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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무정(終)

* 창작공간/단편 - 월하무정

by 여강 최재효 2014. 8. 17. 14:39

본문

 

 

 

 

 



   

 

                                                  

 

 

 

 

  

 

                                                              월하무정

 

 

 

                                                                                                                                                                      - 여강 최재효



                                                                            

 

 

 

  

 낙랑공주 애랑으로부터 무영단의 실체를 알게 된 호동은 애랑을 심적

으로 압박하여 무영단의 규모, 지휘계통, 단원들의 성격, 낙랑국 전체에

퍼져있는 단원들의 위치 및 보고체계, 훈련 상황 등 상세한 내용을 파

악할 수 있었다. 호동은 함께 온 수하들에게 조속히 무영단의 조직을 움

직이는 낙랑국왕의 동생 최필과 지휘관들의 소재를 파악하라고 지시하였

다. 또한 무휼에게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상인으로 가장한 무예에 뛰어난

군사 백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호동은 낙랑국왕 최리와 자주 어울리면서 고구려가 절대로 낙랑국을 침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최리는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어 호동

을 위무하면서 낙랑국 대신들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 연회가 있

었지만 최필은 보이지 않았다. 호동이 애랑에게 최필에 대하여 물었지만

잘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낙랑국왕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무영

단의 최고 지휘관 최필이 어떤 인물인지 호동은 알고 싶었으나 왕에

함부로 최필의 존재에 대하여 물어 볼 수 없었다.


 호동의 수하들은 궁궐 주변, 시장통, 민가를 돌아다니며 무영단의 실체

를 파악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정탐활동을 하였으니 아무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호동은 사냥을 하러 간다며 수하들과 낙랑궁을 빠져나가 낙랑국

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무영단의 실체를 찾으려고 애를 섰지만 좀

처럼 무영단의 존재를 알아 낼 수 없었다. 호동과 수하들은 묘책을 내어

낙랑국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무영단 조직을 알아내기로 하였다.

호동은 수하들과 묘안을 찾고 있었다.


 “왕자님, 무영단은 상인, 농부, 어부, 장인匠人, 무사, 관리 등 낙랑국의

모든 백성들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주막을 운영하는

자들이 분명히 단원으로 활약하면서 그 지역 정보를 수집하여 최필에게

보고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막집을 크게 운영하고 있는 자를 납치하여

정보를 캐보는 것이 어떤지요?”
 호동의 수하 중 한명이 호동에게 제안하였다.


 “만약 그 자가 무영단원이 아니라면 어찌하느냐?”
 “보안을 위해서 처치해야지요.”


 “위험한 방법이기는 하나 시도해볼 만 방안이기도 하다. 그럼, 내일

새벽 인시寅時에 너희들이 낙랑국 도성 안에서 가장 잘나가는 주막집

주인을 납치하여 궁성 동문 밖으로 데리고 오너라. 군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 된다. 쥐도 새도 모르게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낙랑궁 담장을 넘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호동은 낙랑공주 애랑과 공주 궁에서 주안상을 가운데 두고 정담을 나

누었다. 애랑은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고 오래오래 낙랑국에 머물

러 있기를 바랐다. 호동이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은 모두 말해주었으나

결정적으로 최필을 비롯한 무영단을 이끄는 자들의 명단이나 사는 곳에

대하여는 모른다고 하였다.  


 “애랑, 내가 낙랑국에 온지도 꽤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랑의 가족들은

모두 만나보았는데 유독 작은 아버지만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나에게

인사를 시켜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왕자님, 작은아버님은 늘 공사가 다망하시어 소녀도 뵙기 어렵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왕자님께서 작은 아버님을 뵐 수 있을 거에요.”


 “나는 고구려의 왕자이며 아울러 낙랑국의 사위입니다. 사위가 신부의

작은 아버님에게 인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예의가 아닙니다.”


 “왕자님, 소녀가 내일 작은 아버님 댁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버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볼게요. 오늘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마시고 오직 소녀

한사람만 예뻐해 주셔요.”    


 “그러지요. 나는 애랑 말고 다른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답니다. 애랑도

그런 나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고 우리 고구려의 일에 적극 도와야 합니다.”
 “왕자님, 저는 왕자님의 편입니다.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소녀는 다 드리겠습니다.”


 “애랑, 고마워요. 애랑은 나의 배필입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저승에 들어서도 우리는 부부로 지내야 합니다.”
 “왕자님, 고맙습니다.”


 애랑은 호동에게 술을 따르고 호동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머릿결에

서 향긋한 냄새가 솔솔 피어났다. 호동은 애랑의 체취에 금방 몸이 달아

올랐다.


 “애랑, 이 술잔에 나의 사랑을 담았습니다.”
 “왕자님, 고마워요.”


 “우리 오늘도 사랑을 나누며 정을 쌓도록 해요.”
 “네에. 고마워요.”


 호동은 낙랑공주 애랑이 말로는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지만 가장 중

요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호동은 빠른 시일

내에 무영단의 존재를 파악해야 했다. 호동은 몸이 달았다. 아버지 무휼

이 눈이 빠지게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자 호동은 술 맛이

나지 않았다. 호동이 술에 취한 애랑에게 아무리 달래보아도 무영단의

실체에 대하여 같은 말만 할 뿐이었다. 호동은 술상을 물리고 애랑을 안

아주었다.


 “왕자님, 사랑해요.”
 “애랑, 우리는 천생연분이오.”


 “왕자님......”
 호동의 억센 팔이 낙랑공주 애랑을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았다. 애랑은

곧 정염의 화신이 되어 달아올랐다. 호동의 능숙한 몸놀림에 애랑은

숨을 몰아쉬며 절정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달도 없는 고요한 밤이었다. 낙랑국 도성은 잠에 깊이 빠진 듯 개 짖

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동의 수하 열 명이 궁성 경비병들 모르게

궁궐 담장을 넘었다. 궁성의 당장 둘레가 길다보니 궁성 전체를 물샐틈

없이 경계하는 일은 어려웠다. 평복차림의 호동의 수하들은 바람같이

달려 낙랑국 도성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주막에 도착하였다.


 주막은 네모 형태로 지은 제법 규모가 큰 기와집 두채인데 주인이 거

주하는 뒷집은 담장이 낮아 대문을 열지 않고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바깥채는 모두 봉놋방으로 꾸며져 있고 뒤채도 일부는 봉놋방이 있는

데 가운데 부분은 주인이 사용하는 방과 주방이 위치해 있었다. 봉놋방

안에서 간간이 사내들의 코고는 소리 잠꼬대 소리가 났다. 마침 개도

없어서 사방은 고용했다.


 “저기가 주인부부가 쓰는 방이다. 남자만 데리고 가기 어려울 것이

다. 주모도 함께 납치해야 한다. 빨리 데리고 가야한다.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남자들이 방문 고리를 살며시 잡아당겼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안에서 잠을 자던 주

인 부부가 놀라서 일어났다. 남자들이 재빨리 주인 부부의 입을 막았

다.


 “누, 구구요? 읍-”
 “우린 강도가 아니다. 너희들에게 무엇을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소

리치면 너희 부부는 죽은 목숨이다. 너희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한다면

아무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자, 우리를 따라 나서라. 알겠느냐?”
 주막집 주인 부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들은 부리나케 궁성 동

문으로 달렸다.


 “여기다.”
 호동이 어둠속에서 달려오는 수하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 왕자님께서 나와 계시다.”

 “수고하였다. 주막집 주인이 맞느냐?”


 “확실합니다.”
 호동이 엉거주춤 서있는 주막집 주인부부를 훑어보았다. 컴컴한 밤이

지만 얼굴의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고구려 왕자로 낙랑국 공주와 혼인한 호동왕자다.”
 “네에? 호, 호동왕자님이라고요?”
 주막집 남자는 무척 놀라워하였다.


 “그렇소이다. 내가 그대를 이리 데리고 오게 한 것은 몇 가지 알고 싶

은 것이 있어서요. 나는 낙랑국에 무영단이란 그림자 없는 단체가 있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또한 그대가 무영단원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말해준다면 후한 상금을 내릴 것이고 또한 오늘

밤 우리가 만난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할 것이오.”


 “와, 왕자님, 저는 무영단원이 아닙니다.”
 주막집 주인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이놈, 우리가 네놈이 무영단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네놈을 이리로 데리

고 온 것이다. 혼이 나야 입을 열겠느냐?”

 호동의 수하 한사람이 주막집 주인 부부를 무릎을 꿇게 하고 호통쳤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무영단원이 아닙니다.”

 “그럼, 자네가 어떻게 무영단 이름을 자연스럽게 말하는가? 낙랑국에서

무영단원이 아니면 무영단이란 이름을 절대 알 수 없거늘.”


 “그, 그건......”
 “이놈, 죽고 싶으냐?”
 주막집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하자 호동의 수하 한 사람이 칼등으로 주막

집 남자를 쳤다.


 “그러지 말고 우리에게 협조하시오. 우리에게 협조하면 그대에게 황금

천 냥을 주겠소. 또한 그대들이 원한다면 그대들을 우리 고구려로 가서

살게 해주겠소. 나는 고구려의 왕자입니다. 한번 한 말은 책임을 집니다.

낙랑국에서 사나 우리 고구려에 가서 사나 사는 것은 같소. 그대가 협조

만 해준다면 그대들의 안전은 약속하겠소. 그러니 나를 믿고 협조해주

시오.”
 호동이 다시 한 번 주막집 남자를 설득하였다.


 “왕자님, 저희는 정말로 모릅니다.”
 “이놈, 네놈이 말을 못하겠다면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밖에 없다.

네놈이 우리의 정체를 알았으니 더더욱 살려 둘 수 없다. 각오하라.”


 호동의 수하가 칼을 뽑아 곧 내리칠 기세였다.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주모가 호동에게 애걸하였다.


 “여보, 미쳤어요? 절대 말하면 안 돼. 말하면 우리 낙랑국은 망하오.”
 주막집 주인남자가 주모를 나무랐다.


 “왕자님, 아무래도 이 연놈들을 죽여 버려야 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대들이 나에게 협조해준다면 후한 상금과

함께 우리 고구려로 가서 살게 해 주겠소. 협조를 안 한다면 안 된 일이

지만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그대들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동의 설득에 남자는 갈등하고 있었다.


 “왕자님, 정말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시는 거죠?”
 “내가 그대에게 고구려 왕자로서 하늘에 맹서하오. 염려하지 마시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잘 생각하시었습니다.”
 “저는 무영단원이 맞습니다.”


 주막집 주인 남자는 호동에게 무영단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

다. 무영단을 움직이고 있는 낙랑국왕 동생 최필이 부하들과 달포에

한번 주막에 들러 주막집 남자가 수집한 첩보들을 놓고 토론을 하는 등

주막집 남자와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왕자님, 저도 실은 무영단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최필이 단

원들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와 오랜 세월 친밀하게 지내

왔지만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고 독단을 일삼아 무영단 안에서도 최필에

대한 불만이 많습니다.”


 “주인장, 고맙습니다. 내 반드시 그대들을 고구려에 가서 살도록 조치

를 할 것입니다. 나를 믿고 나중에라도 수시로 나에게 무영단에 관한 정

보를 말해주세요.”


 “왕자님, 무영단은 낙랑국의 목숨과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낙랑국을

배신하였으니 이제 낙랑국에서 살 수 없습니다. 왕자님께서 고구려로

돌아가실 때 저희도 데려가주세요.”


 “걱정하지마세요. 내 반드시 그리하겠으니 언제든지 이사할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오늘일은 절대로 비밀로 할 것이니 그대 부부는 평소처

럼 행동하면 됩니다. 황금 천 냥은 그대가 고구려로 갈 때 주겠소이다.

갑자기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에게 의심을 받기 쉽습니다.”


 주막집 주인으로부터 무영단의 실체를 파악한 호동은 최필을 비롯한

무영단을 움직이는 간부들이 주막에 모일 때 한 번에 처치하기로 계획

을 세웠다. 호동은 수하 한사람을 매일 두세 번 주막에 들러 주막집

인으로부터 무영단에 관한 소식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동의 수하가

주막집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최필이 사흘 뒤 새벽에 주막에서 은밀

하게 모임을 가진다는 첩보를 전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아버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원군이 언제 온다고 했느냐?”
 “왕자님, 내일 안으로 왕자님께서 청한 무예가 출중한 백여 명의 군

사들이 상인으로 가장하여 낙랑국에 들어올 예정입니다.”


 “오, 그래. 아주 때가 잘 맞아떨어지는구나. 잘되었어.”

 호동은 아버지 무휼이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호동은 아버지 무휼에

게 편지를 써서 전서구에 날려 보냈다. 3일 뒤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낙랑국 도성을 향해 진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음-, 드디어 낙랑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구나, 역시 호동

은 내 아들이다. 이번에는 짐이 최선봉장이 되어 직접 낙랑국 도성으

로 밀고 들어갈 것이야.”
 “태왕, 호동왕자님께서 큰일을 해내신 듯 합니다.”


 “이번에 낙랑국을 점령하고 나면 그 호동이를 태자에 앉히려고 하오.”
 “태왕, 당연하신 처사입니다. 부디 그리하소서.”
 국상 을두지와 대신들은 태왕의 눈치를 보았다.


 호동의 요청대로 무휼은 무예에 뛰어난 고구려 정예 병사 백 여명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낙랑국으로 급파하였다. 군사 백명을 열개 조로

편성하여 낙랑국으로 들여보낸 무휼은 전군에 전투태세를 갖추라

명령을 하달하였다. 고구려와 낙랑국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

병사들은 무휼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낙랑국을 향해 진격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유지하였다.


 “태왕께서 전투준비 명령을 내리신 걸 보면 곧 낙랑국과 한바탕 붙

을 모양이야.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몰살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

데......”


 “이번에는 다를 거야. 호동왕자님께서 이미 낙랑국에 들어가 계시잖

아. 또 태왕이 가짜 자명고를 믿고 낙랑국을 치는 일은 없을 것이야.

먼저는 너무 무모했어.”


 “아무튼 태왕의 정복욕은 알아줘야 해. 우리는 고구려 병사로 근무

하면서 늘 전쟁만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전쟁터에서 죽게 될 거야.”


 “이번 전쟁은 무휼 태왕께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신대. 태왕의 명이

떨어지면 기마병들이 바람같이 달려 낙랑국 도성으로 진격할거래.”
 낙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 병사들은 곧 전쟁이 있을 거란

예감을 가지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급파된 고구려 군사 백여 명이 낙랑국 도성 밖에 은신하

고 있었다. 주막이나 민가에 분산되어 머물고 있는 고구려 병사들은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은밀하게 행동하였다. 드디어 낙랑국의 운명

이 결정되어지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

었다. 호동은 백십 여명의 고구려 정예 병사들에게 최필 일행이 모이

기로 된 주막에 최대한 가까이 집결하라고 했다.


 초승달도 서산으로 넘어가고 캄캄한 새벽이 되자 주막집 주인이 말한

대로 주막  안채로 최필을 비롯한 낙랑국의 무영단을 움직이는 주요 간

부들이 모여들었다. 대충 스무명이 모였는데 대개가 중년의 남자들이었

다. 모두가 비무장 상태여서 얼핏 보면 평범한 백성들 같았다.


 최필과 무영단 주요 간부들은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낙랑국 전역을

돌면서 그 지역의 동태를 살피고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지역 군단장

비롯한 간부들에게서 정탐 결과를 보고 받거나 지역의 현안 문제를

토론하였다.


 “지금이 우리가 고구려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기회다. 저 안에 있는

자들을 한명도 빠짐없이 척살하라.”
 호동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호같은 고구려 군사 백열 명이 주막 안채

를 향해 달려들었다.


 “앗, 적이다. 피하라.”
 “저자가 최필이다. 죽여라.”


 호동이 소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마무리 되었다. 낙랑국을

지탱시켜주던 무영단의 간부들이 호동이 이끄는 고구려 특수부대에

게 모두 전멸 당하였다. 담장을 넘던 자들은 화살이나 표창을 맞았

다.


 “주막에 불을 질러라. 우리는 즉시 이곳을 떠난다. 아무런 단서나 흔

적을 남기지 마라.”
 “불이야.”


 도성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낙랑국 도성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주막

이 불길에 휩싸여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낙랑국 하급 관리들과 백성들

이 자다 말고 놀라서 주막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너무 큰 불길이라

근처에서 물만 뿌려댈 뿐 누구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호동은

낙랑국 근처에 숨어있는 고구려 진영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뭐라고? 주막에 불이 났다고?”
 “네. 대왕 그러하옵니다.”
 “여봐라, 최필, 내 아우 최필을 찾아오거라. 어서.”


 낙랑국왕 최리의 명령을 받고 군사들이 최필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최필의 아내는 최필이 주막으로 갔다는 말만 하였다. 군사들이 주막

에 도착하였으나 불길이 너무 세서 접근하지 못했다. 군사들과 백성

들이 합심하여 불을 다 끄고 나자 잿더미 속에서 새카맣게 그을린

시체 서른 구가 나왔다. 너무 심하게 타서 시신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다. 고구려 군이 쳐들어온다.”
 “앗 정말로 고구려 군이 몰려온다. 도망가자.”


 낙랑국 도성을 향해 고구려 군사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낙랑국 도성 백성들은 기가 질려 도망가기 바빴다.


 “아, 이제 우리 낙랑국은 망하였도다.”

 “개똥어멈, 빨리 도망가고 봅시다. 저 고구려 놈들은 인정사정 없다우.

우선 우리 목숨부터 구해야 될 거 아니우.”


 “하이고, 새벽에 주막이 불타서 이상하다 했더니......”
 낙랑국 백성들은 짐을 싸서 도망갈 준비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공격하라. 낙랑국 궁성은 자명고도 없고 무영단도 없다. 마음껏 공

격하라.”


 무휼은 호동에게서 무영단 지휘부를 모두 처단하였다는 편지를 받고

군사를 출동시켰다. 고구려의 대군이 낙랑국 도성을 삽시간에 포위하

였다. 낙랑국 군사들은 성루에서 화살만 날릴 뿐이었다.


 “여봐라. 내 아우 최필을 찾았느냐?”
 “대왕,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보이지 않는다고?”

 “최단장님께서 불이 난 주막으로 간다고 나가셨다는데......”


 “주막은 불을 껐느냐?”
 최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네에. 대왕.”
 “그 불탄 그 주막 안에서 무엇이 나왔다고 하느냐?”


 “새카맣게 타다만 남자 시체 삼십 여구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아, 이런. 내 아우가 불에 타죽은 게 분명하구나.”낙랑국왕 최리

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왕,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무엇이냐?”


 “고구려의 기마부대 군사들이 새카맣게 몰려와 도성을 포위하였

습니다.”

 “뭐라고? 고, 고구려 기마부대 군사들이 동성을 포위하였다고? 그게

정말이냐?”


 “대왕, 사실입니다.”
 최리는 멍하니 앉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거 큰일이로다. 여봐라, 호동왕자를 불러오너라.”
 “대왕, 궁 안에 호동왕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호동왕자가 어디 갔단 말이냐? 그럼. 공주, 애랑이를 데리고 와라.

어서.”


 ‘아,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낙랑국이 이제 운명을 다하였나 봅니다.

고구려의 정복자 무휼에게 낙랑국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천지신명

이시여, 우리 낙랑국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주소서.’
 최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버님, 아버님, 애랑이옵니다.”
 “네가, 네가 호동이에게 무영단의 존재를 알려주었느냐?”


 “아버님, 소녀는 왕자님이 간청하는 바람에 이름만 알려주었습

니다.”

 “그럼, 네 작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을 하였느냐?”


 “그냥, 이름만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아, 네가, 네가 나의 딸이 맞느냐? 네가 낙랑국을 망하게 하였구나.

무영단은 낙랑국을 지켜온 그림자 없는 조직이었건만 네가 그 조직

을 와해시켰구나. 어찌하여 무영단의 실체를 호동이에게 말했단 말

이더냐. 저승에 들면 조상님들을 어찌 뵐꼬?”
 낙랑국왕 최리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버님,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이름 정도는 알려주어도 큰 일이 없

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소녀를 벌하여 주소서.” 


 “너는 조상님과 이 아비를 욕되게 하였다. 내 차마 너를 죽일 수가

없구나. 이 칼로 자결을 하여라.”


 “아버님, 소녀를 용서하여주세요.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낙랑국 공주 애랑은 아버지 최리가 던져준 단도短刀를 들었다. 애랑

은 호동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왕, 고구려 군이 도성 문을 깨고 궁성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오, 조상님이시여, 이 못난 후손을 용서하소서. 소손小孫이 여식을

잘못 훈육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 못난 후손 죽음으로 벌

을 받겠습니다.”
 최리 역시 단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버님, 소녀를 용서하소서. 호동왕자님, 소녀는 아직도 왕자님을

믿습니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은 저승에서 다시 이어요. 소녀의

시신을 보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시어요. 소녀는 먼저 갑니다.”


 애랑은 아버지 초리를 향해 큰절을 하고 칼을 빼서 배를 찔렀다. 아

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궁 밖에서 고구려 기마군의 창칼을 맞

고 낙랑국 백성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궁 안으로 불화살이 비 오듯 쏟

아졌다. 궁성은 금방 불길에 휩싸이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애랑아, 애랑아, 이 아비를 용서해다오. 이 아비의 잘못된 판단으로

너와 나라를 잃었구나.”


 “아-버-니-임, 소녀, 소녀를 용-서......”
 “애랑아, 애랑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낙랑국왕 최리는 죽어가는 딸 애랑을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최리

는 딸을 고구려왕자 호동에게 시집보내 고구려와 정략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으면 고구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영토 확장 정책을 고수하는 태왕 무휼의 야욕은 그 무엇으

로도 꺾을 수 없었다.

 

 “여봐라, 호위무사는 나의 목을 쳐라.”
 실컨 통곡을 하고 난 낙랑국왕 최리는 곁에 있던 호위무사에게 명

했다.


 “대왕, 어찌 이러십니까? 어떻게든 살아서 낙랑국 백성들을 돌보셔

야지요. 소신을 할 수 없습니다.”
 “명령이다. 어서 네 칼로 나의 목을 쳐다오. 어서.”


 “대왕.”

 “고구려왕 무휼은 낙랑국 백성을 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

복한 다른 지역에서도 백성들은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짓을 하

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으면 낙랑국 백성들에게 치욕이 될 수 있다.

어서, 네 그 칼로 나의 목을 쳐라. 어서. 낙랑국의 왕으로서 마지막

명령이다.”


 “대왕, 그래도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아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살 수 있겠느냐. 어서 나의 목을 쳐다

오. 비굴하게 살아서 백성들에게 처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대왕, 용서하소서.”
 낙랑국왕 최리는 호위 무사의 칼에 목이 떨어졌다. 번조선의 토호

최숭崔崇이 낙랑국을 개국한지 232년 되는 해였다. 낙랑국왕 최리와

낙랑공주 애랑의 시신이 나란히 대전에 눕혀졌다. 그때 낙랑국 왕성

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사들과 함께 호동이 대전으로 뛰어 들었다.


 “애랑, 애랑, 나요. 나 호동이요. 애랑, 이게 어찌된 일이오? 누가 애

랑을 이리 만들었소? 애랑, 애랑......”


 호동은 낙랑공주 애랑의 시신을 끌어 안고 통곡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죽은 정인情人 낙랑공주는 아무 말도 없이 싸늘하게 식어가

고 있었다.


 무휼은 호동왕자 덕분에 숙원이었던 낙랑국을 정복하였다. 태왕

무휼은 호동의 공을 높이 치하하며 곧 태자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공언하였다. 대신들도 호동이 태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을 공

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태자 즉위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 일부에서 호동의 활약과 공을 두고 설왕설래하

였다. 송 왕후의 친정인 연나부 사람들은 호동의 활약상을 깎아내

리는 데 분주하였다.


 “왕후님, 만약에 호동이 태자에 책봉되면 우리 연나부는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동이 태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나에게 묘책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왕후님, 묘책이라니요?”


 “그대들은 두고 보세요. 곧 호동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소신들도 두발 뻗고 잠잘 수 있습니다.”


 왕후 송 씨는 이번에야 말로 호동왕자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의 몸

에서 나온 왕자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승전에

취해있던 고구려 왕실에 검은 구름이 서서히 몰려왔다.


 “뭐요? 왕비, 그게 사실이오?”
 “태왕, 어제 새벽에 호동이 소첩의 침실에 난입하여 소첩을 강간하

려 하였습니다. 소첩은 이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소첩과 호동이 중

에 한명을 선택하십시오.”


 “그 아이가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왕후 송 씨는 아침 일찍 태왕 무휼을 찾았다.


 “호동이 소첩의 침실에 난입한 사실을 목격한 궁녀들이 한 둘이 아

닙니다. 그 아이들을 데려다 문초해 보시면 백일하에 호동의 못된 행

동이 드러날 것입니다. 소첩은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속이

메스껍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혈기 왕성한 나이라고 하자 어찌 어미

를 겁탈하려는 자식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여봐라, 호동왕자와 왕후 처소의 궁인들은 모두 들게 하라.”
 송 씨는 이미 왕후 처소 시비들과 궁인들과 입을 맞춰놓았다. 태왕의

부름에 호동은 무슨 상을 내리는 줄 알고 대전에 들었다.


 “호동아, 너는 지금까지 아침저녁 인사 같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로 왕후의 처소에 몇 번이나 갔었느냐?”


 ‘앗, 아버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무휼의 물음에 호동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금방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태왕은 노여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왕비 처소의

궁인들은 지은 죄도 없으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잘못 말하면 나의 목숨은 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황후 처소

의 궁인들까지 부른 것을 보면 아버님이 이미 나와 왕후의 관계를 다

알고 계시는 게 틀림없는 거 같다. 어찌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할 수

없고, 거짓말을 고할 수도 없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호동은 심장이 쿵쾅거리고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었

다.


 “아버님,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열 번 이상 되는 것 같습니

다.”
 호동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열 번 이상이라고?”

 태왕 무휼은 기가 막혔다. 호동이 한 번도 왕후의 처소에 간적이 없

었다는 말을 기대했었다.


 ‘저런 여린 녀석을 보았나. 비록 왕비가 불러 간적이 있더라도 발뺌

을 해야지. 그럼, 왕비와 호동이 정말로 사통을 하였단 말인가?’
 무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비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연

적戀敵으로 판명 나는 순간이었다.
 

 “이놈, 네가 어찌하여 왕후의 처소에 드나들었느냔 말이냐?”
 “소자, 어머님께서 주안상을 차려 놓고 소자를 부른 적도 있었지만, 어

머님의 안부가 걱정되어 소자가 스스로 어머님 처소에 갔었습니다.”


 “태왕, 아니에요. 소첩이 부른 적은 딱 한번입니다. 그것도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호동이 제 발로 와서 술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첩은 어미의 입장에서 술을 주었고요. 술을 마시고나서 소

첩을 강간하였습니다.”


 “이노옴-, 모두가 사실이렷다.”
 태왕은 벌떡 일어나 호동을 노려보았다.


 ‘착해 빠진 호동이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왕후 송 씨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네가, 감히 아비의 여인인 왕후를 탐하려들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구나.”

 “태왕, 호동이 법적으로 모후母后인 소첩을 강간하려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무휼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여봐라, 너희들은 호동이 왕후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느냐?”  

 이번에는 태왕이 왕후의 처소 궁인들에게 물었다.


 “태왕폐하, 소비小婢들은 호동왕자님께서 왕후궁에 드나드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습니다.”
 “그래. 호동이 언제부터 왕후 처소에 드나들었느냐? 바른대로 말해야

한다. 만에 하나 거짓이 있으면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태왕의 기세에 시비侍婢들은 감히 태왕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이 본대로 태왕께 아뢰어라. 사실대로만 아뢰면 태왕

께서 너희들에게 아무런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야.”
 왕후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궁인들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안심시켰

다. 


 “지난해 봄부터 태왕폐하께서 원정을 나가시면 호동왕자님께서 몰래

왕후님 궁으로 오시었습니다.”
 “호동이 왕후 처소에 와서 무엇을 하였느냐?”


 “왕후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데 오시어 왕후님을......”

 “왕후를 어찌하였다는 것이냐?”


 “소비들은 차마 말씀드릴 수가......”
 “괜찮다. 너희들이 본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면 된다.”

 태왕은 궁인들을 달랬다.


 “호동왕자님께서 주무시는 왕후님을 강제로 옷을 벗기고......”
 궁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태왕, 소첩이 말씀드리지요. 저 아이들은 옆에서 바라만 보았을

뿐입니다. 소첩이 속 시원히 말씀드리지요.”
 왕후 송 씨가 궁인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험-, 말해보시오.”
 “태왕께서 원정 나가시고 서너 달씩 궁을 비우실 때 호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첩의 침궁에 난입하여 소첩을 강간하였습니다. 소첩

이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태왕께서는 호동이를 감싸고도실 뿐

소첩의 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소첩은 태왕이 원정을 나갈 때면 침

궁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워 궁인들을 늘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동이 소첩 곁에 궁인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첩을

범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저 아이들이 증인입니다.”


 왕후 송 씨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호동은 이 광경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왕후의 말에 항의를 하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저 여인이 자신이 나를 불러 유혹하고서 이제 와서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구나. 이제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로다. 한때는 내 마음

의 연인으로 왕후를 사모하기도 하였지만 이제 생각하니 참으로 부질

없는 짓이었구나. 내가 낙랑국을 망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호동은 아버지 무휼이 없는 틈을 타 왕후 송 씨가 자신을 은밀히 불

러 불륜을 저지르게 한 일들을 떠올렸다.


 ‘왕자, 왕자는 내가 어미로 보이나요? 내가 여자로 보이나요? 오늘밤

은 밋밋한 모자 지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호걸은 때를 잘 잡아야

해요....., 이 어미는 늘 쓸쓸하답니다.’


 호동은 어머니 해씨가 죽고 아버지 무휼이 새로 들인 왕후 송 씨를

어머니로 받아들 수 없었다. 어머니라고 부르기보다는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왕후의 유혹에 마지못해 정을 주었으나 차츰

왕후 송 씨가 호동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아버지와 거리를 두

었다. 어쩌다 한번 맺은 계모와의 관계는 호동이 낙랑공주 애랑과 혼

인을 맺기 전까지 남의 눈을 속이고 계속이어졌다.


 “호동이 네 이놈, 왕후의 말이 정녕 사실이렷다.”
 “......”


 “아버님, 송구하옵니다. 이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여봐라, 호동은 이제부터 짐의 자식이 아니다. 저놈을 왕자 궁에

가두어라. 짐이 저놈을 좀 더 조사한 후에 처결을 내릴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를 용서하소서. 소자는 효도를 하려고 한 죄

밖에 없습니다. 두 분께 드린 소자의 효도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 어

떤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듣기 싫다. 여봐라, 어서 저놈을 끌고나가라.” 
 ‘아, 애랑, 내가 바보짓을 하였습니다. 그대 말처럼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숨어 살거나 내가 낙랑국에 눌러 살면서 해로할때

까지 함께했어야 했거늘. 모두 나의 과욕이 오늘의 비극을 만들었

습니다.’
 호동은 무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태왕, 고맙습니다. 씨앗을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동이 비록 죄인의 몸이 되었지만 소첩에게는 아들입니다. 호동이

나름대로 효도를 하려고 하였다고 하지만 그 도가 넘쳐 못할 짓을 한

같습니다. 호동이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흉노나 오환 아니면 두

루막으로 유배를 보내세요. 이 궁궐에 두면 언제 또다시 소첩에게

덤벼들지 모릅니다.”


 송 왕후는 한때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호동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되자 죽이고 싶은 마음 보다는 인정을 베풀고 싶었다. 


 “짐에게 생각할 틈을 좀 주시오.”


 무휼은 왕후 송 씨가 아들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왕후의 얼굴

을 당분간 보지 않기로 하였다. 왕후가 호동의 어미처럼 보잘 것 없는

출신의 여인이었다면 아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죄로 다스려 처벌을

할 수 있었지만 무휼은 왕비족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태왕, 우리 해우왕자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 태왕

의 뒤를 이을 왕자는 해우 밖에 없습니다.”
 

 태왕은 호동을 왕자 궁에 가두고 술로 살았다. 만사를 제쳐두고 두문

불출하며 곡기를 끊고 밤낮 술에 취해 있었다. 국상 을두지乙豆支와 각

나부那部의 고추가나 대신들이 찾아가 무휼을 달래보았지만 무휼은


아들을 잘못 훈육시킨 죄책감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왕후는 태왕에게 호동의 일을 빨리 처결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왕자님, 왜 태왕께 변명을 하지 않으십니까? 조정 대신들은 왕후가

왕자님을 유혹하여 함정에 빠트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태왕께 적

극 해명하시어 목숨을 보전하시고 장차 고구려의 태자에 앉으셔야 합

니다. 낙랑국을 정벌하는데 왕자님의 공이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습니

다. 태왕께 왕후의 죄를 소상히 고하시고 목숨을 보전하십시오.”



 “만약 내가 적극 나서서 해명하게 된다면 이는 어머님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아버님에게 큰 근심을 끼치는 일입니다. 자식 된 도리로 어

찌 그런 난감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여 출신의 대신들과 평소 호동을 따른 대신들이 호동에게 찾아와

태왕에게 적극 해명을 요구하였지만 호동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달포가 지난 어느 날, 호동은 왕자궁을 지키는 병사를 통

해 아버지 무휼이 곡기를 끊고 산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로 인하여 아버님께서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구나. 나 같은 불효

자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차라리 나 한 몸 죽어서 두 분이 화합

하고 오래오래 복락을 누리시게 하는 게 도리인 것 같다. 어머님,



이 불효자 곧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어머님께서 갈사국 출신이

아닌 힘 있는 나부那部의 출신이셨다면 소자 고구려의 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소자는 여인의 독사 같은 왕후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이 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태자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여인은 갓난아이를 태자에

앉히려고 혈안이 되어 있답니다. 여인의 유혹에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으니 이제 이 한 몸 버려서 왕실이 평안하고 고구려가 안정된 기반

위에서 대대손손 평화를 누린다면 바랄 게 없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승에서 소자의 운명이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애랑, 미안하오. 나 때문에, 나 한 사람 믿고 있던 그대에게 행복을 주

지 못하고 죽음을 안겨주었소. 내 그대를 저승에서 만나면 올바른 지

비가 되어 영원히 살겠소. 기다려주오.’


 호동은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빼들고 배를 찔렀다. 국내성에 추적

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밤새도록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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