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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4)

* 창작공간/중편 - 여풍

by 여강 최재효 2019. 11. 14. 16:31

본문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4

 

소노부와 절노부의 두 장자가 피살된 후로 고구려의 정세(政勢)는 날이 갈수록점입가경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소노부가 주축이 된 5부 연맹은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쳤지만, 두 노부(奴部) 소속 장자의 죽음에 대한 향후 대책을 마련하지도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대월단의 완벽한 임무 수행으로 고구려 조정의 범죄 관련 관청뿐만 아니라 5부 연맹에서도 두 장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무런 단서나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이 미궁(迷宮)으로 빠져들자 5부 연맹과 고구려 전역에서는 이상 기류가 감지되었다.


 조정에 출사하는 고관대작과 지방장관 중 평소 뇌물을 챙기거나 부하들을 괴롭
힌 전력이 있는 자들은 복지부동하며 살길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해우 태왕이 관리들에게 기강을 바로 세우고 흔들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도 하부 조직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호족들조차 지하로 숨어 움직이지 않았다. 뒤가 구린 관료들은 벼슬을 그만두거나 칭병(稱病)하며 집안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하였다. 


 두 건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정국은 점점 더 꼬여만 갔다. 소노부와 절노
부의 고추가(古鄒加)와 유력한 장자들은 수시로 모임을 가지며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회의는 공전(空轉)만 거듭할 뿐이었다. 다른 노부(奴部)의 고위직에 있는 장자들은 이번 사건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애써 평온한 척하였다. 


 “다음번에는 우리 관노부 차례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 장자 중에서 털어서 먼
지 안 날 분 있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노부 소속 착한 백성들 등골을 빼먹고 산 덕분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따끈한 방에서 함포고복할 때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착하게 삽시다.”
 관노부에서 제법 언변이 좋다는 장자가 한마디 하였다. 


 “아닙니다. 이번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게 급선무입니다. 배후만 밝
혀지면 지금까지 우리가 누리고 살던 관습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여러 장자님들, 백성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우리가 내일부터 당장 손발에 흙을 묻힐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백성들은 우리 같은 상류층 사람들을 떠받들고 한평생 살기 위해 태어난
부류들입니다. 백성들은 개돼지처럼 한평생 살다 죽으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보살필 필요는 없습니다.”


 나이 많은 장자가 열을 올리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자 다른 장자와 유지들은 고
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장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관노부 최고 장자인 주부(主簿)가 큰기침을 서너 번 하였다. 장자들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주부는 조정에서 고추가 다음가는 고위직이었다. 고추가는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만 있는 직함이었다. 


 “여러분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백성과 우리 장
자들과의 관계를 논의하고자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닙니다. 벽서의 내용은 곧 고구려의 운명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 관노부는 과연 어느 위인(偉人)에게 운명을 맡겨야 할지를 논의해야 합니다. 제발, 세태를 정확하게 보세요. 내가 보기에 장자님들은 모두 눈뜬 장님 같습니다. 근시안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을 보면 너무도 답답합니다.”


 주부의 말에 장자들은 함구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생각하느라 골몰했다. 주부는
이번 사건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고구려 조정에서 해우 태왕 다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는 태왕의 숙부(叔父)인 재사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자들은 단순히 사건의 경위를 캐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 순노부는 이제 존폐의 갈림길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우리
순노부뿐만 아니라 5부 연맹 전체의 입장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는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소노부와 절노부의 두 장자가 죽은 것은 단순히 그자들의 개인적인 비리에 연유합니다. 벽서에 쓰인 바와 같이 추모 태왕께서는 고구려가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평화롭게 사는 무릉도원이 되기를 갈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와 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두 장자가 참수된 것은 어쩌면
고구려 만백성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한 추모 태왕의 일갈(一喝)이라고 보면 될 것같습니다. 조만간에 고구려의 향방을 가늠할 걸출한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순노부는 이 나라가 건국되면서부터 국가의 의례(儀禮)와 제례(祭禮) 등을 맡아왔습니다. 우리는 순노부의 전통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유지 관리해야 합니다. 무지하게도 정세의 흐름을 외면하면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순노부는 곧 오실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고구려 조정에서 주부와 우태보다 아래 관등이기는 하지만 순노부에서 가장 영
향력이 막강한 승(丞) 대인의 말에 순노부 장자들은 머리만 긁적거렸다. 장자 중에서 비리가 많은 자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언제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목을 취할지 몰라 잠시도 편히 앉아있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승대인, 곧 오실 그분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비리가 있는 한 대인이 승대인에게 물었다.


 “나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봅시다.”


 승 대인은 그분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함부로 실명을 밝힐 수 없었다. 자
신이 추측하고 있는 인물이 곧 나타날 ‘그분’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순노부의 장자들은 하릴없이 객쩍은 이야기를 하면서 구세주처럼 나타날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 추측성 말을 남발하기 바빴다.


 연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장자들의 모임은 결론 없이 끝나기 일쑤였다. 5부
연맹의 수장들을 비롯한 장자들은 마치 거대한 영웅이 뚜벅뚜벅 국내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자들은 그 영웅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項羽)나 북부여를 창건한 천왕랑 해모수(解慕漱)쯤 되는 거물일거 라고 상상하였다.  


 “두로야, 반역 도당(徒黨)들이 어찌하여 네 이름을 벽서에 거론한 것이냐? 짐에
게 바른대로 고하거라. 짐은 너를 피붙이처럼 위해주었느니라. 짐에게 추호도 거짓이 있으면 안 된다. 너는 짐이 *명부(冥府)에 들 때도 짐과 함께 *천경(泉絅)에 들어 호위 무사로 있어야 하느니라. 행여, 다른 마음먹으면 즉시 네 육신을 갈가리 찢어 독수리 떼에게 먹이로 줄 것이다.”


 해우 태왕은 소노부와 절노부 고추가가 가져온 벽서를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5부에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태왕은 노발대발하면서도 당장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들은 태왕의 괴팍한 성정으로 피해를 볼까 봐 될 수 있으면 태왕 앞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 명부=천경, 저승을 말함.
 
 “폐하,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역도들이 작성한 벽서에 어째서 저를 지목하였는
지 모르겠습니다. 소신은 지극정성으로 폐하와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밤낮으로 충성을 다한 것밖에 없습니다. 소신을 믿어주소서.”


 두로는 해우 태왕 앞에 엎드려 눈물까지 흘리며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태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태왕은 온갖 궂은 일들을 두로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네가 짐에게 충성하고 있는 바를 잘 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또 다시
이런 불경한 일이 발생하고 네 이름이 회자(膾炙)된다면 네놈의 목을 잘라 국내성벽에 걸어 놓을 것이야. 짐은 오늘부터 네놈을 유심히 관찰할 것이야. 명심해라.”

 해우 태왕은 두로의 눈꼴틀린 모습을 한번 노려 보고 고개를 홱돌렸다.


 “태, 태왕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이 두로는 이승에 있을 때는 태왕 폐
하의 충견(忠犬)으로 살 것이며, 저승에 들어서도 역시 폐하를 가까이서 보필하며 순진무구하고 사심 없는 개로 살아갈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두로는 무릎을 꿇고 태왕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그래야지. 알았다. 알았어. 이놈아, 무슨 사내가 그리 겁이 많은 게야? 짐
이 한마디 했다고 눈물을 흘리다니, 바보 같은 놈.”
 “폐하의 성은이, 성은이 태산 같사옵니다.”
 두로는 소리를 내어 울고 나서 태왕에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휴우-, 살았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내 이름을 들먹거린 것이야? 이놈들을 찾아
내 박살을 내야지 안 되겠어. 다음에 또 내 이름이 거론되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두로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소노부의 수장 고추가를 찾아갔다. 소노부는 충격
에 빠져 있었다. 두로가 소노부에 찾아갔을 때 마침 소노부의 모든 장자와 유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두로 대인, 어서 오시오. 우리 소노부는 언제나 두로 대인을 환영한답니다. 태
왕 폐하께서는 평안하신지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소노부 고추가가 맨발로 달려 나와 두로를 맞았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못된 짓
을 서슴없이 저질러온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둘은 이번 사건으로 더욱 끈끈한 연대를 모색하고 싶어 했다.


 “고추가 대인, 평안이 다 뭐요? 이번 사건으로 나는 죽을 뻔했습니다. 속히 소노
부와 절노부의 장자를 죽인 놈들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고추가와 나의 목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빨리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고추가는 하인을 시켜 술상을 내오게 했다. 두주불사인 두로는 술을 보자마자 한
동이를 순식간에 비웠다. 두로는 보통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앉아서 술 열 동이를 마셔야 취했다. 태왕도 두로가 술을 잘 마신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는 술에 취하여 안하무인이 되었다.


 “두로 대인, 이번 사건을 태왕의 묵인하에 측근들이 저지른 사건 같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소노부와 절노부에서 태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그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소노부 고추가가 말하는 태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란, 다름 아닌 태왕의
시침(侍寢)들 여인과 관련한 것이었다. 소노부 고추가에게는 딸이 세 명 있는데, 둘째 딸이 고구려 최고의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또한, 절노부 고추가에게는 딸이 둘이 있는데, 두 명 모두 미모가 출중하다고 소문이 난 상태였다.

 

 어느 날 태왕이 소노부와 절노부의 고추가를 불러 은근히 두 대인의 딸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대인의 딸들은 아직 어려서 사내와 잠자리를 하기에는 미숙했다. 태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소노부 고추가는 둘째 딸 대신 미모가 떨어지는 큰딸을 태왕에게 시침들 궁인으로 보냈고, 절노부 고추가는 삼년 후에 태왕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소노부 고추가가 둘째 딸이 아닌 박색의 큰딸을 보내자, 태
왕은 고추가가 자신을 속였다며 진노(震怒)가 극에 달해 고추가의 큰딸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또한, 절노부 고추가의 두 딸이 모두 가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태왕은 진노하였지만 5부 연맹의 수장들을 죽일 수 없었다. 


 ‘태왕이 나 아닌 측근들을 시켜 소노부와 절노부의 장자들을 죽였다? 그렇다
면 태왕이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지, 태왕은 이미 두 얼굴이 아닌 열두 얼굴을 가졌지. 태왕의 변덕을 아무도 말릴 수 없어. 나 역시 언제 태왕이 보낸 자객의 칼에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 내가 어쩌다 그런 인간에게 빌붙어 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더란 말이냐?’


 두로는 고추가의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고추가는 두로가 생각에 골몰하
자 이상한 생각을 했다. 태왕이 곧 자신의 목을 달라고 할 것만 같았다.


 “소노부와 절노부의 두 장자를 죽인 자객이 태왕이 보냈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
나 마찬가지입니다. 벽서에 나를 거명하였으니 이일을 어찌해야 할 지 난감합니다.”


 고추가는 아직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두로가 무슨 말을 하면 엉뚱한 답
변을 하기 일쑤였다. 두로는 소노부 고추가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왔다가 되레 위로를 해줘야 할 것만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고추가 대인,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태왕은 소노부를 지지기반으로 하여 보위
에 앉았습니다. 두 분 고추가 대인의 딸 사건으로 잠시 화가 난 태왕께서 소노부와 절노부를 한번 혼내준 것 같습니다. 고추가 대인께서 절노부 고추가와 상의하여 미녀 두 명을 시침들 궁인으로 들여보세요. 그럼, 여색을 탐하는 태왕의 마음이 누그러질 겁니다.”
 두로가 잔을 비우고 고추가를 안심시켰다.


 “그리해야겠습니다. 왜 진작 그런 방법을 구상하지 못했을꼬?”
 두로는 소노부 고추가, 장자들과 어울려 하룻낮과 밤을 새우며 술을 퍼마셨다.

 

 소노부 장자들은 두로의 말만 믿고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판단하고 예전의 습성으로 돌아가 또다시 백성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착취하였다. 소노부의 고추가와 장자들이 전혀 뉘우침 없이 예전과 같은 행동을 일삼자 절노부의 고추가와 장자들도 똑같이 따라 하였다.


 “대부인, 일단 관노부의 주부(主簿) 대인을 접촉하여 대부인의 뜻을 충분히 알
렸습니다. 주부는 우리 계루부에 긴급 사태가 일어나면 기마대를 동원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부인께서 주부를 격려하고 치하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전하시지요. 그리고 순노부의 승(丞)대인 또한 대부인의 뜻을 받들어 계루부가 원하면 언제라도 군사들을 보내 지원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승대인에게도 서신을 보내시지요.”


 “좌보대인, 우태대인, 고생하시었습니다. 이제 절노부만 남았습니다. 소노부는
어차피 태왕의 후원세력이니 그냥 두고 절노부만 잘 포섭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 같습니다. 모레 술시(戌時) 관노부의 주부대인과 순노부의 승대인을 초빙하세요.

 

 우리 계루부와 동맹을 맺는 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내일 낮에는 내가 직접 절노부의 고추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절노부만 우리 편이 되면 고구려 오부 연맹은 계루부의 영향권 아래 둘 수 있습니다.”


 “대부인, 내일 직접 절노부에 가신다고요? 가시게 되면 고추가 대인님도 함께
가시지요.”
 “나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좌보대인과 우태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여부인이 계루부 수장이면서 고
구려 왕자인 재사의 배우자라 하여도 여인의 처지로 사내들을 상대로 담판을 벌이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미는 이미 5부 연맹에서 알아주는 여장부였다. 그미가 해우 태왕의 숙모라는 보이지 않는 권위와 위엄이 다른 노부(奴部)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고구려에서 태왕 이외에 재사와 그미의 권위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이 태왕을 알현할 때는 한없이 온순한 양처럼 행동하지만, 태왕이 없는
곳에서 재사와 그미는 태왕에 버금가는 언행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또한, 5부 연맹 중에서 막강한 병력(兵力)과 재력(財力)을 지닌 계루부의 수장이라는 점이 부부의 위엄을 더욱 높여주었다. 재사의 말 한마디는 태왕의 어명(御命)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졌다. 태후(太后)가 없는 고구려의 왕실에서 그미는 이미 태후나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오후 좌보대인과 우태대인 그리고 호위 무사 20여 명이 절노부로 떠나
는 그미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미의 화려한 행차는 왕의 어가를 방불케 했다. 그미가 탄 마차 뒤로 절노부에 선물할 물건들이 마차 다섯대에 가득 실려 있었다.

 

 절노부의 수장을 만나기 위하여 절노부로 향했다는 소식이 절노부에 전해졌다. 절노부의 고추가는 태왕의 숙모이며 유리왕의 왕자 재사의 아내인 부여부인이 온다는 소식에 갈팡질팡하였다. 그미가 한 번도 절노부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어서, 어서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절노부의 모든 장자를 소집하여라.
우리 절노부에 귀인이 오신다. 그 귀인에게 밉보이면 우리 절노부는 끝장이다.”


 고추가의 명령이 절노부 산하 모든 마을에 전해지고 장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추가의 저택으로 모여들었다. 장자들도 그미의 위엄과 성정을 잘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그미와 한번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미는 끝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성정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절노부의 장자들은 그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경을 써야 했다.

 

 그미가 탄 황금빛 찬란한 마차가 좌보대인과 우태대인 그리고 창칼을 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절노부 고추가의 저택에 도착했다. 칠보로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붉은 비단옷을 입은 그미는 금방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 같았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절노부의 모든 장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대부인, 어서 오십시오. 절노부를 찾아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절노부 고추가가 허리가 꺾어질 정도로 몸을 굽혀 그미에게 정중히 인사하였다.
고추가 뒤로 서 있던 장자들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감히 그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대인들께서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절노부 사람들도 그미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절노부 고추
가의 저택은 이미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그미가 고추가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후원에 있는 별채로 들어갈 때 그미를 본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그미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마다 그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과연, 과연 고구려의 여장부답다.”
 “조쌀하게 생긴 게 여간내기가 아니겠어.”


 “쉿, 개똥 어멈. 말조심해. 태왕의 숙모님이셔. 남편은 유리태왕의 막내 왕자님
이고, 계루부의 수장으로 고추가란 말이야.”


 “우와, 처녀보다 더 젊고 예쁘다. 과연 재사 왕자님 부인답다.”
 “왕비보다 더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부여부인이 우리 절노부 사람들에게 주려고 인삼과 약초 그리고 소고기, 돼지
고기를 다섯대의 수레에 가득 실어 왔대. 과연 여장부답다.”


 절노부 사람들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젊은 사내들은 그미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미가 손뼉 치는 사내들에게 손을 흔들자 사내들은 자지러지며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미가 별채로 들었다. 내실에는 산해진미가 산더미같이 올려진 주석(酒席)이 마련되어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장자들과 유지들이 한 사람씩 그미에게 인사를 하였다.


 “여러분, 오늘 위대하신 주몽 태왕의 손자 며느리이시며, 유리 태왕의 며느리
이고 또한 현재 해우 태왕의 숙모이신 부여대부인께서 우리 절노부에 왕림하셨습니다. 모두 잔을 들어 부여대부인님을 환영합시다.”


 절노부 고추가가 건배를 외치자 갑자기 분위기가 유쾌하게 변하며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그미는 잔잔한 미소를 지어가며 장자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었다. 미와 시선이 마주친 장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얼른 고개를 숙여 그미에게 복종뜻을 전했다. 어떤 유지는 그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미의 미모에 반해 멍한 태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그미가 자리에일어났다.


 우리 고구려는 추모대왕(鄒牟大王)께서 단군 할아버님의 재세이화홍익인간(在
世理化弘益人間), 즉 '하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라는 뜻을 받들어 나라를 건국하셨습니다. 고구려는 천년 제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이제 겨우 오십 년밖에 안 된 상태에서 너무 많은 부침(浮沈)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나라 오랑캐들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또한, 백제를 비롯한 사로국과 주변 여러 나라도 우리 고구려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나라 형편을 보십시오. 정상적인 나라가 맞습니까? 이대로 더 지속할 경우 고구려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 5부 연맹이 일치단결하면 외침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계루부를 대
표하여 절노부와 친선을 맺고자 왔습니다. 얼마 전에 소노부와 절노부 소속 장자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짓을 해서 천벌을 받았을 겁니다. 여기 모인 장자님들은 절노부 백성을 친 자식처럼 여기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이 여전히 암약하고 있을 겁니다. 천지신명께서 그분들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계신다면 즉시 비열한 행동을 멈추고 장자답게 행동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계루부에도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계루부는 절노부와 예전부터 상호협력하며 지냈습니다. 절노부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우리 계루부가 발 벗고 나서서 도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우리 계루부가 난관에 봉착하면 도와주리라 믿습니다. 훌륭하신 고추가님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몸을 사리고, 불법을 앞장서서 저지르는 일부 장자들은 곧 하늘이 천벌을 내릴 거로 믿습니다. 우리 고구려는 이제 서쪽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서쪽의 대륙은 단군 할아버님이 개척하고 누천년 간 나라를 운영하신 우리의 땅입니다. 한나라 오랑캐들이 옛 조선을 파멸시키고 차지한 땅을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그미의 사자후(獅子吼)에 장자들은 중간중간 박수로 응수했다. 어떤 장자는 그미
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대부인 만세‘를 외치고 또 어떤 장자는 ’고구려 만세, 대부인 천세‘를 연호하며 뜨겁게 반응하였다. 그미의 연설은 무서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리에 연루된 장자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다.


 ‘아, 과연 여장부로다. 저런 분이 태왕이 돼야 한다.’
 ‘해우 태왕을 당장 내치고 대부인을 태왕에 앉혀야 한다.’


 ‘맞다. 고구려는 끊임없이 대륙을 공략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대부
인이 비록 여자이긴 하지만 고구려를 중흥시킬 적임자다.’


 ‘무서운 여자다. 혹시 소노부와 절노부의 두 장자를 죽인 배후가 저 부여부인 아
닐까? 저 여자가 이 시점에서 왜 우리와 손을 잡으려 하는 거지? 참으로 묘한 일이로다.’  


 장자들은 그미의 연설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미의 이야기가 끝
나고 다시 흥겨운 주연이 이어졌다.


 “대부인, 제가 감히 잔을 올리겠습니다. 연설이 참으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가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절노부의 고추가가 그미에게 술잔을 건네고 감격해 했다. 고추가를 시작으로 절
노부 장자들이 연장자 순서대로 다가와 그미에게 술잔을 올렸다. 비리가 있는 장자들은 그미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미는 모든 장자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손을 잡아주었다.

 

 주연은 새벽이 훨씬 지나서 끝나고 그미와 좌보대인, 우태대인 등은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 때쯤 계루부로 돌아왔다. 그미의 품에는 절노부 고추가와  상호 협력을 규약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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