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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비(4)

* 창작공간/단편 - 천년 비

by 여강 최재효 2006. 11. 27. 12:54

본문

 

 






 

 

                     

  

 





             천년 비(4)

 

 

 

 

                                                                                                                                                            - 여강 최재효

 

 

 

 

  월지에서 돌아 온 뒤로 위홍은 앓아 누웠다. 여왕은 막내 아들 양패

와 어의(御醫)를 파견하여 위홍을 간병하도록 하였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사랑하는 연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대소신료

와 세인들의 이목이 두려웠다. 여왕에 등극하기 전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지만 여왕이 된 이후로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

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낮 부터 술로 괴로운 심사를 달래고 있던 여왕이

유모(乳母)이며 위홍의 처인 부호부인을 불렀다.


  “폐하, 소첩 대령하였습니다.”
  “유모, 어서오세요.”


  한 남자를 두고 있으나 마나한 처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안달이 날 정

도의 사랑에 눈먼 여인, 두 여인이 오랜만에 대면하게 되었다. 여왕은 한

여인의 지아비를 독차지한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해 했고 그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부호부인의 행동을 눈감아 주었다. 여왕의 그러한 의도를 간파한

부호부인은 고관들과 향리들로 부터 많은 뇌물을 받고 은밀히 관직을 알선

주는가 하면, 서라벌에서 내로라하는 부호(富豪)들 부인들을 자주 집으

로 초대하여 은근히 협박반 회유반으로 뇌물을 챙기곤 했다. 남편이 자신

을 잊고 있는데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였다. 산더미처럼 긁어모은 재물로

부호부인은 공허해진 마음을 달랬다.

 

  당나라에서 수입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비단과 능라로 만든 수백 벌의

호사스러운 옷을 차려 입고 서라벌에서 가장 잘 생긴 젊은 한량들과 어울

리면서 돈을 물 쓰듯 했다. 공공연히 젊은 정부(情夫)를 집으로  끌어 들이

기도 하였지만 누구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짐이 숙부 집으로 행차를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마음이 몹씨 아프

답니다. 숙부의 상태가 어떤지요?”
  “폐하, 각간께서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숙부의 병세가 그 정도 예요?”
  “겨우 물 몇 모금만 넘기십니다.”
  “그래, 어의가 뭐라고 합니까?”


  “노환과 함께 그 동안의 피로가 겹쳐 심신이 많이 쇠하여 쉽게 일어나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부호부인은 여왕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위홍의 병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어릴 때에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장난질도 치며 마음대로 가지고 놀

던 어린 아이였지만 지금은 신라의 통치자가 되어 있는 여인에게 부호부인

은 두려움과 함께 질투를 느겼다.


  “쉽게?”

  "네, 폐하"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그이를 살려 주세요. 아직 이르옵

니다. 나무 아미타불……."


  여왕은 위홍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으로서 두 오빠

정강, 헌강왕을 보필해 무리 없이 국정을 이끌었고 자신이 여왕으로 등극하

기 훨씬 이전부터 연인사이가 되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국정을 안

정되게 이끄는데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이제는  사랑하는 연인이 병마(病魔)

싸우고 있다니 여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 어찌한다? 함부로 궁궐을 나갈 수도 없으니…….
  “유모, 내 오늘밤 무슨 일이 있어도 숙부를 찾아 뵐 거예요. 유모는 돌아가

숙부 간병에 성심을 다하도록 하세요.”
  “폐하, 오늘밤 저희 집에 행차하신다고요?“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에는 꼭 각간 어른을 뵈어야 겠어요. 꼭.”
  여왕은 유모 손에 얼마의 패물을 쥐어 주고 각간 위홍의 병간호를 부탁했

다.


  술시(戌時)가 되자 여왕은 시녀 둘과 호위무사 두 명만 대동하고 각간의

집이 있는 소량리로 향했다. 행여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일행은 평

민복으로 갈아 입었다.  여왕의 마음이 이미 각간 곁에 있었지만 발걸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왕이 각간의 집에 도착하자 오리부인과 많은 비복들

이 여왕의 행차를 맞이했다. 


  “폐, 폐하, 어찌 손수 누추한 곳 까지 납시시었습니까? 소신, 방에서 폐

하를 맞습니다. 불충을 용서하소서.”


  부호부인에게 미리 소식을 전해들은 각간 위홍은 간신히 일어나 앉아 여

왕을 맞았다. 며칠 사이에 위홍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수척하게 말라 있었

고 계속 기침을 해댔다. 위풍당당한 풍채는 간데없고 병든 늙은 남자가 몸

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각간의 마른 얼굴에는 저승꽃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피어 있었다. 머리 맡에는 방금 마신 흔적이 있는 탕약

사발이 놓여 있었고 발치에 있는 하얀 비단 손수건에는 검붉은 것이 묻어

있어 위홍의 병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며칠 사이에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여왕은 위홍의 손을 잡고 소리없이 굵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비 오듯

쏟는 여왕을 보고 위홍은 마음이 쓰려왔다.


  “폐하, 울지마소서.” 

  “숙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예요? 어찌요?”
  “폐하,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가 봅니다? 이제 소신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합니다.”


  위홍은 여왕의 손을 꼭 잡았다. 여왕이 따스한 체온이 전신에 퍼졌다. 여

왕의 두 눈동자에서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려 위홍의 마른 얼굴 위로도

떨어졌다. 여왕은  지난 10년간의 위홍과 아기자기했던 일들이 생각나자

더욱 복받쳐 통곡을 하였다.

 

  "폐, 폐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숙부,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했나 봅니다. 용서 하세요."

  "아닙니다. 삼라만상은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소신 또한 때가 되었을

뿐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


  위홍은 여왕을 위로하려 하였지만 여왕은 더욱 큰 소리로 흐느꼈다.

한참동안 울고 난 여왕은 눈물을 닦고나서 위홍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바짝 마른 장작처럼 위홍의 양 다리는 감각이 없었다.  


  “숙부, 힘내셔요. 환절기라 잠시 몸살기운이 있을 뿐 숙부는 다시 일

어나실 거예요. 다시요, 그러니 절대 마음 놓지 마시고 약 드시고 몸을 추

슬러야 해요. 숙부.”
  여왕은 절규에 가까운 말을 이어갔다.


  “만세반석처럼 단단한 숙부입니다. 이 까짓 노환쯤이야 얼마든지 물리

칠 수 있어요. 꼭 일어 나셔야해요. 소첩, 숙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답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만 계시면 어떻게 해요,

숙부?”


  위홍은 여왕의 섬섬옥수를 꼭 잡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여왕의 눈물

과 노안에서 샘솟듯 한 눈물이 섞여 위홍의 두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

다. 여왕이 손수건으로 위홍의 눈가에서 눈물을 찍어냈다.


  “고맙습니다. 폐하. 소신 폐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일어나겠습니다.”
  “암, 그래셔야죠. 그래야하고 말고요.”
  “폐하, 소신이 누워있는 사실을 밖에 알리지 마소서. 만일 소신의 병환

이 밖에 알려질 경우 조정은 물론 세간에 흉흉한 소문이 일어날 수도 있

습니다. 그러니 제가 누워있는 것을 비밀로 하세요.”


  신라 조정은 여왕이 등극한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잠복

해 있었다. 각간 위홍의 위엄에 눌려 조용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

게 위홍의 병환 소식이 알려질 경우 조정에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 바람

이 불수 있었기 때문에 위홍의 걱정은 컸다. 자신도 빨리 병석에서 일어

나고 싶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가는 심신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숙부, 걱정 마시고 어서 일어 나셔요.”
  “폐하”
  “네, 말씀하세요. 숙부.”


  “소신이 만에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용서하여 주소서. 소신

이 헌강대왕 때 이 땅에 부처님의 법력이 넘쳐 천년 왕국의 염원과 폐하

와의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쌍의 비로자나불상을 만들어

북궁해인수에 안치했습니다. 행여 소신에게 소원이 있다면 폐하와 해인

수에 가보는 것입니다.”


  “숙부, 염려마세요. 그곳에 꼭 갈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어서 쾌차하

셔야 해요.”
  여왕은 흐느끼면서 위홍의 거죽만 남은 손을 꼭 잡았다. 가늘게 뛰는

위홍의 맥박이 여왕의 손에 전해 졌지만 예전에 활화산처럼 포효하던

맥박이 아니었다.


  “숙부, 다시 올 테니 염려마세요.”
  “폐하, 폐하…….
  울음 섞인 위홍의 목소리가 점점 쇳소리로 변하면서 작아졌다. 여왕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숙부, 용서하세요. 이렇게 숙부를 남겨 놓고 궁궐로 돌아가야만 하는

소첩을 용서하셔요. 곧 다시 들리겠습니다. 꼭 예전처럼 일어나시리라 믿

어요.”


  “폐하, 고맙습니다. 다시는 오지마세요. 소신이 일어나 다시 등청(登廳)

할 테니 폐하는 누추한 이곳에 다시 납시지 마소서. 남의 이목이 두렵사

옵니다.”


  “숙부, 우리의 사랑이 아직 갈 길이 먼걸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

안 돼요. 전 누굴 의지하고 살라고요? 절대로, 절대로 숙부를 이대로 쓰

러지게 할 수 없어요.”
  “폐하-.”


  여왕은 흐느끼는 위홍의 가슴 위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부호부인과

양패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한식경이 되어도 여왕은 자리

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두 사람이 무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 했다.


  “어머니, 이제 그만 궁궐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자시(子時)가 훨씬 넘

었습니다.”

  밖에서 대령해 있던 양패가 방으로 들어왔다.
  “폐하, 양패 말이 맞습니다. 어서 돌아가 보셔야 합니다. 양패야, 어서

폐하를 모시고 돌아가거라. 너무 늦었다.”


  “네, 아버지. 소자 내일 다시 들리겠습니다.”
  “숙부, 몸조리 잘하시고 계세요. 다시 들릴게요.”
  대궐로 돌아온 여왕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사이에 초췌하게 늙어

버린 충격적인 연인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 거렸다.


  “여봐라, 술을 내오너라. 이대로 잠을 청할 수 없느니, 어서 술을 내오

너라.”
  여왕은 자작(自酌)하면서 혼자 큰 소리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여왕은 잠이 들었다. 여왕이 기침

한 시각은 다음날 오후가 훨씬 지나서 였다. 


  “어머니, 소자, 양패이옵니다.”
  여왕의 침전에 든 양패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오오, 내 아들 양패야. 어서 오너라. 아침 일찍 무슨 이일 있느냐?”


  “어머니, 지금은 오후가 훨씬 넘어 저녁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니?”


  “간밤에 어머님이 다녀가신 뒤로 각혈을 하시고 정신을 놓으셨다고 합

니다.”
  “뭣, 뭐라고? 각혈을 하셨다고?”
  “네에, 어머니.”


  ‘아아, 큰일이로다. 이 일을 비밀로 할 수도 없고.’
  “양패야, 너는 지금 당장 시중과 각부 장관회의를 소집하라고 전하라.

그리고 어의에게 대각간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하라.”
  “네에, 어머니. 그런데 대각간이라니요?”


  “네 아버지를 대각간으로 승차시켜야 겠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폐하.”
  여왕은 괴로웠다. 다시 초췌하게 변한 위홍을 생각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위홍은 이미 예전의 연인(戀人)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의 위홍에 대

한 애틋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을 위하여 숙부의 벼슬을 대각간으로 올리는 거야. 그래서 다른 신

료들이 감히 대각간의 위상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영문도 모르는 대신들이 대궐로 모여 들었다. 낮에 소집된 회의가 아니

라서 눈치 빠른 신료들은 보름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각간 위홍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닐까하고 나름대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병부령. 폐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오?”
  늙은 예부령이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물었지만 병부령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어제 폐하를 뵐 때만해도 싱싱한 장미꽃 같았소이다. 모르지요,

꽃은 수시로 촉촉이 비를 맞아야 하지 않소? 흠, 흠.”


  “수시로 비를 맞아야 한다? 허허 허허허 거, 일리 있는 말씀이외다.”
  술이 덜 깬 여왕이 대전에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신료들의 입이 굳게 닫혔

다.


  “갑자기 경(卿)들을 오시라했습니다. 이미 경들도 아시다 시피 각간께서

몸이 불편하여 보름째 등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짐이 걱정이 되어 어제

어의를 파견하여 각간의 상태를 살펴보도록 하니 병세가 좀 심하다고 합니

다만 며칠간 더 섭생을 잘하고 약을 쓰면 쾌차하리라고 말하더이다. 이에

짐이 긴급히 경들을 오시라한 이유는 각간이 안 계실 때 각간에 관한 일을

상의 하고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동안 각간께서는 불철주야 국사를

돌보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서라도 등급을 한 단계 높여 대각간으로 봉하고자 합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젠장, 그런 일로 꼭 밤에 회의를 소집해야 한단 말인가?’
  각부 장관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여왕의 처사에 대하여 못 마땅해했다.

신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몇몇은 시중의 눈치를

살폈다.


  “신, 예부령 아뢰옵니다.”
  “오, 예부령. 어서 말해 보시오.”


  “김 각간께서는 경문대왕의 친제(親弟)로서 이 나라 정신적 지주인 황룡

사 중건에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문, 정강, 헌강 세분의 대왕을

충실히 보필하였고 또한 폐하를 보필하여 신라의 국운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신은 폐하께서 각간을 대각간으로 승차시키시

는 일은 타당하다고 사료 되옵니다.”


  “오, 고맙소 예부령. 짐은 예부령의 충심을 크게 살 것이오. 다른 신료

들은 이의가 없으시오?”
  시중 준흥은 임금의 처사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지만 각간 김 위홍이 임

금의 숙부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임금의 정부(情夫)이기 때문에 뭐라고

이의를 달기가 어려웠다.


  “그럼, 경들의 의견이 예부령의 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알고 내일 부로

각간을 대각간으로 승차시키겠소. 그리고 시중께서는 각간이 완쾌하여

등청 할 때 까지 각간의 소임을 맡아서 처리하여 주시오.”
  갑작스런 여왕의 조처에 대하여 시중은 놀라워하면서 자신의 의중이

간파된 것 같아 떨떠름했다.


  “폐하,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소신 대각간께서 등청하실 때 까지 성심

을 다 바치겠습니다.”
  “시중, 고맙소. 내 그대의 충정을 잊지 않으리다.”


  여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여 시중이 앞장서서 숙부의 승차를 반

대하면 어쩌나하고 내심 걱정을 하였었다. 대신들이 물러간 뒤 여왕은 홀

로 술잔을 기울였다. 달빛이 여왕의 침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각간

위홍의 병간호를 위해 파견 되었던 어의가 도착했다는 시녀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 어의. 대각간의 상태는 어떠하오?”
  고개를 조아리며 어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답답하오. 어서 말해보오?”
  “폐, 폐하. 마음을 단단히 하셔야 할 듯 하옵니다.”
  “단단히 하라? 그게 무슨 뜻이오? 어의.”
  “이틀을 넘기시기가 어려울 듯 하옵니다.”


  “뭐라고, 이틀?”
  “황공하옵니다. 폐하.”
  “여봐라, 양패를 불러라. 어서.”


  ‘아아, 숙부가, 숙부가 이틀밖에 못산다고? 이 것이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 바위 같던 분이 겨우 이틀 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더냐?’
  여왕은 어의 보고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왕의 마음이 이미 위홍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머니, 소자 대령이옵니다.”
  “양패야, 지금 즉시 나와 함께 대각간이 계신 소량리로 가보자. 대각간께

서 위독하시다고 하는구나. 마음이 급하다. 어서 가자. 평복을 하고 나갈 것

이니라.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아니 된다. 이번에는 짐과 너 단 둘 뿐이다.”
  “네, 폐하.”


  자시(子時)가 훨씬 넘은 시각 두 필의 말이 궁궐을 빠져나와 소량리를

향해 달렸다. 반달이 서산에 막 기울고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간

간이 들릴 뿐 밤길을 달리는 모자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어머니, 날씨가 너무 차갑습니다. 천천히 달리소서.”
  “이 까짓 날씨가 무에 겁이 난단 말이더냐? 내 마음이 급하구나.”
  말울음 소리에 각간의 집사가 부리나케 나와 여왕을 맞이했다.


  “폐하께서 납시셨다. 어서 아버님께 인도하라.”

  양패의 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네, 나리.”
   방안으로 여왕이 들어섰으나 위홍 각간은 정신을 놓고 있었고 여왕의

유모인 오리부인이 피로한 기색으로 여왕을 맞았다.   


  “폐하, 오늘 초저녁부터 각간께서 정신을 놓으시고 간신히 숨을 쉬고 계

십니다. 송구하옵니다. 소첩이 병구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유모는 고개를 조아리면서 각간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처럼 송구스러워했다.


  “유모, 어찌해야 하오? 어찌해야 숙부께서 일어나실 수 있단 말이오?”

  “폐하 소첩, 정성을 다했지만......”
   부호부인은 말끝을 흐리면서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간신히 들려오는 각간의 호흡소리가 여왕을 더욱 안타깝게 했지만 한 나

라의 왕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이 더욱 미웠다.
  “숙부, 소첩이 왔습니다. 눈 좀 떠보셔요. 이렇게 허망하게 누워만 계시면

어찌하라고요?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여왕은 시체처럼 누워 있는 위홍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면서 오열했다.

여왕의 눈물이 방울방울 각간의 얼굴로 떨어지자 간각이 가늘게 눈을 떠서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 하옵니다.”
  “숙부, 아니 되옵니다. 이대로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은 어찌 살라고

요? 절대로 숙부를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절대로요.”


  “어머니, 고정하소서. 아버님은 불사신이옵니다. 어머님도 잘 알고 계

시잖아요? 아버님은 절대로 허망하게 가시지 않을 실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금지옥엽 같은 막내아들, 양패가 여왕의 심정을

위무하였으나 흐르는 세월 앞에 각간 김 위홍 역시 어찌할지 못했다.


  “양패야, 너는 즉시 시중을 이리로 불러 오너라.”
  “어머니, 시중과 아버님은 사이가 안 좋은데…….


  “아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의지할 분은 그분 밖에 없다. 저번, 월지에

서 시중은 네 아버지와 화해를 하였고, 나에게도 충성을 다하고 있느니라.

어서 가서 모셔오너라.”


  “예, 어머니.”
  축시(畜時)가 넘어서 시중 준흥이 각간의 집에 도착하였다. 시중은 오면

서 대충 양패로부터 위홍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폐하, 시중 준흥이옵니다.”


  “오, 시중. 어서 들어오시오. 야심한 시각에 오시라해서 미안합니다. 시

중께서 보다시피 대각간께서 위중하오. 내 시중을 급히 부른 까닭은 잘 아시

리라 믿습니다.”
  “폐하, 무슨 하명이라도 받잡겠사옵니다. 하명만 하소서.”


  “고맙소, 시중.”
  “황공하옵니다. 폐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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