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성년자의 감상을 금합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라
주인공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많은 이해있으시기 바랍니다.
........여강 최재효 ]
두번 우는 새(1)
- 여강 최재효
“아, 대감마님. 소첩, 아직 꽃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만 더
기다려 주소서. 제발, 제발 대감마님…….”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그놈에 꽃물이 무에 그리 오래 간단 말이
냐? 어젯밤에는 할 수없이 네 딸년을 은애하였지만 오늘은 너의 육덕을
맛 좀 봐야겠다.”
“대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에요. 어찌.”
“역적의 계집이 말이 많구나. 너는 이제 죽을 때까지 내 물건이니라. 어제
는 친구의 아내였으나 이제는 내 소유물이 되었느니라. 그러니 다른 마음먹
으면 안 된다. 알겠느냐?”
임금이 거처하는 경복궁보다 더 으리으리한 저택 사랑채에 사내의 굵은
목소리와 여인의 애걸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편 때문에 딸과 하루아침
에 노비가 된 절재 대감의 큰 며느리 내은비(內隱非)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으나, 딸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늙은 사내의 수청을 들어야하는 자
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사내가 내은비를 덮쳤다. 마치 호랑이가 암사슴을
잡아먹기 전에 혼을 빼는 것처럼 사내는 여인의 옷을 사정없이 벗기고 지분
거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고은 속살이 황촛불에 더욱 뽀얗게 빛났다. 사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여인의 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감, 제발…….”
여인은 더 이상 앙탈을 부려야 사내의 음욕을 그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체념하였다. 조선을 호령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아, 정녕 이런 치욕을 견디며 목숨을 부지해야 한단 말인가?’
여인의 고운 눈매에 이슬이 맺히면서 흐느꼈다.
‘으음, 고년. 육덕이 제법이로구나. 늙은 마누라에 비할 바가 아니야. 그놈
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을 계집을 품으니 왜 이리도 기분이 좋을꼬. 내 비
록 그놈이 살아서 조정을 농단할 때 그놈의 눈치를 보았었지만, 이제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된 이상 수양(首陽), 아니 상감 한 사람만 제외하면 이 조선
천지는 나의 세상이로다. 상감, 성은이, 성은이 하해(下海)와 같습니다.‘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죽은 듯 누워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절재
대감의 며느리 내은비를 탐하기 시작했다. 기방에서 많은 여인들을 후려본
솜씨가 밴 사내의 손이 여인의 젖가슴과 은밀한 부위를 유린하였다.
아 -. 여인의 양볼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면서도 입에서는 연신 신
음을 토했다.
‘아버님, 여보. 이년을 용서하세요. 목숨이 아까워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역신(逆臣)의 손길에 몸부림치는 이 못쓸 년을 용서하세요.
아버님, 여보…….‘
내은비는 비록 사대부가의 며느리였지만, 시아버지 절재 대감이 황보인
대감과 조정의 실권을 쥐고 어린 상감을 좌지우지할 때는 중전이 부럽지
않을 만큼 부귀영화를 누렸다. 조정의 대소신료들 절재 대감에게로, 그들
의 아내들 값진 패물을 꾸려들고 내은비에게로 향했다. 그때 사내의 아내
도 금은보화를 들고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던 절재 대감과 관계를 호전시
키기 위하여 절재대감을 찾았으나 절재대감은 만나주지 않았다.
심지어 궁궐의 여인들도 내은비의 눈치를 보곤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천지가 개벽 된 이후로 졸지에 역적의 며느리가 된 내은비는 이후 근
2년 동안 죽지 못해 살아 온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런 차에 수양의 왕위 찬
탈을 분개하던 이개, 성삼문, 박팽년, 박팽년, 유응부, 하위지 등 이른바 사
육신들의 의한 상감 시해사건이 공모자였던 김질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
었다.
상감은 친히 국문을 열어 사육신들을 처형하였고, 반대편에 섰던 정인지,
신숙주, 최항, 한명회, 양정, 홍윤성, 홍달손, 권람 등은 상감의 비호 아래
공신이 되었고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사육신과 그들의 편에 섰던 대신들에 대한 치죄(治罪)가 끝나자 상감 수
양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반
역자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당한 대신들의 아내와 딸, 첩, 여자 하
인들 역시 공신들에게 골고루 배당되었다.
온상(溫床)에서 곱게 자라 사대부들의 아내가 되어 편안하게 세상을 살
아온 여인들은 하루아침에 역적의 여인이란 죄목이 씌어졌다. 어떤 재수
좋은 공신은 역적으로 몰린 신하의 아내와 딸 그리고 첩을 동시에 하사받
기도 했다.
아 -. 늙은 사내의 두툼한 손이 여인의 은밀한 곳을 지분거리자 여인은
몸을 뒤틀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럴수록 흥분이 점점 고조된 사내는 뜨거운
입김을 토하며 적진을 코앞에 둔 병사처럼 있는 힘을 다하며 사내의 진면목
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했다.
늙은 사내가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다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술에
취해 남성이 정도를 걷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나이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
하는데 사내는 탄식하며 채우지 못한 욕심에 미련이 남아 촛불에 아롱
거리는 여인의 탐스런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벌써 이리되었단 말인가? 아직 탐할 계집이 줄을섰거늘…….'
두 눈을 꼭 감고 질풍과 노도의 기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술 냄새를
풍기며 물러나 앉아 있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 시아버지에
게 비굴할 정도로 손을 비벼가며 아부하던 사내였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사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사내가 이제는 여인의 새로운 주인이 되
어 자신의 육신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동안 일어나 앉아있던 사내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헛기침을 하
고난 뒤 다시 여인에게 덤벼들었다. 여인은 죽은 듯 가만히 사내에게
자신을 내맡기 채 송장처럼 꼼짝 않고 있기로 했다.
‘흠, 고년 보면 볼수록 맛깔스럽게 생겼단 말이야. 헌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이할꼬? 내 십년만 젊었어도 이 밤이 지새도록 인생의 향락을
음미 할 텐데…….‘
사내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며 여인의 육덕을 껴안고 한참동안 지분거
리며 억지로 음욕을 채우려고 했다. 여인의 늙은 사내의 거친 손길에 육
신을 맡긴 채 꿈결처럼 흘러간 지난 일을 회상했다. 비록 황천길에 든 남
편이 여성 편력이 심했지만 자신에게는 나긋나긋할 정도로 잘 대해 주었
다. 남편의 간청에 할 수 없이 남편이 첩을 집안에 들이는 것을 승낙
해 주었다.
남편의 첩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상전처럼 대해주었고 질투심 많은 내
은비는 그냥 눈감고 살기로 했다. 남편은 집안에 두 여인의 눈치를 보아가
며 적절히 합방 시기를 조절하여 잡음이 나지 않도록 하였다. 사내가 내은
비의 은밀한 곳은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내은비의 머릿속은 엉켜버린 실타래로 가득했다. 시아버지의 도도함과 남
편의 자상함이 그리고 영원히 누릴 것 같았던 부귀영화,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허공으로 사라지고 눈앞에 혹독한 시련이 떡 버티고 서서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정리하려 하였다.
‘딸이 없었다면 자진을 하고 말텐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남성대신 거친 손으로 여인을 떡 주무르듯 하
던 사내가 여인의 눈치를 보았다.
“어험-, 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
“험-, 그래봐야 어쩔 수 없을게다. 구천을 떠도는 네 지아비나 시아버지
그리고 네 피붙이들도 너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찌 생각할까?“
“대감, 너무 하십니다. 어찌 어제의 친구 아내를 이리 대하실 수 있단 말
입니까? “
“전쟁터에서 승자는 패자의 전리품을 가질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느니.
너와 네 딸들 역시 전쟁터에서 전리품에 불과하니라. 그 전리품이 주인이
바뀌었을 뿐 너에게도 아무것도 손해 볼 일이 없느니. “
“대감, 이 조선 땅에는 여인들이 마치 남자들의 종물(從物)처럼 취급받는
다 하여도, 대감을 낳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누가 만드나요? 남
자만 있다면 과연 이 조선이 존속되겠는지요?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
남정네들은 여인들을 이리 홀대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남편이 역적질을 하
였다면 역적질 한 사람만 처형시키면 될 것을 어찌하여 식솔들까지 공범
(共犯)이 되어 이렇듯 죽는 것 보다 못한 굴욕을 주는지요?“
“허어? 네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때, 나라 법을 그리 만들었느니라. 여인들은
그저 국으로 집안에 묻혀 아이나 낳고, 남자들 뒤치다꺼리나 조용히 처리
하면 되느니라. 여인은 이 조선 땅에서 사람이 아니니라. 오로지 남자들을
위한 부속물이니 다름 마음먹지 말거라.“
“대감도 여인의 몸에서 나왔고, 지금도 이 여인을 품고 음욕을 채우시면
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허어, 고년. 육덕만 탐실한 줄 알았더니 주둥이도 꽤나 맵구나. 너는 나의
종으로 우리 집안에 왔느니라. 종은 주인의 말에 죽고 사는 법이니라. 종년
주제에 주인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거나 함부로 입질을 하면 치도곤을 맞을
수 있다. 네 비록 어제는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내 잠자
리를 즐겁게 해주는 계집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아무 말 말고 내 명령에 따라
야 하느니.“
‘아, 조선이 이런 나라였더란 말이냐?’
내은비는 속으로 흐느끼면서 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과년한 딸 내은금(內隱今)과 남편 첩의 딸 한금(閑今)이 함께 사내의 노비로
왔으니 분명 사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감, 앞으로 이년이 대감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칠 테니 이년의 청을 들
어주세요.“
“청이라니? 무슨 청이란 말이냐?”
“대감댁에 제 친딸과 남편의 첩실에게서 낳은 계집이 저와 함께 왔습니다.
그 애들은 아직 시집도 안 간 몸이니, 비록 대감의 노비지만 짝을 지어 시
집을 보내주세요. 대감의 딸처럼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 딸들도 모두 상감이 하사하신 물건이거늘 누
구에게 시집을 보낸단 말이냐?“
“대감, 그 애들은 비록 종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어엿한 사대부가의 금
지옥엽의 딸들이었습니다. 대감의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그 애들을 건드리
지 마시고 시집을 보내주세요. 네에?“
“안된다. 그 애들 역시 나의 전리품이다. 네가 이러고저러고 간여 할 전리
품이 아니란 말이다.“
사내는 역정을 내면서 내은비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삼십 초반의
내은비가 한 여름의 장미꽃이라면 내은비의 딸 내은금과 한금은 이제 막 봄
기운을 머금고 피어난 복사꽃이었다.
사내는 원숙하고 세련미를 발산하며 많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은 내은비
도 사과처럼 풋풋한 내은금과 한금도 자신의 육욕(肉慾)의 제물로 삼고 싶
어 했다. 사내뿐만 아니라 같은 노선에 서 있다가 벼락출세를 한 다른 공신
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령군은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된 노산군의 비(妃)를 자신에게 하사하여
달라고 상감을 괴롭혔으나, 상감은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한때는 조선국의
국모였던 여인을 신하에게 내릴 경우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
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상감은 성삼문의 아내 차산 딸 효옥과 이승로의 누이 자근아지는 운성부원
군 박종우에게, 최면의 누이 선비와 조완규의 아내 소사 딸 요문은 병조판서
신숙주에게, 윤영손의 아내 탑이 딸 효도와 이반경의 첩 막생은 중추원사 박
강에게, 성삼성의 아내 명수와 정효강의 아내 효도 딸 산비는 병조참판 홍달
손에게, 박대년의 아내 정수와 송석동의 아내 소사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
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 딸 백대와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에
게, 하위지의 아내 귀금 딸 목금은 지병조사 권언에게 하사하였다.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얻은 물건을 나누듯 상감은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대신들의 여인들을 노비로 하사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 집안
의 여인이든 노비이든 할 것 없이 여성의 인격은 인정되지 않고, 단지 주고
받을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었다.
여인에게 안간힘을 쏟던 사내가 끄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땀
으로 범벅이 된 사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직 남자로서 자존심을 지킨
스스로에게 만족해했다.
‘언제까지 이 늙은 남자의 잠자리를 즐겁게 해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
단 말인가?‘
사내는 자리끼를 들이키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늙은 마누라의 질투가
겁이 나서 안방으로 든 것이다. 사내의 분비물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권
세가의 당당했던 안방마님에서 늙은 사내의 정욕의 제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이 집을 도망치는 거야. 두 딸 아이들과 함께 이 집을 탈출하여 유리걸식
하고 있을 내 아들을 찾는 거야.‘
내은비는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어린 두 아들은 가까스
로 도망쳐 죽임을 면했다. 생사도 모르는 두 어린 아들들은 분명 먼 인척이
나 어느 한적한 절에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거
라 판단했다. 조정에서 명망이 높은 사내의 집에는 상감의 반대편에 섰다가
죽임을 당한 취금헌(醉琴軒) 대감의 아내 옥금(玉今)도 노비로 와 있었다.
그녀들은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눈물의 세월을 무의미하
게 보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내은비는 두 딸들을 부엌으로 불렀다. 세도
가의 딸답게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두려움과 불안한 그늘이 얼굴에 가득했
다. 이틀 전 자신의 꽃물이 다 마르지 않아 어미대신 정욕의 제물이 된 딸
내은금이 불쌍했다. 어미와 눈이 마주치자 내은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얘야, 얼마나 고통이 컸니? 미안하구나. 어미가 되어 너를 지켜주지 못
했으니 나중에 저승에 들면 네 아비를 어떻게 봐야할지.“
“어머니, 울지마셔요. 소녀와 어머니의 운명인 걸요.”
노비로 온 뒤로 모녀는 자주 만나 울 수도 수 없었다. 집안 내 여러 시선
들이 새로들어온 여인들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몸은 어떠니?”
처녀의 몸으로 남성을 처음대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딸을 측은한 시선
으로 바라보는 내은비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사서삼경이나 내훈을 읽고 있을
시간에 손에 물을 묻히고 초라한 복색을 한 두 딸들이 더욱 내은비를 슬프게
하였다.
“너희들이, 부모를 잘못 만나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어머니…….”
“얘들아, 잘 들어라. 우리 이집에서 야반도주하는 거다. 이렇게 치욕스럽게
살다 죽으나 도망치다 잡혀 죽으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이
어미의 명을 기다리거라. 절대 집안사람들이 눈치 채면 안 된다. 알겠니?“
“네에.”
두 딸에게 탈출 계획을 말하고 난 내은비는 부엌문을 빠끔히 열고 밖을 내
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권세가의 집답게 아침부터 수십
명의 하인들이 평소와 달리 분주히 오가며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다. 남자 하
인들은 장작을 날라 방마다 장작불을 지피고 여종들 역시 집안을 들락거렸다.
내은비와 두 딸 그리고 옥금은 부엌에서 바깥 동정을 살피며 오늘 집안에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때 내은비와 말이 통하는 여
종 막녀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다른 여종들은 새로 들어온 내은비 일행을
경계하며 고운 피부와 반듯한 외모를 시기하고 있었지만 막녀는 내은비와
말이 잘 통했다.
“막녀야, 집안에 무슨 일 있니?”
“어머? 모르셨어요? 내일 우리 대감께서 신숙주 대감과 한명회 대감 등
조정에서 내로라하는 공신들을 초대해 잔치를 여는 날이에요.“
“그래?”
“이렇게 바쁜 날 어째서 안방마님은 우리들에게 음식 만드는 일이나 다
른 허드렛일을 시키지 않는 걸까?“
“아씨, 마님께서 아씨와 새로 들어 온 분들에게는 당분간 아무 일도 시키지
말라고 하명하셨어요?“
“아니, 왜?”
“모르겠어요.”
막녀는 같은 하인의 처지가 된 내은비에게 깍듯이 존대를 하며 마치 자신
의 상전을 모시듯 했다. 자신들 처럼 본바탕이 다른 내은비 일행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은비 일행이 이집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안방마님
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내은비와 옥금은 예전에 자주 만나 허물없이 지냈
던 안방마님을 만나면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하여 좀 더 좋은 대우를 요구
할 참이었으나 좀처럼 상전이 된 안방마님을 볼 수 없었다.
‘아, 우리가 비록 지아비 때문에 노비신세가 되었지만 예전의 자격지심이
있어 일부러 우리들을 멀리하고 있음이 분명해. 우리를 멀리하고 단지 집주
인의 성적 노리개로만 인정하겠다는 처사가 아닌가?‘
내은비는 예전 같으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억지웃음을 짓고 두 손을
싹싹 비벼가며 아부하던 안주인을 만나고 싶었다. 어제의 지인 사이에서 주
인과 하인으로 전락한 야속한 운명을 그녀는 어찌 대할지 알고 싶었다. 내은
비는 혼자서 집 안팎을 샅샅이 돌아보며 탈출구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사랑
채 오른편 담장 밑으로 개구멍이 나 있었는데 잘하면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초겨울의 하루가 지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안마당에 포장
이 처지고 바람막이가 빙 둘러 쳐졌다. 내일 행사를 위한 준비가 막바지에 달
한 것 같았다. 집안은 온통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내은비 일행이 종으로 들
어온 지 달포가 다 되었지만 안주인은 내은비 일행에게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은 채 별채에 기거도록 하였다. 방 두 개를 네 명이 사용하다보니 같은 처
지에 비밀이 없었다. 내은비는 할 수 없이 옥금에게도 야반도주 계획을 알려
주었으나 옥금은 응답이 없었다.
“이보시게 여기서 평생 종으로 살 것인가?”
“형님, 제가 이집에서 도망간다 한들 어디 갈 곳이 있어야지요? 전 그냥 남
겠어요. 전 모르는 것으로 할 테니. 형님과 두 딸을 데리고 도망을 치세요.“
“조선 팔도 어디가면 입에 풀칠하지 못할까? 자네는 자색도 고우니 어디가
도 종노릇 보다 훨씬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아닙니다. 네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금방 눈치를 채 수도 있습니다.
전 그냥 이곳에 남겠어요. 그러니, 형님하고 두 딸을 데리고 도주하세요.“
옥금은 종으로 들어오던 날 집주인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주인의 명령은
곧 법과도 같아서 거역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옥금이 갈 곳은 없었다. 만일 야반도주하여 먼
인척을 찾아간다하여도 후환이 두려워 숨겨주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목
숨을 위하여 관아에 밀고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다.
옥금은 달포 동안 이미 서너 차례 사내의 육욕의 제물이 되었고 살아 있다
는 것이 무의미했다.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옥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너희들 입조심해야 한다. 내일 밤이다. 내일 초승달이 일찍 지고나면 세
상이 칠흑같을 것이야. 방에 불을 켜놓은 상태에서 조용히 나를 따라 나서
야 한다. 내일은 이 집에 손님들이 온다고 하니 우리를 경계하는 눈초리가
약간 느슨할 것이야. 그때를 노려서 이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
“어머니, 가슴이 떨려요. 도주하다 잡히면 처형당하는 거 아닌가요?”
한금이 두려운 눈빛으로 내은비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첩에서 나온 한
금은 평소에도 내은비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얼굴도 자신의 몸에서 나온
내은금보다 훨씬 예쁘고 자색도 고왔다.
“한금아, 왜 이 어미를 따라나서기가 겁나니?”
“아닙니다. 어머니. 만약 도주하다 잡힐 경우 어머니에게 어떤 형벌이 가해
질지 몰라서요.“
“네가 정 두려운 생각이 든다면 남아 있거라. 네 언니만이라도 데리고 야반
도주를 할 테다.”
“어머니,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한금이 내은비에게 감히 어머니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다. 첩의
자식들은 서얼(庶孼)을 차별하는 조선 양반사회에서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종의 신세로 전락한 마당에 굳이 서얼의 차등이
필요없었다.
"아씨-"
별채에 등불이 막 꺼지자 막녀가 내은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막녀아니니? 늦은 밤에 웬일이니?"
"대감마님께서 지금 즉시 내은금 아가씨와 한금 아가씨를 사랑채로 들
라고 하십니다."
"뭐라고? 두 애들을 동시에?"
상전의 명은 곧 국법과 같았다. 지아비로 인하여 종의 신세로 전락한 처
지로서 감히 주인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내은비는 두 딸들이 늦은 밤
불려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갔다.
아직 남자를 모르는 두 딸들의 오늘 밤 충격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지울
수 없는 치욕이 되거나 어쩌면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남성의 세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남겨 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내은비는 자신이 직접 두
딸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흥, 구렁이 같은 늙은이 같으니…….’
“막녀야, 알았으니 먼저 가 있어라. 내 두 아이들을 예쁘게 단장시키고
데리고 가마.”
막녀가 간 뒤 내은비는 이제 막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두 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은금아, 한금아. 내 말 잘 들어야한다.”
“네, 어머니.”
“지금 늙은이가 너희 둘을 부른다. 분명 너희에게 흑심을 품고 있음이 분명
하다. 내 너희들을 데리고 함께 갈 것이니 겁내지 말거라. 사랑채에 가면 내가
하는 대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에. 어머니.”
이미 몇 차례 주인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는 내은비는 주인에 대하여 크
게 겁내지 않았다. 두 딸을 앞세우고 사랑채에 도착 했을 때 방안에서 두
사내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또 누가 들어있단 말인가?’
“대감마님, 소첩 들었사옵니다.”
“대감마님-”
“에헴. 들어오너라.”
세 연인이 방안에 들었을 때 내은비는 깜짝 놀랐다. 시아버지 절재 대감이
조정 중신으로 있을 때 자신의 집을 자주 찾아와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던 젊고 잘생긴 벼슬아치가 주인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내은비 모녀를 본척만척 할 뿐이었다.
이제는 두 사람의 사이가 천한 노비의 신분과 조정의 신하이니 감히 신
분으로 따질 수없는 하늘과 땅 같은 현실의 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대감마님, 소첩을 불러게시오니까?”
“너를 부른 게 아니라 네 두 딸 년들을 불렀는데 어찌하여 네가 동행하였
는고?”
“아무렴 풋풋한 사과보다야 늦서리 맞아 농익은 사과가 더욱 보기 좋고
맛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허, 고년 주둥아리는 살아서…….”
“옆에 계신 젊은 대감마님, 소첩 오랜만에 문우엿쭙습니다. 그간 평강하
셨는지요?”
젊은 벼슬아치는 내은비를 애써 모르는 척 하였다. 관복을 입고 있는 것
으로 보아 대궐에서 퇴청하자 마자 바로 주인을 찾아 온 듯 했다. 비록 노
비와 조정 벼슬아치의 사이지만 예전의 분위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젊은 벼슬아치는 흘낏거리며 한때 조선 최고의 가문의 큰며느리였던 내은
비를 훔쳐보았다.
“얘들아. 주인대감마님과 옆에 계신 대감께 인사 올리거라.”
내은비의 말에 내음금과 남편의 첩실 몸에서 나온 한금이 날아갈 듯 두
사내에게 큰 절을 올렸다.
‘흠, 고년들 나긋나긋한 게 제법 물이 올랐겠구먼.“
‘이년들이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리던 세도가의 딸년 들이렷다.’
두 사내는 내은금과 한금의 절을 받으며 상전벽해가 된 세상을 실감하
고 있었다. 예전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호사를 누리며 두 사내의 음
흉한 시선이 햇병아리 같은 두 소녀에게 꽂혔다.
“너는 물러가거라. 내 고령군(高靈君) 대감과 이 얘들과 밤새도록 진탕
하게 술을 마실 것이니라.“
내은비는 눈앞이 캄캄했다. 조정에서도 여색(女色)을 밝히기로 이름 난
두 사내에게 아직 다 피지도 못한 두 딸을 내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금
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또한 내일 밤 야반도주하기로 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은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 계속 -
두번 우는 새(終) (0) | 2007.11.27 |
---|---|
두번 우는 새(2) (0) | 2007.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