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삼정헌에서 차를 달이며...
망중(忙中)에 다선(茶仙)이 되어
- 여강 최재효
東國所産元相同(동국소산원상동) 우리나라 나는 것도 원래는 서로 같아
色香氣味論一功(색향기미논일공) 빛깔과 향 기운과 맛, 효과가 한 가질세
陸安之味蒙山藥(육안지미몽산약) 육안차의 맛에다 몽산차의 약효 지녀
古人高判兼兩宗(고인고판겸양종) 옛 사람은 둘을 겸함 아주 높게 평가했지.
“처사님, 온수를 더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이미 저는 다선(茶仙)이 되어 삼매 속에서 초의선사 일행 분들과 이야
기를 나누고 있는 걸요.”
“네에? 초의선사요.”
운우(雲雨)에 이어 연무(煙霧)가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두물머리를 자욱하게 감싸
안으며 늦가을의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직은 단풍의 절정기에 도달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가을빛은 완연해 보였다.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옷깃을 세웠다. 이곳에 설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아련한 슬픔에 잠긴다.
산사의 범종 소리나 독경(讀經) 소리가 은은하게 전해질 때 그 깊이는 나 스스로도 헤
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붓다를 뵙고 싶거나 세사(世事)에 머리가 아플 때, 나는 수종사를 찾아 흔적을 남기는
데 그 이유는 전국 최고의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기가 막힌 차 맛과 시원한 강바람을
만끽할 수 있으며, 남쪽으로 눈길을 주면 바로 내 고향 여주(驪州)가 있고 그곳에 어머
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눈물샘을 건드렸다. 나는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우묵한 눈길로 바라보며 장승처럼 서 있어야 했다.
예전에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에서 바라보는 양수리의 풍광은 조선 최고의
승경(勝景)을 자랑하였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아파트와 빌딩, 주택 등 현대식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양수리의 모습이 반갑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오는데
나그네 여린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게다가 네개나 되는 거대한 다리가 양수리를 중심
으로 남북으로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훼손시켜 놓았다. 잠깐
눈을 감고 백여 년 전 두물머리 풍경을 그려보았다.
운길산 꼭대기에 자리한 수종사 삼정헌(三鼎軒)은 내가 수종사에 들릴 때마다 들리는
다실(茶室)이다. 10평 남짓한 다실에 20여명이 동시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규모로
마치 시골 마을의 사랑방 같다. 사찰을 한바퀴 휘휘 들러보고 삼정헌에 들어서자 중
년의 아름다운 보살님이 나에게 목례(目禮)로 인사를 건넨다. 나는 얼떨결에 두 손을
모으고 응대하였다. 이미 두 무리의 중년 남,녀들이 차를 마시며 귓속말로 소곤대고 있
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운길산 남쪽 아래 두물머리의 시원하고 수려한 모습이 통유리 창을 통해 시야에 들어
온다. 밖에서 보는 풍경보다 못하지만 다실(茶室)에 앉아 감상하는 두물머리의 경치는
가히 한국 최고의 절경(絶景)이라 할만 했다. 나는 한참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빼
어난 풍광을 가슴으로 맞았다. 붉은 가을색이 운길산을 온통 시집가는 새색시 칠보단장
하듯 예쁘게 단장해 놓았다. 늦가을 햇살을 머금은 운길산의 붉은빛과 산 아래 푸른빛
이 감도는 두 강의 물빛이 묘한 음양의 대조를 이루며 가을을 더욱 깊게 채색하고
있었다.
연둣빛이 부드럽게 살아 있는 찻잎을 하얀 다기(茶器) 안에 넣고 뜨거운 물을 적당히
부었다. 차향이 서서히 피어오르면서 나의 예민한 후각(嗅覺)을 자극하였다. 나는 지그
시 두 눈을 감고 한때 이 산사에 자주 들러 차를 음미하던 조선 후기 몇몇 지식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조선이 이제 막 외부세계의 문물(文物)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시기에
수종사는 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과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 그리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草衣) 장의순이 있다. 동다
송은 내가 좋아하는 초의선사의 시문(詩文)이다.
동다송은 정조(正祖)의 딸,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남편인 홍현주(洪顯周 : 1767–1851)
가 다도(茶道)에 대하여 초의선사 장의순에게 묻자 시문으로 차의 역사와 우리나라 차
의 유래에 대하여 간략하게 68구 434자의 한시 형식으로 압축하여 지은 걸작(傑作)이
다. 초의선사는 당시 조선의 차의 역사가 중국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
국차와 현격하게 차이가 있으며, 조선의 차에는 다른 나라의 차에서 맛 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차의 특징이 있음과 차에 대한 예찬을 노래하고 있다.
초두(初頭)에 소개한 시문은 초의선사의 동다송 중 37구부터 40구 까지의 내용으로,
조선 차의 색향기미(色香氣味)가 중국차에 비하여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읊고 있다. 조선 후기, 조선 차에 대한 문헌이 거의 없는 때에 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이
채(異彩)를 띨 수밖에 없다. 동다송은 차에 대한 역사와 조선(朝鮮) 차에 대한 외양,
차에 대한 효능, 차를 달이는 방법, 조선 차의 우수성 등이 짧은 시문에 초의선사의
차에 대한 해박함과 함께 정치(情致)하게 녹아 있다.
눈을 감았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수종사에 모여 초의가 운길산 맑은
물로 달인 차를 음미하면서 각자 차에 대한 소감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생생
하게 영상으로 그려졌다. 초의선사가 푸른빛이 감도는 찻잔에 한가득 차를 따르자 추
사 선생은 마치 보물을 어루만지듯 찻잔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한참 동안 후각
으로 차향을 맛 보았고, 다산 선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차 한모금을 입 안에 넣고 이리
저리 살살 굴리면서 삼매(三昧)에 빠져 있는 듯 한 표정이다.
달인(達人)들 끼리는 통하는 법인가 보다. 초의선사는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두 분의
거두(巨頭)가 자신이 달인 차를 맛보고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차 한 잔 앞에 놓고 서너 시진(時辰) 동안 면벽하는 스님처럼 정좌(靜坐)하고
있는 두 선지식과 언제 자신이 달인 차 맛에 대한 품평이 있을지 기대하는 초의선사의
초조한 표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가운데 먼 후세의 낯선 사내가 가세하여 차 맛을
보며 역시 말없이 두물머리 풍광을 가미(加味)하고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
“최 처사(處士)는 내가 달인 차 맛이 어떤고?”
답답한 듯 초의 장의순이 찻잔을 들고 앉아 있는 나에게 물었다.
“참다운 맛과 빛깔이 저절로 넉넉합니다. 약간 쓴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면서 고소하
고, 입안에 시원한 향기가 감도는 게 그 어디에서 느낄 수 없는 다감(多感)에 감탄사가
절로 납니다. 선사님의 차는 구난(九難)을 범치 않고 사향(四香)을 보전하니 귀신조차도
탄복하여 제 갈길을 잃을 지경이고, 팔십 노인 얼굴에 도화(桃花)가 필 듯하니, 분명 이승
의 맛이 아닌 무릉(武陵)에서나 맛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가히 선계(仙界)의 맛이라고 하
여도 흠이 될게 없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세 분 선지식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교언(巧言)을 입에 담고 말았다.
“허허, 허허허......, 최 처사가 금인(今人)이 아닌 듯 싶네. 이미 다선(茶仙)이 되었으이.”
초의선사는 껄껄 웃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진정한 답이 분명하네.”
나의 구차한 답변에 추사 선생이 박수를 치며 거들고 나섰다. 나는 잠시 무의식에 들어 백
일몽을 꾼듯 돌부처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요즘, 보기드문 달변일세 그려"
다산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내 등을 다독거렸다.
“처사님, 더운물을 더 드릴까요?”
나는 보살님의 고운 목소리에 무의식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닙니다. 이미 대취하였는걸요.”
“네에, 취하셨다고요?”
“네에. 정말입니다. 술 마신 것 보다 더 크게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랍니다.”
“......”
나의 말에 삼정헌 화사한 보살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서 소곤거리며 차를 마시던 두 무리의 남, 녀들은 나를 반쯤 정신이 나
간 사람으로 바라보는 듯 했다. 그들은 차를 단지 미각으로 마신다면 나는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등 오감으로 마시니 느낌도 사뭇 다르리
라. 또한 무의식중에 초의 선사를 비롯하여 추사와 다산 선생과 합석하여 담론(談論)을
펼쳤으니 말하면 무엇하리요.
나는 지명(知命)을 넘기면서 30여년 세월을 애지중지하던 주지(酒池)를 차츰 멀리하려
고 애를 써왔다. 그러나 뼈골까지 그 기운이 깊이 스며들어 장시간 중단하면 금단현상
(禁斷現狀)이 느껴질 정도로 주선(酒仙)의 유혹을 단시간에 단절하기는 어려웠다. 주선
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제는 서서히 차의 맛을 깊이 음미하면서 경지에 오르면 다선(茶
仙)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향(茶香)을 가까이 하면서 느낀 점은 술은 몸속에 들
어가면 금방 술기운이 전신에 퍼져 비몽사몽의 상태에 쉽게 접근하는데 반하여 다기(茶
氣)는 술과 달리 느림의 미학이 있다.
즉, 뜨겁고 빠른 효과를 내는 술의 화기(火氣)는 사람을 금방 야성(野性)이나 마성(魔
性)에 빠지게 하여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더욱 난폭한 기질을 보이게 한다. 물론 차분한
성질의 사람들도 화주(火酒)나 독주(毒酒)를 마시게 되면 약간의 비현실적이거나 비이
성적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뜨거운 기운이 충천(衝天)한 사람의 경우 심성을 부드럽고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차를 마셔도 금방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의 혀에 있는 미각
세포에서부터 차의 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기는 나이가 들어감에 차차 약해지면서 몸까지 느려지게 마련이다. 대개가
청춘에는 국선생(麴先生)과 지나칠 정도로 우정을 자랑하게 되지만 중년에 들어서면
진중한 멋을 자랑하는 다선생(茶先生)을 가까이하면서 인생의 뒤안길을 음미하는 이들
이 늘어간다. 개중에는 지천명이 넘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주지육림(酒
池肉林)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부류들이 있기는 하다. 그들 중 일부는 지나친 나머지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황강(黃江)을 건너기도 한다.
오랫동안 나는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산물인 커피를 짝사랑 했었다. 그러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나의 몸은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역으로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신중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보살님에게 감사 인사
를 하고 격려금으로 약간의 시주(施主)를 한 뒤 산사를 나오니 일주문 위로 반달이 걸
려있었다. 방금전에 내리던 이슬비는 간데 없고 찬바람이 솔솔 불면서 나그네의 옷깃
을 다시한번 세우게 하였다. 갈까마귀가 나의 심정을 알고 있는지 나를 대신하여 운길
산을 오르내리며 길게 울었다. 산사를 찾아 불공을 올리고 잠시나마 다선이 되었던 감
정을 나는 운문(韻文)으로 요약해 보았다.
수종사 연가(戀歌)
북강(北江)은 무슨 사연이 있어
뻔 한 길을 이리 늦었는지
남강(南江)은 쉬운 물길 어디인지 잘 알면서
헛되이 굽이굽이 돌아 왔을 터
지명(知命) 중간에 선 한 사내
두 손 곱게 모아 투지(投止)로 마음 달래고
가을 국화 보다 고운 귀인(貴人)
임 향한 단심(丹心)은 멈출 줄 모르네
이녁, 지금까지 정인(情人)을 섬김에
한 번도 가볍지 않았다면
청천(靑天)에 구름 머물러도
서둘러 신월(新月) 찾은 적 없었을 테지
수종사 저 아래 강에 가을산 잠겨있고
높은 하늘조차 조용히 빠져있는데
오백년 고목에 깃든 온갖 산새들
돌아갈 줄 모르고 쌍쌍이 정답네
두 물도 어렵사리 만나 한 몸 이루었으니
시월의 붉은 선연(善緣)도
백천만겁(百千萬劫)이 너무 길다 말하지 말고
저 강물이 모두 마르도록 이어져야 하리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말이 없고
세상 사람들 세치 혀는 천장(千丈)이라네
범종 소리 산 아래 은은히 퍼지는데
내 어찌 은근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으리
- 창작일 : 2015.10.26. 17:40
남양주시 운길산 수종사에서
[註] 구난사향(九難四香) :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는 제조요. 둘은 감별. 셋은 찻그릇.
넷은 불다루기. 다섯은 물. 여섯은 차덖기. 일곱은 가루하기. 여덟은 다리기. 아홉은 마시기이다. 또한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이르기를 '茶에는 진향(眞香), 난향(蘭香), 청향(淸香), 순향(純香)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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