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소녀素女(4)

* 창작공간/중편 - 소녀(素女)

by 여강 최재효 2008. 11. 19. 09:42

본문

 

 

 

 

  

 

                    

                                         


                         

 

 

 

 

                        소녀素女(4)

 

                                                                                                                                                       - 여강 최재효

 

 


 분명히 T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그가 어느새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앵그르(Ingres)’로 변신하여 화려한 누드 한 폭을 그려 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복잡한 두뇌는 금방 1814년 앵그르의 출세

작인 '그랑 오달리스크‘를 떠올렸다. 터키 황제 슐탄의 여인이 전라(全裸)

의 모습으로 더번을 쓴 채 요염한 모습으로 쏘아보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청년기 순진했던 나에게 오달리스크는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오

랜 세월 뇌리에 각인된 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황제의 여인이 바로 눈앞

었다.


 늘씬한 허리선과 풍만한 뒤태는 나의 이성을 흐려 놓기에 충분했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불빛에 노출된 그레실의 실체는 육욕에 물든 할렘

(harem)의 황제의 여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베

개를 베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눈이 시리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길게 호흡을 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전체에서 부분으로 옮겨

가며 명화를 감상하였다. 그레실의 할아버지는 스페인계통의 남자로 이

곳 원주민 여자와 결혼한 탓에 그레실의 가족들은 피부가 백인의 피부와

거의 같았다.


 이곳 원주민들이 약간 진한 갈색의 피부인데 반해 그레실은 마치 서유

럽에서 이민 온 사람 같았다. 나는 그레실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알고 있는 P국의 상식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 대

부분이 까무잡잡한 피부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레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나의 의문은 풀렸다.

철저한 캐톨릭 신자인 그레실은 편지 끝 부분에 늘 하나님에게 나의 건강

과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덧붙이곤 했다.


 명화를 앞에 두고 외설이니 음란이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따뜻

한 방안 온기에 스스로 그린 명화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나는 숨 쉬는 것

조차 잊고 명화감상에 도취했다. 비록 전라(全裸)의 모습은 아니지만 오

히려 반라(半裸)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더욱 감칠맛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로에 서서 방황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료

한 줌 주지 않고 잘 익은 남의 과실을 따는 행위는 분명 범죄이고 양심을

속이는 행위이며 두고두고 자신에게 큰 상처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인에게 술을 권하고 술을 못 이겨 잠든 여인을 어찌해본다는 것은 사

내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피부의 한 부위로 그레실의

실체를 직접 느끼기보다 단지 눈으로 명화를 즐기는 것이 좋다고 나는

결심하였다. 디지털시계가 새벽 5시를 알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숨

이 멎을 것 같았다.


 살며시 그레실의 육덕을 만져보려고 손을 들다가 나 스스로 흠칫 놀라

며 얼른 손을 내렸다. 내 육신의 아래 부위에서 계속 강한 신호를 보내

왔다. 그러나 위에서는 전혀 반대의 의견을 보내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반투명의 실크 속에 아름다운 육신이 용광로처럼

불타고 있었다. 그 불타고 있는 육신의 활화산을 나의 가슴으로 덮어

꺼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칫 불을 끄다가 두 영혼이 모두 타버릴 것 같

았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그레실의 숨소리는 일정했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홀로 잠든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내가 화장실에서 나온 것을 알고

잠든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살며시 그레실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석고상이 된 것 처

럼 전혀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곧 전면전을 예고하거나 최

소한 국지적이며 일방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깊은 상

처로 얼룩이 질 것 같았다. 메모지를 꺼내 간단하게 메시지를 하고 탁

자 위에 올려놓았다. 


 I'll be back in 10 o'clock am. I love you !

 호텔 안내 팸플릿을 보니 새벽 5시부터 지하에 있는 사우나 실이 문

을 연다고 되어 있다. 객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10시면 T가 다

시 호텔로 찾아 올 시간이다. 프런트에 2312호에 정확히 9시에 콜서

비스를 부탁하고 지하 사우나로 향했다.


 사우나에는 이미 여러 명의 젊은 남자들이 내려와 있었다. 얼굴이 피곤

에 지친 것으로 보아 밤새도록 연인과 끈끈한 밤을 보냈거나 아니면 술

과의 전쟁을 벌인 한심한 부류들 같았다.


 매혹적인 그레실의 뒤태가 계속해서 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앞에 있

는 남자 손님도 그레실로 보였고, 왔다 갔다 하는 남자들의 뒷모습도

모두 그레실의 미끈한 뒷모습으로 보였다. 사우나를 나가서 다시 2312

호로 돌아가 그레실을 안고 본능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

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남자가 한번 결심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철칙이 더욱 강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차례로 끼얹어 보아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오로지 투명하고 얇은 천에 감춰진 그레실의 뇌

적인 뒤태만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아아, 바보. 나는 정말로 바보다. 바보야. 혹시 그녀가 잠들지 않은 상

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녀는 분명히 잠

들어 있었어. 바보가 아니라 용기 있는 사내야. 어머니께서 분명히 나를

보시고 잘했다고 하실 거야. 가만, 공짜로 주는 떡도 먹지 못하는 나는

정말 바보가 맞을까? 에이,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제대로 세상

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친 것은 아

지. 나도 모르겠다고.


 냉온탕을 번갈아 다니며 몸을 괴롭혔다. 술이 깨기 시작하면서 뒷머

리가 띵했다.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다시 날 것 같았다. 억지로 다시

속내의 덜 삭여진 내용물들을 빼내고 나니 속이 뒤집힐 것처럼 통증이

전해졌다. 차가운 물로 입안을 헹구고 온탕에 몸을 담그고 어제 하루

동안 나에게 펼쳐졌던 한편의 드라마를 다시 그려 보았다. 생각할 수

록 짜릿했다. 드라마를 몇 번이고 자꾸만 돌리다가 잠이 들었다.


 “Hey, Hello, wake up, wake up......!"
 누가 나를 흔들어 대는 바람에 간신히 눈을 떴다. 어린 종업원이 속

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를 깨웠다. 사우나 벽에 기대어 코를 고는 나를

종업원은 보다 못해 깨운 것 같았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두 시간을 넘게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쓰러져 하루 종일 잠을 자

고 싶었지만 또 다시 사우나에서 잠 잘 수는 없었다. 그때 번개처럼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지, 내가 잘 방이 또 있지. 그래 아침이지만 다시 들어가 보는 거

야.’
 한국 여행사에서 남자 2인당 1객실로 배정한 방 생각이 났다. 오전 10

시까지 앞으로 3시간이 남아있으니 최소한 2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었

다. 얼른 사우나에서 나와 13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문을 노크하자 룸

메이트가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어디서 밤을 샌 거요? 난 형씨가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줄 알

았다오.”


 “밤새 이곳 친구들과 술을 퍼마셨습니다. 이제 막 술자리가 끝났는데

잠이 쏟아지네요. 나, 지금부터 잠시 눈 좀 붙일 테니 깨우지 마세요.

 10시 쯤 일어 날 겁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일행들

에게서 이탈해 홀로 이 도시를 여행할 거라고 이야기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소.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마치고 아침 9시까지 버스에 타라고

했소. 난 그럼 아침 좀 먹고 오겠수다.”

 룸메이트는 시큰둥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막상 침대에 누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

긴 했지만 선잠이었다. 금방 눈을 뜨고 멀거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 곳에 왔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는 또 어떻

게 보내야 할지 천천히 고민해 보았다. 시계는 9시를 알려주었다. 지금쯤

그레실에게 콜(Call) 서비스가 전달되었을 것이고, 홀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허탈해 하면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의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두고

적대감을 품거나 주는 감도 못 따먹는 멍청이쯤으로 판단하고 피식 웃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지, 나의 신사다운 행동에 감격해 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일어나 면도를 하고 부수수한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마치 어젯밤

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면을 썼다.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한

시간 후면 T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아침인사를 건넬 것이고

나는 어젯밤에 그레실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변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여우같은 T에게 어떻게 이해를 구해야하나?’
 10시 이전에 미리 그레실이 있는 2312호로 가야한다. 만약 내가 그

방에 있거나 없거나 T는 요상한 상상을 하면서 시간 맞춰 올 것이고

혹시 콜 서비스를 받고 난 후에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그레실이 잠

들어 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행여 거의 전라(全裸)나 마찬가지

인 그레실을 보고 T가 억제되어 있던 본성을 드러낸다면 나로 인하여

큰 일이 벌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객실을 나섰다. 이곳 M시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 호텔에 계속 묵을 예정

이므로 짐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2312호를 노크 했다. 노크 하자마자 그레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Good morning, Honey?"
 "Oh! good morning, My Engel?"
 그녀의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술기운

을 이기지 못하여 지금까지 침대에서 비몽사몽간 헤매고 있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다.


 침대는 깨끗하게 정리정돈 된 상태였고 그레실은 막 화장을 끝낸 듯 화

장품 케이스가 경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써 놓고 나간 메모 덕분에 그

녀는 안심하였을 것이다. 메모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나갔더라면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우울해 있거나 나에게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니, 어젯밤 어디 있었어요?”
 “이 호텔 지하에 있는 사우나에 있었어요. 당신이 나 때문에 단잠을 자

지 못할 것 같아서요.”


 “…….
 “그레실, 미안해요.”
 “아니에요. 난, 지난밤 진정한 흑기사를 보았어요. 그 흑기사는 나를 영

원히 지켜 줄 거라 믿고 싶어요. 고마워요. 혹시, 내가 술에 취해 당신에게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어요?”


 “오, 노노. 전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허니, 정말로 고마워요.”


 나는 답변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간밤에 그레실 뺨에

살짝 키스를 하였고 긴 시간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의 풍만한 육신을 모두

훔쳐 본 것이 마음에 찔렸다. 활짝 웃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허니, 나 간밤에 꿈을 꾸었어요.”

 “오오, 그래요. 무슨 꿈인데요?”
 “내가 어느 먼 섬에 신혼여행을 갔었어요.”


 “그래요? 코라손 하고 또 간거에요?”
 “아뇨.”
 “아니라면?”
 “분명히 남자는 남자인데 얼굴이 생각이 잘 안나요.”


 “응?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니? 세상에 그런 일도 있나? 신랑 얼굴도 몰

라?
 “나 바보 맞죠? 신랑 얼굴도 모르다니요?”
 그레실은 깔깔거리면서도 한편에는 짙은 우수(憂愁)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와 결혼한 남자 얼굴을 모르다니.”
 “그런데, 이제 생각났어요.”
 “이제?”
 “네에.”
 “그게 누군데? 그 남자가?”


 “바로, 바로 내 앞에 서있는 당신이예요. 아침에 콜서비스 받고 잠에서

깨었을 때부터 그 남자가 누군가 골몰히 생각했어요. 생각이 날 듯 하다

가도 안 나고, 날 듯하다가 또 사라지곤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제 보

니 바로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 남자가 나라고? 기분 좋은데 그레실. 내가 당신하고 신혼 여행을

갔었다니까?”
 “미워요 하니. 어쩜, 나만 홀로 남겨두고…….


 나는 그녀의 아쉬워하는 얼굴빛에서 나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콧등이 찡했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금방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간밤에 내가 자신의 곁에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레실은 굉장히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Gresil, I'm sorry. I'm sorry.”
 “Honey, I love you. I love you."


 “Sorry."
 그녀의 볼에 살짝 눈물이 비쳤지만 못 본체 했다. 나와 그레실은 포옹

을 한 채 마치 정물화 속의 물체가 된 것처럼 잠시 시간을 잊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T가 방문을 노크할 것 같았다. 오전 10시간 넘었지만 T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그레실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그레

실의 휴대전화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헬로? 오우, 미스터 T. 어디세요? 지금 10시가 훨씬 넘었는데. 호텔로

못 온다고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요?”
 "허니, T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네요.“


 “그래요?”
 나는 다시 한 번 T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나는 T를 심술

꾸러기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나와 그레실에게 오붓한 시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일부러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저런, 어쩌나 그럼?”
 “허니, 우리 짐을 꾸리고 나가요. 먼저 아침식사 하셔야하고요.”
 “그레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하죠?”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그레실은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곳 M시의 유명한 관광지와 맛있는 레스토랑

으로 안내 할게요. 무조건 나만 따라오시면 되요.”
 “오오, 그래요? 역시 내가 그대를 찾아오기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우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나가요. 내가 당신을 데리고 갈 데가

있어요.“
 “어딘데요?”
 “미리 알려주면 안돼요.”
 “무척 걱정되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햇살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그레실의 뒷모습은 영

락없는 20초반의 아름다운 미시의 모습이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S

라인이 나의 시선을 유혹했다. 약간 까무잡잡한 이곳 사람들은 내가

거의 백인에 가까운 그레실과 손을 잡고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질투와 시기 어린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상당히 어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국의 아름다운 여

인이 동양 남자와 백주(白晝)에 손을 잡고 걷는 모습에 약간은 기분이

언짢을지도 모른다.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날씨는 건기 철이라 매우 더웠다. 조금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했다. 내가 자꾸만 땀을 닦아내자 그레실은 택시를 세웠다.



 “산 아구스틴.”
 “오케이.”

 택시기사는 백밀러로 우리를 흘끔 한번 처다 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

었다.


 “산 아구스틴?”
 금방 카톨릭 냄새가 풍겼다. 분명히 동양의 나라인데 국민들의 의식은 전

혀 동양인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 처럼 보였다.



 택시가 시원스럽게 도심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전 국민의 90%가 카톨릭

신자의 나라답게 도심에는 고딕식의 유럽풍의 성당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도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탓이리라. 300년 넘게 스페인

의 지배체제에 있다 보니 국민의 대부분이 강제로 개종되거나 자연 동화되

어 카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깊은 명상에 빠져있는 사이 목적지

에 도착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한국에서 온 사내를 압도했다. 성 어거스틴 대성

당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크리스탈로 장식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이국의

손님을 맞고 있었다. 천정과 벽에는 두 사람의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성화

(聖畵)가 오랜 풍상을 견디면서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고고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성당 내부도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된 듯 했다.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폭격

에도 불구하고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성당에 대하여 경외심마저 들었다.

2년 전 바티칸의 베드로 대 성당에 갔을 때와 비슷한 경건함을 느꼈다.


 “허니, 이곳은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에요. 이 곳 사람들은 이

성당에서 결혼식 올리는 것을 지상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기도 해

요. 만약, 만약 내가 그대와 맺어 졌더라면 나는 이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 또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성모 마리아님의

축복 속에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으로부터 나를 사

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늘 성모 마리님에게 당신의 안전과 평

화를 빌었어요. 그리고 당신을 나에게 데려다 달라고 기도 했고요.”   
 그레실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아아, 내가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함부로 한 말이 그레실에게 큰 희망인

동시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구나. 30년이 지난 이제 내가 어찌해야 이

여인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레실은 좌석에 앉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영어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자국어를 섞어 가며 올리는 그녀의 기도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지

만 그녀의 감정이 혼합된 음성으로 보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조용히

의자에 앉아 합장했다.


 “성모님, 죄송합니다. 이 미련한 영혼으로 인하여 한 소녀가 미몽에서 깨

어나지 못하고 있나이다. 부디, 소녀를 밝은 길로 인도하시고, 이제는 길고

긴 눈물의 여정(旅程)에서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늘 꿈속에서 그

리던 사랑했던 인연을 30년 만에 만났습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렇게 성모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해 봅니다.

 

 서로의 반려(伴侶)가 있어 옛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30년 전의

순정은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땅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

도 불쌍한 여인을 굽어 살펴 주소서. 제가 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

하고 깨끗한 백설같은 소녀(素女)였습니다. 성모님, 이 어리석은 영혼이

간절히 빌고 또 비옵나이다.”


  내가 마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의 신분으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

으로 착각한 그레실은 내 손을 슬며시 잡으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

나 내가 크리스천이면 어떻고 불교신도인들 어떠랴. 한때 너무도 보고

싶어 수많은 밤은 하얗게 밝혔던 그 여인이 곁에 있는데, 백년도 못 사

는 중생이 어떤 종교인들 무엇이 어떠랴.


 내가 방성(放聲)을 끝내고 눈에 고인 액체를 손등으로 닦으려 하자 그레

실은 얼른 향긋한 손수건을 건넸다. 성 어거스틴 성당을 나온 우리는 사진

을 찍고 택시 편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다음에는 우리나라의 최고 영웅인 호세 리잘 공원에 가려고 해요.”
 ‘아아, 호세리잘. 스페인이 이 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시절 독립을 위해 목

숨을 받친 영웅, 호세 리잘.’


 순간 나는 일제 강점기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린 투사들이 생각났다.

호세 리잘 공원에서는 큰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가

던 당시의 발자국을 형상화 놓은 길에서는 나는 잠시 고인의 애국심을 생

각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력이 미미하면 외침을 받기 마련이다.


 발바닥이 몹시 아팠다. 대충 10시간 정도 걸었다. 물론 중간 중간 택시

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상당한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다. 점

심때는 M시에서 유명하다는 이하우이하우(ihawihaw)에서 해산물 요리

를 곁들여 한잔 술로 이국의 향취를 만끽했다. 유명세를 타는 식당답게

나는 그곳에서 여러 명의 동포들을 보았다. 내 또래 쯤 되어보이는 중년

여인들이 우리를 훔쳐 보면서 자기들 끼리 뭐라고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

었다. 아마 나를 서울서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졸부로 여기고 현지 처를

얻어 섹스 여행을 온 파락호 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다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다시 근심거리가 생겼다. 오늘 밤은 또 어

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지난밤 같은 악몽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환상 속에서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

다. 나는 자꾸만 그레실의 눈치를 보았다. 저녁 식사를 현지식으로 마치

고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계속 -

 

 

 

 

 

 

 

 
















'* 창작공간 > 중편 - 소녀(素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녀素女(최종회)  (0) 2008.11.20
소녀素女(3)  (0) 2008.11.18
소녀素女(2)  (0) 2008.11.17
소녀素女(1)  (0) 2008.11.1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