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2)
- 여강 최재효
최근 들어 박 영식은 많이 변해있었다. 예전 같으면 젊은 여성 고객들이
의원을 찾아오면 마치 인형이나 조각품처럼 생각하거나 단지 자신에게 돈
을 벌게 해 주는 상품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사십 중반이 되면서부터 아내
정 수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자꾸 눈 밖에 나 보였다.
하루 종일 구린내 나는 타인의 입안을 들여다보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
기 위해 무조건 일만해야 하는 자신이 점점 처량한 신세 같다고 느껴졌고,
아내 정 수희 또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어쩌다 낮에 집에 전화를 걸면 아내는 집에 없었다. 그 때마다 아내가
무슨 요리학원이나 수영장 또는 헬스클럽에 다니겠거니 생각해왔다. 그런
데 지난 봄 어느 날 아내 정 수희는 새벽 5시가 넘어서 들어 온 적이 있었
다. 아침에 자신에게 분명히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다녀오겠노라고
했었고 평소 성실하게 살림을 꾸려 온 아내의 늦은 귀가를 그냥 모른 체했
다.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이 되면서부터 정 수희는 집에서 할
일이 없었다.
한달에 한두 번 아이들에게 용돈을 넉넉히 챙겨 주거나 밀린 공과금을
내는 일이 할 일의 전부였으며 하루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씨름을 하는 일
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정 수희가 서울 서대문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
나면서부터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다. 작년 가을 K읍에 있는 고향 초등학
교 동창들 체육대회에 참석했다가 5학년 때 같은 반짝이었던 차재철을
만났다.
코흘리개 차 재철은 늘 정 수희를 괴롭혔다. 정 수희가 친구들과 고무줄
을 할 때면 몰래 다가와 칼로 고무줄을 끊어놓고 달아나거나 이상한 별명
을 만들어 정 수희를 울리기 일쑤였다. 그런 차 재철은 30여년 만에 만난
정 수희는 의젓하게 변한 차 재철의 모습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정 수희는 영등포에서 중견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차 재철에게서 자주 전
화를 받았고 정 수희와 차 재철은 한 달에 두서너 번 정도의 지속적인 만남
을 가지게 되었다.
박 영식은 아내 정 수희가 낮에 거의 집을 비우거나 자주 술 냄새를 풍
기고 늦게 귀가하는 횟수가 잦아지자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에 비
해 자주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필요 이상으로 고가(高價)의 옷을 구입하며
박 영식이 집에 있는 일요일에도 항상 친목회를 이유로 집을 비웠고 자신
과 두 아이들은 음식점에 식사를 배달시켜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올 추석 전 아내 정 수희는 박 영식이 집에 있는 일요일 오후 2시쯤
명동에서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나갔다 오겠다며 화려한 색상의 옷
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마침 아이들도 도서관에 가고 없
었다. 박 영식은 아내를 미행하기로 마음먹고 정 수희가 집을 나가자 뒤
따르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정 수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자 박 영식도 아내
가 눈치 채지 못하게 다른 택시를 타고 아내 뒤를 쫓았다. 정 수희가 탄
택시가 명동입구에서 멈추었다. 정수희는 마치 바람 난 여인같아 보였다.
정 수희가 들어 간 곳은 음식값이 꽤나 비싸 보이는 화려한 현대식으로
지어진 3층의 중국음식점인데 입구에서부터 정장의 남자 종업원들이 90
도로 고개를 숙이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박 영식도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종업원에게 00초등학교 동창회가 몇
층이냐고 묻자 2층 국화실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유리창 너머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식당에는 중년 남녀 대여섯 명만 있을 뿐
아내는 없었다.
다행히 밖에서 소규모 홀로 된 식당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박 영식은
다른 홀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로 했다. 2층 전체 소규모 모임을 가질 수
있는 홀이 30여개나 있었다. 복도 맨 끝 방에 당도했을 때 박영식은 숨이
멎을 뻔 했다. 분명히 10분전에 택시에서 내린 아내 정수희가 그 홀에 있
었다. 아내의 등이 보이고 그 앞에 잘 생긴 중년 남성이 앉아 있는데 마치
부부나 오랜 기간 사귀어 온 여인처럼 보였다.
“저 사람이 저기에?”
박 영식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마치 남의 정사 장면이라도 훔쳐
보는 듯 숨이 갑갑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홀안의 두 사람 목소리는 뚜렷
하게 들을 수는 없으나 대충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들을 수 있었다.
와 차 재철리 나누는 정담을 빠짐 없이 머리에 기억하고 음식점을 빠져 나와 건너편 빌딩 입구에 숨어 아내가 나오기 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수희, 그날 밤 잘 들어 갔지?”
“그럼요, 애 아빠는 요즘 통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으래? 오늘은?”
“집에 혼자 있는거 보고 나왔어요. 동창회 간다고 말하고.”
“그래, 잘했어. 잘했어. 우리 뭘 먹지? 수희?”
“재철씨가 알아서 시키세요?”
홀안에는 세 쌍의 중년남녀가 밀회를 즐기는 것 같았다. 박 영식은 아내
‘마누라에게 남자가 있었구나. 아, 이런 그동안 나를 감쪽같이 속였다
니 나쁜 년, 어쩐지 요즘 귀가가 늦고 입에서 술냄새가 난다 했더니 저놈
하고 놀아나느라 그랬군. 오늘은 내가 녀년의 꼬리를 밟으리라.‘ 박 영식
은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 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유부녀인 김 혜영과 연애
를 하는 동안 아내는 초등학교 동창 차 재철과 열애에 빠져 있었다.
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박 영식이 애꿎은 담배만 반쯤 피우다 바닥에 버 리고 비벼댔다. 그렇게 박 영식이 2시간 정도 서성이고 있을 때 아내 정 수 희가 차 재철의 팔짱을 끼고 음식점을 나와 대로변에 있는 택시승강장 으 로 걸어갔다. 박 영식이 정 수희와 차 재철이 택시를 잡고 시내 쪽으로 달리자 박 영 식도 택시를 타고 미행하기 시작했다. 정 수희가 탄 택시가 남산으로 올라 가 H호텔로 들어 섰다.
‘아, 어떻게 하지? 나도 잘 한 일은 없지만 마누라의 바람을 그냥 보고
“아니, 저 것들이 대 낮에?”
박 영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
재철이 프런트에서 객실 키를 받아들자 정 수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뭐라
고 차 재철 에게 귀속말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
으로 사라지자 박 영식이 프론트로 달려와 아가씨에게 물었다.
“아가씨, 방금 그 두 남녀 몇호실로 올라갔죠?”
“실례지만 저희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난, 난 그 여자의 남편이란 말이에요? 안 알려주면 아가씨 가만 안 둘꺼
야?” 박 영식이 큰 소리로 프론트 아가씨에게 행패를 부리자 건장한 청년
두명이 다가왔다.
하는 호텔입니다. 뭘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 데 조용히 하시고 나가 주세요.“ 나왔다. 을 들어가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박 영식은 혹시나 했다가 아내가 외
“선생님, 점잖은 분이 왜 소란을 피우십니까? 여기는 여러 사람이 이용
두 청년이 험악한 얼굴 표정을 짓자 박 영식은 아무말 없이 호텔 밖으로
‘아,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내 눈앞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백주에 호텔
간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박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세요?”
“아, 아닙니다. 잠시 낮에 친구와 통화했던 것이 생각나서요.”
“중요한 일이었나 보죠?”
“아니요. 그냥 친구가 언제 고향엘 다녀오자고 해서요. 언제가 좋을까하고
잠시 생각했었어요.“
“네에”
“바텐, 여기 맨하탄 한 잔 줘요.”
“저도 칵테일 마시고 싶어요. 이 건 그냥 카카오 냄새만 나는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어요?”
“와인 몇 잔 마셨는데요, 뭐?”
“그럼 제가 다른 걸로 시켜 드릴까요?”
“그러세요. 전 칵테일을 마시기만 할 줄 알지. 잘 몰라요.”
“바텐, 여기 보드카선셋 한잔 줘요. 베이스는 좀 진하게 하고 오렌지로
채워 주세요.”
박 영식의 주문에 바텐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도시의 밤은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며 서서히 젖어갔다. 김 혜영은 보드카선셋(Vodkasunset)이
달콤하다며 연거푸 세 잔을 비웠다. 시계는 이미 새벽 1시가 훨씬 넘었다.
두 사람이 또 다른 조용한 장소에 들렀다 헤어진 시간은 새벽 5시가 가까
워서 였다.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원장님 좀 바꿔 주세요.”
“선생님은 지금 진료중이라 전화 받으실 수 없어요. 12시부터 점심시간
인데 그 때 다시 해 주시겠어요?
“아가씨, 집인데 얼른 바꿔줘요.”
“아네, 잠시 만요.”
간호원 아가씨는 사모님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박영식 입니다.”
“저에요. 혜영이.”
“아, 혜영씨, 집엔 잘 들어가셨어요?”
“다행히 그 이가 지방 출장중이라서.”
“그랬군요. 어젠 정말 미안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제 불찰이죠, 뭐. 아니면 제가 선생님을 유혹 했던가. 피곤
하지 않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혜영씨, 이상은 없는 거죠?”
“이상?”
“아, 왜 있잖아요. 임신이 될 수 있다던가 하는......”
“그저께, 그거 끝나서 염려는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상처가 났어요.”
“저런, 얼마나요?”
“얼마라면 와서 확인해 보시게요?”
“그, 그게 아니고.”
박영식은 간밤 김혜영과의 꿈같은 정사(情事)를 생각했다. 두 시간 정도
함께 열락의 성을 쌓고 허물고를 반복 하면서 운우의정을 맛보았다.
“수철아, 저기 저 아파트가 맞는 것 같다. 이 주변에서 제일 높은 것을
보니 틀림없을 거야. 103동 1803호 했어.” 두 사람이 탄 차가 하와이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30층의 거대한 아파트에 몇 집이 마치 등대처럼 불이
켜져있다. 아파트 입구 경비실에는 60대 초반의 경비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있다.
“누이, 만약에 그 집 문이 잠겨 있으면 어쩌지?”
“그 남자가 열어놓았다고 했어.”
“그렇지만, 한밤중에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면 주거침입죄에
해당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 따질 거 없어. 그 남자가 주인이고, 주인이 자신의
집 주소까지 알려주고 현관문까지 열어 놓았다면 이미 승낙한거 아니니?”
움직였다. 그 남자 말대로 문은 열려있었다. 정 수희의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남의 집을 몰래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남동생은 현관 앞에서 망을 보라고하고 정 수희는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거실에는 벽시계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었다. 컴컴해서 사방 분간이 잘 안되었지만 아파트의 구조가 다행히 살고 있는 집과 비슷했다. 안방 으로 추정되는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 수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주차장에서 검은 물체가
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살며시 안방으로 접근했다.
불빛만 새어 나오는 정황으로는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갈 수 도 없었다. 정수희는 망설이기 시작
했다. 그 남자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의 상황이 일치했다. 그러나 만약
방안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하는 마음이
일자 자신이 마치 그 남자가 쳐놓은 덧에 걸려드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
움이 엄습해왔다.
심장박동소리가 거실의 벽시계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정 수희는 도저
히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안방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현관으로 옮겼다.
“아니, 누나 왜 그냥 나와?”
“난, 도저히 안방 문을 열수가 없어. 너무 심장이 떨리고 다리가 후둘
거려서 나는 더 이상......”
“아니, 누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간단말야? 말도 안돼. 내가 들어가 볼
테니 누나는 여기 있어. 그럼”
“아냐, 수철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고 내가 다시 들어 가볼게.”
정 수희는 만약 남동생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순
간적으로 흥분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할 수 있거나, 만일 이 정보가 잘못
되었다면 주거 침입죄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과
관련이 된 일을 동생에게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정 수희가 마구 뛰는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
갔다. 처음 보다는 거실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다. 거실 가운데 대형
벽걸이 TV와 번쩍이는 장식장과 수입산 으로 보이는 쇼파로 그리고 거실
의 크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신에게 전화를 건 남자의 경제적 위치가 보
통 수준은 넘는 듯 했다. 안방에서 불빛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열어보는 거야. 마음을 굳게 먹고 열어보는 거야. 만약 그냥
돌아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할지 몰라.’ 정수희는 혼자 중얼거리며 살며
시 안방으로 접근했다. 손잡이를 약간 돌리자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고개를 디밀고 방안을 보는 순간 하마터면 정수희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분명 15년 이상 보아온 남편의 육신이 그 곳에 있었다. 다른 여인
의 육체를 끌어안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은 마치 언젠가 우연히 인터넷
에서 본 포르노 사진의 한 장면 같았다.
순간 정수희 머릿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이불이 흘러내
져 있고 남녀의 속옷이 어지럽게 널려있으며 휴지가 뭉턱이로 침대 주
위에 흩어져 있었다. 핑크빛에 젖은 남녀의 육신은 싱싱해 보였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미쳐 날뛸 것 같은 기분이 묘하게도 차분해 졌다.
남편이 눈앞에서 다른 여인의 육신을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
면서 정수희는 담담한 자신에 놀라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들이댔다. 미약한 후레쉬 불빛이 번쩍거렸지만 벌거숭이 남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을 깨운다면 흥분한 상태에서 자신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선뜻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서 바닥에 있던 남편의 검정색 팬티와과 김혜영의 흰색 망사팬티를 집
‘이제는 어떻게 한다. 저 두 연놈들을 깨워? 아니면 ......’
정 수희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두 사람
‘그래, 증거품을 가져가야해. 증거품을......’ 정수희는 엉금엉금 기어
어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누나, 방에 매형이 있어?”
“아니, 누가 장난 전화를 했나봐.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이 아파트에서
빠져 나가자.”
“그것 참 이상하네. 그 남자 말대로 문도 열려 있었잖아? 정말로 이해
가 안가네”
“우리가 속은 거야. 어서가자.”
안으로 사라졌다. 김혜영의 남편 윤 경찬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의형 제에게 아내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윤 경찬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빠져나가자 검은 그림자가 하나가 엘리베이터
현관문은 그대로 열려있었다.
건설회사 부장으로 있는 윤 경찬은 어제 오후 아내 김 혜영에게 전
화를 걸어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에 출장을 다녀 오겠다고 했었다. 그러
나 회사 사장이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만나 대접할 일이 생겼다면서 술
을 잘 마시는 윤 경찬 대신 다른 사원을 보냈다.
새벽 1시쯤 집에 돌아 온 윤 경찬은 현관에 눈에 익은 구두가 있는
것을 보고 의형제를 맺은 박 영식이 집에 놀러 온 것으로 판단하였다.
호형호제하며 자신들과 잘 어울렸으며 집이 먼 관계로 술에 대취한 날
이면 가끔 집에 데리고 가 재워 보내기도 했다.
“이 친구가 놀러왔나?”
윤 경찬의 집은 방이 여섯 개 있었다. 아들은 군대가고 딸 둘은
모두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큰 집에 노모와 윤 영찬 내외가 살고 있었다.
박 영식이 잠에서 깨지않도록 윤 경찬은 살며시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박 영식이 놀러와 대취한 날이면 늘 아들의 방에서 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딸들의 빈방을 열어봐도 박 영식은 없었
다.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럼 이 친구가 아직도 마누라와 안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나?”
윤 경찬이 두 사람이 무슨 술을 마시고 있는지 궁금했다. 베란다쪽
에서 안방을 들여다보려고 하였지만 커튼이 쳐져있었고 핑크불빛이
하얀 커튼을 선정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윤 경찬이 숨을 죽이며 이중 문을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열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윤 경찬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아내 김 혜영의 핑크빛으로 물든 등이 천천히 들썩이는 모습이 눈에 들
어 왔기 때문이다.
윤 경찬은 피가 거꾸로 솟고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았다.
가? 아냐 이건 말도 안돼는 상황이야. 말도 안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윤 경찬은 믿을 수 없었다. 술김에 무엇을 잘못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 아내가, 내 아내가 의형제를 맺은 박 영식과 그런 사이였단 말인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보았으나 통증만 전해졌다.
순간 윤 경찬은 총각 때 본 영화를 생각해 냈다.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아내가 외간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여 욕정을 채우다 남편에게 발각되
어 남편의 손에 남녀가 피살되어 결국 남편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영화였다.
그 영화 같은 일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에 윤 경찬은 갑자
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 아내와 박 영식을 어떻
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만일 그럴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들을
믿고 군대에 있는 아들과 멀리 유학가 있는 두 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만약 저 두 연놈을 없애 버린다면 난 어찌 되는가? 난. 그때
저놈을 우리집에 재우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괜히 재워가지고 그 날
이후로 마치 쥐가 제 집드나들듯 해버렸으니......’
윤 경찬은 자신의 안식처인 안방에서 아내가 외간남자와 정사(情事)
를 벌이는 데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했다. 살며시 집을
빠져 나온 윤 경찬은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는지 처음 박영
식을 만날 때부터 지금 까지의 일련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여보, 여기에요.”
아내 김 혜영이 윤 경찬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호텔 커피숍에는 드
문드문 외국인들만 있을 뿐 초봄의 주말 오후의 특급호텔은 한산해
보였다. 검정색 원피스와 복숭아색 스카프로 한껏 멋을 낸 김 혜영의
곁에는 평범한 시골스런 인상의 박 영식이 수줍게 앉아 윤 경찬을 맞
았다.
“여보, 인사해요. 내가 늘 말씀드리던 박 영식 의사 선생님이세요.”
윤 경찬은 의사라는 말에 일단 기가 죽었다. 우리나라에서 직업중
‘사’자 들어 가면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무의식적 판단과 돈 있고
배경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윤 경찬 자신이 꽤 괜찮은 기업의
부장이지만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의사 앞에서 약간의 질투와 불편함
을 느꼈다.
“반갑습니다. 윤 경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 영식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명함을 보며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수준을 가늠해 보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수하면서도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박 영식의 외모에
처음 그를 대면하는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게 된다. 반면 호남형이면서
두주불사의 윤 경찬은 거구의 체구로 약간 음흉한 이미지를 풍겼다.
“집 사람한테서 박 의사님의 고명을 들었습니다. 많이 도와주신다고
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윤경찬이 진실로 고마워하는 듯한 제스처를 써가며 얼굴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혜영씨가 윤 부장님께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박 영식 역시 만면에 웃음지어 보이며 겸손해 했다. 윤 경찬의 호탕하고
성격이 좋을 것 같아 박 영식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여보,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나가서 맛있는 거 좀 사줘요. 나 배고파요”
“어, 그럴까. 박 선생님, 이 근처 어디 좋은 음식점 아시면 안내 좀 부탁
드립니다. 오늘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두 분을 모시는 기념으로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세 사람은 박 영식의 차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미사리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팔당대교를 건너 북한강을 끼고 10분 쯤 달리자 평소 박 영식이
자주 다니던 고급 레스토랑이 나왔다. 얼큰하고 텁텁한 탕 종류를 좋아
하는 윤 경찬의 취향은 아니지만 얻어먹는 입장에서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곳 레스토랑은 순수 우리 한우(韓牛)만을 사용한 함박스테이크가
일품입니다. 서울 시내일류 음식점보다 서비스에서도 떨어지지 않습니
다. 윤 부장님께서도 한 번 맛보시면 자주 찾게 될지도 모르지요.
”
박 영식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홀 안에 메아리 쳤다.
대형 윈도우로 북한강 위를 나는 수백 마리의 철새가 지그재그로 날며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강 언저리에는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상태로
있는데 물새들 몇 마리가 얼음위에서 졸고 있다. 페티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가 은은히 울려 퍼지자 김 혜영은 눈을 감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지만 제 정서에는 이런 노래가 좋아요.” 윤 경찬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 들으면서 어떻게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가 멋쟁이 아내와 친
“혜영씨, 이 노래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에, 주로 흘러간 팝을 즐겨 듣지요. 요즘 노래도 즐겨 듣는 편이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떻게 집사람과 친구가 되시었는지 물어봐도 되겠
습니까?”
음악을 듣고 있던 김 혜영이 박 영식을 가로막고 나섰다.
“여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 사업을 많이 도와주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박 선생님 고향도 바로 옆 동네 였고, 그래서 동네 오빠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고, 또 사업상 자주 전화도 하다보니 박 선생님이
친구가 없는 것 같아 당신을 박 선생께 당신을 소개하려고 나오라고
한거에요.”
김 혜영이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박 영식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나섰다.
‘동네오빠? 친구?’
“아예, 그러셨군요. 전 그냥 집 사람이 어떻게 박 의사님같이 귀한 분
하고 친분이 있나하고 물었을 뿐입니다. 혹여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
니다.”
하게 지낸다는 일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몇 번 혜영씨 와 대화를 하다보니 먼 친척뻘 누이동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래서 기왕이면 부군을 모시고 식사나 하면서 이러저러한 세상사는 이야 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자신의 아내가 외간남자와 친
“와인 나왔습니다.”
웨이츄레스가 이태리산 쉐리와인을 가져왔다.
“제가 아주 즐기는 이탈리아 진자노(Zinzano)라는 주류회사에서 만든
백포도주입니다. 식전에 한잔 마시면 속이 아주 깔끔해질 겁니다. 제가
자주 이집을 들리다 보니 아가씨들이 제 취향을 알고 알아서 내옵니다.”
박 영식은 자랑스러운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웨이츄레스 얼굴과 몸
매를 흩어보았다.
“처음 보는 아가씨 같은데?”
“어제 새로 온 아르바이트 학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 한 잔 받으시죠?”
박 영식이 윤 경찬과 눈을 맞추며 조심스레 와인을 따랐다. 패티
페이지의 노래가 끝나자 랜디 반워머의 ‘Just When I Needed You Most‘의
음률이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건너 편 창가에 한 쌍의 남녀가 와인 잔을 마주 대며 환하게 웃고 있는
데 여인은 아래위로 보라색 투피스 남색 머플러로 한껏 멋을 내었고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 진 요염한 손톱이 여염집 여인같지는 않았다.
여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남자에게 뭐라고 귓속말로 속삭이자 남자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여자가 담배 한 가치를 뽑아들자 남자가 얼른
불을 붙여준다. 여자가 구름 과자를 만들어 공중으로 뿜어내자 남자는 멋
지다며 박수를 친다.
“손님, 함박스테이크 나왔습니다.”
향긋하면서 고소한 향이 일행의 후각을 자극했다.
“저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박 영식이 윤 경찬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 네에. 말씀하세요.”
윤 경찬이 웃는 얼굴을 하자 박 영식은 안심하면서도 우물쭈물 하자 김혜
영이 거들고 나섰다.
“박 선생님,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세요.”
“부군께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올해로 마흔 다섯입니다.”
“그럼, 저하고 동갑이네요.”
“아,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로 친구를 만났구만.”
영은 남편과 박 영식이 금방 가까워지자 속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박 영 식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와인병이 비자 웨이츄레스가 이번에는
동갑이라는 말에 윤 경찬의 입에서 즉각 반말이 튀어 나왔다. 김 혜
포트와인을 내왔다.
주로 와인 종류를 좋아하는 박영식의 취향을 잘 아는 지배인이 식중
(食中)에 마시는 수입산 포트와인을 알아서 내보낸 것이다. 독주(毒酒)를
좋아 하는 윤경찬은 마지못해 와인을 들면서 자꾸 지배인 쪽을 쳐다보
았다.
'자슥, 좀 독한 브랜디나 보드카를 주지'
“윤 부장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 아니오. 술이 좀 밍밍한 거 같아서......”
“박 선생님, 이이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을 좋아하거든요. 와
인은 입에 안 맞을 거예요.”
“이런, 제가 결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윤 부장님, 제 생각만 했습
니다.”
윤 경찬은 회사에서도 회식이 있거나 급조 된 술자리가 생기면 소주
나 맥주 대신 양주를 주로 마셨다. 그러다 보니 부하직원들도 마지못해
독한 양주를 마시게 되다 보니 술에 약한 사원들은 술 좌석이 좌불안석
이 되고 만다.
윤 경찬이 주로 마시는 술은 미국산 테네시위스키로 그중에 잭 다니
엘(Jack Daniel's) 넘버 7을 선호하는 특별한 취미를 지니고 있다. 가끔은
언더락스 잔에 콜라를 섞어 잭콜(JackCol)을 즐기기도 한다. 즉시 박 영
식이 잭 다니엘 세븐을 주문하였다. 다행히 이 집에 구하기 어려운 잭
다니엘이 있었다.
“정말로 맛이 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함박스테이크는 처음 먹어봐요.”
약간 취기가 오른 듯 김 혜영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수선을 떨었다. 잭 다니엘 세븐 한 병을 혼자서 다 비운 윤 경
찬 역시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윤 경찬은 아내가 자신보다 박 영식과 더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지만
질투보다 묘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옆에 배우자가 있던 없던 남녀는
마음에 맞는 상대가 있으면 호감을 사기 위하여 정도를 넘는 행동을 하
는 경우가 있어 종종 부부간에 언쟁의 소지가 되곤 한다.
특히 송년 모임에 부부동반에 다녀와 크게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술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평소 억눌렸던 감정
이 알코올이라는 화학적 성분이 혈관에 투입됨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없
는 행동이 나타나기도 하고 최소한의 감정 표현을 하는데 일조를 하기
도 한다.
평소 아내의 농도 짙은 화장과 요염한 몸매로 늘 살얼음판을 걷던
윤 경찬은 우려가 천천히 현실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며 불안해 했다.
박 영식과 김 혜영이 부부사이고 마치 자신이 초대받은 손님 같다는 느
낌이 들었다. 어느덧 어둠이 대지를 지배하고 하늘에 영롱한 별들이 자
신의 위치를 뽐내기 위하여 치열하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잭 다니엘 두병이 거의 비워졌지만 알코올에 강하게 단련된 윤 경찬
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술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박 영식은
윤 경찬이 건넨 양주 서너 잔에 상당히 취해있었다.
“저어, 제가 이런 제의하면 윤형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박 영식이 윤경찬의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박 선생님, 무슨 말씀이어도 좋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아, 동갑네 끼리 무슨 존대를......”
“아, 그렇지 우린 동갑이지 참, 동갑, 참 좋은 말이야. 우리나라에
서 동갑만큼 좋은 사이가 어디있을까? 안 그러우 마누라님?“
양 두병에 기분이 좋아진 윤 경찬은 김 혜영에게 농담을 부리는
여유를 보였다.
“박 선생님, 말씀해 보세요.”
“아네, 김 여사님게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사이에 제가 윤형과 의형제를 맺으면 어떤가 해서요.“
세요?” 김 혜영과 박 영식의 시선이 윤 경찬의 입술로 쏠렸다. 그러나 윤
“아, 의형제요? 저희 양반과요? 좋지요. 여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
경찬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마누라 친구와 내가 친구가 된다? 세상에 이래도 되나? 하긴 나뿔거
야 없지. 사회적 지위도 있고, 사람도 성실해 보이니 말이야‘ 윤 경찬은
창밖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보 뭐하세요? 박 선생님이 당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제안 하
셨잖아요.”
“아, 그거 좋지. 의형제라. 마침 나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늘 쓸쓸했었
는데 말이야. 이렇게 휼륭한 의사 선생님과 의형제가 된다면 나야 큰
영광이지 뭐.“
“아이구, 이이가? 비아냥거리지 말구요.”
“이 사람은, 내가 왜 비아냥거려? 진심이야, 당신이 이미 박 선생에
대하여 검증을 했으니 나야 그대로 따르면 되는거 아닌가?“
윤 경찬 자신도 박 영식과 의형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은
없는 듯 했다.
“참,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동갑네라고 해도. 아래 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9월 5일 생인데, 윤 형은 어떻게 되시는지?”
“그럼 내가 훨씬 형이네. 3월19일 생이니.”
“그렇게 되나? 어이쿠 경찬 형님, 이 아우가 앞으로 잘 받들어 모시
지요.”
름만 부르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 말일세.“ 쳤다. 곁에서 바라보던 김 혜영의 발그레한 얼굴에 잔잔히 미소가 번졌다.
“에이, 이 사람아. 그냥 서로 성씨 뒤에 ”형“자만 붙여 부르자고. 이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일세.” 박 영식이 윤 경찬의 제안에 맞장구를
홀 안은 어느새 손님들로 꽉 찼다. 모두 중년의 남녀 쌍쌍인 것으로
보아 서울에서 데이트하러 온 부적절한 관계인 듯 했다. 홀 안을 떠다니
는 음률도 초저녁 때 보다 더욱 끈끈하게 들렸다.
“자, 그럼 우리 형제가 된 마당에 축배가 없어서야 되겠나. 어때 의사
동생 축배 한 잔 더 드는 게 말이야?“
이미 상당히 취한 박 영식은 흔쾌히 승낙하자 김 혜영이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아니, 이 사람아? 웬 맥주?”
“박 선생님도 많이 취하셨고, 당신도 꽤 취한 것 같아요. 간단히 맥주
로 입가심하고 일어나요. 시간이 꽤 되었어요. 여보.“
“여자들은 남정네들 호쾌한 기분을 몰라준단 말이야.”
윤 경찬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리자 박 영식이 윤 경찬을 두둔하고 나섰다.
“맞아요. 형님, 여자들은 남자들이 술만 마시면 뭐가그리 아까운지 모
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윤 여사님, 오늘 제가 몽땅 계산합니다.“
을 생각해서 그렇죠.“
“아이참, 박 선생님.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집에 있는 가족들과 건강
“그럼 우리 시내 어디 좋은 데 가서 딱 한 잔만 더하자고. 박 아우님,
어때?”
“좋오치요. 윤 형님.”
“우리집 근처에 내가 자주 가는 바가 있는데 그리로 옮길까. 그럼?
당신도 같이 가자고.”
“어머나, 남자들 가는데 여자가 따라가도 되요?”
“글쎄, 난 아직것 술집입구에 여자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을 보지 못했
는데......”
이었다. 봄의 강바람은 차가웠다. 대리운전으로 윤 경찬의 집 근처에 도착 했다. 이미 자정이 넘었다. 개선장군처럼 윤 경찬이 단골 카페문을 박차고
세 사람이 카페를 나온 시간은 보름달이 하늘 한 가운데 있을 때쯤
들어서자 30중반의 마담인 듯 한 여자가 뛰어 나오며 반색을 한다.
“하이고, 윤 오라버니, 전 오라버니가 미국으로 이민가신 줄 알았다우.
아무리 이 년이 보기 싫어도 그래 한 달에 한번은 들리셔야 섭섭하지 않지.“
“아따. 고년 입심은 아직도 여전혀.”
“아니, 오라버니 그런데 웬 애인을 데리고 오셨수? 내가 있는데......”
장관이셔. 그러니 오늘은 잘 모셔. 알았니?“
“요년아, 애인이 아니라 우리 집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계신 내무부
“어머머, 그러셔요. 몰라봐서 정말로 송구허구만유. 사모님. 영광이에요.
요렇게 만나 뵙게 되서리.“
일행은 깊숙한 홀로 안내 되었다. 열 평정도 되어 보이는 실내는 중세
유럽풍의 그림과 조각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실내장식 및 테이블과 소파
의 상태로 보아 개업한지 얼마 안돼 보였다. 몇 달 전 윤 경찬이 우연히
이 살롱을 알게 되었고 보통 한달에 두서너 번은 혼자 오거나 또는 회사
동료들과 들리곤 했다.
윤 경찬은 술로 박 영식을 이기고 싶었다.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으로는
박 영식에게 뒤쳐질 지 모르지만 술 만큼은 아내가 보는 앞에서 박 영식
을 보기 좋게 이겨보고 싶었다.
“오라버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술은 뭐로 하시게요?”
“내가 늘 마시던 거 있잖아, 그걸로 가져오고. 우리 마님은 소프트 한
걸로 알아서 가져오고 안주는 시원한 걸로.“
“오케이, 역시 오라버니는 멋쟁이야.”
“아니, 여보.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또 ?”
김 혜영이 윤 경찬을 흘겨보며 괜히 따라왔다 싶은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하” 박 영식은 두 손을 크게 벌리고 오버액션 까지 취해가며 호 탕하게 웃었다. 술과 안주가 들어오자 김 혜영은 크게 놀랬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양주 한 병과 3000cc 생맥주가 담긴 핏처 하나와 과일화채
“좋습니다. 저도 두 분 모시고 술을 마시니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가 테이블에 놓여졌다.
“아니, 이봐요, 아가씨? 우리 일행은 이미 1차로 양주를 많이 마시고
왔어요. 그냥 입가심 할 걸로 간단히 가져와요.“
김혜영이 불쾌한 말투로 마담을 쏘아봤다.
"아냐, 아냐, 됐어 됐어. 이정도면 양호해."
윤 경찬이 아내 김 헤영의 팔을 제지하며 나섰다.
"역시 오라버니는 통이 크셔." 마담이 윤 경찬의 옆에 앉으며 너스
레를 떨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