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여자(최종회)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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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어요. 저녁 8시면 어김없이 러
닝머신을 괴롭히던 여자가 새벽 시간에는 몸을 놀리기 귀찮은가 봅니
다. 이른 아침 5시에 아파트 단지 가운데 있는 공원에 나가서 8시가
될 때까지 서성댔습니다. 괜히 지나가는 초면의 노인에게 인사말을
건네기도 하고 유령 마을이 되다시피 한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와 개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3시간 넘게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나는 개와 고양이를 벗 삼아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활보하였답니다. 남자가 자존심
이 있지 두세 시간 기다리다 그냥 돌아설 수 없잖아요. 나는 근처 슈퍼
에서 우유와 빵을 사서 아침 겸 점심으로 해결하고 나서 그녀가 나오기
를 학수고대하였어요. 해가 중천을 경유하여 서천으로 달음박질 할 때
까지도 그녀의 그림자 조차 볼 수 없었어요.
참담한 심정으로 멍청하게 낡은 벤치에 앉아 애꿎은 똑딱이 카메라만
쥐어박으며 신세한탄만 늘어놓았답니다. 도대체 내가 왜 그 유령 같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요. 남녀 관계란 참으로 오묘한 게 틀림없나 봐요. 나는 그녀를 기다리
다 지쳐 땅거미가 질 무렵 만근이나 되는 육신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어요. 정말로 괘씸하고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는 내 컴퓨터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답니
다. 아무리 꿍얼거려보았자 내 입만 아프던걸요. 반쯤 마시다 남은 헤네
시XO를 꺼내 안주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셔대기 시작했어요. 40도가
넘는 독주(毒酒)인데도 불구하고 내 속은 전혀 덥혀지거나 알딸딸한 느
낌이 없었어요. 나는 병맥주를 꺼내 소위 주당들이 말하는 ‘폭탄주’를
제조했답니다.
제2차 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100배의 위력을 가
진 핵폭탄 서너 개를 뱃속에 집어넣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더군요. 그런
데 제조과정에서 브랜디(Brandy)와 라거비어(Lagerbeer)의 배합량에
문제가 있었던지 금방 강력한 효과가 나타났어요. 어설픈 폭탄제조기
술자의 실험은 그만 일을 내고 말았답니다. 천정이 빙빙 돌더니 금방이
라도 아파트 천정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어요.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냉수를 마셔댔지만 핵폭탄의 가공할 위
력은 상상을 초월했어요. 나는 뒤늦게 초토화 된 뱃속을 달래기 위하
여 팬티 바람에 건너편 그녀가 하는 것처럼 거실에서 뛰기 시작했어
요. 전신(全身)에서 포도알 크기의 땀방울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면
서 거실 바닥은 금방 흥건해 졌어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거실을 뛰어 다녔어요.
후덥지근한 기온 때문에 몸이 용광로가 된 것 같아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지요. 으레 내 시선은 건너편 그녀의 아파트를 응시하였어요. 그
런데 그녀의 아파트가 어둠 속에서 정적에 휩싸여 귀신이 사는 집처럼
보였어요.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동시에 온몸에 활짝 열려있던 수 만
개의 땀구멍이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금방 닫혀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나는 똥마려운 강아지 처럼 허둥대며 어
쩔 줄 몰라했어요.
그런데 벽시계를 보니 저녁 7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나는 안
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고 미소를 지었답니다. 그녀의 운동은 정확히
저녁 8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나거든요. 오랜 관찰에서 터득한 나의
감각적 시간개념이 핵폭탄으로 뱃속이 초토화 된 관계로 잠시 혼란에
빠진 게 틀림없었어요. 나는 다시 미끈거리는 거실을 미친놈 처럼 팬
티바람으로 뛰며, 느끼한 얼굴의 가수 윤수일이 히트시킨 ‘아파트’란
노래를 신나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노래를 목청이 터지도록 부르고 나니까 속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
는 듯 했어요. 나는 폭포수처럼 흐르는 땀을 닦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로 하였습니다. 내가 비몽사몽간에 거실 소파에서 일어난 시각이 밤
9시 쯤 되었을 거 에요.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쯤 감긴 눈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아
이고, 이게 웬일이랍니까? 글쎄, 어머니와 시집간 바로 아래 여동생이
조카들을 데리고 문 앞에 떡하니 서있는 게 아니겠어요.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나는 어머니 손에 들린 묵직한 물건을 받으려
고 손을 내민 순간 여동생이 비명을 질러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시원한 바람이 내 사타구니로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고서야 머리가 쭈
뼛 서서 마치 고슴도치 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것도 잠시 나의 볼품없
는 육신이 여인들 앞에 공개되었으니, 아무리 나를 낳은 어머니와 뿌
리가 같은 여동생일지라도 경악하지 않겠어요.
나는 얼른 돌아서서 뛰어 들어가 축축이 젖은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꿰고나서 어머니에게 다시 인사를 드려야 했답니다. 아마 어머니는
나를 본 순간 억장이 무너졌을 거 예요. 안 봐도 뻔 하죠. 나이 40이
되도록 장가도 못간 아들이 불쌍하여 밑반찬을 만들어 찾아 왔더니
아들이란 놈이 팬티바람에 눈은 썩은 동태눈깔이 되어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문을 열어주니 어떤 어머니가 기가 막히지 않았겠어요.
어머니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지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거실
에 들어오셔서 내가 흘린 땀방울이며 여기 저기 벗어 내팽개쳐진 옷
가지며 제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정리 정돈 하시고 휑하니
나가버리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장가도 못 들고 늙어가
는 아들 때문에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어머니의 가슴 속에 나는
휘발유를 들이 붓고 말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죽고 싶더
라고요.
여동생과 조카들도 괜히 주눅이 들어 있다가 무슨 죄인들처럼 비
실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더니 어머니 꽁무니를 따라 바람처럼 사라
지더군요.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눌 길 없어 미친놈처럼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뛰어 다녔어요.
이유도 없는 분노가 그녀로 말미암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창가로
다가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집은 여전히 암흑에 쌓여 있
는 게 아니겠어요. 나의 분노도 잠시였고 이내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
졌답니다.
밤 10시가 넘었으니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일찍 잠자리에
들거나 또는 운동 후에 외출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산사에 가면 지겹도록 들을 수 있는 명상음악을 틀었
어요.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의 현재 서 있는 자리를 천천히
뒤돌아보기로 했지요.
심사숙고하는 가운데도 나의 시선은 자주 그녀의 아파트 베란다 쪽
으로 이동하곤 했답니다. 명상에 잠기니 한쪽 모퉁이가 일그러진
달님이 창가로 내려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더군요. 달님은 나에게
'이 멍청한 녀석아, 지금 뭘하고 있는게야?'하고 꾸지람을 하시는 거
같았어요.
세상에는 아직도 성(性) 혹은 섹스를 단지 자웅(雌雄)의 신체적 일
부가 교접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지극히 구석기시대적 발상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새로
개발된 각종 하드웨어는 우주시대를 달리는데 사람들의 소프트웨
어는 선사시대에 머물러 있는 거죠.
요즘 일부 국가에는 동성애자(同性愛者) 간의 결혼이 허용되고 있
고, 심지어 당당하고 늠름하던 남성 심볼을 제거하고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로 거듭나는 중성(中性)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실 겁니
다. 우리나라에도 '하 뭐시기'란 예쁜 여인이 있잖아요.
태국은 그런 부류의 중성들이 활개 치기 좋은 세상이지요. 그들을
상대로 해마다 미인 콘테스트를 개최하여 거시기 잘린 가장 아름다
운 여성아닌 여성을 선발하여 만인이 부러움을 사게 하니 기가 막힌
요지경 속이지요.
그뿐인가요 서울 한복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소위 말하는 메트
로섹슈얼리즘이 대유행하면서 대한민국 도시 남성들이 모두 여성화
되어 가잖아요. 여성스러운 것, 부드러운 것, 아기자기한 것, 예쁜 것,
약한 것, 달콤한 것으로 표현되는 이것으로 인하여 조만간 한국 남
성들이 모두 여성화 될 게 뻔 하다구요.
아마 군대에서도 가급적 여성스러운 군인, 예쁜 군복, 부드러운 총
칼, 달콤한 병영생활로 바뀔 날도 멀지않았어요. 남자의 완력을 믿
고 세상을 우습게보기도 했던 마치스모(Machismo) 추종자들은 모
두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조국의 미래가 걱정된답
니다.
그 뿐인가요? 호모섹슈얼리즘, 페티시즘, 레즈비언, 페미니즘 등
온갖 해괴한 신조어들이 양산되면서 지금은 가히 성(Sex)의 백가쟁
명(百家爭鳴) 시대가 아닌가요? 하루가 다르게 신인류(新人類)가 탄
생되면서 만들어지는 성(性)관련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데도 불구하
고 고리타분하고 구상유취한 논리만 고집하면서 약간의 궤도이탈이
라도 하는 분이 있으면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순식간에 ‘공공의 적’으
로 만들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 처럼 4차원 또는 그 이상의 세계에 거주하는 신인류는 보편타당
한 사람들 눈에는 ‘미친놈’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놈’으로 인식되어
온갖 추악한 단어를 내뱉으며, 손가락질 해댈 겁니다.
내가 귀가 둘이니까, 귀가 셋이거나 하나인 사람들에게는 내가 동
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배타적이며, 이질적 비흡수의 대상
이 되어 그들의 누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완화시키려는 수작
들이 회사, 학교, 병영 등지에서 비일비재하거 일어나고 있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저 건너편 여인도 보통 단수 이상일거라 추측이
됩니다.
범인(凡人)이라면 절해고도같은 이런 곳에 거주할 리가 없잖아요.
그 여인도 뭔가 이 사회에 불만이 있어 홀로 이상향을 동경하며, 찾
아든 곳이 바로 이곳 재개발아파트단지일 거 예요. 보통 이상향하면
따뜻하고 살기 좋으며, 늘 젊음이 넘쳐나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이나 혹은 먹고 마실 것이 공짜로 무한정으로 제공되면서 자신의
오감(五感)을 만끽할 수 있는 환타스틱한 곳을 상상할 겁니다.
소위 고전소설에나 등장하는 에덴, 요지경(瑤池鏡), 무릉도원, 샹그
릴라(Shangrila)는 20세기 들어 각국이 경쟁적으로 쏘아 올린 거짓
말 못하는 인공위성 덕분에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
났잖아요.
그렇다보니 저 처럼 도덕경(道德經)을 읊조리며, 죽림칠현(竹林
七賢)이나 옥황상제를 존경하는 부류나, 크로마뇽인들이 애지중지
하는 그리스 로마신화 따위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조작되거나 억압된 성(性)을 수긍하며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저는 학구열(學究熱)에 한창 몰두해 가슴에 한 아름 청운(靑雲)을
품고 곧 온 세상이 내 것이 될 것 같은 시절이 있었어요. 뭐 누구나
그런 아름다운 때는 다 있었겠지요. 그때 저는 바람기 많은 코쟁이
여인들의 가장 사랑하던 남자인 돈쥬안이나, 여덟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고운 인연을 맺고 입신양명하는, 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주인공인 양소유(楊小游)를 우상으로 숭배했었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양소유이며 '저 건너 사는 여인이 팔선녀(八仙女)
중 한명이 아닌가' 하는 꿈같은 상상을 하고 있답니다. 이제는 우리도
가장 아름답고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인 성(性)에 대하여 솔직
하게 행동해야 할 때라고 봐요.
더럽고 부정적이며 음습한 사망의 골짜기에 버려둬야 할 물건이
아닌 다양하며, 집단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인생에
서 가장 보배로운 것이어야 한단 말이지요. 성(性)을 음성적이라고
자꾸 편협한 시선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결과를
도출시킬 수 있어요. 인간이 어떻게 성(性)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요? 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승에 들 때 , 아니 저승에 들어서도 그
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잖아요.
우리의 전통적인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생활방식은 서서히 혹은
급진적으로 일부다처(一夫多妻) 혹은 일부다부(一婦多夫)의 사회
로 변질되어 갈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오래전부터 섹스가 합법적
으로 산업화된 나라들은 어느 정도 양성평등이 이루어 졌다고 판단
되지만 말로만, 양성평성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왜곡되고 있잖아요. 제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홀로 미적감각을 추구하는 것도 다 이유
가 있다고요.
성(性)과 관련이 없는 춘향이가 존재하겠어요? 또한 섹스와 전혀
상관이 없는 로미오와 줄리에가 존재하겠느냐고요? 지고지락(至高
至樂)의 성(性)은 결국 인류의 궁극적 목적이고, 인류가 자손만대 살
아갈 수 있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고 봐요.
그러니까 지극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분이 아니면 대개의 사람
은 한 평생 성(性)의 니르바나(Nirvana)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거
죠. 즉,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잠시 존재하다가 해가 뜨면 아
쉬움에 사무쳐 사라져야하는 허무한 존재란 말씀입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그런데 정말로 불안해 죽겠어요. 방금 그녀의 거실을 살펴보았는
데 아직도 인기척이 없어요. 지금 시각이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데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죠? 무슨 특별한 일이야
있겠어요? 매일같이 보이던 사람이 안 보이니 그런 것이겠죠. 오
늘은 그냥 자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쯤 그녀에게 가보려고요. 그래서 방금 생각
해 낸 것이 제가 여인이 되는 거 에요. 아무런 연고도 없고 볼 일도
없는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면 그녀가 놀래잖아요. 제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장해서 그녀를 찾아가 화장품을 팔러 왔다면 그녀는
분명 문을 열어줄 거예요.
저는 한때 크로스드레써(Cross Dresser) 클럽의 회원으로 활동
한 적이 있었기에 값비싼 명품들을 좀 가지고 있어요. 원피스, 투
피스, 쓰리피스, 가발, 원색 스타킹, 다양한 종류의 하이힐, 루이뷔
통 핸드백, 샤넬 제품의 향수들, 각종 화장품이 가득 든 케이스 세
개, 깃털이 달린 모자 등등 원숙한 여성이 꼭 소유해야 할 속옷과
액세서리, 기타 소품들이랍니다.
공활한 창공에서 달님이 크로스드레싱 소품들을 펼쳐 놓고 있는
저를 향해 빙그레 웃으시면서 또 한마디 하시네요. ‘이 녀석아, 정
신차려. 지금 한 여름밤에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속이 불편한 모습으로 야단을 치고 계시네요. 더 혼나기 전에
얼른 눈을 붙여야 겠어요.
나는 오랜만에 아침 식사를 하고 몸단장을 시작했답니다. 샤워를
하면서 면도기로 머리를 제외한 내 신체에 난 모든 털을 말끔히 제
거하였어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알코올이 희석되고 부기가
빠져서 그런지 어제 저녁보다 그런대로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비록 게으른 남자지만 적당한 음식과 운동으로 조절을 잘 한편
이거든요. 기초 화장 후에 볼연지와 짙은 핑크색의 립스틱과 블루
계열 아이샤도우, 아이라인, 마스카라로 예쁘게 화장을 하고 아끼
는 캘빈클라인 제품의 야시시한 언더웨어를 착용한 뒤에 약간 보
라빛이 감도는 가발을 썼어요. 그리고 눈이 부시도록 하얀 스타킹
을 착용했답니다.
거기에 속이 훤히 비치는 실크 계열의 엷은 하늘색 투피스를 입
어보았어요. 제가 보아도 영락없는 섹시하고 색기가 뚝뚝 흐르는
미시가 분명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어요. 세상에나,
대형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제가 보아도 너무 매력적인 거 있죠?
마릴린 먼로의 요염한 자태는 비교도 되지않아요.
전 너무 신이 나고 행복감에 젖어 콧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린 카
라 흉내를 냈다가 머라이어 캐리,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야한 율동
을 따라 하기도 했어요. 아마 보통 사람들은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저의 요상한 행동을 목격했다면 배꼽을 잡을 테죠.
그러나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3, 40대 미시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 화장품 코너나 고급 레스토랑 또는 물 좋은 나이트
클럽에 가면 저는 분명 많은 여인들의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으
며 공주로 행세할 거예요.
또 엉큼한 남자들은 용팔이나 너훈아 같은 약아 빠진 웨이터에게
사랑 시(詩) 나부랭이나 그럴듯한 글귀를 적은 쪽지에 쥐어주고 저
에게 끊임없이 파견하여 구애(求愛) 작전을 펼칠 테고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에요. 저는 투피스 색과 비슷한 하늘색
하이힐을 신고 루이뷔통 핸드백을 메고 집을 나왔어요. 세상에나,
조용히 잠자고 있던 매미들이 제가 나타나니까 아름다운 화음(和
音)을 내면서 저의 앞길을 축하해 주는 게 아니겠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시들어 있던 접시꽃이랑 때를 잊은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며 제 앞길을 축복해 주던 걸요. 저는 너무나 즐거워 그녀
가 살고있는 아파트까지 50m도 안 되는 길을 춤을 추며, 사뿐사뿐
걸었답니다. 화장품이 든,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케이스를 메고 가
는 발걸음은 경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은근히 걱정이 되었어요.
드디어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어요. 마치 도둑고양
이처럼 살금살금 그녀를 향해 다가갔어요.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
브래지어 끈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거 같아 서서 옷맵시를 점검하
기도 했어요. 그녀의 아파트 현관 문 앞에 섰는데 이상하게도 초
인종을 누를 수 없었어요.
마른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용기를 냈어요. 초인종 버튼
을 누르는 제 엄지손가락이 바르르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
튼을 눌렀답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무리 버튼을 눌
러도 안으로 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 예요. 나는 버튼을 눌러 대
면서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어요.
그래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이 여인
이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잠자리에 있는 거야?’하고 중얼
거렸어요. 제가 아무리 주먹으로 문을 심하게 두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자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나름대로 예쁘게 치장하고 왔는데 문
도 열어주지 않다니. 나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현관문 손잡이
를 꽉 잡고 힘껏 당겼어요.
그런데, 그런데 거실 안에 온통 신문지, 잡지, 종이박스, 부서진 가
구 조각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그만 그 자리
에 주저 앉아서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 거예
요? 단 한 가구 밖에 없는 이웃에게 인사도 없이 매정하게 떠나갈 수
있는 거냐고요?
나는 한참 울다가 우연히 벽을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나는 그 자
리에서 말을 잊은 채 밤늦도록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
어요. 글쎄, 벽에 그녀를 처음 가까이서 보았던 그 마트에서 빈 카
트를 끌고 다니는 후줄근한 내 뒷모습이 담긴 커다란 사진이 벽에
떡하니 붙어있지 뭐예요.
- -끝 -
아파트 여자(2) (0) | 2010.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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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여자(1) (0) | 2010.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