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꽃(1)
- 여강 최재효
“여보세요? 거기 박 영식씨댁 맞죠?”
수희가 잠결에 전화를 받은 시각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중년 남성의 취
기 섞인 목소리가 마치 망치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저는 당신이 정수희씨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희는 그 목소리가 마치 저승차사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하며 머리카락이 쭈뼛 쭈
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세요? 누군데 이 새벽에 가정집에 전화를 하죠? 그리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요?”
“사모님, 놀라지 마시고 내 말 잘 들으세요. 지금 당신 남편이 우리 집 안방에서
내 마누라와 뒹굴고 있소.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가보시요. 우리 집은
경기도 안양시 종로동 2289번지 하와이아파트 103동 1803호입니다. 00역 남광
장 옆에 있는데 지금 문은 열려있습니다. 차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요? 나는 지
금 당신 남편과 잠자고 있는 김혜영이 남편이외다. “
전화는 끊어졌다. 잠결에 받은 전화에 수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청심환을 복용하고 나서 수희는 방금 전 꿈결처럼 걸려왔던 전화 내용을 곰곰이 생
각해봤다. 비록 잠결에 듣긴 했어도 뇌리에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입력되어 있었
다.
전에도 종종 새벽에 전화가 걸려 온 적이 있었지만 대개가 잘못 걸려 온 전화였다.
그러나 술에 찌든 남자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가 분명히 들어 있었다는 데
에 수희는 전율했다.
중요한 실험이 있다면서 며칠째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남편이 지금 이 시각 남의 집에 그 집 여인과 잠을 잔다는 사실을 수희는 믿을 수 없었다. 결혼 15년차인 수희는 한번도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왜소 하고 볼품없이 생긴 남편에게 어떤 여자가 유혹을 하겠느냐며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거들
떠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을 해왔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자신의 집 주소까
지 정확히 알려주면서 직접 확인해보라 하였다.
지금쯤 남편은 사무실에 있어야 했다.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휴
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수희는 요즘 들어 남편이 와이셔츠나 넥타이에 신경을 쓰
는 것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다른 여자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퀸 사이즈 침대가 운동장처럼 느껴졌다. 수희는 바로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철아, 매형이 지금 술집에서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데리러 오라고 하는데 같이
좀 가 줄래? 새벽이고 나 혼자 가기가 좀 꺼림칙해서 그래, 부탁한다.”
“누나? 매형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잖아, 취했으면 그냥 택시타고 오면 될 텐데,
얼마나 마셨기에?”
수철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강변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7월 새벽의 한강은 뽀
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 너머로 노량진과 여의도의 불빛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철아, 지금부터 내가하는 이야기 잘 들어야해.”
“......”
수희의 이야기를 다 들은 수철은 믿을 수 없었다. 항상 착하고 법 없이도 살 매형
이 이 밤에 유부녀와 동침을 하고 있다는 누이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아냐, 누나가 뭘 잘못 들었을 거야. 그냥 차 돌려서 집으로 가던지, 아니면 매형
사무실로 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 “
“매형 사무실에 전화를 해보고 휴대폰도 걸어봤지만 받지 않아.”
두 사람은 말없이 전방만 응시했다.
차가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접어들었다. 여의도 시민공원에는 새벽이지만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수철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으며
악셀레이터에 힘을 주었다. 새벽의 도로는 낮에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는 고질적
교통체증에 시달리던 운전자들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휑하니 뚫려있었다.
“영식씨 사랑해. 이젠 당신 없이는 못살겠어.”
“누님, 혜영이......”
침대시트가 이미 흔건하게 젖었지만 남녀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한 두 불덩이는
다시 하나의 불꽃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밤 맥주와 양주를 섞어서 마신
탓 인지 두 사람은 피부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화기(火氣)를 억누를 수 없었다.
밤은 음양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묘사할 수 있는 암수에게 있어 최대의 은혜이자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한 핑크빛 수면등 아래로 두 몸뚱이는 정육점 윈도우
에 이제 막 진열해 놓은 고기처럼 보였다.
에어컨은 암수의 열기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듯 가끔 부웅하는 소리를 내면서 팬
을 돌리고 있다. 건넌방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김혜영의 시어머니가 잠자고 있었지
만 김혜영은 개의치 않았다. 박영식이 김혜영의 집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고 드나
들기 시작한 것은 올 봄부터 였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혜영이 박영식이 운영하
는 치과를 찾은 때가 지난해 늦가을 낙엽이 막 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오후였다.
“선생님, 사랑니가 상했나 봅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못 참겠어요.”
30후반쯤 되는 미모의 혜영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박 영식에게 입안을 모두 공
개하면서 흘끔흘끔 영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까무잡잡하고 보통 키인 영식에게
서 혜영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비록 얼굴은 시골은 아저씨처럼 구수하게 생겼지만
차분하고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 진료하는 모습에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랑니를 뽑아야 겠습니다. 많이 상했는데요. 주사를 놓았으니 아프지는 않을 겁
니다.”
“아……. 선생님, 아파요. 좀 쉬었다 뽑으세요.”
무시무시한 쇠 연장을 미모의 여인 입속에 집어넣고 휘젓는 일은 외모에 늘 콤플
렉스를 안고 살아 온 박 영식에게 종종 일종의 쾌감을 주었다. 대부분의 손님이 사
탕을 많이 먹고 이가 상해서 오는 초등학교 아이들이거나 노인들인데 박영식은 코
를 찌르는 악취와 볼품없는 모습에 진저리를 치곤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김 혜영 처럼 30대의 무르익은 여체를 소유한 여인들이 한가한
오후 손님으로 접수되면 박 영식은 20분 정도면 충분한 진료를 1시간 정도 일부러
늘리면서 자신이 사람들의 고장 난 이빨을 다루는 기술을 은근히 뽐내면서 여인들
의 체취를 만끽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약 드시고 이틀정도 있으면 아물 겁니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뽑혀 나온 이빨을 보면서 혜영이 눈을 찡긋하며 배시시 웃어보이자 박영식은 기분이 좋아졌다.
돈을 줘가며 자신의 신체 일부를 무자비하게 없애버린 남자에게 도리어 고맙다고 하는 묘한 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대학에서 많은 공부를 한 몇몇에
게 부여된 특수 면허다.
김 혜영이 박 영식 앞에 나타난 것은 1주일이 지나서 였다. 오후 5시30분 쯤 타이
트한 감색 투피스차림의 혜영이 꽃다발을 들고 치과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은 선물하는데 마다 할 남자는 거의 없으리라.
“어이쿠, 김 여사님, 이런 과분한 선물을 다 주시고,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은 뒤로 통증도 없었고 말끔히 아물었어요. 정말
로 고맙습
니다. 이 꽃은 저 꽃병에 꽂으면 되겠어요.”
본래 수줍음이 많은 박영식은 반달보다 예쁘게 그려진 아이라인 아래에서 보석
처럼 반짝이는 김 혜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대학 동창들의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은 하나같이 묘령의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난다. 그런 친구들을 늘
부럽게 생각해 오던 박영식은 만약 이 여인이 애인이라도 되어 준다면 여인이 원
하는 것 무엇이든지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창가에 시들어가는 장미를 버리고 혜영이 자신이 가져온 싱싱한 핑크빛 장미로
갈아 끼우는 중이었다. 왔다 갔다 할 때 마다 스커트에 살짝살짝 드러나는 팬티라
인이 박영식의 시선을 자극했다.
“선생님, 어때요? 이렇게 화병에 꽂으니 더 싱싱하게 보이죠?”
“우리 아가씨들한테 시켜도 되는 걸요.”
박영식이 멋쩍게 웃었다.
“김 여사님, 이리 앉으세요. 제가 커피를 대접할게요. 마침 손님이 뜸한
때라서......”
“선생님, 이리 안으세요.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김 여사님이 오늘은 치과 손님이 아니라 제 개인손님이니 제가 직접 타서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 이런 행운이 다 있다니,”
혜영은 설계사로 일하고 있지만 아무에게나 섣불리 보험가입을 권유하지 않는다.
서너 번 만난 뒤 그 사람의 호감을 얻었다고 판단될 때 은근히 보험 이야기를 꺼내
면서 보험의 필요성을 제기 하면서 사회생활의 각종 재미있는 이야기를 예를 들면
서 보험을 들지 않으면 당장 큰일 날 것처럼 과대포장하거나 보험을 들지 않아 최
근에 큰 손해를 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지만 절대로 보험을 들라고 하
거나 강요는 해보지 않았다.
“선생님, 집에서도 부인께 이렇게 서비스를 베푸시겠죠? 사모님은 참으로 행복하
시겠다.”
헤이즐넛의 향기가 혜영을 후각을 자극했다. 박영식은 자신이 탄 커피를 맛있게
음미하는 혜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다시 엉뚱한 상상을 했다.
‘저 정도 여인이라면 애인으로 손색이 없을 텐데......’
“선생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 아닙니다. 김 여사님이 요즘 TV 드라마에서 한창 인기절정에 있는 탤런트
박정수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머나, 제가요? 박 정수에 한참 못 미치는데......”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이렇게 미인의 치아를 제가 치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행복합니다.”
박 영식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김 혜영은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선생님, 저 지금 퇴근하는 길이거든요. 아직 퇴근하시려면 좀 더 계셔야겠네요?”
김 혜영이 벽시계를 바라보면 만약에 박 영식이 시간이 허락 한다면 자리를 옮겨
저녁이나 소프트한 음료라도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동
시에 박 영식도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까지 5분정도 남아 있었다. 박 영식이 접
수대에 인터폰을
해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더 이상 접수된 환자가 없다고 하네요. 저도 오늘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요.”
순간 박영식은 김 혜영의 입에서 무슨 답변이 나올지 몰라 긴장했다. 김혜영이 잠
시 멈칫거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오히려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박영식의 세단 승용차가 강변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한강의 늦가을은 쓸씀함
을 더해
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무겁게 흘렀고 박영식은 헛기침만 해댔다.
“선 생님, 어디 좋은 곳이라도?”
“미사리 가보셨어요?”
“거기 가시게요?“
“네, 제가 머리가 아프거나 사색을 즐기고 싶을 때마다 찾는 카페가 있는데 경치
도 좋고 음식도
괜찮고 특히 커피 맛이 일품이라서요.“
“어머나, 저는 카페촌 앞으로 자주 다녀는 보았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어요.”
“그럼 오늘 저와 가보시자고요.”
오후의 카페촌은 한산해 보였다. 카페 주차장마다 서너 대의 승용차만 서있을 뿐
이다. 박영식은 ‘카사블랑카‘라는 카페에 차를 세우자 안내인이 나오면 정중히 인사
를 한다.
“이 집은 바닷가재 요리가 일품이지요. 와인도 일품이고”
“어머나 선생님은 미식가이신가 봐요?
“미식가라고 보다는 그냥 좋아서......”
두 삶은 한강을 내다 볼 수 있는 2층으로 안내되었다. 2층은 한쪽이 1층과 터져
있고 그 앞에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 자주 얼굴을 보였던 중년
의 여가수가 허스키하고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여운 있는 노래가사를 토해내고 있
었고 노래가 중간 중간 몇 안 되는
중년의 손님들은 박수를 쳐댔다.
“어머나, 경치도 참 좋아요. 이 집 주인은 안목이 남달라 보여요. 선생님, 제가 이
런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박 영식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자, 한잔 받으세요.”
“지금 한창 대낮인데 괜찮을까?”
김혜영이 능청스럽게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붉은 포도주는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산으로 보졸레누보라고 부르는데 진한
소스의 생선요리나 가벼운 쇠고기 요리 또는 로스트 치킨. 야채 라쟈냐 등에 잘 어
울린 답니다. 식사 중에
마시는 와인으로는 괜찮지요. 자, 김 여사님도 한 잔 해보세요.“
“제가 오늘 너무 큰 대접을 받네요. 그냥 가까운 곳에서 간편한 식사정도 하고 싶
었는데.“
“이렇게 우아하고 고귀한 미인을 보통으로 모시면 되나요?”
“어머? 저 놀리시면 싫어요.”
“아, 아닙니다. 진담입니다. 정말로 제가 병원 개업한 뒤로 김 여사님 같은 미인
손님은 처음입니다. 감색 투피스가 더욱 김 여사님의 흰 피부와 잘 어울립니다.“
김 혜영의 얼굴에 홍조가 띠기 시작했다. 늦가을 한강은 겨울을 맞이하기 위한 준
비에 한창 바빠 보였다. 여름내 푸르렀던 가로수 잎사귀들은 바람에 하늘거리면서
하나 둘 바람을 타고 여행을 떠나고 강변의 나무들과 잡초들도 갈색의 옷을 갈아
입느라 분준 해 보인다. 100평정도 되는 2층 홀 한구석에 두 쌍의 연인들이 일찍
부터 자리를 잡고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간혹 유쾌한 남자의 웃음소리와 여인의 교
성(嬌聲)이 전해지곤했다.
“김 여사님은 나이에 비해 정말 너무 젊어 보이세요. 제 집사람하고 비슷한 연령
인데도 젊어 보이십니다. 전 처음 김 여사님께서 우리 병원에 오실 때 탤런트가 오
신 줄로 착각했어요.“
“어머, 자꾸 놀리시면 저 정말 화낼꺼에요.”
바닷가재 요리가 나오고 붉은 와인 잔이 부딪히면서 초저녁의 시간은 빨리 지나
가고 있었다. 마치 오랜 기간 함께 해 온 연인 같기도 하고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이
기도 했다.
와인 세병이 바닥을 보였다. 술을 즐기지 않는 김혜영은 눈꺼풀이 무거워 지기 시
작했다. 처음 박영식을 경계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박영식의 달콤한 칭찬과 향긋한
와인 그리고
분위기에 서서히 평소의 분별력을 잃어갔다.
“저어, 김 여사님?”
“네에?”
“......”
“선생님, 말씀해 보세요.”
“저어, 김 여사님 애인 있으세요?”
“네에?”
김 혜영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마음을 진정 시켰다.
“아뇨, 없는데요? 유부녀가 애인을 둬서 뭣하게요? 집에 남편이 있는데요.”
‘이 여자가 숙맥인가? 아니면 고단수의 불여시 인가?’ 박 영식은 방금 전 자신이
불쑥 꺼낸
이야기에 미안해하며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죠. 집에 아저씨가 계신데.”
“그런데 선생님, 왜 그런 질문을 저에게......”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그 어색함을 눈치 빠른 김혜영이 깼
다.
“선생님은 애인이 있으세요?”
“네에? 아, 네에. 당연히 없지요. 누가 저 같은 남자를 애인으로 두겠어요. 볼품없는 저를요.“
“그럼, 제가 선생님 애인해 드리면 될까요?”
박영식은 귀를 의심했다.
“혜영씨야 말로 저를 놀리시면 저 진짜 화냅니다.”
“어머나, 세상에 어떤 여자가 선생님처럼 성실한 분을 애인으로 두고 싶지 않겠어요? 감히 선생님에게 접근을 못했겠지요. 선생님을 마음에 두고 있더라도.“
박 영식은 비록 김 혜영이 거짓으로 말했어도 기분이 좋았다.
“저는, 저를 잘 알아요. 세상에 화영배우나 탤런트 뺨치는 멋진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감히 그런 반열에 낄 수 있나요.“
의사로서 비록 이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박 영식은 자부했지만 대학 동창 모임이
나 의사친목회 가면 유부남들이 자신의 화류에서의 영웅담을 주요 화제로 꺼내고
즐거워 하는 데에 박영식은 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선생님은 한 가지를 못보고 계신 듯해요.”
“네에? 그 한 가지가 무엇인데요?”
“여자들의 눈, 즉 여자들이 남자들을 보는 척도이지요. 물론 선생님은 남자이시
니 당연히 여인네들의 시각은 없겠지요. 여자들은 십대나 이십 때 까지는 눈으로 보
이는 실체에 따라 움직이지요.
그러나 30이나 40십대가 되면 눈이 아닌 초콜릿의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본답니다.
결혼전에는 자신의 현재의 현상이나 상황을 유지시켜 주거나 빛내 줄 수 있는 남자를 찾지만 중년이 되면서 뒤 돌아보면 자신은 이미 한 남자의 지어미의 위치에 있어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것도 요즘처럼 낙엽이 지는 계절이면 그 시린 가슴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답니다. 그저 무서리 맞고 시들어 가는 연꽃이 되는 거지요. 저도 물론 한 여인이
기 전에 세 아이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아내라는 고삐가 매어져 있지요. 유부녀라
고 멋진 남자를 보면 왜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겠어요?“
“그래도, 저는 못 생긴 초콜릿이 되긴 싫은데......”
“못 생긴 초콜릿도 있군요.“
박 영식은 김 혜영의 말뜻을 헤아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 혜영은 말을 마
치자 건배를 제의했다.
“자, 선생님 괘념치 마시고 술이나 들어요.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저와 선생님의 첫 데이트를 위하여!”
“위하여”
노래를 부르던 남자 가수가 김 혜영과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했다. 카페 분위기는
마치 절정을 향해 달리는 쌍두마차 같았다. 이미 밖은 어둠이 짙게 내렸고 팔당댐쪽
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길게 이어졌다. 대리운전으로 두 사람이 서울 올림
픽 강변로를 달릴 때는 이미 자정이 지난 뒤였다.
차창 밖으로 강남의 거만한 아파트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제 각각 빛을 발산하
면서 늦가을의 밤을 장식했다. 박 영식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듯해서 김 혜영에게 간단히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가자고 제
의 했다.
“선생님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애 아빠가 기다릴 텐데......”
말과 달리 김혜영의 의지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한 30분만 투자해주세요. 제가 잘 아는 팝(Pup)이 있는데 분위기도 괜찮고 주로
중년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박 영식은 어디 내놔도 미모
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김 혜영과 함께 늦은 밤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꿈
결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도로변 낙엽이 이리저리 휩쓸려 날렸다.
역사는 주로 밤에 일어나게 마련이다. 박 영식은 잠깐 자신도 모르게 왼 손이 김
혜영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러나 김 혜영은 눈을 감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왼손에
신경이 집중되면서 박 영식은 김 혜영의 눈치를 살폈다. 뽀얀 김 혜영의 얼굴에 피
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박 영식이 손을 김 혜영의 스커트 위로 올려놓자 김혜
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 영식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박 영식의 왼손바닥이 촉촉
해지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 여자를 오늘 밤 어떻게 해볼까? 아냐 처음 만난 날부터 이러면 안 되지. 참아
야지. 난 사나이니까.‘
박영식은 머릿속에서 복잡한 수학공식을 풀고 있었다.
‘바보, 이렇게 내가 마음을 열었는데도 가만히 있다니. 바보야, 바보. 이 남자가 어
떻게 하나 지켜 볼까?‘
김 혜영이 장난기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박 영식의 왼손을 자신의 스커트 안쪽으
로 잡아끌자 박 영식은 은근히 놀라며 손에 힘을 주며 멈칫거렸다. 박 영식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박 영식이 얼굴을 돌려 김 혜영의 옆 얼굴을 보자 김 혜영은 눈을 감은 채 빙긋 웃
고 있었다.
‘음, 이 여자가 내가 싫지 않은 모양이군. 잘하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데.
내 여자, 아니 내 애인으로 말이야. 애인. 드디어 나에게도 애인이 생기나 보군.‘
박 영식의 입이 점점 옆으로 벌어졌다.
“저기서 좌회전해서 차를 벽에 바싹대고 파킹시켜 주세요. 어서오세요 사장님,
오늘은 사모님과 함께 오셨군요.”
박영식이 자주 들리는 업소의 종업원은 김혜영을 박영식의 처로 생각했다. 물론
밤 12시간 넘은 시각 남편이 아내를 대동하고 술집을 찾는 경우는 거의 희귀종으
로 분류 될 사람들이다.
홀 안에는 늦은 밤 만추의 분위기를 만끽하려는 중년의 쌍쌍들로 가득했다. 빈 테
이블이 없었다.
“사장님, 오늘은 테이블 대신 바 테이블에 앉으시면 더욱 분위기도 있을 법한데요.“
종업원은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은 손님이 제법 많군. 할 수 없지 뭐. 자, 김 여사님 저기 바 테이블 의자가 높기는 하지만
화려한 장식장과 다른 손님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저리로
가시지요?“
“박 선생님, 이 업소에는 자주 오시나 봐요? 종업원들이 박 선생님을 깍듯하게 모
시는 걸로 봐서요?“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옵니다.”
“오늘처럼 묘령의 여인을 데리고요?”
“예?”
박 영식은 김 혜영의 질문에 자신의 허점을 보인 것처럼 당황했다.
“아닙니다. 늘 혼자 왔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종업원들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물으면 아프다고 소리 지를 텐데요?”
“네에?”
박 영식은 위스키 언더락 한잔을 시키고, 김 혜영에게는 카카오 피즈를 시켜주었
다. 미사리에서 와인을 많이 마신 박 영식은 위스키를 단숨에 마셔 버리자 김 혜영
은 불안해했다.
“어머, 술도 잘 못하시는 분이?”
“아, 괜찮습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기분 좋은 날 또 절세가인이 제 곁에 있는데 어
찌 술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아이, 놀리지 마시고요. 그러다 너무 취하시면 댁에 어떻게 가시려고?”
“아, 전 집이 두 채입니다. 마누라가 있는 본하고, 저 혼자만 잘 수 있는 집하고요.“
“집이 두 채라니? 무슨 뜻인지?”
“아, 마누라가 보기 싫을 때, 종종 제 사무실, 아니 의원에서 자기도 하지요. 밤새
연구할 게 있다고 핑계대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