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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개(1)

* 창작공간/단편 - 날 개

by 여강 최재효 2008. 1. 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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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1)


                                                  - 여강 최재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에게는 생겨난 연유와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론이 내재되어 있다. 하늘을 나는 새와 길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

하나에도 인연의 역사가 존재한다. 인과 연은 함께 존재한다. 악이 그

연(緣)을 만나면 악과(惡果)를 얻을 것이며, 선이 연을 만나면 선과(善

果)를 얻게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부부 사이의 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부는

만나할 사람이 만난 것이고, 그 만남이 좋은 결실이 되던 혹은 악연

이 되던 부부의 만남은 인연과에 의해 드러난다.


 비록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하나도

된 것이 없다. 그 같은 대덕의 말씀은 금과옥조라고 믿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미 인연의 굴레라는 거대한 틀 서 톱니바퀴가 되

어 서로 물리고 물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아무 조짐도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자

가 권세로 자신과 인연이 없는 미인을 아무리 탐한다 해도 그 인연

은 맺어지지 않는다. 물론 육신은 얻을 수 있으나 절대로 마음은 얻

지 못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스치는 것은 그냥 무심한 것

이 하나도 없다.


 “여보, 지금 어딜 가고 있는거예요?”

 “…….”


 눈이 내릴 것 같은 느지막한 오후,  흰색 벤츠 한 대가 북한강을 따라

미끄러질 듯 춘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주말 오후여서 그런지 경춘

가도는 많은 승용차들로 붐볐다. 거의 서울 방향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승용차에는 약속이나 한듯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널리 알려진 도로 좌우로 청춘 남녀나 또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년들을 유혹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예쁜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차 있다. 안락한 시트에 묻혀 나는 지난

일들을 더듬어 보았다.


 그날 이후 남편은 서서히 이방인처럼 변해갔고 나 또한 남편에게 조

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을 자제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면벽 수도하

는 수도승처럼 행동했다. 휴일이면 남편은 하루 종일 방에서 꼼짝하

지 않았다. 점심과 저녁 식사를 위해서 잠시 식탁에 앉으면 그 뿐, 나

는 그의 곁에서 시녀처럼 서서 그의 눈치를 살피며 후식과 커피를

준비하면 되었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은 삼 년 전 가을 이었다. 이미 한번의 이혼 경

력이 있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은 쉽지 않았다. 전 남편의 사업파산

으로 나는 졸지에 빚쟁이가 되어 날마다 찾아오는 채무자들에게 시

달려야 했다. 지옥의 나날이었다.


 전 남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동업자로 문서에 이름을 올려

았다. 나는 졸지에 수억 원의 빚을 떠안은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빚을 청산하고 아이들과 월세으로 이전

하였다. 정신을 가다듬어 갈 즈음 남편이 찾아왔다.


 나는 즉시 이혼을 요구하였으나, 남편은 이런 저런 이유로 나의요구

를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추저분한 남편에게 이혼소송 제기하였다.


 전 남편이 진 빚의 대부분은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채권자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지금의 남편은 전 남편의 빚을 상당부

분 탕감해 주었다. 빚잔치를 끝내고 머리를 식히고 있는 나에게 대학

친구가 찾아와 고급 외제승용차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을 해보라고 권

유하였다. 여러번의 고사 끝에 나는 친구의 강요에 의해 변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친구는 나의 외모라면 영업에 상당한 이점이 있을 거라며 부추겼다.

나는 친구의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자동차 수입회사 영업사원으로 신분

을 바꾸었다. 국산차와 달리 억대를 호가하는 외제 고급승용차를 판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혈연, 지연, 학연의 끈을 강조하

며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 다녔지만 실적은 지극히 미미하였다. 


 나는 회사에서 배운 판매전략 기법과 전통적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아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판매 전략을 세웠다. 미인계를 쓰는

것이 어쩌면 낡은 방법이긴 해도 특유의 기법을 개발하면 의뭉스럽

거나 행동이 비꾸러진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에 묘책을 짰다.


 인터넷과 상공회의소 자료 등을 통하여, 사회에서 제법 큰소리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취향과 출신지, 학연 등을 파악하고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이메일 주소를 알아

경우에는 고향 이야기 또는 학교 소식을 전하면장기전에 돌입

했다.


 아울러 휴대전화를 통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안부를 묻는 문자를

띄웠고, 약간 나이가 든 인사들에게는 예쁘게 만든 우편엽서를

우면서 고향과 모교 소식을 전했다. 물론 내가 고급외제승용차 판매

 사원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그 어떤 표현도 삼갔다.


 천명이 넘는 인사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렸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답신이 오지 않았다. 나는 태생이 자동차판매 사원이 적성에 맞지

는다고 판단하고 다른 직종의 직업을 알아보려고 할 때, 한통

이메일을 받았다. 편지를 보낸 인사는 나를 잘 안다고 했지만 나는 그

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B자동차의 최신 목록을 가지고 자신의

회사로 방문해 달라고 하였다.


 “당신 오늘 마음 단단히 먹어야해.”
 “…….
 앞만 보고 핸들을 놀리던 음전한 남편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집에서

출발하면서 거의 말이 없었던 남편 이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건데요?”

 남편은 뜸을 들였다. 나는 재차 물었다.


 “며칠 전, 당신이 내 제의를 받아들었잖아. 오늘 날개를 달겠다
…….
 “아니, 그럼 당신?”


 최신형 B차동차의 목록을 가지고 K사를 방문했을 때 나는 여우에 홀린

기분이었다. 전 남편이 내게 남겨준 빚의 상당 부분을 탕감해준 남자가

정중히 나를 맞아주었다. 첫 인상에서 나는 그가 셈속이 빠른 남자가 아

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여왕을 맞듯 그 남자는 깍듯하게 나를 맞이해 오히려 내
자신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남편의 외제가구 수입사업에 상당한 자금을 대주

고 있던 남자는 남편의 사업이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자 않는다고

판단하여 남편에 대한 투자를 포하였고 남편은 바로 부도사태를 맞

고 말았다.


 그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전 남편과 고향 선후배 관계라고 했다. 

남편이 부도사태를 맞게 되고 가정이 풍비박선 난 것도 남편의 무계획

한 사업 확장과 자금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한 원인에 있음을 그 남자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흐리마리한 남편이 업을 파탄내고 거의 일년간

숨어있던 곳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

밖에 없다는 론을 내려야 했다.


 음종하고 음황에 빠진 남편은 무책임하게 사업장과 가정을 파탄 내놓

제주도에 있는 내연녀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고, 그녀가 남편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게 되었다.


 그는 전 남편에게 제대로 사업을 하도록 지도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

프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흔쾌히 수억 원 대의는

승용차 다섯 대를 구입하겠다고 했다. 한 대는 자신이 타고, 나머지 네

대는 회사업무용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전 남편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나는 더 이상 전 남편일에

대하여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가 한번에 다섯대의 차를 사주고 나에게 이상한 요구를 하려

는 게 아닐까?' 

 잠시지만 남자에 대한 의구심에 나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예상치도 않았던 일에 나는 고개숙여 감사를 표했다. 눈앞에 실리가

급선무였던 나는 웅숭그리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또한 전 남편을 아는 그 누구에게도 동정이나 도움 같은 것은 받고 싶

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판매 실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고급

외제승용차 다섯 대 판매실적은 그간의 미미했던 판매 실적을 단숨에

만회하고도 남았다.


 K사 사장은 그간 나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던 것이 분명

했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집에서 좀 멀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자

신도 후배의 사업이 파산 된 것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

의 언행으로 보아 그의 품성이 무람없어 보이지 않았다.


 전 남편이 나와 이혼한 뒤 곧바로 내연녀와 재혼 한 사실과 그밖의 남

편과 관련된  세세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하고 기

분이 나빴지만 눈앞에 실리와 전 남편에 대한 금증해소 차원에서 이

해하기로 했다.


 “허어, 눈이 내리네.”
 “여보, 당신 정말 그런데 가는 거예요?”


 “당신, 내 제의를 말로만 받아들인 거 아니겠지?”

 새치름하게 앉아 있던 나에게 남편은 거듭해서 물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들 끼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만나서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을 탈피하고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려는 것 뿐 이야. 그냥, 소풍간다

고 가볍게 생각하면 될 거야.”


 남편의 말에 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리고 언젠

가 남편이 보여준 사진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세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괴기스럽기 조차

했었다. 사진 속 장면들은 화성이나 목성에 사는 사람들이나 가능할 것

같은 행위라고생각했었다.


 차가 청평호를 끼고 달렸다.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하여 마치 수억

마리의 나비떼처럼 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편은 차의 속도를 낮추고

윈도 브러시를 작동시켰다. 앞서가던 차량들이 비상등을 깜빡거리며

뒤차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자 남편은 수시로 시간을 체크하였다. 약속

소까지 정상속도로 한 시간 정도 더 가야하는 거리인데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어질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K사 사장은 자신이 고급외제 승용차를 다섯 대 구입해주었을 뿐만 아

니라, 자신과 거래관계에 있거나 인맥을 활용하여 그 뒤로도 수십 여대

의 최고급 외제승용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

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갑자기 수입 자동차판매 업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

고, 나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자연히 K사 사장만나는 횟수

가 빈번해졌다. 그와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이면 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릴 때 지방에서 혈혈단신 올라와 구두닦이로 시작해 현재의 중소기

업체 사장이 되기까지의 입지전적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어렵고 힘든 시절 이야기는 나에게도 그를 이해하는데 도

움을 주었다.


 그의 회사는 건설경기 붐을 타고 국내 굴지의 건설사의 하도급을 맞

으면서 급성장을 하였고,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 된 상태라고 하였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몇 년 전 사고로 잃고, 부인마저 정신착란증세

를 보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제는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며 착잡

해 했다.


 그는 나에게 왜 재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 남편통해

남자들의 속물근성을 알게 되었고, 돈이면 자신영혼지 파는 남

자들에게서 남성 기피증세까지 보인다고 했다. 또한 내가 남성에 대

한 비판적인 이야기에 그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 곱새기며 나의 이야

기를 들어주었다.


 K사 사장을 자주 만나면서부터 나는 그동안 내가 남자들에게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닫게 되었다. 세상 남자들은 모두 전

남편처럼 돈과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는 망종같은 동물 쯤으로 치

부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지 뒤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내가 수많은 남자들에게 보냈던 경멸에 찬 말과 시선이
도저

한 그들에게 얼마나 큰 해악이 되었는지 생각하니 큰 죄를 지은 것

았다.


 K사 사장과 하루에 보통 서너 번의 전화 통화가 이루어져야 안심이

되었다. 통화내용은 언제나 처럼 일기로 시작하여 시시콜콜한 신변

잡기와 영업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의 격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

디가 나에게는 아침이같았다. 그가 어쩌다 외국 출장을 가 있는

기간 동안은 허전하고 한편으로 행여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까 불안했다.


 문득 나 자신이 그에게 깊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기가

없으면 단 5분도 우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지만 공기의 존재가치를

잊듯 나 또한 그에게 내 목숨과 직결된 그 어떤 것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듬해 봄 우리에게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미국에 있는 협력사를 방문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승용

차편으로 LA에서 샌디에고를 가던 도중 그가 탄 차가 샌디에고 프리

웨이 5번 도로에서 전복되면서 그는 중상을 입었다.


 나는 국내에서 가슴을 졸여야 했다. 매일 저녁 처녀시절 다녔던 시

내 법당을 찾아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고 그 사람의 쾌유를 위하여

부처님 앞에 절을 하였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부처님, 그이를 살려주세요. 제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줄 사람입니다. 그이가 살아야 저도 새롭게 태

어날 수 있답니다. 지나간 악몽을 잊고 신세계로 달려 갈 수 있도록

이 가련한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소서.'


 내가 100일 기도를 드린 덕분일까. 그 사람이 LA에 있는 병
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4개월 만에 돌아왔다. 마치 먼 곳에 피서를 다녀온 사

람처럼 그의 풍신은 멀쩡했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나의 접근을

은근히 피하는 눈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는 채 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귀국했음에도 그에게 전화가 없었다.


 그가 큰 사고의 후유증으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그럴 수

있을거라고 나는 자조하면서 휴대전화만 바라보았다. 미국에서 돌아

온 한 달 후,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날, 나는 그간의 밀

려있던 이야기를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에게 무언가 중대한 이야

기를 할 것 같으면서도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그와 데이트를 하면 마치 후식처럼 은밀하게 치뤄지

던 행위도 사라졌다. 그가 나의 욕구를 애써 모르는 체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이제는 나에게 여성다움을 느끼지 못하

거나, 미국에 있는 동안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것이 아닌가 고민하

였다.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그

에게서 청혼을 받았다. 그의 무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

라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이미 예정되었던 일이 때 맞춰 진행되고 있

는 것처럼 주변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첫 청혼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모습에서

전 남편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고, 또한 갑작스러운 청혼에

남편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문제와 나의 결혼 후 거취 문제 등 곰곰

이 생각할 사안들이 많았다. 그의 청혼을 거절한 나는 잠시 그와 소원

한 관계가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위치와 주변을 의식해 심사숙고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확고했다. 그 역시 나의 청혼

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비 오

는 날 새벽, 그가 대취한 상태로 예정도 없이 집을 방문였다. 마침

여름방학 기간 중이라 아이는 외가에 가 있었다.


 그날 나는 많은 눈물을 뿌려야 했다. 만취한 그는 밭은 숨을 토
해내

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

는 그의 모습은 인생을 초연한 상태로 마주하거나, 달한 사람같아

보였다. 미국에서 돌아 온 이후 나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고 난 뒤 나는 그에게 오히려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현대의학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그는 혼자서
감내하

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결혼날짜와 예식장을 예약하였고, 초청할

대상자들을 사촌 이내로 제한하자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가 집을

방문하고 한 달 뒤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나는 부러 결혼

식에 전 남편을 초대하였다. 분명 그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

었다.


 새로운 부인과 예식장에 나타난 전 남편은 환하게 미소 지으
며, 악

수를 청했다. 전 남편이 나의 결혼식에 참석함으로서 나는 그간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을 맛보았다. 다행히 전 남편 옆에 서있

던 여인은 나이에 비해 겉늙어 보여 안심이 되었다.


 몰디브로 간 신혼여행지에서 우리는 꿈 많은 이십대로 돌아갔
다.

낮에는 전용 가이드를 따라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밤이면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혼여행까지 와서 남성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 그는 몹시 괴로워하였다. 신혼여행 기간 그는 홀로 술잔

을 잡고 눈을 슴벅거리며, 해변을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이란, 하늘이 맺어 준 남녀의 지고지순한 정
신적

합일이 더 중요하다고 힘주어 강변하였고, 그런 나를 그는 사랑을 담

뿍 쏟으며 아껴주었다.


 “여보, 눈이 점점 더 내려요. 저기 저 휴게소에서 쉬었다가
요.”
 “그럴까? 오늘 제 시간 미팅이 힘들 것 같은데 어쩌나?”

 남편은 무척 초조해 하였다.


 “꼭 가야 돼요?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집으로 돌아가요.”
 “파티에 꼭 참석한다고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안 가면 그 사람

릴 원망하겠지?”

 남편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여보, 난, 그 사람들 얼굴을 못 볼 것 같아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데, 뭐가 어때서? 만나는 사람들이 마

들지 않으면 중간에 나와도 되니까 걱정말아요.


 “그래도…….


 남녀 사랑의 근간(根幹)이 정신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이상이
환상에

기인했음을 나는 재혼을 하고 깨닫게 되었다. 남편은 다행히 내가 데리

고 들어간 전 남편의 씨앗을 마치 자신의 분신인양 애지중지 했다.


 물론 고향 후배가 남긴 흔적이니 더욱 애틋함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들기도 했다. 결혼 기간이 일년 가까이 지났다. 나는 당연시 되는 우

리 두 사람만의 은밀한 행위가 차차 잊혀져 가자 애정에 대한 고정관념

과 부부간 높아만 가는 무언의 장벽으로 야기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서서히 무기력감에 삐져들고 있었다.


 면벽 수도하는 산승(山僧)이나 수도원의 수녀(修女)가 아닌, 진
의(眞意)

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여인으로서 끈적끈적한 유혹은 늘 나의 시선을 끌

기에 충분했다. 유혹은 또 다른 유혹의 낳고, 어엿한 남편 있는 여인으로

서 수절(守節)은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나는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알아주는 비뇨기과 전문

병원에 가야했다. 담당의사와 눈이 마주칠 때 마다 나는 굴욕감과 함께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고 중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똑바

로 들지 못했다. 의사는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의 리비도

(Libido)의 정도와 그와 상반되는 욕구불만을 대충 파악한 듯 연민의

정을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남편과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았을 때 담당의사는 우리 부부를 자

신의 연구실로 불러 남성의 발기 원리와 남편의 현재 상에 대하여 자

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발기의 원리는 남성이 시각적, 촉각적으로 성적인 흥분을 하여 음경

내부의 해면체라는 일종의 혈액 주머니 속에 해면체 동맥을 통해 혈액

이 유입되어 혈액양이 증가되고, 해면체를 가득 매운 혈액이 백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높은 압력을 받아 단단하게 발기가 되는 것을 말합

다.’

 당당하게 신의 학식을 피력하면서도 담당의사는 남편 보다 나를 더

의식하는 듯 했다.

 

 남편과 시선을 맞추기보다 설명하는 한 시간 가까이 그는 내 시선을

맞추기 위하여 무척 애쓰는 것 같았다. 10%는 남편을 의식하였고 나머

지는 나를 의식했다. 나는 설명을 듣는 중간에도 그의 이야기가 귀에 들

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그가 중심부위가 내 시야에 들어 왔을때 그곳은

무척 도도록해 보였다.


 ‘발기부전이란 이런 발기의 과정 중에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겨 아예

발기가 안되거나 만족 할  만한 성행위를 할 정도로 발기가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남녀 모두가 만족스러운 성행위를 할 수 있을 만한

발기가 충분히 되지 못하는 경우가 전체 성생활 중 25%이상 일어날

때를 의미합니다.

 

 사장님의 경우는 외부 충격에 의한 신경조직의 파괴로 인하여 기부

전이 되는 경우로 최근 들어 각종 사소로 인하여 이 같은 형태의 사례

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말을 하는 중에도 끈적끈적한 담당의사의 시선이 나의 전신을 훑고

었다.

 

 ‘발기부전의 원인은 크게 심인성 즉, 정신적 원인과 신체적 원인에서

야기되는 기질성으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심인성은 심리적으로 불안

하거나 정신과적인 문제로 예를 들면 우울증, 정신분열증, 인격 장애

또는 여러 신경증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기능에 대해 잘못 된 정보나 무의식적인 죄의식을 갖거나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데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경우, 서로의 성적느낌이나

서로에게 바라는 행위를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심인성 발기부전이

올 수 있지만, 기질적인 원인과 함께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반드시

기질적인 이상에 대한 검사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발기는 신경계, 혈관계, 내분비계가 함께 작용 되어야 하는데 어느 한

계통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정상적인 발기를 이룰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사장님의 경우처럼 외부의 충격에 의하여 신경계가 손상된 경우가 가

어려운 케이스입니다.’

 담당의사의 눈이 이상하리만큼 빛나고 있었고 그의 중심이 위로 치

뻗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사장님에게 권하고 싶은 해결책은 발기보형물 삽입술

입니다. 삽입술이란  음경내부에 발기를 시켜주는 일종의 기구를 장

착하여 원할 때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발기를 시킬 수 있게 해주

는 수술을 말합니다.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보형물의 선택은

음경의 크기, 경제적 능력, 과거 병력, 심리적인 상태 등을 전반적으

로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하게 됩니다. 발기보형물은 크게 굴곡형

보형물과 팽창형 보형물로 나뉩니다.’ 


 담당의사는 모형물과 차트를 보여주면서 침을 튀겼다. 나와
시선을

맞추다가 그가 남편과 시선이 맞으면 순식간에 서름한 표정으로 변

다.

 

 ‘사장님에게는 굴곡형보다 팽창형 보형물이 어느 정도 남성의 자존

심을 지켜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팽창형에도 자가팽창형, 두조각

팽창형, 세조각 팽창형이 있는데 현재 신경계통의 손상 정도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사장님에게는 세조각 팽창형 보형물이 적격입

니다.

 

 세조각 팽창형 보형물은 실린더, 펌프, 저장고를 따로 갖추고 있는

보형물을 말합니다. 현존하는 발기보형물 중 자연적 발기와 가장 유

사한 보형물로 발기부전 환자 90%이상이 선호하고 현재 우리나라에

서 가장 널리 시행되고 있는 수술입니다.


 고환에 부착된 펌프를 몇 차례 누르면 치골 뒤편에 심어 놓은 저장고

의 액체가 실린더내로 유입되어 발기가 이루어지고 반대로 펌프 아래

를 살짝 누르면 실린더의 액체는 다시 저장고로 돌아가 음경은 이완되

 됩니다. 저장고에는 100ml 가량의 액체가 보관되어 있어 강력한

발기가 이루어져 만족도가 매우 높은 수술입니다.‘

 

 남편은 일주일 정도 심사숙고해본 뒤 시술을 결정하겠다고 하고 병원

나섰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남편은 꽤나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식사 시간 내내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되풀이 했다.


 그날 남편과 나는 브랜디 루이13세를 두 병이나 비웠다. 만취 된 남

집에 돌아와 큰소리로 흐느꼈다. 내가 아무리 남편의 등을 토닥

거리며, 괜찮다고 하였지만 그는 대성통곡하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

였다.


 “여보,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해? 당신은 화장실 안가?”
 화장실을 다녀온 남편의 손에 커다란 종이컵이 쥐어져 있었다.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이디오피아 향이 풍겼다.


 “아참, 내 정신좀 봐. 나도 화장실 다녀올게요.”

 차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잠시 주춤거렸다.

회색빛 하늘이 우리 부부의 현재 상태를 말해주듯 우울해 보였다. 스

키장으로 향하는 젊은 커플들이 탄 승용차들이 주차장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차 지붕에 스키를 매단 그들이 부러웠다.

 

 담당의사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남편의 일로 잠시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저녁에 나는 병원 근처 카페에서 담당의사를 만났다. 

는 남편의 보형물 삽입술이 꽤나 까다롭고 어려울 거라고 했다.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눈치를 보았다. 남편의 담당의사라

고 하여 나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이야기 막판에 농담 비슷하게 나에게 '씨내리' 이야기

를 들려 주었다. 남편 모르게 밖에서 외간 자를 만나는 것도 큰 부담

이지만 의사로 부터 남편의 상태가 절망적일 수 있으니, 일찌감치 다

른 수컷을 찾아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최고의 복락을 누려보라는 그의

은근한 수작이 불쾌하면서도 짜릿한 상상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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