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1)
- 여강 최재효
“화연아, 우리 영원히 잊지 않고 헤어지지도 않을 거지?”
“그럼,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난 벌써 저 달님과 별님에게 맹서했
어. 우리 절대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30년 세월이 꿈결처럼 흐른 지금도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다. 주말이나 국
경일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면 나는 가리봉동에 간다. 가리봉동에 나의 친인척이
있어서가 아니고 숨겨둔 애인이 있어서도 아니다. 특히 비가 내리거나 눈 오는 날,
지병(持病) 처럼 내 몸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슬며시 고개
를 든다.
오늘도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가슴이 답답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창밖 하늘을 응시하며 멍하니 서있는데 박 과장이 커피를 한 잔 가지고 와서 내 등
을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입사 동기인 박 과장은 20년 이상 나와 경쟁자 혹은 동반
자, 협력자로 지내온 사이여서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유일한 동료사원
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취미 또한 나와 같아 자주 술자리를 갖는 편이다. 단지 남
자로서 입이 가벼운 데가 있어 자주 동료사원들로 부터 눈총을 받기 일쑤다.
“최형, 또 그녀가 생각나는 모양이군.”
“아, 아니야. 그냥 하늘이 예뻐서 쳐다보고 있었어.”
나는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하늘이 예쁘다? 거 참으로 묘한 일일세. 나는 반세기 가까이 살도록 하늘이 예쁘
다는 말은 처음 들어. 그러지 말고 먼젓번 운을 띄우던 그 이야기 좀 마주 해봐. 자
네의 사랑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해.”
얼마 전, 퇴근길에 박 과장과 맥주 한잔 들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비춘
적이 있었다.
“에이, 그 이야긴 내가 그냥 꾸며낸 거야. 그때 개략적으로 다 이야기 했잖아."
“거짓말. 그 날, 최 과장 첫사랑 이야기하는 진지한 태도를 보니 정말로 있었던 일
이 틀림없어. 내 눈은 못 속여.”
“박 과장, 그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어?”
“지금까지 멜로드라마나 애정영화를 수백 편 봤지만 최 과장의 첫사랑 이야기 만
큼 재미가 없었어. 지난번에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들었는데 오늘은 자세하게 다시
듣고 싶어. 퇴근하고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해줘. 자네 좋아하는 탁배기는 내가 살 테니.”
박 과장은 지난번 오후 내내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치근댔다. 재성은 박 과
장의 집요한 요구에 할 수
없이 응하고 말았다.
Y읍내 Y여자고등학교와 Y고등학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학교 진학을 위한 관문인 예비고사(豫備考査)가 코앞에 다가오자 두 학교는 은근히 신경전을 벌
리고 있었다. 재성은 Y고등학교 문과 반에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여 학교에서 거는
기대가 굉장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는 재성이
혹시 감기나 몸살이 날까봐 노심초사했다. 벌판이 누렇게 변하고 주변 산이 온통 화
려한 색으로 치장할 때쯤 재성은 화연이 보고 싶어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
였다. 학교 수업은 대학 진학반 위주로 수업이 이루어 졌다.
동급의 취업반 친구들은 오전 수업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대학 진학반
학생들은 별도의 정예반을 만들어 정규 수업 이후 밤 10시까지 스파르타식 학습이
계속되었다. 재성은 반 수석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과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
다.
친구들은 모두 경쟁 상대자였고 재성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공부 잘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공부로 심신이 지쳐있는 재성에게 화연은 용기를
북돋워주는 존재였다. 지난 여름 방학 때 신륵사에서 만나 본 이후로 재성은 화연
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오로지 공부만 해야 했다.
“아, 화연이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 학교를 빠져 나갈 방법이 없으니......”
학교의 철저한 정예반 학생들 관리에 학생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재성은 주
체할 수 없는 화연에 대한 그리움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늘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밤을 지새우다 시피 하는
재성은 친구들이 거의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도서관을 빠져 나와 학교 담장
을 넘었다. 반달이 서천에 걸려 있었다. 담장을 빠져 나온 재성은 화연이가 살고
있는 읍내 하리를 향해 달렸다.
달이 서산 아래로 완전히 기울자 Y읍내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묻힌 거대한 공
동묘지같았다. 재성이 눈에 익은 골목길을 달릴 때 마다 개들이 짖어댔다. 오직 화
연이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재성은 부리나케 달리고 또 달렸다. 20여 분만에
재성은 화연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하였다.
화연은 고모 댁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재성은 화연이 역시
대학진학반이라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지만 화연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리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여학생이라도 새벽 3시 반이 훨씬 넘은
시간까지 공부는 무리일거라며 재성은 스스로 위안하였다.
‘아, 어쩌나 혹시 화연이가 안자고 공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화연이 살고 있는 집은 'ㄷ‘자 형태인데 안방을 중심으로 우측에 화연이 방이 있었
다. 다행히 화연이 고모는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재성은 최대한 가까운 거리로 다
가가 화연이를 불러 볼 심산이었으나 쉽지 않았다.
자칫 화연이를 부르는 소리에 화연이 고모가 잠에서 깨거나 엉뚱한 사람이 나올
경우 화연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게 뻔했다. 밤 이승에 흠뻑 젖은 재성은 오들
오들 떨었다.
‘화연아, 화연아-.’
재성은 속삭이듯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가 너무 적어 곁에 사람이 있어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날이 훤히 밝아 올 때 까지 재성은 담장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화연의 이름을 셀 수도 없이 불렀다. 눈물이 양쪽 볼을 타고 흐르자 재성
은 소매로 훔치며 훌쩍거렸다.
‘오늘은 돌아가고 기복이 편에 화연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줘야겠어.’
공부에 재주가 없는 기복은 취업반이어서 오전 수업만 끝나면 발정난 수캐처럼 같
은 부류의 여학생 꽁무니를 따라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같
은 학교를 다닌 기복이
는 화연이 사촌이었다.
학교를 몰래 빠져 나와서 화연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기쁘고 힘찬 발걸음이었으
나 돌아가는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밤이슬에 재성의 머리는 뽀얗게 빛이 날 지경
이었다. 재성이 골목길을 지나갈 때 마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심술이 난 재성
이 짖어대는 개를 향해 돌을 집어 던지자 개들은 더욱 사납게 으르렁 대며 짖어
댔다.
어떤 집은 재성이 던진 돌멩이가 개집에 맞아 큰소리가 나자 집 주인이 ‘누구야?’
하며 소리를 질러 대기도 하였다. 희뿌연 새벽 안개 속에 학교가 보였다. 하얀 건물
이 마치 영화에서 본 듯한 교도소 같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옮길 때 마다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졌다.
‘바보. 밤샘 공부를 하지 않고. 그렇게 잠이 많아서 어떻게 대학교에 가려고......’
재성은 다시 학교 담장을 넘어야 했다. 담장을 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지 무릎이 터지고 팔에도 찰과상을 입었다.
아픈 것도 잊은 채 재성은 기숙사로 살며시 들어가 눈을 붙였다. 함께 방을 쓰는
친구의 코고는 소리에 재성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재성은 화연이를 찾
아 갈 때 미리 편지를 써가지고 못한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최 과장, 한잔 들고 이야기 하시게. 그날 새벽에 그녀를 만나봤어야 하는 건데.
나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깨웠을 거야.”
박 과장은 너털웃음을 웃고 나더니 단숨에 탁주 사발을 비웠다.
“박 과장, 내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나?”
재성도 우울한 심사에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재성은 잔을 비우면서도 화연을 그리
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청주에 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재성은 갑자기 화연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자, 내 잔 받고 다음 이야기를 해보시게. 너무 재미있어. 나는 서울서 커서
최 과장처럼 그런 전원 풍경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추억이 없어. 그냥 고등학교 때
걸 스카우트 두세 명 하고 시큰둥한 연애 말고는 이렇다 할 추억이 없어. 지금 생
각하면 후회가 돼. 나도 최 과장 처럼 그런 가슴 시린 사랑을 한번 쯤 해봤어야 하
는 건데.”
박 과장은 재성의 찌그러진 양은 술잔에 탁주를 가득 부었다.
“박 과장, 자네 내 고향에 한번 가봤나?”
“무슨 소리야? 15년 쯤 되었나? 그때 자네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가보지 않았나?”
박 과장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그렇게 밤에 왔다가 밤에 돌아가는 방문 말고.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가
보았느냐고 묻는 걸세.”
“아니, 그렇게는 못가 보았어. 차를 운전하며 강원도를 갈 때 늘 자네 고향을 지나
치면서도 한 번도 들리지 못했네. 미안하네. 자네 고향에 볼 게 무진장 많다는 이야
기를 들었
는데 말이야.”
“그럼 언제 한번 내 고향에 다녀오시게. 내 고향에 다녀와야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를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테니.”
“최 과장 이야기 다 듣고 내 한번 자네 고향에 갔다 오겠네.”
“내 고향은 한반도 가장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흙이 비옥하여 쌀, 땅콩, 고구마
같은 농작물이 아주 잘 자라지. 물론 맛도 좋지. 엣날에 내 고향에서 생산되는 쌀은
임금님에게 진상할 정도 였지. 또한 내 고향에는 유명한 신륵사와 세종대왕님, 효종
대왕님이 영면하고 계시는 영릉이 있어.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친 명성황후의 탄생지가 능현리에 있어. 나는 명성황후가 태어나고 110년 후에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났어.
그녀의 탄생지와 내가 태어난 집이 담장 하나 두고 있었거든.”
“자자, 한잔 쭉 들고 하던 이야기나 하시게. 다음이 궁금해 죽겠네.”
“참, 그 사람 성질하고는......”
“최 과장, 고향 자랑은 이야기 중간중간 하고, 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시게.”
“알았네. 알았어. 자 ,한잔 하시자고. 그런데 비가 오시려나?”
재성은 유리창 밖으로 꾸물거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두 사람이 고향은 비록 다르지만 술 취향도 비슷하여 자주 잔을 기울이곤 하였다.
재성이 잔을 비우고 잠시 눈을 감더니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박 과장은 재성의 입
이 어서 열리기를 기대하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빗방울이 떨어
지기 시작하였다.
- 계속 -
_()_ 오늘부터 새로운 창작 단편소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탈고 전이라 오탈자가
종종 있습니다. 깊은 이해 있으소서....... 2011.6.3.
새벽 인천 소래포구에서 여강 최재효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