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 내린 눈(3) - 여강 최재효 소연은 춘연의 노모의 배려로 후원에서 박씨녀 함께 기거를 하게되었다. 좋은 약과 충분한 휴식으로 소연의 동상은 금방 부기도 빠지고 곧 회복되 었다. "언니! 고마워요." 불안과 초조속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소연이 어느날 박씨녀와 덕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제는 우리는 이 타국에서 친남매처럼 지내야 해. 그리고 언젠가는 조선 땅으로 돌아가야 하니 그때까지 이집 노마님의 눈 밖에 나면 않되니 요령 껏 행동해야 되" 박씨녀가 친언니처럼 대해주자 소연이 눈물을 흘렸다. "예, 알겠어요, 언니! 언니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께요."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덕칠과 소연은 노복들과 어울려 집안 일을 거들고 춘연의 노모와 노복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 조선 땅으로 출전한 이춘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 두달간 악전고투하며 청군에 맞서 싸우던 상감은 정월 30일 세자등 백관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오랑캐의 왕에게 굴욕적인 항복하 였다. 조선은 향후 청국에게 군신(君臣)의 예로 받들어야 하며, 소현세자와 봉림 대군 그리고 비빈들을 인질로 청국에 보내고, 척화(斥和)의 주동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 대감을 청나라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2월중순 청군은 조선 땅에서 완전히 철수를 하였다. 조선은 청의 형제의 나라 에서 신하의 나라로 전락되었고, 이후 250여년간 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 온 수 십만의 조선백성들과 병사들을 사고 파는 인간시장이 심양과 요양, 대련, 하얼빈등 만주지역 큰도시에 생겨났다. 청국의 군인들과 결탁한 상인들에게 잡혀 온 조선의 순박한 백성들은 대개 젊은 청년들과 부녀자들인데 이들은 보통 250냥에 매매 되었다. 오랑캐군 에게 포로로 잡혀 온 조선군사들과 양반가의 자제 및 규수들은 청국조정에 1,500냥 이상의 속가(贖價)를 내야 풀려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조선 조정에서는 상감을 비롯 대신들간에 청국에 잡혀간 백성들 반환문제로 설전이 벌어졌지만 속가를 요구하는 청국의 조건에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전쟁중에 국고는 이미 바닥이 났으며 관리들 녹봉 (祿俸)도 제대로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정진경의 가족들은 목멱산 기슭에 사는 고모집에 피신해 있다가 전쟁이 끝나 무사히 운종가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뿐 집은 무사했다. 정 진경은 오랑캐에게 잡혀간 처 박씨가 걱정이 되어 어머니인 김씨에게 처를 찾아와야 하니 돈을 마련해 청국에 가서 찾아 와야 한다고 했지만 김씨는 냉담했다. 젊은 처자가 떼놈들에게 잡혀갔으니 몸이 더럽혀 졌을 것이기 때문에 정씨 가문의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김씨의 주장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던 정진경에게는 하루 하루가 지옥 같았다. 밤마다 부인 박씨의 얼굴이 나타나 살려달라고 했다. 자신 또한 조정에 출사하는 지라 개인적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백성들 개인 자격으로 청국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사신이 청국에 가면 그 사신들을 따라가서 가족을 찾아 데려오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박씨녀의 친정 아버지는 사위 정진경에게 하루 빨리 청나라에 가서 자신의 딸을 찾아 올 것 요구하며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정 진경이 병부에 알아보니 처 박씨와 덕칠이 작년 12월 초순경 오랑캐 고급군관인 이춘연을 따라 청국의 수도 심양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6월말에 경조사(慶弔使)가 청국으로 떠나고 9월경 청국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떠난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진경은 어머니 김씨 몰래 부인 박씨를 찾기로 결심을 하고 병조에서 발부해 주는 피로인(被擄人) 가족임을 증명하는 확인증을 발급 받았다. 그리고 경조사절로 가는 관리중 안면이 있는 자에게 청국에 있는 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춘연이 춘삼월 조선에서 돌아오자 집안에 활기가 넘쳤다. 이춘연의 부모는 박씨녀를 며느리처럼 대해주었고 박씨녀도 그런 춘연의 부모에 대하여 서서히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자연 박씨녀가 이춘연의 부인 역할을 했으며 춘연은 하루 하루가 즐거움의 나날이었다. 그러던 6월 중순경 박씨녀의 몸에 이상 징후가 왔다. "아, 이 일을 어쩐다." 지난달 부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박씨녀의 몸 속에 오랑캐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자 박씨녀는 춘연과 노모에게 알렸다. 춘연의 노모는 임신한 박씨녀를 친딸 이상으로 잘 대해주었다. 밤이면 이춘연은 박씨녀와 소연의 처소를 번갈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낯선 조선인이 찾아와 박씨녀에게 전해달라며 덕칠이에게 편지를 전하고, 내일 다시 올테니 답장을 달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공물을 가지고 축하사절로 온 하급관리였다. 편지를 받아든 박씨녀는 손이 떨렸다. 여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오. 당신이 용산수용소에서 오랑캐군관과 심양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은 살아있다 는 것에 조상님께 감사를 드렸소.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두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소. 당신이 무사하기만을 천지신명께 빌고 있다오. 휘영청 밝은 달밤이면 당신생각에 눈물로 지샌 다오. 그리고 9월달 천추사가 심양으로 떠날 때 나도 따라 가려하오. 그때 당신을 만나 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말하고 속가를 주어 당신을 조선 으로 데려 오려고하오. 혹시 당신에게 해가 될지 몰라 간단히 몇자 적으니 그리 아시고 항상 건강하고 마음 굳게 하고 계시오.
정축(丁丑)년 6월 초순 한양에서 정진경 박 씨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자 곁에서 바라보던 소연이 위로를 했다. "언니,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언젠가 조선 땅으로 돌아갈 날이 오겠지요." 박씨녀는 복받치는 서러움과 통한으로 눈물을 쏟았다. "어찌하다 내가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어찌하다가." "언니 울지 마셔요. 꼭 한양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 거예요." 소연이 박씨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위로를 해주었다. "언니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답장을 쓰세요. 내일 조선에서 온 그 선비가 오신 다고 하잖아요." "그래, 소연아! 고맙다. 아마도 네가 없었다면 내 외로워서 어찌 살았을꼬" 박씨녀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혹시 편지를 가지고 조선으로 가다 오랑캐 군사에게 발각될 경우를 염려해 평소 배워둔 언문(諺文)을 사용해 한양에 있는 정진경에게 연시(聯詩) 형식의 편지를 썼다. 1
한쌍 원앙되어 해로동혈 하려하였거늘 무슨 이유 있어 멀리 오랑캐 땅 짝 잃은 기러기 되었을꼬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 돌아와 한 시절 제 세상 만난듯 저리도 행복하거늘 내 무슨 전생 업보 있기에
2 눈물도 이제 그 근원이 다한 듯 마르고 가슴마저 삭막해져 가거늘 남녁 하늘로 흘러가는 구름아 멀리 조선 한양 땅 서방님께 내 원통한 사연 전해다오 몸 비록 멀리 타국 땅 있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한양 하늘 아래 있음을 3
저 연꽃 한창이고 나 또한 저리 피어 있어야 하거늘 날 지나고 나면 또 시듬을 보는구나 저 제비 강남가고 나면 기러기 날아들 테고 그 때쯤이면 서방님 품에 안겨 운우의 정 나누어 볼 수 있을지 정축년 6월 멀리 오랑캐 땅에서 당신을 그리며 못난 소첩 올립니다. 편지를 쓰고 난 박씨녀는 불운 씨앗이 꿈틀거리는 배를 잡고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얀 종이위에 눈물이 점점 떨어졌다. 다음날 조선에서 온 그 선비에게 덕칠이 박씨녀의 편지를 전했다. 불륜의 씨앗은 박씨녀의 의지 와는 상관없이 무럭무럭 커갔다. 그 씨앗이 커갈 수록 박씨녀는 걱정이 되었다. 3개월후 한양에서 남편 정진경이 자신을 찾아오면 분명 자신이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순진한 정진경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번한 사실이었다. 며칠을 밤잠 못자고 고민하던 박씨녀는 아무리 오랑캐인 이춘연이 자신을 잘 대해준다 하여도 자신의 배속에 불륜의 씨앗을 키울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유산을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청나라에 경조사로 떠났던 일행이 돌아와 박씨녀가 써준 답장을 받아 본 정진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한바탕 밤 소낙비가 한양 땅을 휘몰아 친 후 휘영청 밝은 달이 흥인문(興仁門) 위로 떠올라 종로와 경복궁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부인 박씨의 편지를 읽은 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부인생각에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내렸다. 복사꽃 보다 환하고 어여쁜 부인 박씨의 얼굴이 떠올라 달 속에 투영되어 환히 웃고 있었다. "여보! 미안하구려, 내가 죄인입니다. 당신을 그 먼 오랑캐 땅에 버려 두고 데려오지 못하고 있으니... 못난 남편을 용서하구려." 경진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오열했다. "그때, 달려가 부인을 구했어야 하는건데..." 작년 12월 목멱산 고모 댁으로 피난갈 때 부인이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이 얄미웠다. 당시에는 부인도 중요하지만 만약 들킬 경우 어린 아이들과 늙은 부모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보면서도 숨죽이고 있었던 자신이 사내답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늘 시달려 왔다. 경진은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백거이의 시를 인용해 글로 표현했다. 臨別心勤重奇詞(임별심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마음속 부탁했는데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그 말 중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맹세의 말 七月末日漢陽之(칠월말일한양지) 칠월말일 한양에서 深夜無人私語時(심야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生天願作比翼鳥(생천원작비익조) 하늘에 나면 비익조가 되고 生地願爲連里枝(생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天地間有時盡也(천지간유시진야) 하늘과 땅 사이 시간도 다함이 있으나 此恨永遠無絶期(차한영원무절기)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丁丑(정축)년 7월말 깊은 밤, 달에게 부탁해 멀리 심양으로 보내노라 박씨녀는 소연과 짜고 이춘연과 노모 모르게 낙태약을 구해 뱃속의 아이를 유산시키고 몸이 쇄약해 자연 유산이 되었다고 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이춘연의 노모는 아쉬워하면서 박씨녀가 가여워 더 잘해 주었으며 자신의 씨앗이 유산 되었다는 소식에 춘연은 크게 낙심하였고 박씨녀가 한달 정도 누워 있자 밤이면 춘연은 소연의 방을 드나들었다. 9월 하순 청태종의 황후 보르지지트의 생일이었다. 조정에서는 40명 규모의 천추사를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정진경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심양 으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팔월 하순 한양을 떠난기전 정진경은 부인 박씨를 찾아오기 위해 어머니 김씨 몰래 속가 삼천냥을 준비했다. 부인 박씨의 본가에서도 사위 정진경이 청 나라 천추사 일행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천냥을 준비해 전해주었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 정진경은 심양을 향해 떠났다. 가족이 오랑캐의 포로가 된 한양의 많은 양반가에서도 가족들을 데려 올 속가를 마련 하여 천추사가 청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무려 수 천명이 넘었다. 물론 상당수의 노비나 양민 천민 가지 것이 없는 한양의 백성들은 청국으로 잡혀간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는 자신 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이가 속출했다. 조선 건국이래 천명이 넘는 조선사람들이 사절단과 함께 중국에 간 적이 없었다. 청국으로 떠나는 대규모 사절단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한양 백성 들이 대궐 앞으로 몰려들었다. 10리에 이르는 긴 행렬이 청국을 향해 떠나가자 많은 가난한 백성들이 편지를 써서 혹시라도 자신의 누이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전해 달라며 일행들에게 부탁을 하는 슬픈 광경이 펼쳐졌다. 한양을 떠난 천추사 일행이 한달만에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의 날씨는 썰렁했다. 천추사 일행으로 온 정진경은 부인 박씨를 찾기 위해 당도한 날부터 낯설은 심양 시내를 헤매며 이춘연의 집을 찾았다. 오랑캐 말을 하지 못하는 정진경은 우여 절 끝에 다음날 밤늦게 겨우 이춘연의 집을 찾았 지만 부인 박씨를 생각해서 다음날 다시 찾기로 하였다. 오랑캐의 씨앗을 낙태시킨 박씨녀는 점차 이춘연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자신이 인간시장에서 구해준 소연이 밤이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으며 박씨녀는 그런 소연이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타국에서 오랑캐 남자를 사이에 두고 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었으며 소연 역시 박씨녀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느즈막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난 박씨녀에게 덕칠이 살며시 찾아 왔다. "아씨! 한양에서 서방님이 찾아 오셨어요." 박씨녀는 귀를 의심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꾼 후라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터였다. "뭐라고 했니? 지금?" "아씨, 놀라지 마세요. 한양에서 서방님이 찾아 오셨어요." "덕칠아, 서방님이 오셨다고? 정말이지? 지금 어디 계시니?" 박씨녀는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네에, 제가 막 대문을 열고 나가려 하니까 서방님이 대문 앞에 서 계셨어요. 반갑기도 하였지만 혹시 누가 볼 까봐 저자거리 주루(酒樓) 2층 객실로 모셨어요. 지금 다행이 노마님도 안계시고 하니 잠시 다녀오세요." "덕칠아, 나하고 다녀오자. 그런데 집안에서 내가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박씨녀는 노복들의 눈초리가 걱정이 되었다. "아씨, 걱정 마세요. 모두 저와 친하니까. 잠시 바람 쐬고 온다고 할께요." 박씨녀는 오랑캐 복장을 하고 소연이에게 한양서 남편이 찾아온 사실을 알려주고 나갔다. 박씨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덕칠이와 집을 나섰다. 주루에는 대낮 에도 술에 취한 오랑캐 군인들과 상인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불량스러운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미색의 박씨녀가 주루로 들어서자 오랑캐들의 눈초 리가 일제히 박씨녀에게 쏠렸다. 정진경은 간단한 요리와 술을 시켜 놓고 부인 박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방님! 아씨 모시고 왔습니다." 정진경은 마시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래?" 부인 박씨를 만날 경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낮술을 마시던 진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인!" 정진경은 9개월만에 부인 박씨를 보자 눈물이 글썽거렸다. "서방님!" 박씨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정진경의 품에 안겼다. "부인,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용서하시구려." 진경은 눈물을 머금고 부인 박씨를 꼭 안아 주었다. 부인 박씨가 오랑캐 복장을 하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부인, 미안하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제 지어미 하나 건사하지 못한 죄 백번 죽어 마땅 하오.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정진경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부인을 보자 그동안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자기의 여자에게 남자 노릇을 못한 것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이 못난 남자를 용서하시오.” “서방님, 울지마셔요. 이 일은 서방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라님의 실정(失政)으로 인한 것입니다. 울지마셔요. 서방님.” “아니오. 아니오. 나라님 잘못이 아니라 이 못난 남자의 잘못입니다. 나는 그동안 부인을 오매불망 그리워하였습니다. 이제 이렇게라도 부인을 만나보니 가슴의 응어리가 봄 눈 녹는 듯하오. 그동안 얼마나 고초가 크셨소?” “서방님, 그동안 소첩도 서방님과 두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 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도 무탈 하신지요? 그리고 근영이와 근수도 잘 있는지요?” “부인, 걱정 마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두 아이들은 잘 있어요. 다만, 다만 부인이 집에 없어 집이 텅 빈 느낌입니다. 너무 쓸쓸 하답니다.” 정진경은 부인을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 "서방님, 이 못난 소첩을 용서하세요." 박씨녀는 정진경에게 절을 하였다. 두 사람이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부둥켜 안고 있었다. "부인, 이제 나와 조선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서 속가를 준비해 가지고 왔소.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갑시다." 정진경은 부인 박씨가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지라 속가를 치르면 내일이 라도 당장 부인 박씨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서방님, 전 지금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이춘연이란 사람의 노예로 잡혀 있는 몸입니다. 제가 조선에 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의향에 달려 있답니다. 지금도 그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시 나왔어요. 제가 집으로 돌아가 사정해 보겠습니다. 서방님은 조선관원의 신분으로 오셨으니 부디 처신 잘하 시고 내일 이맘 때쯤 이 주루에서 기다려 주세요." 박씨녀의 눈에서 뺨으로 하염없이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리 하리다, 부인.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이 주루로 오겠소. 내가 그 분을 찾아 뵙고 속가를 내고 당신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겠소." 정진경은 다시 부인 박씨를 부둥켜안았다. 그 날 이춘연은 밤늦게 귀가했다. 박씨녀가 자신의 아이를 유산한데 대한 반감으로 그 동안 밤마다 소연의 처소를 찾던 이춘연이 오늘밤에는 오랜만에 박씨녀의 처소를 찾았다.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으며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박씨녀는 조선 땅에서 남편 정진경이 자신을 조선 땅에 데리고 가기 위하여 찾아 왔다는 사실을 말하자, 이춘연은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 이춘연이 조선 땅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왔다. 박씨녀가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눈물로 하소연 하였으나 역시 이춘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예전에 늘 그랬던 것 처럼 박씨녀의 옷을 벗기고 욕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박씨 부인은 낙태이후 어쩔 수 없이 오랜만의 방사(房事)를 치루었다. 코를 고는 이춘연의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박씨녀는 마음이 착찹했다. 멀리 조선 땅에서 온 남편 정진경이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과연 자신을 데리고 조선으로 갈려고 할지 의문이 들었다. 아침이 밝아왔지만 이춘연은 박씨녀에게 아무 응답이 없었다. 박씨녀는 큰 고민에 빠졌다. 분명 오늘 남편 정진경이 자신에게 반가운 소식을 기대하며그 주루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이춘연으로부터 아무 답변을 듣지 못했으니 다시 남편을 만난다 한들 전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가슴에 큰 상처만 남길 것 같아 편지를 써서 전하기로 했다. 서방님 전상서 어제 서방님 만나 뵙고 돌아와 한숨도 잠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소첩은 스스로 무엇을 어찌 할 수 없는 매인 몸입니다. 주인에게 조선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선처를 구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소첩 가슴이 찢어질 듯 합니다. 서방님, 이곳은 오랑캐의 땅입니다. 소첩의 모든 것은 이춘연이란 청국 고급군관의 손에 달렸습니다. 서방님을 따라 한양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나중에라도 때가 된다면 소첩 혼자라도 한양으로 가겠습니다. 부디 옥체 보존 하시고 평안히 돌아가시옵소서. 못난 첩 올림 편지를 써놓고 박씨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후 덕칠이를 불러 편지를 전 했다. 약속한 때 보다 미리 주루에 와 기다리고 있던 진경은 부인 박씨의 속가 (贖價)만 주면 부인을 데리고 조선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었다. 덕칠이 무거운 마음으로 박씨녀의 편지를 전했다. "아니, 너 혼자왔는냐?" 눈이 휘둥그래진 진경이 덕칠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예, 서방님! 아씨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편지를 읽고 난 정진경은 충격을 받은 듯 한 동안 멍하니 하늘만 처다 보며 슬피 울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국의 낯선 남자가 주루에 앉아 울고 있자 변발을 한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재미 있어 했다. 오랑캐들은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며 전쟁에서 붙잡아 온 조선백성들은 천한 노비 취급을 했다. "서방님! 간단히 편지라도 써주세요. 아씨에게..." "아니다, 덕칠이 네가 본대로 전하고. 이 돈을 너에게 줄 터이니 아씨께 전하 거라. 나는 내일 조선으로 떠나야 한단다. 그리고 내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 아씨 마음도 변치 말라고 전하거라." "서방님, 간단히 한 줄 써주세요." 덕칠이 다시 재촉하자. 한참 생각 후에 편지 한 장을 써 주었다. "덕칠아, 이 편지를 아씨께 전하거라.." 정진경은 편지와 돈 꾸러미를 덕칠에게 주었다. 정진경이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黃鳥歌) 한수로 자신의 마음을 읊은 작별 편지를 받아 본 박씨녀는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운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당신을 그리며 - 정 진경 - 복 받쳐 오르는 서러움과 그리움 그리고 꿈속에서 보고싶었던 님이 가까이 왔지만 볼 수 없는 현실이 통탄스러웠다. 곁에서 지켜보던 소연이 박씨녀의 등을 다독거리며 달래 주었다. "언니, 그만 울어요. 몸도 좋지 않으신데..., 언젠가는 조선 땅을 밟을 날이 올거에요. 서방님께서 속가까지 주시고 가셨잖아요." 소연이 울고있는 박씨녀를 달래 보았지만 흐르는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 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박씨녀는 남편이 주고간 돈 사천냥을 이춘연의 노모 에게 내밀며 남편이 조선에서 찾아 왔던 사실을 전하고 박씨녀와 소연 그리고 덕칠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이춘연의 노모 역시 응답이 없이 아들이 돌아오면 상의해 보겠다는 말만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몇 달이 흘렀다. 만주 땅에 새봄이 오고 슬피 울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남편 정진경이 조선에서 다녀간 후 박씨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고 소연이 이춘연의 씨앗을 잉태하자 지난해 유산의 경험이 있던 이춘연과 노모는 소연을 더욱 애지중지 하며 일체의 잡일을 시키지 않고 별채를 마련해 주며 하인들에게 모든 수발을 들도록 했다. 이춘연은 자주는 아니지만 박씨녀의 처소를 찾아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박씨녀 처소를 찾은 이춘연이 조선 으로 가고 싶냐고 물었다. “하오, 흔하오.” 박씨녀는 그 말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제야 길고 긴 속박에서 벗어 날 수 있 다는 희망에 박씨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박씨녀가 정색을 하고 이춘연에게 절을 하자 이춘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박씨녀의 감사의 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과 자신의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 받든 박씨에게 이춘연은 고마워하면서도 이제 박씨녀를 자유롭게 해준 것에 대하여 미안한 감이 들었다. “소첩 비록 오랜 세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소첩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조선에 돌아가서도 절대 잊지 않겠나이다. 대인,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하오, 하오. 핑샹.” 이춘연은 박씨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조선 한양에서 부터 자신을 따라와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한마디 불평불만하지 않은 박씨녀가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에 지아비와 아이들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해 했다. 박씨녀가 눈물로 하소연 하자 이춘연은 박씨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승낙을 했다. 박씨녀는 그 말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으리,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지요? 제 몸은 비록 나으리께 매여 있지만 마음은 늘 멀리 조선 땅 한양에 있답니다. 이제는 저를 고향에 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고향쪽 둔다고 하는데, 한양에 두고 온 자식들이 눈에 밟힌답니다." 박씨녀가 눈물로 하소연 하자 이춘연은 박씨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승낙을 했다. "하오! 하오!" 이춘연은 그 동안 소연과 박씨녀 사이에서 나름대로 신경이 무척 쓰였다. 비록 포로로 잡혀 온 조선 여자였지만 두 여인 모두 정성껏 자신의 노모를 공경 하고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해준 데 대하여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심양에서 늘 봐왔던 오랑캐 여인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자색도 곱고 교양이 있었으며 학식도 겸비해 두 여인중 한 명을 정실(正室)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했었다. 박씨녀는 자색이 뛰어나도록 고왔지만 이미 출산을 한 몸이었고 조선 땅에 남편이 있는 몸이며 소연에 비해 나이가 약간 많았다. 그러던 중 소연이 자신의 씨앗을 잉태하였고 자연 소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박씨 녀의 눈빛이 거북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춘연은 박씨녀를 껴안고 음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박씨녀 역시 어느 때 보다 기뿐 마음으로 춘연을 받았다. 대륙의 황야에서 들짐승처럼 살아 온 이춘연에게서 남편 정진경으로부터 맛 볼 수 없었던 단단함과 거친 사내의 숨결을 몸으로 익혀야 했던 박씨녀 자신 도 모르게 오랑캐 사내의 손길에 연주되는 악기가 되어 있었다. 동방예의 지국의 사대부가에서 곱게 자란 화초 같은 박씨녀에게 이춘연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남편 정진경이 문약한 선비라면 이춘연은 한 마리 야생마였으며 자신의 의지 와 달리 몸은 이춘연에 의해 다양한 방중술로 원숙한 여인으로 단련되어 갔다. 긴 연주후 이춘연의 단단함이 거친 파도처럼 박씨녀 몸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어느 때 보다 경쾌한 신음소리, 박씨녀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지만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육욕의 향연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박씨 녀와 운우의 정을 나눈 이춘연은 조선의 꽃을 꼭 안아주며 잠을 청했다. 박씨녀 역시 곧 조선 땅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이춘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춘연의 승낙이 있은 이후 박씨녀는 이춘연에게 부탁해 덕칠과 함께 조선 으로 갈 수 있도록 청을 하였고 이춘연은 흔쾌히 허락을 하였다. 소연은 박씨녀가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부러우면서도 뱃속에 오랑캐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현실이 얄미웠다. 조선 땅에서 소연을 찾겠다고 찾아 오는 가족은 없었다. 이춘연과 춘연의 노모는 소연을 정실부인으로 대해주었고 혼례식까지 치러 주어 당당한 안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 6월 초순 박씨녀는 이춘연과 춘연의 노모께 큰절을 올리고 덕칠이도 함께 심양을 떠났다. 달포만에 물어물어 압록강에 도착하자 장마로 물이 불어 강을 건너는 뱃길이 막혀 버렸다. “아, 이럴수가 내 조국의 땅 조선이 코앞에 있는데 여기서 발이 묶이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할 수 없이 오랑캐들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어야 했다. 여관의 주인은 이상한 눈으로 박씨와와 덕칠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 했다. 2층에 위치한 객실에 덕칠이와 보내야 했다. 덕칠은 상전인 아씨와 같은 방을 쓴다는 사실에 너무 송구스럽기만 했다. 덕칠은 박씨녀가 잠든 것을 보고 문옆에 기대어 잠이들었다. 새벽녘 이상한 그림자들이 박씨녀가 잠든 방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들 중 검은 그림자가 잠시 두리번 거리며 사방을 살피더니 간단히 방문을 열고 박씨녀에게 접근했다. 박씨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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