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소서노 소래에서 부활하다

* 창작공간/Essay 모음 1

by 여강 최재효 2015. 12. 21. 11:30

본문


- 寄稿文 -

 

 

 

 

 

 

                    

 

 

 

                        

 

 


  

       소서노 소래에서 부활하다

 

 


                                                                                                                                                      - 여강 최재효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 나는 소래포구를 찾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숙

(熟考)할 일이 있으면 나는 늘 소래로 향하곤 한다. 포구에서 서해(西海)로 이어지

물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함과 함께 육신의 홀가분함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잠시후 나는 10년 체증(滯症)에 걸린 듯 답답한 심정을 달래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언제쯤이면 이 같은 우울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

을까. 나는 어느새 또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그리운 할머님의 이름

을 애타게 외치고 있었다. 그 성스러운 이름, 소서노(召西弩).
 

  AD 660년 3월 당(唐)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

(神丘道行軍大摠官)으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산동반도의 래주(萊州)

를 출발하여 당나라 수군(水軍) 13만 명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덕적도(德積島)로 향

하였고, 신라에서는 김춘추의 태자인 법민(法敏)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소정방

을 맞이하였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지금의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를 경

유하여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여 사비성으로 향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며칠

후인 서기 660년 7월 18일 의자왕과 백제의 지도부는 최후의 보루였던 공산성(公

山城)에서 항복을 한다.


 한 고대사 연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소래(蘇萊)에는 소래(蘇來), 소래(蘇

萊), 소래(召來)라는 3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춘추전국(春秋戰國) 말기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쫓긴 동이(東夷)의 소성족(蘇姓族)과 래이족(萊夷族)이

BC 480년경 황해를 건너 소래지역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소래(蘇來)라는 지명이 생

겼고, 산동반도에 래무(萊蕪)라 불리는 래무인들이 대거 소래지역으로 들어와 소래

(蘇萊)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또한 어하라(於瑕羅)에 황해를 건너 온 소서노

가 소래지역에 들어왔다는 의미에서 소래(召來)라고 한다는 등 다양한 소래의 유래

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소서노 일행이 소래지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지역을 소래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학자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대표 문집은 격암유록(格庵遺錄)

이라 할 수 있다. 아래는 격암유록 중 말운론(末運論)에 나오는 일부 문장이다.


 非山非野仁富之間 人山人海萬姓聚合 小木多積之中, 三神山人出生地 女古老人草魚

禾艸來 相望對坐地. 三神帝王始出時 善者多生惡者死 可笑可歎奈何 嗟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인부(仁富 - 인천과 부천) 사이에 많

사람이 모여 산과 바다를 이루네. 감나무를 따르는 소목(小木)들이 많이 모여 있

는 곳이네. 삼신산(三神山)의 주인인 삼신대왕(三神大王)이 출현하는 땅이며 삼신산

의 불사약(不死藥)이 있는 곳이네. 노고산(老姑山)과 소래산(蘇萊山)이 서로 바라보

는 땅에서 삼신제왕(三神帝王), 곧 천상(天上)의 왕이 출현하네. 착한 사람은 많이

살고 악한 사람은 죽게 되네. 가히 웃을 수밖에 없고 탄식할 수밖에 없으니 어찌하

면 좋은가.


 격암 선생은 역학(易學), 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筮), 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한 이인(異人)으로 앞일을 정확히 예언했다. 여기서 천상의 왕은 곧, 소서노(召

西弩)를 의미한다. 소서노는 마고(麻姑) 여신, 즉 마고할미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주

요 길목마다 천제(天祭)를 지냈다. 마고 여신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분으로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마고신을 받들어 모셨다. 격암록은 마

고 여신의 대변인으로 소서노가 소래포구를 통해 소래산과 노고산 사이 길을 통해

한강 유역의 위례로 진출하였음을 암시하였다. 위 문장에서‘草魚禾艸來(초어화초

래)’는 소래(蘇萊)의 파자(破字)가 된다.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朱蒙)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일조한 소

서노는 훗날 주몽과 예씨(禮氏)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가 찾아오자 주

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한다. 자신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주몽의 뒤

이어 고구려 태왕(太王)이 될 것을 기대하던 소서노는 실망한 나머지 BC 42년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두 아들과 일

행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옛 번조선(番朝鮮)과 진조선

(眞朝鮮) 사이의 땅이었던 진번(辰番)의 땅으로 어하라(於瑕羅)였다.


 어하라는 지금의 요서지방으로 발해만의 동해빈(東海濱)인데 옛 고조선의 영역에

해당한다. 소서노는 어하라 정착에 성공하였으나 계속되는 한나라의 침입에 국력을

소모해야 했으며, 주몽에 이어 태왕에 오른 유리(琉璃)의 견제를 부담스러워 하였다.

소서노는 오랜 고민 끝에 마한(馬韓)으로 가기를 결심한다. 백제의 건국설화에서는

소서노 일행이 남하한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소서노 일행은 동해빈에서 출

발하여 황해를 건너 남하한다. 그곳에서 직선거리로 닿을 수 있는 곳이 소래포구 밖

에 없었다.


 위의 여러 예를 들어 인천광역시 남동구 소래의 어원(語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소래에 왔던 적은 없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어느 고서(古書)를

 보더라도 소정방은 소래와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인천 시민들 상당수는 소래지명의

어원이 소정방과 연관해 알고 있는 듯 하다. 소정방이 누구인가. 우리 한민족의 위대

한 해상왕국 백제를 멸망시킨 우리민족 최대의 공적(公敵)이 아닌가. 누가 하필이면

아름다운 포구에 더러운 이름을 연관시켰는가. 백제가 역사 속 나라가 된 이후에 누

군가 의해 고의로 예전에 소래(召來)혹은 소래(蘇來)로 불리던 지명을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인 소서노를 의식하여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고의로 소정방을

끌어들여 소래의 어원을 소정방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너무

지나친 사대(事大)의 발상에 속이 쓰리다.


 강화, 시흥, 서울에 노고산(老姑山)이라는 동일 지명이 있다.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

에 노고산이 있고, 부천과 시흥의 경계에도 노고산이 있으며, 서울 마포에도 노고산

이 있다. 이 노고산에서 충분히 소서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소서노의 첫자 노

(弩)자와 노고산의 노(老)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소서노의 쇠뇌를 뜻하는 노

(弩)자는 소서노가 강력한 무기 쇠뇌를 사용하는 여자 무사이자 무당(巫堂)임을 뜻

다. 노고산의 노老자는 소서노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뜻하는 문자로 볼 수 있다.

 

 노老자는 흙토土+삐침별丿+비수비匕자로 이루어진 문자이다. 하늘에서 땅에 별

의 기운이 꽂히는 것을 형상으로 하여 만든 문자가 노(老)자인데, 이때 땅에 꽂히는

별의 기운은 북두칠성에서 오는 기운을 말한다. 따라서 제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고(姑)자는 여자여女+옛고古로 이루어진 문자로 마고(麻姑)를 신(神)으로

모시면서 만들어진 문자이다. 따라서 강화, 시흥, 서울의 노고산을 보면 소서노의 이

동 경로를 암시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노고산(老姑山)이란 마고에게 제사지

내는 산이라는 뜻이다. 마고는 여신이므로 남자들이 제사지내지 않고 여자들이 제관

이 되어 제사지낸다. 소서노가 강화, 소래, 시흥을 경유하여 한강을 통과하면서 제사

지낸 산들이 바로 노고산이다.


  女古老人草魚禾艸來 相望對坐地


노고산(老姑山)과 소래산(蘇萊山)이 서로 바라보는 땅에서 삼신제왕(三神帝王), 곧

천상(天上)의 왕이 출현하네.


 윗글은 이미 상술(上述)한 남사고 선생의 예언서(豫言書) 격암유록 중 말운론 일부

로 소서노 일행이 소래에 도착하여 부천과 시흥 사이에 있는 소래산과 노고산을 통

과하여 시흥,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정벌하며 차차 한강 남쪽 유역의 하남

시 위례 방향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볼 수 있다.

 

 이때 위 정복지를 잉벌노(仍伐奴)라고 하였다. 잉벌노를 유추해 볼 때 소서노가 온

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잉仍자는 人+乃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

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고, 벌(伐)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회유 또는 토벌했다는

뜻으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노(奴)자는 소서노로 본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소서노(召西弩 : BC66년 ~ 6년)는 백제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

니이자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다.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이라는 설과 졸본부여 사람

인 연타발의 딸이라는 설, 비류국 왕인 송양의 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현재 정설은 《삼국사기》고구려 건국 설화에 나오는 내용으로 ‘주몽이 졸본에 정착

하여 졸본 부여왕(이름 미상)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비류와 온조

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며,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인 우태(優台)와 처음에 혼인하였다. 우태 사후에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그를 도와 고

구려 건국에 일조했다고 한다. 이후에 부여에 있던 동명성왕의 장자 유리명왕이 고구

려에 올 때 추모왕과 결별하고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어하라(於瑕羅)에 봉해졌다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소서노의 큰 아들이며, 백제 건국 시조인 온조(溫祚) 대왕을 숭모할 사당이 2015.

 5. 20일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에 세워졌다. 온조사당은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

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 - 후에 백제로 고침)로 선포한 온조왕을 기리

 위한 것이다. 온조 사당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단종 2년(1454년)에 세워졌

으나 정유재란(1597년) 와중에 소실됐다. 천안시는 사업비 13억원을 들여 2천730

㎡의 부지에 76.14㎡ 규모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향토 사학자들은 온조왕이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13년간 최초로 직산에 도읍

정하고 백제 700년 역사의 서막을 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안시는 “온조사

당 건립은 천안이 백제 초도(初都)로 인식했던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실증적자료”라며 “직산이 백제 건국의 첫 도읍지임을 알리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제주도 서귀포에는 진시황(秦始皇)의 사자(使者)이며, 방사(方士)였던 서복(徐福)이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 지금의 한라산)을 찾아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리

고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여 내려온다. 정방폭포

인근 서복 전시관에서는 서복과 관련된 설화와 관련된 전시품을 관람할 수 있다. 서

복 전시관은 서복에 관한 설화에 기초하여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에게 문화적 볼

리를 제공하기 위해 서귀포시가 지난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총 92억5,500만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고 한다.

 

 서복 전시관은 크게 서복 전시실과 서귀포시 역사관으로 나뉜다. 서복 전시실은 '불

로불사의 꿈'과 '서복의 여정', 진시황제의 청동마차와 병마용갱(兵馬俑坑)의 실물 복

제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귀포시 역사관은 서귀포시의 연혁과 문화 유적지, 관광

문화 홍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안에서는 서귀포와 서복이라는 영상 애니메이

션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4개 언어로 상영된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 또는 신화(神話)를 근거로

하여 해당 지역의 가치 재창조를 위한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상술

한 바와 같이 천안시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로 꼽을 수 있다. 신화, 전설, 설화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고문서(古文書)나 금석(金石)

등 증빙자료가 없는 단순한 이야기를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포장하여 그 지역

선전 또는 홍보하는 아이콘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눈앞에 작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처사(處事)는 자칫 역사적 오해를 불

러올 소지가 있다. 일본과 중국은 조그마한 빌미만 있으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고 영

토(領土)를 넓히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중국 길림성 연길(延吉)에서 자동차로 1시

간 거리에 소재한 백초구(百草溝) 인근에 천성호(天星湖)가 있는데 동서 20리 남북으

로 10리가 넘는 호수 가운데 섬처럼 생긴 용구도(龍龜島)가 있다.

 

 이 섬 안에  선녀봉(仙女峰, 만천성(滿天星), 경구(景區 : 관광용으로 빼어난 풍광지

역)가 있다. 이 섬 산꼭대기 커다란 석상이 있다. 선착장에서 약 1Km 쯤 가면 거대한

 석상(石像)을 마주할 수 있는데 백의신녀(白衣神女) 또는 백의선녀(白衣仙女)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왼손에 쑥, 오른손에 마늘을 들고 있는 여신상(女神像)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중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조상신인 양 여기고 있다. 한민족

(韓民族)의 시모(始母)인 웅녀를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으로 탈바꿈시키고 관광

지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중국인들은 역사를 왜곡시켜 놓

았다. 조만간에 단군상까지 만들어 놓고 자기들 조상이라고 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웅녀상은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핵심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사건이라

고 할 수 있다.


 어하라에서 소서노는 비류(沸流)에게 대권(大權)을 물려주자 온조는 갈등한다. 소

서노는 온조와 십제(十濟)로 불리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어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한

다. 그는 신하 마여(馬黎) 등에게 명하여 대선단(大船團)을 준비하도록 한다. 소서노

와 온조는 어하라(東海濱 지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미추홀(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소래 일원)에 닫는다. 발해만의 동해빈에서 출발하여 직선거리로 닿을 수 있

곳이 이곳으로 미추홀의 소래지역 이다. 지금까지도 미추홀의 경계가 어디까지

지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미추홀은 소서노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불리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미추홀이 마한

을 다스리던 목지국(目支國)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소서노가 소래에 도

착하여 소래산 일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후로 미추홀은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지

명이 바뀐다. 매(買)자의 의미가 돈을 주고 산다는 의미이므로, 소서노가 마한왕(목

지국왕)에게 돈을 주고 매입(買入)한 마을을 현(縣)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명으로 보아서, 소서노가 미추홀(소래)에 상륙하여 자기의 영지

(領地)로 삼은 후에 공식적인 절차에 의하여 미추홀 땅 일부를 매입하여 소서노의

으로 확정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매소홀은 소성(邵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 백성이

된 백제인들 현지 정서와 소서노의 존재를 의식한 신라는 소서노의 소(召)자 대신

고을 이름 소(邵)를 사용하였다. 2,000년 전에 미추홀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단

지 바닷가에 어업을 위주로 살아가는 토착원주민 촌락이 있었을 뿐이다. 인천의 바

닷가에 배가 안전하게 들락거릴 수 있는 지역은 소래가 유일하다. 인천의 기타 해안

가는 선박을 정박시키기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매우 위험하다. 소서노가 이끄

는 수만 명이 넘는 유민(流民)을 태운 대선단(大船團)이 운집한 소래포구의 모습은

백제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역사적인 대사건이 분명하다.


 소서노가 어하라를 떠나 황해를 건너 남하하면서 대선단을 이끌고 왔는데, 나라를

세우고 경영(經營)할 목적으로 남하하였다면 그 규모는 적어도 수만 명이 넘는 무리

였을 것이다. 적어도 배 한척에 2~300백 명이 탄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소서노의 대

선단은 100여척이 넘는 규모라고 짐작할 수 있다. 황해를 내려오면서 소서노는 평

안도와 황해도 경기도의 해안에 머물며, 척후(斥候)를 보내 대선단이 안전하게 정박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을 것이다.

 

 한강 이북 지역은 땅이 척박하고 날씨가 추워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소

서노와 그의 참모(參謀)들이 선택한 지역은 한강 중하류 지역으로 위례(慰禮) 지역

이었다. 소서노 대선단은 강화> 김포 > 위례 코스를 택하지 않았다. 대선단이 한강

을 거슬러 올라갈 경우 이 지역을 관할하는 마한(馬韓)의 군사들에게 적발되어 습격

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서노의 대선단은 지금의 소래포구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포구(浦口)의 특징은 거세 파도와 비바람을 막아 선박을 안전하게 보

호할 수 있다.


 소서노 일행의 선택은 탁월했다. 만약 강화와 김포를 경유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

갔다면 마한의 군사들과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새로운 나라의 건국은 수포

로 돌아갔을 것이다. 소래에 도착한 소서노는 잠시 소래 지역에 머물며, 마한왕과

협상을 벌여 소래 일대 지역 땅을 사들인다. 소서노는 세(勢)를 불리고 지금의 소래

산 > 소사 > 구로 > 양천 > 마포로 이동하며 토착세력을 회유 또는 정벌하면서 서서

히 하북(河北) 위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가 경유한 주요 지역마다 마고(麻姑) 여

신께 제사를 지낸 산들이 있다. 강화도 노고산, 시흥의 노고산, 서울 마포의 노고산

이 동명(同名)으로 소서노와 마고여신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소래 사람들은 오랫동안 소래의 유래에 대하여 잊고 살았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소정방의 소래 주둔설(駐屯說)은 이제 영원히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계속

해서 소래를 소정방과 연관시키면 중국인들은 소래가 중국의 땅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고구려를 당나라에 속하는 변방의 제후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우리의 역사를 훔치고 있는 저들이

다. 해상 제국 대백제를 개국한 여제(女帝) 소서노가 소래에 첫 진출하여 백제를 건

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며, 자랑스러운 소래 역사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가장 딜레마가 바로 소서노의 존재라고 한다. 고구려와

제 두 제국을 건국한 주역이 바로 소서노이기 때문이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

잇는 매개(媒介)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서노가 없어야 고구려가 당나라의 제후국

이라고 우길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소서노가 있으니 도저히 고구려를 당나라의 변방

국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서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구 소래포구에 한 손에 강궁(强弓)을 들고 서서 서해를

응시하는 용맹스러운 여걸 소서노의 거대한 동상(銅像)이 세워진다면 얼마나 좋을

까. 온조(溫祚)나 서복(徐福)보다 나는 소서노의 위대함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일

본은 독도(獨島)를 자기네 영토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고, 중국은 우리의 이

어도를 자기네 경제적배타구역 안에 넣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중일

(韓中日) 삼국이 바야흐로 영토 전쟁에 휘말리고 있다. 이런 한 때에 소서노는 최선

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백제는 후에 최대판도를 자랑할 때 담로(擔魯) 제도를 두어

대륙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서노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인천 소래지역을 상징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정

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등 다방면에서 수호신(守護神)으로 또는 외적(外敵)을 막

아내는 방패로 그 존재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 늦기 전에 소래에 소서노의 동상

과 전시관 등을 만들어 소서노를 인천 또는 남동구 소래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시

켜야 한다. 소서노가 소래에 첫 발을 내디뎠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많다.

 

 얼마 전 TV 드라마에서‘주몽’을 방영할 때 탤런트 한혜진이 소서노의 역할을 맡아

잘 소화해낸 적이 있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단군왕검

을 낳아 고조선을 개국시킨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熊女)까지 빼앗아가는 중국인 들

이다. 저들이 발해만 근처에 소서노 동상을 설치하고 백제까지 자기네 역사라고 주

장하기 전에 서둘러 소래포구에서 소서노를 부활시켜야 한다.


“여보, 한 시간 넘게 서서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응? 아, 잠시 그리운 할머니를 만나고 왔어.”
 “네에? 할머니 산소는 여주에 있잖아요?”
 아내와 함께 전어를 맛보러 왔다가 잠시 소래포구 선착장에 서서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하고 온 나에게 아내는 이상한 시선으로 보며 말을 건넸다. 비는 그쳤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 향수(鄕愁)를 부르는 포구의 야경이 나그네를 위로하고 있었

다.

 

 

 

                                                                                                                                                        - 끝 -

 

 

 

 

 

 

 

 

 

 

 

 

 

 

 

 

 

 

 

 

 

 

 

 

 

 

 

 

 

 

 

출처 : 백제와 소래역사 바로 세우기
글쓴이 : 호동왕자 원글보기
메모 :

'* 창작공간 > Essay 모음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대폰천하지대본야  (0) 2018.10.05
살아가는 이유  (0) 2017.10.10
망중에 다선이 되어  (0) 2015.11.04
시간의 향기는 점차 엷어지는데  (0) 2015.10.06
갈매기는 조용히 허공을 날고  (0) 2015.08.1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