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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1)

* 창작공간/중편 - 여풍

by 여강 최재효 2019. 11. 11. 15:44

본문

 

 

 

            - 본 작품은 고구려 제6대왕인 태조왕의 어머니 부여태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부여 출신 여인으로 고구려 왕자 재사(再思)와 혼인하여 아들 궁(宮)을

              낳습니다. 그녀는 7살의 궁을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는 여장부 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주변의 약소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여걸이기도 합니다.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 여강 최재효 -

 

 

 

 

 

 

 

 

 

                                                                          

 

 

 

 

 

 

 

                                                                             여풍

 

 

                                                                                                                                                                                 - 여강 최재효

 

 

                                                                                                      1

 

 

 고구려 국경을 넘은 부여의 대소왕(帶素王)이 고구려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자, 나라가 곧 망할 것을 우려한 대소왕의 친제(親弟)는 무리 일백여 명을 이끌고 압록곡(鴨淥谷)에 진출하였다. 친제는 사냥 나온 해두국(海頭國) 왕을 죽이고 왕의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갈사국을 세웠다.


 또한,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자신을 따르는 부여 백성 일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
려로 귀순하였다. 이때 무리에 섞여 고구려로 넘어온 부여녀(扶餘女)는 고구려 대무신 태왕의 아우인 재사(再思) 왕자와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부여부인이라 불렀다. 


 고구려 제2대 유리 태왕부터 제5대 해우(解憂) 태왕까지 고구려 *5부 연맹 중
하나인 소노부(消奴部)에서 태왕이 배출되었다. 태왕을 배출한 소노부의 전횡은 다른 노부(奴部)에 많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였다. 조정의 요직은 소노부에서 독점하다시피 했고, 소노부 소속 관리들의 만행과 비리는 도를 넘고 있었다. 영토 확장에 여념이 없던 태왕들은 내홍(內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여 부인은 말수가 적고 도저하며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미는 절도있
는 언행과 엄격한 주변 관리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지아비 *재사(再思)로 부터도 칭찬을 들었다.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왕실에서는 끊임없이 음모와 배신이 이어졌다. 대무신 태왕의 두 번째 후비(后妃) 해씨(解氏) 부인의 아들 호동(好童)왕자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구려 백성들로부터 영웅호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소국들과의 벌어진 전장에 나가 혁혁한 전과(戰果)를 세워 부왕을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제1왕비는 이제 겨우 한 살짜리 아들 해우(解憂) 왕자를 품에 안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 5부연맹 - 계루부(柱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다.                 또 다른 이칭으로 계루부,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환나부                  (桓那部)라고 한다. 5부 명칭 뒤의 ‘노(奴)’자나 ‘나(那)’자는 개울(川), 냇가의 주변 지역이나 또는                 그 일원의 어떤 특정 집단을 뜻한다.
* 그미 - 주로 문학 작품에서, ‘그녀’를 가리키는 말
* 재사 – 고구려 제2대 유리 태왕의 여섯 번째 아들. 유리왕의 큰아들은 도절(都切), 둘째 아들은 해명(解明),
              셋째 아들 무휼(無恤), 넷째 아들 여진(如津), 다섯째 아들은 해색주(解色朱)

 

 

 그녀는 자신이 낳은 어린 해우왕자를 장차 고구려의 태왕에 앉히고 싶어 했다. 호동왕자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자 그녀의 조급증은 차츰 더해 갔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중신들과 모의해 호동왕자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낙랑국(樂浪國)을 정벌하고 돌아온 그를 함정에 빠트렸다. 


 제1왕비는 태왕이 궁궐에 없을 때 호동왕자가 자신을 찾아와 강제로 욕을 보였
다며 무고하였다. 대무신 태왕은 왕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그녀의 무고와 중신들의 상소에 호동왕자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비의 참언(讒言)을 믿게 된 대무신 태왕의 의심은 호동왕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일로 고구려 전역에는 제1왕비를 규탄하는 소리가 높았고, 그녀는 왕실 사람
들에게서도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제1왕비는 부여 부인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으로 궁궐에서조차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두 여인의 갈등으로 대무신 태왕과 재사(再思)왕자 사이도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미는 참언으로 호동왕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1왕비를 저주하고 있었다. 미워하는 여인의 몸에서 나온 자식 역시 그미의 저주 대상이 됨은 물론이었다. 그미가 제1왕비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그미의 조국 부여(扶餘)에 기인 했다. 호동왕자의 생모 해씨는 갈사국 왕의 손녀였다. 갈사국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였고, 그미는 부여 출신이었다.


 압록수의 한 지류 주변에 소노부, 계루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 등 5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이 집단들을 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5부 연맹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었다.

 

 5부 연맹 중에서도 왕실을 구성하는 노부는 소노부와 계루부, 절노부 였다. 소노부는 왕을 배출하였고, 절노부는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주몽 태왕을 배출했던 강력한 집단임에도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하는 계루부는 절치부심하여 태왕의 위(位)를 노리고 있었다. 세 노부 이외의 관노부와 순노부는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각부는 끊임없이 갈등과 연합을 반복하면서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태왕을 배출한 소노부의 막강한 세력을 억누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미는 시아주버니였던 대무신 태왕이 44세로 훙서하였을 때, 남편 재사가 고
구려의 태왕에 앉을 기회를 놓친 것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대무신 태왕과 제1왕비 사이에 태어난 소생으로 해우가 있었지만, 정사를 책임지기에는 어렸다.

 

 5부 연맹에서 태왕의 동생인 해색주(解色朱)와 재사 중에서 다음 태왕의 뒤를 이을 인물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두 형제는 서로 엇비슷한 성정으로 우애도 깊은 편이었다. 오랜 토의와 검증 끝에 5부 연맹 회의에서 해색주를 차기 태왕으로 결정하였고, 그는 퍽 내키지 않는 심정에서 고구려 제4대 태왕의 지위에 올랐다.

 

 해색주 태왕의 재위 이듬해부터 고구려 전역에서 천재지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고구려 동부지역에서 홍수가 나면서 그해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식량이 부족한 동부지역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며, 나라 안을 떠돌았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해색주 태왕은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매년 기근이 이어지면서 백성들은 해색주 태왕을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도 태왕은 중신들과 군사들을 동원하여 민중원(閔中原)으로 사냥을 나가기도 하였다.


 백성을 돌보지 않는 태왕에게 실망한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 대승(戴升)은
자신을 따르는 일만여 가구와 함께 후한(後漢)으로 귀순하는 등 나라 안은 백성들의 원성으로 시끄러웠다. 원치 않은 권좌에 오른 해색주 태왕은 재위 5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그를 민중원(閔中原)에 장사지내고 그에게 민중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미는 지아비 재사를 차기 고구려 태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계루부의 주요
인사들을 규합하여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와 연대를 모색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번 대무신 태왕이 훙서했을 때, 태자 해우가 어리고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없어 태왕의 자리에 앉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해우의 배경이 되는 소노부에서 군대까지 동원하여 다른 노부(奴部)를 협박하다시피 했다.

 

 결국, 5부 연맹에서 민중왕의 후임으로 태자 해우가 차기 태왕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부여 부인은 치밀하지 못한 지아비 재사를 속으로 원망하며, 계루부 장자들과 조정에 출사하는 중신들을 크게 질책하였다.


 “지난번에도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
였습니다. 계루부가 살 길은 태왕을 배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해우는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없고, 그의 생모는 포악하며, 소노부 사람들 역시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다음 번에는 우리 계루부에서 태왕을 배출해야 합니다.”


 계루부의 막후 실력자로 부상한 부여부인은 계루부 소속 장자와 중신들에게 어
려운 주문을 하였다. 나이 많은 왕자 재사는 계루부의 *고추가(古鄒加)를 맡고 있었다. 부여 출신의 부여부인은 권력 지향적인 여인이기도 했다. 두 번씩이나 지아비가 고구려의 태왕이 될뻔한 기회를 놓친 뒤로 그미는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고 차기 고구려 태왕을 노리고 있었다. 망국(亡國) 부여 출신으로 고구려 왕자의 부인이 되고 계루부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 위해 그미는 지아비의 배경을 십분 이용했다.

 

* 고추가 – 고구려. 왕족, 전 왕족, 왕비족, 기타 유력한 노부(奴部)의 수장만 받을 수 있었던 관등.

 

 그미에게는 어린 아들 궁(宮)이 있었다. 해우가 제5대 고구려 태왕에 등극하고 얼마 안 돼서 그의 생모가 세상을 달리하자, 그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해우는 숙부인 민중왕 재위 중에 여러 번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생모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생모를 잃자 해우 태왕은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재위 초반부터 중신들과 5부 연맹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즉위한 첫해 늦가을에는 엄청난 폭우가 보름 가까이 내렸다. 수백 곳의 마을이
매몰되고 수천 명의 백성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며, 수십 곳의 산이 무너져내려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듬해 3월 거대한 폭풍이 국토를 휩쓸어 수백 년 된 고목이 뿌리째 뽑혀나갔으며, 4월에 한파가 닥쳐 농작물들이 대부분 얼어 죽기도 했다. 5월에는 하늘에서 달걀만 한 우박이 쏟아져 논밭에서 막 싹이 올라오던 농작물이 훼손되는 등 천재(天災)의 연속이었다. 


 “대부인 큰일입니다. 해우 태왕이 등극한 이후로 해마다 일어나는 천재로 백성
들의 삶은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하루 한 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계루부 출신 *좌보대인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미에게 아뢰었다. 그는 나라의
중대 사안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미를 찾았다. 그미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여 황실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풍족하고 자유분방한 유년을 보냈다.

 

 그미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무예를 배워 검술, 궁술(弓術), 마술(馬術)에 능했고, 병법(兵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계루부에서는 그미의 검술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계루부 소속 군사들의 진법(陣法)을 연구하여 직접 훈련을 주관하기도 했다. 

 

 

* 좌보 - 고구려 건국 초창기에 점차 확대되어가는 통치기구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목적에서 좌,우

           보(左右輔) 관등을 설치하였다. 나중에 국상, 막리지로 이름이 바뀐다. 지금의 국무총리 격이다.

 
 “대인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아주 잘 돼 가고 있어요. 해우가 태왕이 된 이후
부터 매년 반복되는 천재를 왕이 실덕(失德)하여 그렇다고 소문을 내세요. 백성들은 민중 태왕의 뒤를 이은 해우 태왕에게도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그미의 얼굴에서 진한 향이 풍겼다. 좌보대인은 그미가 팥으
로 메주를 쑤어도 믿을 만큼 그미에게 절대복종하였다.


 “그렇습니다. 태왕은 너무 의심이 많고 독단적이라 중신들의 말을 거의 듣지 않
습니다. 태왕이 즉위 초기에는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지역을 정복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만, 계속되는 천재로 그나마 쌓은 공적(功績)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기행으로 중신들과 백성들로 부터 신뢰를 회복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좌보대인이 고개를 흔들어 댔다. 그미는 계루부의 수장인 지아비 재사의 후원에
힘입어 계루부를 5부 중에서 가장 막강한 집단으로 키우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다. 지아비가 아무리 고추가의 지위에 있다고 하지만, 관리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피폐(疲弊)하거나 현재에 안주하려 든다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미는 틈만 나면 계루부의 주요 인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내고 결
속을 다졌다. 지어미와 성격 차가 있는 재사는 그미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장차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될 수 있으면 그미의 일에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좌보대인, 지난번에 잠시 짬을 내서 압록수에 있는 염전(鹽田)에 다녀왔습니다.
지금보다 규모를 두배로 확대하고 판매망도 한(漢)나라뿐만 아니라 부여와 백제, 사로국, 가야까지 넓히려 합니다. 우리 계루부에서 신경을 좀 더 쓰셔야 할 겁니다.”
 그미의 도저하고 빈틈없는 모습에 좌보대인은 연신 고개만 조아렸다.


 “대부인, 지난해 사들인 농장과 선단(船團)도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시지요.” 


 “아닙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습니다. 압록수 하류는 *개마대산(蓋馬大
山)에서 발원한 강물과 황해수(黃海水)가 만나는 곳으로 최고의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장차 계루부가 고구려의 오부 중에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자금력이 충분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금력으로는 힘에 부칩니다. 조속히 추진해 주세요. 염전 확장 사업 건은 고추가와 이미 상의하였습니다.”


 그미는 지아비가 고구려 왕실의 큰 어른이며, 계루부의 고추가라는 지위를 이용
해 재산을 증식해 왔다. 그미는 두 번씩이나 지아비를 고구려 태왕의 지위에 앉히지 못한 것은 금력(金力)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경제력 확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재사는 이미 고구려에서 손에 꼽을 만큼 재산이 많이 있지만, 그미는 지아비를 태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계루부에는 재사 이외에도 재산이 많은 장자와 유지가 꽤 있었다.

 

*개마대산 - 지금의 백두산, 고구려 시대에는 개마대산이라 칭했다.

 

 그러나 막상 긴급한 상황을 맞이하면 돈 많은 장자와 유지들은 거금을 선뜻 제공하지 않고 눈치를 보았다. 눈치를 보다 실기(失期)하는 경우를 몇 차례 겪자 그미는 생각을 달리했다. 계루부에서 양성하는 사병을 먹이고 입히는데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계루부의 사병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계루부의 장자들로부터 일정 금액을 갹출하여 충당하지만, 금액을 놓고 장자들 간에 갈등이 상존했다.

 


 “대부인께서 지난번에 하명하신 대월단(大月團) 구성 건은 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보름 정도 지나면 완결될 것 같습니다.”


 “대월단 구성 건은 현재 나와 고추가 그리고 좌보대인과 계루부 소속 일부 장자
들만 아는 사안입니다. 절대로 외부인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를 기해주세요. 그리고 태왕의 호위 무사인 두로(杜魯)를 포섭해야 합니다.”


 “대부인의 명대로 그자에게 접근하였으나, 워낙 고집이 센 작자라 쉽게 먹혀들
지 않습니다. 소신이 계속해서 접촉하고 있으니 조만간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그미가 말하는 대월단은 계루부 내에 비밀조직을 신설하는 것인데, 백 명의 검
사(劍士)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그미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구조였다. 대월단은 고구려의 중앙과 지방조직에서 주요직책을 맡은 인사들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다른 세력과의 결탁 등을 은밀히 조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또한 그미가 내리는 어떠한 지시라도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했다.


 이 비밀조직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지아비 재사뿐만 아니라 부여부인과 좌보
대인 그리고 이에 관련된 계루부 인사들이 태왕의 의심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의(大義)를 위해서 그미는 조직과 재물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두 번의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그미는 조정 중신과 지방 장관 그리고 각부의 친분있는 인사들에게 정국이 돌아가는 정황을 보고를 받고는 있었으나, 좀 더 체계적인 정보의 수집과 관리가 필요했다. 백 명의 대월단원은 무예의 고수들로 일당백의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들은 필요할 경우 반대파 요인의 암살이나 정적(政敵) 제거 등 위험한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그미는 장차 제거해야 할 인물들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殺生簿)를 늘 곁에 두고
있었다. 그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자들은 계루부를 포함한 5부의 수장, 장자, 유지 그리고 조정의 주요 관직을 맡은 인사, 지방에 나가 있는 장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 장관인 욕살(褥薩)은 행정과 군사의 양면을 관장하는 군정적(軍政的) 책
임을 지니고 있었으며, 욕살 이외의 지방관으로 처려근지(處閭近支)와 가라달(可邏達)이 있었다. 그미가 계획하고 있는 관리를 제거하는 방법은 목숨을 빼앗는 것 보다 그들의 비위 사실을 밝혀내 관직에서 퇴출하거나 관등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미가 특히 신경을 쓰는 인물 중에는 해우 태왕의 경호를 맡은 역사(力士) 두로(杜魯)가 있었다. 그는 모본(慕本) 지역 출신으로 팔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도 능했다. 고구려는 태왕이 붕어하면 측근의 신하들이나 후비(后妃)들이 따라 죽어야 하는 순장 제도가 있었다. 


 두로는 해우 태왕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두로는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미는 두로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 계략을 짰다. 우직한 성격의 두로는 해우 태왕을 그림자처럼 따르면서도 태왕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천수를 누리기 위해서는 해우 태왕이 자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해우 태왕은 날로 성정이 포악해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폭음을 했다. 두로는 혹시 태왕이 폭음으로 병을 얻어 죽지 않을까 불안해 했다. 그미의 밀명을 받은 좌보대인이 두로를 만나 여러 가지를 넌지시 뜨개질해보았지만, 그의 반응은 마이동풍이었다.


 “두로야, 저년을 끌고 나가 단칼에 목을 잘라라. 감히 짐의 심기를 건드려 기분
이 좋지 않구나.”


 “태왕 폐하, 저 궁녀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기가 막힌 데 용서해 주시지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다가 그때도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소신이 즉시 죽이겠습니다.”


 “이놈, 두로야, 짐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뭔 잔말이 많은 거야? 너도
죽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궁녀가 너무 예뻐서요.”


 해우 태왕은 의심병이 많아 궁인들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한 궁녀
가 태왕의 어깨를 주무르다 마음에 들지 않자 두로에게 죽이라고 명했다. 태왕은 앉을 때도 덩치가 큰 남자 궁인을 뒤로 기대어 앉았고, 말에서 내릴 때는 남자 궁인이 엎드려 받침대 역할을 해야 했다.

 

 그때 궁인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가차 없이 목을 쳤다. 그렇게 해우 태왕의 심기를 건드려 죽어 나간 남녀 궁인이 부지기수였다.


 “여봐라, 저년을 당장 끌고 나가 목을 쳐라. 짐이 기분이 안 좋다.”


 어느 날, 태왕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를 내며 소리쳤다. 태왕은 베개 대신
궁녀의 몸을 베고 잠을 잤다. 궁녀의 엉덩이와 젖가슴은 밤새 태왕의 베개 역할을 해야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태왕이 흉몽을 꾸거나 몸이 개운하지 않으면 시침을 든 궁녀는 곧바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했다.


 “태왕 폐하, 한 번의 실수로 궁인의 목숨을 빼앗는 처사는 너무 심합니다. 볼기
를 치거나 몽둥이 찜질로 다스려도 충분하다고 사료됩니다.”
 한 신하가 태왕에게 충언(忠言)하자 태왕은 그를 한참 노려보았다.


 “두로야, 이놈하고 저년을 끌고 나가 과녁 앞에 세워라. 연놈들이 짐을  죽이려
고 작당을 한 모양이다.”
 두로와 근위병들은 신하와 궁녀의 눈을 가리고 과녁 앞에 세웠다. 두 사람은 자신
들이 어떤 벌을 받을지 잘 알고 있었다.


 “태왕 폐하, 말 한마디 했다고 신하를 죽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폐하, 소녀를 살려주시어요. 잘못했나이다.” 


 신하와 궁녀는 울면서 태왕에게 용서를 빌었으나,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화살
을 날렸다. 신하의 가슴에 화살이 박히고, 궁녀의 목에도 화살이 꽂혔다. 두 사람의 비명이 궁궐 담장 밖으로 흩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관(百官)은 치를 떨며 몸서리쳤다. 태왕의 잔학한 행위는
이미 고구려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백성들은 점점 더 포악해지는 태왕을 두고 별의별 원성을 쏟아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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