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울(3)
- 여강 최재효
“동신씨, 내가 동신씨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모르죠?”
소주를 물마시듯 입안으로 털어 넣은 미선이의 볼이 은은한 불빛에 물들어 늦가
을 탐스러운 사과같았다.
‘미선이가 나를 좋아 했다고?’
나는 미선이의 뜻 밖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요? 나는 미선씨가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꼭 한번쯤 동신씨를 만날 거라고 믿고 있
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 번개처럼 오늘밤에 이루어 졌네요.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원래 우연이란 소나기처럼 찾아오잖아요. 옛 연인, 밤, 술, 강, 강바람, 추억......”
“멋진 단어들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어요.”
“한가지? 그 한 가지가 뭐지요?”
“황새울, 황새울이 빠졌어요. 나는 요즘도 종종 동신씨와 어린 시절 꾀꼬리봉으
로 칡을 캐러 다니던 시절을 회상해보곤 해요. 어떤 날은 꿈도 꿔요.”
“꿈까지?”
나는 꿈이라는 미선이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아직 미선이와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을 꿈까지 꿔 본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 자주 꾸던 꿈 중에는 초등학교 때 상거리에 있는 조선 중기 효종 임금 때 북벌전쟁 준비를 총지휘했던 이완대장 산소나 신륵사 또는 세종대왕님이 영면하고 계신 영릉(英陵)으로 소풍을 갔다가 길을 잃어 어딘지 알 수 없는 마을로 가서 고래 고래 형이나 누이들을 부르다 깨어나기도 하고, 큰 누이가 시집 간 하거리에 놀러 가는 길에 문둥이가 산다는 분도고개를 넘다가 문둥이에게 쫓겨 도망가는 꿈 이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새울 못 본지 꽤 되었어요. 황새울은 잘 있는 거죠?”
“잘 있느냐고? 황새울은 얼마 전에 없어졌어요.”
“없어지다니요? 왜요? 땅이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황새울 가운데로 넓은 길이 나 버렸어요. S그룹이 상거리에 프리미엄아울렛인가 뭔가를 만드는 바람에 황새울은 자취를 감췄어요.”
“아아, 안되는데. 내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미선이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자신과 나의 사춘기를 보냈던 추억의 황새울이 무참
히 짓밟혔다는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황새울에는 나와 연관 된 이미지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며, 그녀
가 장호원으로 이사 가고 난 뒤에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
각한 때문 일 것이다. 나는 미선이가 억울해 하는 표정을 보면서 내 뇌리 한편에 먼
지가 쌓인 채 처박혀 있던 25년 전 활동사진을 돌려보았다.
“미선씨가 그때 이사 간 뒤로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면 지금 가보면 어디가
어딘지 모를 겁니다. 완벽한 상전벽해가 되었다고요. 아마 나도 고향에 어머님이
안 계셨다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가도 어리벙벙할 거라고요.”
“아니 내 고향이 그리 못쓰게 되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변했는데요?”
금방이라도 수정같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미선이의 큰 눈망울이 나를 응시했다.
“동네 앞으로 뚫린 영동고속도로가 동네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여주가 관광지
로 부상하는 바람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요. 황새울에서 읍내까지
예전의 신작로보다 열 배는 큰 도로가 놓아졌고 길 양편으로 모텔, 아파트, 주유소,
상가, 대학교, 식당, 각종 명품 전시관, 가구점 등이 들어차서 옛 기억만 의존하다가
는 변해버린 고향을 보고 실망할 겁니다.”
“그럼, 고향에 가볼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고향은 미선씨 추억 속에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미
선씨 뇌리에 있는 모습은 그 누구도 훼손시키거나 훔쳐갈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황새울에 대한 기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되어가요. 조만간 그 기억
들이 하얗게 지워질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오늘 황새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 그려요.”
나는 장난처럼 미선이에게 시선을 맞추며 제안했다.
“수채화?”
“네에. 수채화. 두 어린 남녀아이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황새울을 뛰어 다니는
장면도 그려넣고 황새울 옆에 돌박지에서 칡을 채는 추억어린 모습도 그리면 되잖
아요.”
“그리고 나는 선녀가 되고 동신씨는 나무꾼이 되어 함께 두레박 타는 장면도 그려
넣으면 금상첨화 일 테고요.”
“그런 그림은 천천히 그리기로 하고 아가부터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 먼저 이야기
해줄 수 있어요?”
“동신씨, 지나간 것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지나간 것은 현실에 방해가 될 뿐
이에요. 특히 내 기억에 지나간 것들은 주로 무채색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다시 들여
다본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해요.”
“인내?”
“잘 아시잖아요. 우리 집안과 동신씨 집안간의 살얼음 같았던 음울한 시기와 우리
아버지의 기행(奇行)과 바람끼는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우리 가족은 철저히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 결국 고향을 등지고 어머니 친정이 있는 장호원으로 이사
를 가야 했던 그 가슴 아픈 우리 가족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미선씨가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에요. 내
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인선씨에게 질문 공세를 펼 일이 없겠지요. 대충 알
고 있을 정도에요. 그리고 그때 내가 미선씨에게 열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는데 나
는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거 기억나요? 내가 미선씨를 밤에 황새울에서 만나자고 쪽지를 보낸 거
말이에요? 나는 그날 밤 늦도록 이슬을 맞아야 했어요. 물론 그 일 뿐만 아니라 미
선씨 어머니 그리고 소아마비 걸린 형님과 동생들 소식도 무척 궁금해요. 어쩌면
그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 혼자 외사랑을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미선이는 턱을 괴고 강 건너 마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 역시 25년 전 정지한 황새울이란 한편의 수채화같은 영화를 기억하려고 애쓰
고 있는 듯 했다. 자작(自酌)하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주잔을 비
우자 나는 얼른 꼼장어 안주를 나무 젖가락으로 집어 그녀의 입에 가까이 댔다.
“이제 서로 돌아올 수 없는 엑스자 길을 가면서 우리 가족 히스토리가 그리 궁금하
다면 해드리지요.”
미선이는 핸드백을 뒤지더니 던힐 라이트를 꺼내더니 나에게 양해도 없이 한가치
를 입에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라이터를 켰다.
“역시, 이것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위로해주지......”
미선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허공에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만족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미선이의 성스런 의식을 감히 제지하거나 중지시
킨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조용한 의식이 끝날 때까
지 소주잔을 홀짝거리며 기다렸다.
하얀 몸통이 빨갛게 타면서 나오는 연기를 맛있게 소화시킨 미선이는 소주로 입가
심을 하였다. 그녀의 빨간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나의 오랜 궁금증이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여보, 미선 아부지. 이러고 있지 말고 동신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빌어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요. 당신이 형사들에게 잡혀가면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가요. 그러
니 나 죽었다 생각하고 무조건 싹싹 빌어봐요. 당신은 동신 아버지하고 형님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잖아요?”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을 어떻게 찾아가누? 저승차사들이 밖에서 두 눈을 치켜뜨
고 있는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는 형사들의 눈치를 보며 미선이 아버지는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황새울에서 아버지와 물꼬 문제로 말다툼 하는 과정에서 허공을 향해
집어 던지 삽이 아버지 등에 맞은 것을 모르고 집으로 들어온 미선이 아버지는 낮
잠을 자다가 찦차를 타고 집으로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연행되기 전에 옷을 갈아입
겠다면서 잠시 짬을 달라고 하였다.
미선이 아버지는 무심코 집어 던진 삽날에 아버지에게 중상을 입힌 줄 몰랐다.
폭행죄로 유치장에 갇힌 미선이 아버지는 백방으로 힘을 써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동네 이장과 반장들이 아버지에게 화해를 권유하여 며칠 만에 미선이 아버지는 유
치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유치장에서 나온 미선이 아버지는 농사일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였다. 읍내에서
복덕방을 운영하는 친구와 어울려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땅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미선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이 밉기도 하였지만 가끔 뭉텅이로 건네주는
돈 때문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속을 끓이고 있었다. 곱게
자란 집안에서 시집 온 미선이 어머니는 농삿일을 잘 몰랐다.
다 큰 아들은 소아마비에 결려 거동이 불편했다. 미선이 아버지 손길이 닿지 않은
황새울 논에는 벼보다 피가 더 많이 피어 있을 정도였다. 미선이 어머니는 동네 청년
들에게 품삯을 넉넉히 줄 테니 피를 뽑아달라고 하였지만 동네 청년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누구도 미선네 논에 피를 뽑아주지 않았다.
“얘, 미선아, 귀신이 곡할 일이 생겼다.”
미선이 어머니는 딸이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한 미선이를 딸이 아니라 친구처
럼 대했다. 학교에서 보충학습을 마치고 돌아 온 딸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뭔데요?”
“낮에 황새울에 나가 보니까 그 많던 피를 누가 뽑았는지 우리 논 반 정도 깨끗하
더구나. 논두렁에 뽑아 놓은 피가 잔뜩 있어. 낮에는 사람들 시선이 있어 뽑지 않았
을 테고. 그러면 분명 누군가 밤에 우리 논에 들어가 피를 뽑았다는 이야기인데. 누
굴까? 귀신은 아닐테고......”
“아버지가 밤에 오셔서 뽑은 거 아녀요?”
“네 아버지는 한번 나가면 보름도 좋고 한 달도 좋은 위인이야. 논에 벼가 심어졌
는지 보리가 심어졌는지 신경도 안 쓰는 그런 위인이 언제 와서 피를 뽑는단 말이니?”
“그럼, 누가 그런 고마운 일을 했을까?” 모녀는 고민 끝에 밤에 논에 나가보기로
하였다.
밤 12시가 다되어 모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손을 잡고 황새울로 향했다.
반달이 꾀꼬리봉을 향해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황새울에 다 왔을 때 모녀는 논두렁에
서있는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였다. 자전거 위에는 교복과 가방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아니, 저기 웬 자전거가 서 있잖니?”
‘저, 저거는 동신이 자전거인데? 이 밤에 동신이 자전거가 왜 저기 서있는 거지?’
“엄마, 저거는 동신이 자전건데......”
“동신이?”
“네에. 동신이 자전거가 분명해요.”
미선이는 전에 몇 번 주막거리에서 버스를 놓쳐 읍내까지 동신이 자전거를 얻어
탔던 적이 있었다. 모녀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논으로 접근하였다. 논
한가운데 누군가가 피를 뽑고 있었다. 달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은 학교 모자를
쓴 사람 모습이었다.
‘아아, 도, 동신이가......’
미선이는 그만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혹시 어머니가 볼까봐 얼
른 눈물을 훔쳐 냈다.
“얘, 저기 저 사람이 누구니?”
“엄마, 도, 동신이 같아요.”
미선이는 목이 메이는 것을 억지로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자
꾸만 흐르는 눈물을 미선이는 소리없이 닦아냈다.
“뭐? 동신이? 아니 그 애가 이 시각에 집에 안 가고 왜 남의 논에서 피를 뽑는단 말
이냐? 즈네 논은 아래에 있는데. 저 애가 우리논과 즈네 논을 구분도 못하는 바보 아니니? 오래살다보니 원 별일을 다보겠네.”
“엄마, 그냥가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우리 그냥가요.”
“아니, 왜 그냥 가자는 거니? 지네 논과 남의 논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녀석을 두
고 왜 그냥 가자는 거야?”
“엄마, 제발 내말대로 그냥 돌아가요.”
미선이는 간청에 모녀는 달그림자를 밟으며 말없이 집으로 향하였지만 두 사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마, 동신이가 우리 논에 피가 벼보다 많은 것을 알고 우리를 도우려고 하는 거
예요. 낮에는 남들 눈이 있어 못하고 밤에 피를 뽑는 거라고요. 우리 집에 논에 나
가 피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려는 거예요.”
딸의 이야기를 듣고 미선이 어머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미선이는 집에 돌아와
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짙은 초록 바다 한 가운데 밤이슬을 흠뻑 맞아가며 달빛
아래서 피를 뽑는 동신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두 집안 간의 미묘한 기류에 동신
이는 개의치 않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어떻게 동신이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하지? 잘못 뜻을 전하다가 자칫 자존심
을 건드릴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알고도 모른 척 하면 도리가 아닌데 어쩌나......’
미선이는 벙어리 냉가슴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동신이가 밤에 만나
자고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받은 미선이는 동신이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고 생
각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미선이는 저녁을 일찍 들고 감자를 찌고 찐
빵을 만들어 동신이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미선이 어머니는 갑자기 토하며 두통을 호소하였다. 미선이는 읍내
복덕방에 전화를 걸었지만 미선이 아버지는 복덕방에 없었다. 미선이는 할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여 어머니를 읍내 병원으로 모셨다. 찐 감자와 찐빵은 주인도 만나지
못한 채 식어갔다. 어렵게 추수를 끝내자 미선이 아버지가 집에 찾아왔다. 미선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줄 옷을 한 아름 사가지고 왔지만 미선이를 비롯한 자식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뭐라고요? 이제 다방 마담년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도 모자라 황새울 논을 팔겠다고? 안돼요? 그게 어떤 땅인데 팔아요? 절대 못 팔아요.”
미선이 어머니는 오랜만에 집에 들려 논을 팔겠다는 미선이 아버지의 청천 벽력같
은 말에 펄적 뛰었다.
“그 논은 아버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논이야. 내가 내 논을 내 마음대로 팔겠다는데
당신이 왜 반대하는 거야? 그 논을 팔아서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사면 나중에 몇 배
는 수익을 올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논 팔면 우리가 당장 굶어 죽나? 거기 말고 독방굴, 벼르실, 평장계, 물미에 논이 있잖아. 얘들 밥 굶을까봐서 그래?”
“이유가 어떻든 절대 황새울 논은 못 팔아요. 팔려면 나를 죽이고 팔아요.”
미선이 어머니는 울며불며 남편에게 대들었다. 두 달 만에 집에 들어와 논문서를
가져가겠다는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미선이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대항하였
다.
“그년하고 놀아나는 것까지 못 본척 해줬으면 고마워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젠 땅까지 팔아요? 당신 집안 말아 먹으려고 작정했어요? 그년이 당신한테 땅 팔
아 오래요?”
결국 미선이 아버지는 황새울 논을 헐값에 팔았다. 미선이는 대학입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미선이 어머니는 황새울 논이 팔리고 난 뒤 자리에 누웠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미선이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공부를 한다는 것
은 딸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미선이는 대학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이야기 하는 중간 중간 나는 그녀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고 라이터를 켜댔다.
그녀의 눈자위가 촉촉이 젖으면서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는 25년 만에
미선이의 마음을 알고 가슴이 쓰렸다. 그런 것도 모르고 오랜 세월 그녀를 원망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갑자기 맑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이면서 빗방울이 하
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