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
- 여강 최재효
바람 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삼경 하늘에 만선(滿船)이 한 척
앙상한 몸 은광(銀光)으로 목욕하고 떨고 있는 임을 마주하네
북녘으로 나는 기러기 내 달에는 화신(花神)의 입김 거세겠지
입 있는 사람, 묵상하는 임, 엄동은 모두 자숙해야 하는 촌각
발이 있는 유정들은 눈알만 굴리고, 무상한 임 홀로 합장하네
고독경(孤獨境)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어찌 살아있다 말하리
천지에 화무십일홍 절대 말씀을 감히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비단옷 입으면 소복(素服)도 한번 걸쳐보는 것이 합당할지니
광음(光陰)은 눈썹 사이로 지나고 살쩍은 점차 색이 바래네
방종과 음황(淫荒)은 꽃비 뿌릴 때 부질없는 잠시 객기일 뿐
낙엽지고 삭풍 불기 시작하면 굳어진 발자국 지우기 어렵네
이목(耳目)없는데 성자(聖者)된 저 임을 누가 빈손이라 하리
반생 여정 얼핏 돌아보니, 이끼 낀 돌덩이만 쌓았을 뿐이네
임은 꽃 피워 벌나비 불러 먹이고, 눈 내리니 동안거 들었네
발이 열 개라도 쉬지 못하는 인걸들 겨울에도 두수가 없겠네
허리가 구부러진 반백의 죽우(竹友), 별을 따려 잠을 잊었네
아마, 여(汝)의 칠성판에 박을 별을 따려는 게 틀림없을 테지
호적이 지워지면 쓸데없을 혼, 차라리 임 같으면 보시나 하리
얼어버린 별들, 가지에 문패처럼 걸리고 만월은 배시시 웃네
백년이 문틈으로 지나면 누가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겠는가
천년을 한자리에 음전하게 서계신 저 임, 무명의 거인이셨네
- 2019.02.20.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