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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누라

* 창작공간/Essay 모음 2

by 여강 최재효 2010. 12. 2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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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마누라

 

 

 

 


 
                                                                                                                                                      - 여강 최재효


 
 
 “미안하이, 나 먼저 가네. 우리 마누라가 빨리 들어오래.”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함께 하고 있던 친구가 중간에 전화를 받더니 마누라 핑계를 대고 황급히 일어난

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벗을 보고 남아있는 한량들은 씁쓸함을 금할 길 없

어 건배를 외친다. 휑한 주점 안에 갑자기 냉기(冷氣)가 엄습하면서 각자 휴대전화

를 꺼내 신종 족쇄(足鎖)를 확인하거나 변명을 늘어 놓기에 바쁘다.

 

 방금 전 까지 세상이 자신들 것이라며 큰소리치던 사내들 어깨가 좁아 보이면서

'우리 마누라'의 존재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한국의 기혼 남,녀의 호칭(呼

稱)을 보면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는 의식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대화나 행동

을 유심히 보면 은연중 나 보다 집단(集團)을 중시하는 습성이 있다.

 

 나는 집단을 중요시하는 무의식 속의 정체가 무척 궁금하다. 나의 추론이긴 하

지만 나는 그 집단우월주의(集團優越主義)를 고대(古代)에서 그 시원(始原)을 찾

고자 한다. 영어에서는 나와 우리의 구별이 분명하다. 타인에게 아내를 소개(紹介)

할 때 내 아내(My Wife)로 하지, 우리 마누라(Our Wife)라고 하지 않는다.


 원시(原始)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는 여인들이 중심이었다. 일부일처(一夫一

妻)가 아닌 일처다부(一妻多夫), 즉 한 여인에게 여러 명의 남자를 거느릴 수 있

는 생활방식이었다. 이러한 경우 한 여자를 아내로 하는 여러 명의 남자들 사이

에서는 ‘우리 마누라’라는 통칭(通稱)이 자연스럽다. 반대로 지금 아랍권의 사

회에서는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고약한 생활 풍습이 남아있다.

 
 경제력이나 권력이 월등한 사내는 여러 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산다. 조선시대

나라님들은 중전(中殿)을 비록 열 명 정도의 후궁(後宮)이나 나인들을 거느렸다.

이럴 경우에도 한 지아비를 모시고 사는 여러 여인들 사이에 ‘우리 남편’ 이란

호칭(呼稱)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다. 위 두의 예에서 보듯 ‘우리 마누라’와 ‘우리

남편’에 이의(異義)를 달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신라 성덕왕 때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筆寫本)에 마

복자(摩腹子)란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제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상

안 가는 이야기 이지만 그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내가

임신하자 마자 아내를 자신의 상관(上官)이나 권력자(權力者)에게 보내 아이가

태어날 때 까지 성관계를 맺게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상관이나 권력자와 부자

(父子) 관계를 맺도록 한다.

 

 야비해 보이는 남편 자신의 지위(地位)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거나 자기 자식의

복 받은 미래를 보장 받는 해괴한 풍습(風習)이었다. 상관이 군주(君主)이거나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라면 남자들은 기를 쓰고 자기 아

내를 성(性)의 제물로 바치고 싶어 안달하였다. 남자들의 이기심에 애꿎은 아

내들이 희생양이 된 경우다.

 

 또한 신라 중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던 미실(美室)에

게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첫사랑 사다함(斯多含), 진흥왕(眞興王), 진

흥왕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 진지왕(眞智王), 진평왕(眞平王), 애인이었던

설원랑(薛原郞) 등 당시 신라를 주름잡던 훨칠한 미남자들이 모두 미실의 거

대한 음욕(淫慾)의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야 했다. 이런 경우

도 한 여인을 두고 치정관계(癡情關係)에 있던 사내들끼리 ‘우리 마누라’라는

말은 통용되었을 법 하다. 부자지간(父子之間)에 한 여인을 두고 연적(戀敵)이

될 수 있었던 신라의 풍속이 기가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 그야말로

미실은 신라 왕실 사내들이 공(公認)한 ‘우리 마누라’ 아닌가. 미실의 절륜

한 정력과 남성편력이 혀를 내두게 한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를 떠나 지금도 대한민국의 상당수 기혼여성(旣婚女

性)들은 남편을 ‘우리 남편’이라고 아무 생각도 없이 함부로 호칭 한다. 결혼

한 지 수십 년도 더 된 여인이 배우자를 아무 꺼리낌 없이 타인에게 ‘우리 신

랑(新郞)’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못해 정신상태가 의심(疑心)스럽다.

신혼 기간 중에 지아비를 신랑이라고 하는 데 평생 신혼인 경우도 있나보다.

 

 그런 여인이 남편의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라도 있거나 다른 여인에게

눈길이라도 주면 남편을 ‘고양이 쥐 잡듯’ 다그치기 일쑤다. ‘우리 남편’ 즉

공동의 남편이라고 본인들이 스스럼없이 말해놓고 이상한 조짐(兆朕)이라도

보이면 노발대발하는 이 아이러니를 두고 남자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욱 난처한 것은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나 유학 온 외국 젊은이들은 개인

(個人) 보다 집단(集團)을 더 우선시 하는 이 같은 한국의 묘한 언어문화에

의구심(疑懼心)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

아가 한국에는 희한한 문화가 있다고 소개한다면 어쩔 것인가.

 
 내 마누라(My Wife)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Our Wife)'로 부르는 한국 남자

들의 우스꽝스러운 언어행태에 그들은 겉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상한 나라’로 보며 무척 재미있어 할 지도 모른다. 북극의 어느 부족(部

族)은 먼데서 손님이 왔을 때 자기 아내를 그 손님의 잠자리에 들여보낸다

는 믿지 못할 속설 (俗說)이 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세계 여러 곳의 오지(奧地) 혹은 상당히 인지능력(認知

能力)이 떨어지는 종족(種族)에게서 에서 감지된다. 신의 자손인 배달민족

(倍達民族)에게서 이 같은 문화가 있다고 외국에 소개된다면 국가적 망신

(亡身)아닌가. 행여 외국인들 눈에 한국에도 그 같은 문화가 있다고 착각하

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오랜 세월 무의식중에 한국인들 뇌리에 박힌 ‘우리’라는 공동소유(共同所

有) 의 개념을 진지(眞摯)하게 되짚어 볼 때다. 아이들이 아빠를 ‘우리 아빠’

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기혼 남,녀가 배우자를 두고 ‘우리

남편’이나 ‘우리 마누라’라고 부르는 일은 끔찍한 상상을 연상(聯想)케 하기

에 충분하다.

 

 수십 년 동안 영어(英語)를 배웠으면서도 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마

누라(Our Wife)’ 또는 '우리 남편(Our Husband)'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요즘 벌어지고 있다. 물론 사이버 세계에서 인연이 닿아 오

라인(Off Line)으로 이어지는 해괴망칙한 일이다. 다름 아닌 현대판 마복자

(摩腹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J라는 유명 여성월간잡지에 ‘인터넷 정자 매매 대리부 충격 인터뷰’라는 제

하에 엉큼한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기사(記寫)가 실려 있다. 아주 드문 경

우지만 불임 부부(不姙夫婦) 중의 부인이 남편과 합의하에 혹은 남편 몰래 

미지의 남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시선을 잡아끈다.

옛날 씨내림이 재연(再演)되고 있는 가히 메가톤급 신문화에 머릿속이 혼란

스럽다.


 돈도 벌고 남의 아내와 성관계도 맺는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공공연히 벌

어지고 있다니 종마(種馬)같은 그 씨내림이 부럽기도 하면서 부끄러워 손바

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다. 남의 씨를 얻어와 대를 잇는다면 그 씨앗이 제대

로 여물지도 궁금하거니와 그런 일이 만연(蔓延)된다면 대한민국의 시계는

1500년 전 신라 중기로 되돌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남편의 허락 하에 다른 남성과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 아내는 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남편의 사랑이 식었을 때 이혼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한평생을 살게 된다. 차라리 순진한 아내를 ‘우리 마누라(Our Wife)’로 만

들지 말고 입양(入養)하는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퇴폐적인 서양문화 가운데 스와핑(Swapping)이란 게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에서도 '부부플러스‘라는 거대 조직이 사법기관에 적발되어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다. 사회 다양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어 가입된 회원 수만도  5,000명

이 넘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호텔이나 펜션 등 타

인의 이목이 못 미치는 은밀한 장소에서 집단으로 만나 남의 남편, 남의 아내

를 끌어안고 쾌락에 겨운 비명(悲鳴)을 질러가면서 스와핑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스와핑에 참가한 여자가 ‘우리 마누라’이고 남자는 ‘우리 남

편’이다. 자신의 아내를 공동 소유의 여자로 만들어 놓은 지아비나, 지아비를

시장에서 팔려고 내놓은 무나 배추처럼 취급하는 지어미를 두고 우리는 간음

죄로 몰린 바리새인 여인처럼 돌팔매를 할 수 없다. 마누라와 남편 호칭 앞에

습관처럼 사용한 ‘우리’라는 소유격 대명사를 붙여 사용한 사회 전반적 묵인

(黙認)을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란 공동체 안에서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共産主義)에서나 있을 법한 ‘공동소유’의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다. 아파트나 땅 같은 부동산(不動産) 혹은 수천만

원 호가하는 모피 코트, 외제 승용차 등 동산(動産)은 철저히 내 것이라고 주장

하면서도 유독 배우자만큼은 공동의 ‘물건’으로 만들어 놓는 묘한 기성세대들

의 뇌리(腦裏)를 들여다보고 싶다.


 한물 간 세대는 차치(且置)하더라도 신세대,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우리 마

누라’, ‘우리 남편’, ‘우리 신랑’이라는 단어가 아닌 ‘제 아내’, ‘제 남편’이라는

말로 평생 반려자를 “공동의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성

세대와 같이 ‘우리 마누라’, ‘우리 집사람’, ‘우리 남편’이라는 해괴한 용어를 남

발(濫發)다면 그 역시 이미 한물 간 세대와 다를 게 없다.

 

 꾸준한 의식개혁(意識改革)이 없다면 그는 한비자(韓非子) 오두편(五蠹篇)에

등장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兎)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 남편' , '우리 마

누라'라는 단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장시간 묵념의 상태로 앉아 있자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자칭 '시인'이

라는 친구가 한 마디 한다.

 

 " 자네 마누라 무서워서 술을 안 마시나? 우리 마누라는 내가 거나하게 한잔

하고 통닭이라도 한마리 사들고 들어가면 '우리 남편', '우리 남편' 하는데......"

 

 

                                                                                                     - 창작일 : 2010.12.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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