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이야기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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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의 우상으로 내 가슴 속 깊이 각인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였다. 나의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그녀가 나의 마음을 훔쳐간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어찌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 원인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방은 온통 그녀의 사진과 그녀가 출연
한 영화의 포스터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였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음악
을 듣는 일이 가장 행복하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내 또래 여학생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나의 눈에는 그녀 이외
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내가 그녀를 좋아하였는지 나는
그때 유행하던 해외펜팔에 관심을 가지면서 해외 펜팔을 소개하는 책
에서 그녀와 모습이 거의 비슷한 여학생을 고를 정도 였다.
3년 동안 나는 오드리헵번을 닮은 마닐라에 사는 필리핀 백인계 여학
생 그레실 터그방과 주고받은 편지는 작은 상자 안에 가득할 정도여서
나중에 그녀와 연락이 끊어 졌을 때 그 편지를 어떻게 처리할까 한참
고민하였다.
여름비가 내리는 지금 나는 며칠 전 새벽에 N을 도촬한 사진을 컴퓨
터에 띄워 놓고 포토샵으로 편집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때 나는 그녀를 사진 찍을 때 어둠속에서 카메라의 감도를 최대한
높이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값을 적절하게 설정한 뒤에 렌즈를 떨림
방지기능인 IS 설정 상태에서 수동으로 삼각대도 없이 촬영하였는데
사진이 제법 선명하여 볼만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N의 모습은 너무나 고혹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만 같았다. 나는 사진을 이리저리 형태를 변형
해 보고 액자를 만들어 편집해 보며 그녀와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완벽한 초상권 침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 혼자만 보는 사
진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나의 우상인 오드리헵번의 오똑한 콧날과 하얀
피부, 단발머리, 약간은 우수에 찬 듯 하면서 먼데 있는 정인情人을 그리
워하는 듯한 표정을 그대로 판박이한 모습을 나는 보고 있다. 나는 N의
사진을 화사하고 더욱 선명하게 편집하기 위하여고 USB에 담아 놓았
다.
차양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안
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탓인지 그녀의 집 베란
다 창문은 닫혀있었고 거실에 전등도 꺼져 있었다.
나는 N이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 여름휴가를 갔거나 혹은 알라스카 설
원을 달리며 스키를 타고 있을 거라고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런데 M의 집은 거실에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사람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벽시계가 새벽 3시30분을 가리키
고 있다. 마침내 M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였는지 머리가 촉촉해 보였다. 나에게 샴푸냄새가 전달될 것
같기도 하였다. 풍만한 젖가슴을 하늘거리는 베이지색 나시 속에 감추
고 있는데 노브라 상태였다. 아내도 역시 지금처럼 더운 여름날이면
집안에서는 거의 노브라 상태로 있었다.
결혼하고 일 년도 안 되어 아내는 종종 노브라 차림으로 생활하였다.
뻔뻔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편안하게 대해주어서 안심하고
거추장스러운 속옷을 벗어버린 것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M의 집안 범위는 거실과 주방 그리고 베란다 정도
였다. M이 주방 식탁에 앉아 차는 마시고 있는데 찻잔의 크기와 색
깔로 보아 M이 마시는 차는 홍차나 녹차가 분명했다.
나는 숨을 죽여 가며 M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N보다 미모에
서 훨씬 뒤지지만 요염한 자태에서 자르르 흐르는 색기는 오히려 N
보다 더 한 것 같았다. 나는 M이 무슨 일로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사색에 빠져있는지 궁금했다.
이 시각까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앉아 차를 마신다는 것은 정상인의
생활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도툼하고 색정을 연상시키는 D의 입술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
다.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어서 내가 빗소리를 들으며 망상에 빠져있거
나 혹은 건너편 두 여인들을 훔쳐보느라 밤을 새우더라도 문제될 게
없다. 거의 매일 새벽에 빨래를 하거나 집안 일을 하는 N과 M의 정
체가 나는 몹시 궁금했다.
두 여인의 직업이 밤늦도록 일하는 직종이 분명했다. 나의 눈에 잡
힌 두 여인의 생김새가 그녀들이 하는 일을 대변하고 있다. 30대 후
반으로 보이는 N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오똑한 콧날과 단발머리,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어서 그녀는 분명 미용실을 운영하거나 피부
관리 업종의 종사자가 분명해 보였다.
M은 4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그녀 역시 집에 있으면서도 늘 화장
을 짙게 하고 있고 원색 계통의 속옷 종류를 선호하는 것으로 미루어
평범한 주부는 아닌 듯 하다. 내가 만약 두 여인을 마음대로 데이트
를 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는 N을 선
택하고 싶다.
N과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면서 인생을 논하고 예술을 들먹이면서
어설픈 논리로 세상을 비웃기도 하고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 테지. 내가 M의 집을 바라보며 망상에 빠
져 있을 때 갑자기 위층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예정시간 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었다. 거의 침대가 부서
지는 수준이어서 예전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벗어나 듣기 힘들 정도
의 소음이었다.
한참 동안 여인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약하게 울부
짖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위층에
서 나는 소리에 숨죽이며 종종 원치 않은 희열을 맛보기도 하였지
만 지금은 소음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은밀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던 원숙한 여인의 교성嬌聲과도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안방에서 나와 거실에 앉아서 위층의 부부가 얼른 볼
일을 끝내기를 바라면서 소파에 누워 멍청히 천정을 바라보았다.
위층 사람들이 아래층에 홀로 사는 나를 일부러 놀리기 위하여 평
소보다 적어도 열배 이상의 격렬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자 부아가 났다. 다시 안방에 들어가 누웠지만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최근 서울의 한 법원에서는 생활소음의 기준을 주간에는 55데시
벨, 야간에는 45데시벨, 취침 시에는 35데시벨이 적절하다고 판시
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건물이 무너질 정도의 소음이라면 적어
도 150데시벨은 충분히 넘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지금 너그럽게 봐주면서 이 집에서 최소 10년을 거주 한
다고 할 때 위층의 소음으로 나의 수명은 적어도 두세 달 단축될 것
같았다. 요즘 사람의 건강을 담보로하는 다양한 보험상품이 홍수를
이루고있지만 이웃간의 소음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인한 발병이나
입원할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상품을 아직 보지 못했다. 위
층의 수면 방해로 나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분명
하다.
가까이 다가오던 수마睡魔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다. 나는 길게 심
호흡을 하면서 안정을 꾀하려 하였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나는 내
가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 극도의 정서 장애로 인한 정신
적 공황상태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위층으로 올라가기로 하였
다.
새벽 4시 30분이 넘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한 시간도 잠들지 못하
고 두 눈알이 빨갛게 충혈된 채 아침을 맞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았다. 위층까지 올
라가는데 10초도 안 걸리는 시간이지만 내가 만약 초인종을 눌러
남자 주인이 나를 맞을 것을 생각하니 불안했다.
한참 절정을 향해 달리는 데 아래층 남자가 올라와 자신들의 성스
러운 일을 방해한다면 남자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나는 집
을 나설 때와 달리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몇 번이나 손가락을 댔다 떼기를 반복하였다.
다시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그들의 합작품에 박수를 쳐주기로 하
고 다시 나의 보금자리로 들어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천정이 무너질 듯했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
느냐는 듯 고요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청각을 윗층에 집중하고 무
슨 소리가 들리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창문을 활짝 열고 신경을 곤
두 세웠다. 그러나 조용하기만 했다.
동창東窓이 희뿌옇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금방 날이 밝아왔다. 나는
안대를 착용하고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 사람이 극도로 피로하면 오
히려 잠이 오지 않게 마련이어서 나는 두 눈을 감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나는 가까운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고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이상한 것은 지난밤을 꼬박 새웠어도 전혀 피곤하거나 몸이 쳐지는
현상이 없었다. 오히려 산에 오를 때 간밤에 푹 잔 사람들 보다 몸이
가볍고 발걸음 또한 날아갈 듯 했다.
주말 아침이어서 그런지 부부 또는 연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있는데 나 혼자 산에 오르는 신세가 창피하기도 하여 나는
뛰다시피 산 정상을 향했다. 멀리 아침 안개 사이로 도심 속 아파트
와 마천루 숲이 보였다.
저 수많은 건물 속에서도 간밤에 나를 괴롭혔던 일들이 수 없이 벌
어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음양오행에 따라 세상
이 존재하는 이치라면 남녀의 만남과 그 뒤에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
들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인류가 오랜 세월 이 지구를 지배가능
하게 해주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미친 듯‘야호’를 외쳤다. 외침 속
에는 간밤에 위층의 방해로 잠을 자지 못한 억울함을 상쇄시키려는
의도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해가 떠오르며 따가운 은빛 햇살이 살을 파고들자 산에 오른 사람
들이 하산하였다. 나는 산을 내려와 자주 들리는 해장국집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해장국을 시켜 허기진 속을 달래며 탁주 한잔을 곁들였다.
역시 뜨끈한 국물에 탁주 한잔은 꿀맛 같았다. 겉절이와 따끈한 순
두가 나의 피곤한 상황을 어느 정도 보상해 주었다. 아침부터 어량
해진 상태로 나는 집으로 향했다. 넓은 집에 덩그런히 혼자 남겨진
다는 것은 무섭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아이들과 아내가 외국으로 떠나고 손수 밥과 반찬을 만들어 식사
를 해결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는 일은 중년의 남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편과 두 아이들을 뒷바라지한
아내의 노고에 고마워하였다. 내가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집 앞에
119에서 출동한 앰블런스와 경찰차가 서 있었다.
내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온 뒤로 한번도 보지 못한 낯선 광경이었
다. 누군가 계단이나 침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거나 혹은 복통
을 일으켜 119에 신고를 하여 출동한 것 같지는 않았다.
경찰차와 119 앰블런스는 나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어서 나
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위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와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웅성 거리는 소리가 혼합되어 어수선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
하여 계단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3층쯤 올라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소방관 4명이 들것에 누군
가를 싣고 천천히 내려오는 중인데 뒤 따르던 위층의 여인의 얼굴
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면서 훌쩍거렸다.
그 뒤로 경찰관과 위층 여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50초반의 남자도
침통한 표정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눈가가 젖어 있었다. 나는 들것
에 실려 있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였지만 하얀 천으로 덮
여져 있어 볼 수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면서 들것 위에 누워있는 사
람이 충격이나 벽에 부딪혀 상처라도 날까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
였다.
나의 판단대로라면 지난밤 격렬하고 난폭하게 신성한 일을 치렀
을 위층의 부부는 만족한 얼굴로 아침을 맞아야 옳았다. 그런데 위
층의 부부는 지금 울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
웠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람은 분명 위층에 살던 사람이고 무슨 일
로 하얀 천으로 덮인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지 궁금했다. 나는 용
기를 내어 울고 있는 위층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여인
은 대답대신 들것에 누워있는 사람만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는
계단을 통해 위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위층 집은 현관문이 약간 열려있었고 반장일 보는 여인과 몇번 엘
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여인 등 서너 명이 문 앞에서 귓속
말로 무슨 말을 주고받다가 나를 보자 이야기를 멈추었다.
나는 반장일 보는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반장은 나에게
간밤에 위층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죽은 사람은 위층집 여
인의 70살 된 친정어머니인데 오랫동안 간질과 치매 등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려왔다고 하였다.
나는 빼꼼하게 열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을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집 구조가 내가 살고 있는 집 구조와 달랐다. 거실이 나의
집과 반대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화장실과 방 세개의 구조밀
배치도 나의 집과 달랐다.
나는 같은 공동주택이라도 층수에 따라 구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5층밖에 안 되는 공동주택 구조가 어떻
게 다를 수 있는지 의심이 가면서 내가 거주하는 안방의 바로 위
층을 살펴보았다.
나의 집과는 다르게 작은 방에 있었다. 방에서 퀴퀴하면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그 좁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싱글 침대가 거의 부서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침대의 양모서리에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길이 40cm
정도의 검정색 헝겊으로 된 끈이 묶여져 있었다. 나는 번개를 맞
은 사람처럼 방 앞에 서서 꼼짝할 수 없었다.
부서진 침대 위에는 세탁을 안 한지 10년쯤 되어 보이는 시커먼
이불이 놓여 있는데 이불 위에 토사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
는 집을 나와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상상했던 일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 계속 -
재미없는 이야기(파일) (0) | 2012.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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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이야기(終) (0) | 2012.10.31 |
재미없는 이야기(1) (0) | 2012.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