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의 만찬
- 여강 최재효
[저녁 7시까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먹자골목으로 집합, 이의 있으면 문자 줘.]
나의 일방적이고도 구식(舊式)의 명령이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오후 5시가 되
어도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하는 문자(文字)는 오지 않았다. 서울서 대학 다니는둘째딸에게는 별도로 다시 문자를 보내 가급적 일찍 인천으로 내려오라고 하였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회사 일을 마치고 약속된 장소로 막 출발할 무렵 둘째딸로
부터 이의신청(異議申請)이 3통 연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3통의 문자를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둘째딸
의 이의신청은 [아빠, 이번에는 우리가 가고 싶은 데로 가자.], [언니와 엄마도 다
른 곳으로 가고 싶대. 이의신청 받아줘.], [아빠, 나의 이의신청 받아주는 거지? 사
랑해......]. 오늘은 나와 아내가 부부(夫婦)가 되어 가정을 꾸민지 21년이 되는 결
혼기념일(結婚記念日)이다. 지금까지 늘 그렇듯 나는 매년 결혼기념일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장소를 정해 아내와 두 딸들에게 휴대전화로 통보(通報)만 하면 그만
이었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아빠의 방식(方式)에 두 딸들이 거부의사(拒否意思)를 분
명히 밝힌 것이다. 나는 둘째 딸의 이의를 잘 알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요즘
여대생들이 잘 가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아보았다. 서너 군데를 물색해 놓고 고
심(苦心)하다가 언젠가 두 딸들이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 그럼, 딸애들이
요구하는 데로 가보자.’ 나는 남동구 구월동에 소재한 VIPs라는 레스토랑으로 장
소를 변경하고 세 소녀에게 즉시 문자를 띄웠다. 곧바로 이의신청을 들어줘서 고
맙다는 내용의 문자가 세 소녀로 부터 쇄도(殺到)하였다.
창 밖에 춘설(春雪)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다가 아내에게 줄 선
물과 케이크를 준비하였다. 내가 약속 장소인 빕스에 도착 했을 때 둘 딸과 아내가
탄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두 딸들도 한껏 멋을 내고 손에 꽃다
발과 자그마한 종이 백을 들고 있었다. 고급패밀리 레스토랑인데도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아내에게 선물(膳物)을 건네자 아내도 나에게 자그마한 봉투를 건넸다. 고
급스러운 케이스에 핑크색 계열의 실크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 아내도 내가 선물한
물건을 두 딸과 펼쳐보고 흐뭇해했다.
두 아이들은 약간 흥분한 듯 했다. 먼저 케이크를 올려놓고 촛불을 켜자 눈치 없
는 여자 종업원들이 달려와 탬버린을 요란하게 흔들며 ‘생일 축하합니다!'를 연발
하면서 분위를 고조(高燥)시켰다. 결혼기념일 파티가 순식간에 생일파티로 바뀌고
말았다. 두 딸들은 좋아라 박수치며 생일축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아내와 두
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둘째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이기를 참 잘했구나.’하
고 속으로 웃었다.
지난 세월 아빠의 강압적(强壓的)이고 일방적(一方的)인 생활방식이 두 아이들에
게 얼마나 딱딱하고 무료(無聊)하게 비쳐 졌을까. 나는 식사하는 내내 아빠와 딸들
사이에 놓여진 30년 세월의 격차(隔差)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기억
에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기념일 파티에 대한 추억은 전무(全無)하다. 나의 부모님
은 오로지 일곱 남매(男妹)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며 물을 깁고 불을 때야만 했다.
바쁜 전원(田園)에서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파티를 벌인다는 게 얼마
나 부끄럽고 사치(奢侈)스러운 일이었던가. 지금 생각하니 변변한 결혼기념 잔치
한번 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後悔)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아이들과 케이크를 자르며 웃었던 기억은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 결혼
기념일 날 케이크를 사들고 가서 축하해 드린 기억은 없다. 물론 칠남매 중 막내
라는 나의 입지가 그 같은 일에 무뎌지게 했는지 모른다.
두 딸들이 갖다 주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죄인(罪人)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음식을 들면서 머리에 녹지 않는 백설(白雪)을 이고 계신 고향의
어머님을 생각했다. 내가 멍청하게 앉아 있자 큰딸이 열대 과일 한 접시를 담아
와 내 앞에 놓았다. 아내와 두 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큰딸 둘째딸은 남자 친구와 데이트했
던 이야기를 하며 배꼽을 잡고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하며 두 딸들의 아기자기한 데이트 사연을 엿들었다. 두 아이
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외식(外食)이 늙은 소년에게는 아직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 것은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
촌놈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근엄한 아버지 손을 잡고 근사한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쓸쓸한 유년기(幼年期) 때문 아닐까?'하
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두 아이들이 깔깔 거리고 웃을 때 나는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웃었다.
2년 전 위암 수술 후유증으로 살보다 뼈가 더 많은 나에게 장시간 딱딱한 의자
에 앉아 있는 일은 여간 고역(苦役)이 아닐 수 없다. 과일과 디저트를 들어도 세
소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재담(才談)에 빠져 있었다. 나는 후레쉬를
터트리지 않고 두 딸들을 렌즈에 담았다. 당초에 집 근처 삼겹살집이나 뷔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늙은 소년에게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레스토랑이
약간은 부담스럽다. 역한 담배 연기, 매캐한 고기 굽는 냄새, 시끌벅적한 분위
기에 오랜 세월 길들여진 탓일까.
자연스럽게 나는 딸들에게도 나의 기호(嗜好)를 강요하고 있었다. 세태를 파악
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의 결과였다. 식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소
녀들에게 동참(同參)하여 나는 딸들의 남자친구 외모(外貌), 학교명, 성격, 태도,
그 집안 내력 등 이런 저런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나의 물음에 아이들은 의
아한 눈치였다. 결혼할 상대(相對)가 아니고 단순히 남자친구라며 아빠의 무거
운 질문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20 초반 딸들에게 아빠의 의미심장한 물음은
부담이 된 듯 했다.
오랜만 즐거운 시간을 갖는 장소에서 나의 엉뚱한 질문이 찬물이 될까봐 나는
얼른 화재를 돌렸다. ‘아빠는 너희들 남자 친구가 입 하나, 눈 두개, 콧구멍 두
개, 귀 두개가 확실히 붙어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질문을 한거야.’ 딸만 둘을
둔 나는 조만간 나와 성(姓)이 다른 두 아들들을 맞이하는 일에 벌써부터 가슴
이 콩닥거린다. 두 딸들의 배우자로서 또한 나의 새로운 아들로서 누가 선택 될
지 모르지만 분명 이 순간에도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
철없는 두 딸들은 서로의 남자친구에 대하여 자랑하느라 열을 올렸다. 그런
딸들을 보며 나는 걱정하였다. 아직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데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네 명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둘째 딸은 서울서 혼자 살며 대
학에 다니고 큰딸도 조만간 취업을 하면 두 딸들과 외식할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
들게 뻔 하니 말이다.
포만감(飽滿感)에 흐뭇한 기분으로 빕스를 나왔을 때 춘설(春雪)은 이미 그치고
앙상했던 가로수에 백화(白花)가 난만(難滿)했고 미끄러운 도로에 차들이 길에 꼬
리를 물고 기어가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아빠의 암수술로 아내와 딸들은 숨을 죽
이고 있었다. 차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아빠의 모습에 아내와 딸들은 어느
정도 안도(安堵)하는 눈치다. 외식이 잦은 요즘 세태에 유독 나의 두 딸들만 우울
해 했던 것 같다.
지난번 큰딸의 대학 졸업식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유독
딸아이만 얼굴이 어두운 것 같아 나는 무척 가슴이 아팠다. 월백설백천지백(月白
雪白天地白)으로 변한 집 근처 오봉산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이 순간 아주 가볍
다. 조만간 설화(雪花) 대신 춘화(春花)가 만발할 때 나는 두 딸들을 데리고 꽃비
를 맞으며 활짝 웃는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 볼 계획이다.
- 창작일 : 2011.3.24. 21:00
인천 소래포구에서
어머니에게 국화를 바치며 (0) | 2013.11.18 |
---|---|
학생 (0) | 2012.11.26 |
해에게서 소년에게 (0) | 2011.03.07 |
우리 마누라 (0) | 2010.12.24 |
선운산 秋感 (0) | 2010.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