玉簪)에
장식된 금붙이들이 바르르 흔들렸다.
“아니오. 오늘,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 닷새 동안 짐과 함께해야 하오. 짐이 유리와 예후
(禮后)가 졸본성에 들어온 이후로 그대를 자주 찾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소. 또한 닷
새 후면 그대가 짐의 곁을 영원히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다오.
그래서 짐이 마지막으로 그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오. 짐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소서노는 금잔(金盞)에 미주(美酒)를 가득 따랐다. 지아비에게 술을 따르는 소서노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이 밤이 이승에서 지아비 추모왕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에서 설움이 울컥하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추모왕이 소서노의 마음을
읽었는지 목소리를 다듬더니 노래를 하기 시작하였다.
窈窕淑女(요조숙녀) 요조숙녀를
寤寐求之(오매구지) 자나 깨나 구하려하지만
求之不得(구지부득) 구할 수 없어
寤寐思服(오매사복) 자나 깨나 그리워하네
悠哉悠哉(유재유재) 이 밤이 길고도 길어라
輾轉反側(전전반측) 밤새도록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네
“폐하, 시경의 관저(關雎)를 부르셨습니다. 이 노래는 폐하께서 소첩에게 늘 들려주시던
노래였습지요. 소첩이 곁에 있었사온데 마음에 차지 않으셨나 봅니다. 이번에는 소첩이 응답
을 해도 되겠는지요?”
“노래에 대구(對句)가 없다면 술맛이 반감될 거요. 짐이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이유는 그대가
짐의 곁에 있어도 늘 인애하는 마음이 홍수처럼 넘쳤기에 그대를 그리워하여 부르는 노래랍니다.
이제는 오랜만에 그대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구려.”
추모왕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소후가 공후인(箜
篌引)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줄을 튕겼다.
公無渡河(공무도하) 그대여 그 물을 건너지 말아다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그대는 그예 물을 건너시네요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이제 그대를 어이할꼬
소서노가 눈물을 흘리며 구슬프게 노래를 이어가자 추모왕 역시 눈물을 흘리며 잔을 비웠
다. 두 사람이 십년 넘는 세월을 부부로 살면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주변의
시선과 고구려의 건국이라는 막중한 책임 때문에 부부의 정을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
다. 오늘밤이 백년 천년 이어지기를 추모왕 주몽은 속으로 바랐다.
“소후, 오늘밤 짐을 울리는구려. 짐이 많이 미안하오. 비류로 하여금 짐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게 당연하거늘 짐의 입장도 참으로 난감한 게 많다오. 짐만 바라보는 수많은 추종 세력들과
5부의 족장들이 모두 짐 한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짐이 허울 좋은 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오. 소후가 짐의 마음을 헤아리고 멀리 떠나간다니 짐은 사내로서 참으로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오. 미안하오. 못난 지아비를 용서하구려. 흑-.”
추모왕은 진심으로 소서노에게 사죄를 청하고 있었다. 다음 황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느냐를
놓고 졸본성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소서노의 많은
수하(手下)들과 새로이 생겨난 추모왕의 세력 간에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졸본성은 언
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과도 같았다.
“폐하, 폐하는 소첩의 지아비입니다. 천년이 지나고 억만년이 지나도 소첩은 폐하의 여인
이옵니다. 폐하, 오늘밤은 아무 말씀도 하지마시고 이 소첩을 은애(隱愛)하여 주세요.”
핏빛보다 더 붉은 소후의 입술에 달콤한 과일이 물려있었다.
추모왕은 그 과일을 따먹기 위해 소후를 끌어안았다. 밖에서 안의 광경을 훔쳐보던 시비
(侍婢)들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킥킥 거리며 재미있어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시녀들은 서로 안을 훔쳐보려고 하였다. 추모왕과 소후는 새벽이 지나 동이 터올 무
렵 침상에 들었다. 한동안 침전 안에서 황촛불이 너울대며 심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진한 꽃
향기가 밖으로 스며 나오기도 하였다. 졸본성은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비는 십년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 계속 -
남쪽 나라 바닷가에(소서노 어하라 미추홀 도래기) - (끝) (0) | 2016.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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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나라 바닷가에(소서노 어하라 미추홀 도래기) - (3) (0) | 2016.11.26 |
남쪽 나라 바닷가에(소서노 어하라 미추홀 도래기) - (1) (0) | 2016.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