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실 된 숭례문에 절하는 필자 : 2008. 2.16 21:45
冬月色
- 여강 최재효
“미련한 후손들을 용서하소서.”
뼛속까지 얼릴 것 같은 바람이 비수처럼 달려든다. 마치 성난 파도가 난파선을 집어
삼킬 것 같다. 예전에 찾았을 때는 지금처럼 사나운 동장군의 기세는 볼 수 었었다. 송구
한 마음에 하얀 국화 한 송이 놓고 얼른 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임 앞에 공손하게
바치고 절을 올렸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신기한 듯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멀리서 임을 찾은 이유는 나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불을 질러 순식간에 배달자손들의 자존심을 추락시킨 장본인이나 마치 그 한 사람만이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지탄하는 우리 모두 또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자꾸만 채우려한 미련한 후손들의 욕심이 임을 처참한 몰골로 만들었다. 절을
올리고 멍하니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천루라고 하는 거대한 문명의 마왕들이 시커먼
모습으로 임을 빙 둘러 싸고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임께서는
후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넉넉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셨을 것이다. 어느날 부터 문명
이란 거만한 놈이 야금야금 임의 무릎까지 갉아먹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숨쉬기 조차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환청이 들렸다. 자세히 귀를 귀울여 들어보니 그것은 태조
이성계와 손자 양녕대군이 커다란 회초리를 들고 잘난 후손들을 질타하는 호령소리였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임난(壬亂) 당시 극악무도했던 왜놈들도 숭례문만큼은 손대지
않았고, 병자호란 당시에도 한양을 초토화 시켰던 떼놈들 역시 숭례문을 온전하게 보전
시켰다. 지옥 같았던 일제 통치기간에도 역대 조선총독들도 조선의 얼을 감히 훼손시키
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도 임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후손들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슴
으로 삭히면서 속앓이를 해야만 했었다.
이년 전 로마의 콜로세움을 방문했을 때, 크로마뇽인들의 잔인함을 보았다. 물론 영화
벤허와 십계에서도 이미 그들의 잔학상을 보았지만 원형경기장의 육중한 구조물을
보면서 거대한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리 없이 죽어갔을 수천, 수만의 피정복지의
노예들 통곡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수만의 노예들의 목숨을 담보로한 콜로세움이
이천년이 넘도록 건재를 과시하면서 지구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인한 눈물을 감춘 채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천재지변이 없는 한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콜로세움은
노익장을 과시할 것이고 거만한 로마의 후예들은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한때 로마는 서쪽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 정신이 지금의 서구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환제국-배달국-고조선으로 이어진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
일만 년 가까운 휘황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자취를 보여줄 것이 별로 없어 늘 가슴을 태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신라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황룡사 9층탑이 몽고 초원의 야수들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 누천년동안 무수히 명멸해간 반도의 왕조들 궁궐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서울에 남아있는 경복궁 역시 임난 때 선조(宣祖)의 야반도주에 성난
백성들의 손에 불태워져 오랜 세월 방치되어 오다 대원군에 의해 복원된 슬픈 이력을
가지고 있다.
광복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정신을 놓고 살아왔다. 미국의 양키문화가 마치 새로운
구세주인 것처럼 너남즉 할 것 없이 환영하였고, 그들이 먹다 남긴 초콜릿 한 조각이라
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해야 했으며, 머리가 우수하다고 하는 청춘들은 미국을 향해
마치 불나비처럼 달려갔다. 덕분에 크로마뇽인들 시선으로 볼 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서울에는 하늘의 고운 선을 칼로 잘라내 듯 마천루 숲이 무성하게 조성되었고,
우리보다 약간 못한 백성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한양에 마천루와 볼품없는 아파트라는 괴물이 우후죽순처럼 조성되는 동안 배달의
자손들은 철저히 아담스미스의 착실한 후손으로 호적을 바꾸었으며, 몇몇 정신 나간
후손들은 앞 다퉈 메이드인 유에스에이가 되기 위하여 만삭의 몸을 비행기에 싣는
슬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나 깨나 여차하면 아메리카로 튈 생각을 하는 그들이다.
은하수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명멸하는 서울의 불빛들. 저 무수한 도깨비불들이 문명
뒤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을 조상님들의 얼을 무시하고 언제까지 빛을
발산할 수 있을까? 돈이 돈을 만들고, 돈이 사람을 만드는 황량한 서울 한복판에서
어쩌면 임께서는 오랜 세월 통곡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600년 동안 무수히 보아왔을 임의 고고한 모습을 저 달은 앞으로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내일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임을 망각 속에 담아 담아둘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배달자손들이 햄버거와 아담스미스의 손맛에 잘 길들여진 탓일 게다.
- 창작일 : 2008. 02. 16. 02:45 숭례문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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