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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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대포산에 걸려 있고 공사장을 분주히 오가는 트럭들로 아스팔트길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있다. 대로변 주막거리 대폿집에는 늦은 오후부터 한 사내가 소
주잔을 앞에 놓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다. 빈병 두 개가 둥근 철판으로 된
탁자에 한 병은 누워있고 또 한 병은 탁자 끝에 위험스럽게 놓여있다. 사내는 소주
잔 비우고 창문을 통해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겨울들녘 건너편에 있는 동네를 말없
이 바라보고 있다.
소주를 마시는 중간 중간 기침을 하였는데 한번 시작하면 5분정도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약간 허름한 행색과 세파에 찌든 얼굴로 보아 세상을 힘들게 살아온 듯
하다. 사내가 타고 온 검정색 중고 자동차가 먼지에 덮여 제 색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폿집 여자가 식어버린 김치찌개를 다시 데워서 내온다.
사내 얼굴이 거무튀튀한 것으로 보아 건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트럭이 지
나가면 대폿집의 낡은 유리 창문이 부르르 떨리며 곧 부서질 것 같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사내, 그는 마지막 한 잔을 마
셔버리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썰렁한 분위기의 대폿집에 손님이라곤
사내 한명뿐이다. 사내가 약간 어눌한 목소리로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자 여자는
사내가 이미 세병을 마신 상태여서 몹시 불안해했다.
"저어, 손님. 이제 그만 드시지요? 벌써 세병이나 드셨는데?"
주인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왜요? 제가 돈 안내고 도망갈까 봐 그래요?"
사내의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에 여자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슬슬 사내의 눈치를 보며 다시 소주 한 병을
가져왔다.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남의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주인여자
는 사내에게 묻지도 않고 옆에 앉았다.
"한잔 하실 라우?"
사내가 빈 소주잔을 내밀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잔을 받는다.
"저어, 아저씨는 이곳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잔을 비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밖으로
우뚝 솟아있는 고층아파트를 응시한다.
"예전에 이곳 사람이었지요. 지금도 마음은 이곳에 있고요."
혼잣말로 대답을 하고는 눈을 감고 면벽 수도하는 선승(禪僧)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살아있는걸까?’
사내는 다시 중얼거리며 옛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에는 농촌에서 최단 기간 내에 목돈을 만져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돈벌이다.
뽕밭이 있는 보통의 농가는 2장정도의 누에 씨앗을 읍내 잠원(蠶院)이나 농촌
지도소에서 배급을 받아온다. 누에알은 새카만 것이 들깨보다 약간 작아 보인다.
알에서 송충이처럼 생긴 새카만 누에가 나와서 어른 중지만한 크기의 누에가 되어
집을 짓기 까지 누에를 치는 사람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하루에 세 번 이상 뽕잎을 먹이로 주어야 하며, 수시로 누에똥을 받아내 잠박(蠶箔)을 늘 청결한 상태로 만들어 줘야 한다. 누에 씨앗을 가져와 누에고치로 출하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보통 한 달반에서 늦으면 두 달 정도 소요되는데 6월 초순경 부터
시작해 8월초순경이면 누에치는 일이 끝난다. 한 동네 이웃지간인 해주와 진호는
차씨네 집에서 누에치는 일을 거들었다.
아침부터 저녁 때 까지 하루 종일 눈코 뜰 새가 없다. 해주는 농촌에서 보기 드문
예쁜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중키의 진호는 다부진 체구를 지닌 전형적인 농촌총각
이다. 해주의 뽀얀 피부가 만지면 곧바로 분가루가 묻어 날 것같이 눈부셨다. 진호는
해주와 차씨네 집에서 함께 누에치는 일을 하게 된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 동네 살면서 말이 없던 둘 사이가 차씨네 집에서 누에치는 일을 함께 하면서 차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차씨네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농이었으며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누에를 쳤다.
별도로 누에를 치는 창고가 있어 많은 동네 사람들이 차씨네 누에치는 일을 거들어
짭짭한 수입을 올렸다. 그 해에도 역시 차씨네는 누에를 쳤다. 누에가 한참 뽕잎을
먹을 때면 열 서너 명 정도의 동네 아낙들이 차씨네 누에치는 일에 매달렸으며 진호는 그 중 유일한 남자였다.
차씨네 뽕밭은 멀리 떨어진 세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해주와 진호는 주로 가장 가
까운 차씨네 돌박지 밭으로 뽕을 따러 다녔다. 리어카에 해주를 태우고 뽕밭으로 가
는 진호의 발길은 가벼웠다.
"진호야,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찬 것 같은데……."
"으응, 아니. 아무 고민 없어."
"아닌데? 나한테 말 못할 고민거리 있지? 내 눈은 못속여."
"해주야, 오늘 일 끝나고 방공호에서 나 좀 볼래?"
뜬금없는 진호의 제의에 해주는 주저주저 했다.
“그냥, 잠간이면 되......”
진호가 해주의 답변을 기다리며 다시 한마디 하자 해주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좋다고 하였다.
사내는 옛 생각에서 잠시 깨어나 다시 소주 한잔을 비웠다. 담배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줄담배를 피워댔다. 대폿집 여자가 두 번씩이나 재떨이를 비워주며 말을
붙여본다.
"손님, 자, 한잔 드시고 무슨 사연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여자가 사내의 빈 소주잔을 채웠다. 점심 무렵 꾸물대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벽에 있는 낡은 가스히터의 점화스위치를 눌렀다.
"저어, 아주머니. 말씀 좀 물어 볼게요."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해보세요."
"아주머니는 이곳에서 얼마나 사셨어요?"
사내의 얼굴에 약간의 초조함이 서려있다.
"이 동네에서 이십년 좀 넘게 살았어요. 장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장사가 좀 될까 했는데 모두 차가 있으니 읍내로 가서
시장을 보거나 술을 마시는 통에 요즘은 손님이 없어요. 이젠 이 장사도 못해먹겠
다구요."
주인 여자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했다.
"혹시, 저 동네 살던 송서방네 집안에 대하여 아세요?"
사내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송 서방 네라면 그 목수쟁이 송씨를 말하시나?"
"네 맞아요. 그분이 목수 일을 하셨지요. 그 집에 딸도 여섯 명이나 되고요."
사내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분은 10년 전쯤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요. 참 좋은 분이셨는데. 그분을
잘 아세요?"
사내는 송씨를 떠올려 본다.
"네에, 잘 알지요. 저도 이 동네 살았었으니까. 아주머니가 이 동네 오시기전에요.
그럼 아주머니는 그 집안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겠네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집 아주머니나 딸네들하고 인사를 나눌 정도였어요."
여자는 사내를 쳐다보면서 왜 송씨 집안일을 묻는지 이상해 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 볼게요. 그 집 셋째 딸은 지금 어디 사는지 아세요?"
"그 집 셋째 아가씨하고 동창이라도 되세요?"
밤 10시가 넘어도 해주는 방공호로 나오지 않았다. 진호는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
보기로 하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밤 11시가 되어도 해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호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해주였다. 해주가
분명했다. 이 시각 뒷동산에 올라 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야, 여기"
진호가 어둠 속에서 튀어 나오며 해주 앞으로 다가섰다.
"엄마야. 얘,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
해주가 진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고마워 이렇게 나와 줘서."
"날 왜 불러낸 건데? 뭐 줄 거라도 있니?"
진호는 담배연기를 파란 하늘을 향해 뿜어냈다.
"나, 나 말이야. 널 좋아하면 안 되니?"
진호는 간신히 한마디 하고 먼 하늘을 응시했다.
"뭐? 나를 좋아하겠다고?"
해주는 배꼽이 빠져라하고 웃었다. 진호는 해주가 웃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이
해주를 좋아한다면 해주가 감격해 할 줄 알았지만 예측은 전혀 빗나갔다.
"얘, 너 그 말하려고 나를 이 밤에 나오라고 했니? 너 정신 차려. 네 나이 이제
스무 살인데 우리가 연애해서 뭘 어쩌자고 ? 넌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직장도 잡
아야 하지 않니? 이 농촌에서 그냥 썩고 있을 거야?"
해주는 진호가 아주 싫은 것은 아니지만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진호가 자신의
배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주는 금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갔다가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나, 피곤해서 그만 갈께. 분명히 이야기 하지만 난 아직 남자애들하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 없어. 괜히 혼자 마음고생 하지 마. 내일봐."
해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나쁜 계집애,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어지 두고 보자."
진호는 닭 쫓던 개처럼 서녘하늘에 떠있는 반달만 쳐다보았다.
해주가 진호와 헤어지고 동네 한가운데 왔을 때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오는 고등학교 3학년생인 차씨네 막내아들 기정이와 맞닥뜨렸다. 해주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둠 속의 기정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지나쳐 버렸다. 기정이 해주보다
한 살 어리지만 곱상하고 영리하게 생겼으며 동네에서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파다
했다. 해주는 기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린 기정에게 좋아한다는 뜻
을 선뜻 전할 수 없었다.
기정이네 집에서 누에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이웃에서 친 남
매처럼 자랐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해주는 기정
을 짝사랑하는 뜻을 전하기 위해 골몰했지만 만나서 마음을 전할 좋은 방책이 생각
나지 않았다.
해주는 진호와 기정 두 사람을 비교해 보았다. 진호는 인생의 진로가 험난한 가시
밭처럼 느껴졌고, 기정이 대학을 들어가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될 것이라고 믿
었다. 해주는 그런 기정을 유혹하고 싶었다. 내년에 대학을 입학하여 도회지로 나가
더라도 자신을 잊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해주는 차씨네 집으로 일을 하러 가면
서도 자주 기정이의 공부방을 기웃거리곤 했다.
"동창이요? 동창이라? 동창......"
얼큰하게 취한 사내는 주인여자를 쳐다보며 웃기 시작했다.
"왜 웃기만 하세요? 그 집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대폿집 여자는 불쾌해 했다. 분명 이 사내와 송씨네 집과 곡절이 있다고 생각한
주인여자는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아주머니 말씀대로, 그 집 셋째 딸하고 초등학교 동창이지요. 좀 친하게 지냈는
데 고향엘 와도 동창들 소식을 들을 수 가 없어서 그래요."
사내에게 무슨 기막힌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던 대포집 주인여자 시큰둥한 얼굴이
다.
"아직도 모르시나봐?"
"뭘요?"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집 셋째 아가씨가 아이를 낳아서 동네가 발칵 뒤집혀 졌었지요. 처녀가 앨 낳
았으니……."
“나도 그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어요. 그 후에 그 아가씨는 어찌 되었나요?"
사내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 그 아가씨에게 아기를 갖게 한 사내는 멀리 도망을 갔다지요 아마. 혹시 아
저씨가 그 사내는 아니지요?"
여자는 지금 자신의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가 그때 그 사내가 아닌가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니, 이 아줌마, 왜 그런 얼굴로 날 쳐다보쇼?"
도둑이 제발이 저린 듯 사내는 애써 태연한 듯 창밖을 응시했다.
다음 날 부터 진호는 해주에게 노골적인 구애작전에 돌입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귀찮을 정도로 진호의 치근덕대는 꼴이 싫어 해주는 차씨 부인에게 진호가
아닌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뽕을 따러 다니게 해달라고 했다.
진호는 그냥 말로 해서는 해주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얼굴
을 마주쳐도 해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냥 지나쳤다. 진호는 그런 해주를 볼 때 마
다 가슴이 아려왔다.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말도 붙일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 한탄했다.
"내가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고 날 무시하는 것 같은데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너를 꼭 내 애인으로 만들고 말테다."
대학입시반인 기정은 집에 없었다. 짧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서울에 있는 고모네 집
으로 가서 대입전문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누에가 어른 중지만큼 컸을 때 였다. 기
정이 갑자기 학원을 다니다 말고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공
부를 하기로 했다고 아낙네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해주는 속으로 참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정은 밤낮 쉬지 않고 공부에 시달려서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가득이나 하얀 기정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더 하얘졌다. 해주는 그런 기정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누에를 치는 창고와 기정이의 공부방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런 기정을 좀 더 자주 보기 위해 해주는 뽕밭에 나가는 일보다 이런저런 핑계로 집에 머물며 누에치는 일을 했다. 대학입시 공부하느라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위해 차씨네는 보약을 달여 먹이고 몸에 좋다는 각종 한약재를 구입해 집안에는 누에 냄새와 보약냄새로 진동했다.
차씨 부인은 보약을 달이는 일을 직접 하였지만 외출을 하거나 바쁠 때는 해주에게 그 일을 시켰다. 어느 날 해주가 보약을 달여 기정이의 공부방으로 가져갔다.
"기정아, 약 달여 왔어. 마시고 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해주가 간신히 말을 했다.
"으응, 누나 고마워 거기 놓고 가. 나중에 마실게."
"누나?"
해주는 기정으로부터 누나라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릴 때부터 늘 남매처럼 허물없이 지내 왔지만 누나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해주는
그런 기정이 사랑스러웠다. 진호의 눈에 까다로운 성격의 해주가 차씨네 집에서 누에치는 일과 차씨네 막내아들 약 시중을 드는 일로 미루어 분명 차씨네 막내아들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고 판단했다. 진호는 해주의 행동을 은밀히 감시하기 시
작했다.
"그래서, 그 송씨네 셋째 딸은 그 후 어찌 되었나요?"
사내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사내가 아무래도 무슨 큰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주인여자는 사내의 술 취한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그 ,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아주머니?"
사내는 갈증이 나는지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어찌 되다뇨? 처녀가 애를 낳았는데 그 처녀가 성 할리가 있겠어요? 송씨는 동네
창피하다면서 그 아가씨를 멀리 친척집으로 보냈지요. 그 일로 한 동안 동네가 시
끄러웠지요."
주인 여자도 소주잔을 비웠다. 으음-. 사내는 신음소리를 냈다.
"자 한 잔 받으세요."
손님이 없자 주인여자는 아예 장사할 생각을 접고 사내와 수작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동네 불량기 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담배를 사러
오는 것 외에는 대폿집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이 동네에 어떻게 오셨어요?"
주인 여자는 사내가 자꾸만 송씨네 집안일을 꼬치꼬치 묻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진호는 장날 읍내에 가서 농촌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비싼 화장품세트와
양산을 사왔다. 누에치는 창고에서 해주에게 진호는 쪽지를 전하고 황급히 사라졌
다.
[오늘 밤 10시에 방공호에서 좀 만나줄래.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서 그래. 꼭 나와
기다릴게. 진호] 해주는 진호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찢어 버렸다.
"흥,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쳐다봐야지. 주제에."
새벽까지 방공호에서 보낸 진호는 해주에게 심한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해주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면 나올 줄 알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자 진호의 가
슴은 갈가리 찢어졌다.
다음 날 아침 진호는 차씨네 집에서 해주와 마주쳤지만 해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
았다. 누에는 어른 중지보다 더 커 보였다. 늙은 누에가 입에서 실을 뽑아내기 시작
하자 차씨네는 바빠졌다. 남자들은 새끼줄에 볏짚을 일정 길이로 썰어 끼워 누에가
집을 지을 섭을 만들었고 여자들은 곧 집을 지을 늙은 누에를 선별 하느라 분주했다.
해주도 역시 누에 선별작업에 눈코 뜰 새가 없었지만 마음은 기정이 에게 가 있었
다. 해주는 어떻게 하면 기정이를 자기의 확실한 애인으로 만들 것인가를 놓고 좋
은 묘수를 생각해내려고 이 궁리 저 궁리 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유혹을 할 경우 기정이 자신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올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기정이가 공부하는 중간 참외와 수박을 들고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기정이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준비해간 편지를 책상위에 펼쳐져 있
던 책갈피에 살짝 끼워 넣고 살며시 빠져나왔다.
"어, 이게 뭐지?"
잠에서 깬 기정이의 눈에 분홍색 편지지가 들어왔다.
[기정이 에게 기정아, 나 해주야 놀라지마. 난 너를 친 동생 처럼 생각하고 있어.
네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대학입시생이 된 것 같구나. 어릴 때부터 이
웃에서 친 남매 처럼 지내왔는데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부터 너하고 이야기 나누기
도 어렵구나. 요즘 네가 몸이 안 좋은데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보니 대견하고 네
가 자랑스럽게 느껴진단다.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거나하면 말해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공부
잘 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줄게. 알다시피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대학입시생이 었
다구. 비록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혹시 내일저녁 때 시간 낼 수 있니? 주막
거리 학교 운동장으로 밤 10시까지 나와 줄래? 공부하는 너에게 시간을 빼앗아 미
안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꼭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그럼 기다릴게. 해주]
해주의 편지를 읽고 있는 기정이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비록 자신의 집에서 누에
치는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스스럼없이 지내온 터였고 지금은 좀 소원
한 관계지만 늘 해주에 대하여 아련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기정
은 해주를 단순히 이웃에 사는 계집애가 아닌 여자로 보았고 골목길에서 해주와 마
주 칠 때면 불룩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마다 기정은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가야 하나 ? 말아야 하나?"
기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때 공부에 최대의 능률을 올려야 하는데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한다면 입시공부에 상당한 차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돼. 난 대학에 가야 돼. 이런 농촌에서 촌년들이나 만날 내가 아냐."
기정은 스스로 다짐을 했지만. 해주의 복사꽃처럼 환한 얼굴이 아롱거렸다.
"아, 어쩌나 ? 그래 한번만 딱 한번만 만나보는 거야. 딱 한번만."
기정의 눈에는 책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냥 막연히 이웃에 사는 친구 같은
여자애로만 생각해 오던 해주가 갑자기 자기에게 마치 연인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거기에 해주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기정은 해주 생각으로 하루를 그냥 보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역시 해주는 기정이네 집으로 누에치는 일을 하기
위해 왔다.
마침 간밤에 해주 생각으로 잠을 설친 기정이 뒤쪽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오다 해주와 마주 쳤다. 해주와 기정은 잠시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기정
의 심장이 요동 쳤지만 입은 떨어 지지 않았다.
"오늘 밤 시간 꼭 지켜서 나와 기다릴게."
해주는 한마디 남기고 누에치는 창고로 총총히 사라졌다. 해주와 기정이 잠시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진호가 질투어린 모습으로 엿보고 있었다. 오후에
한바탕 여우비가 내리더니 다시 더워지기 시작했다. 진호는 뽕나무를 리어카에
산더미처럼 베어서 차씨네 창고로 향했다. 마침 해주가 곧 집을 지을 수 있는 늙은
누에를 선별하고 있었다. 진호는 늘 준비하고 있던 화장품 센트를 슬며시 해주에게
주면서 속삭였다.
"이거 너 줄려고 읍내에서 사왔어. 그 안에 편지도 있어 읽어봐."
진호는 다른 일하는 동네아주머니들이 볼까봐 얼른 창고를 나왔다. 해주는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열어 보았다. 쌀 한 가마니 가격이나 되는 고급 화장품 세트였다.
"어머나. 얘가 이 비싼걸. 어찌 장만했지?"
하얀 종이에 깨알만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해주야, 오늘 밤 10시에 한번만 만나줘. 그냥 한 마디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서 그래. 진호]
해주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도저히 사서 쓸 수 없는 고가의 화장품을
진호에게 선물 받고 진호의 의사를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오늘밤 기정과
약속을 한터였다. 그것도 먼저 약속을 해놓고 깨기가 좀 이상했다. 해주는 진호에게 약속 날짜를 내일로 하자고 자신의 뜻을 전했다.
“야호, 그러면 그렇지, 역시 여자는 선물에 약하단 말씀이야."
진호는 신바람이 났다. 해주가 먼저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있는 그네에 나와 있었다. 운동장은 어두운 동굴속 같았다. 가끔 시간을 잊은 매미 소리만 고요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그때 정문 쪽에 기정이가 나타났다.
"기정아 여기야, 여기."
해주가 모기 소리만 하게 기정을 불렸다. 동시에 그네 뒤 학교 담장 뒤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학교는 공간이 넓고 혹시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자 해주는 기정과 처음 갖는 데이트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뽕을 따러 다니면서 늘 보아온 돌박지 원두막을 생각해냈다. 뽕밭이 있고 그 옆에 같은 동네 박 씨네 참외밭이 있었는데 그 참외밭 한쪽에 원두막이 있었다. 마음씨 착한 기정은 순한 양처럼 아무 말 없이 해주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기정은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고기처럼 해주의 의지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해주가 기정의 손을 잡고 학교 뒷길로 나와 원두막으로 향하고 있을 때 두 사람과 오십여 미터 간격을 두고 검은 물체가 소리 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기정아, 내가 밤에 보자고 해서 놀랬니?"
해주의 손에는 비닐가방이 들려있는데 안에 무거운 것이 들어있는 듯 했다.
"……."
"너, 이렇게 밤에 여자 만나본적 없지?"
"……."
학교와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적인 생활을 하던 기정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입시생이 밤에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기정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오늘밤만큼은 예쁜 해주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기정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따듯한 해주의 따뜻한 체온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기정은 해주와 손꿉장난하며 지내던 때를 생각했다. 한 살 많은 해주는 늘 엄마가 되고 기정이 에게는 아기 역할을 시키며 자신을 다독여 주거나 젖병을 입에 물리며 자장가를 불러주었었다. 기정은 옛 생각에 홀로 피식 웃었다.
"기정아, 무슨 생각해?"
해주가 마치 오랜 연인사이라도 되는 듯 다정하게 물었다.
"우리 어릴 때 놀던 일 생각. 누나, 그거 이리 줘 무겁게 보이는데…….""
해주는 어쩌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한창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기정에게
큰 손해가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농촌에서
보기 드문 핸섬한 얼굴과 과묵한 성격 그리고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기정이 해주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해주는 기정이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기정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기정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논둑길에 들어서자 목이 쉬도록 합창을 하던 개구리들조차 숨을 죽이고 가냘픈 조각달도 대포산 정상에 걸터앉아 두 사람의 만남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
반딧불이들 역시 해주와 기정의 주위를 날며 시기와 질투어린 축복을 해주는 듯 했다. 손을 펼치면 닿을 것 같은 야트막한 야산인 돌박지 숲에서 소쩍새가 구슬피 울며 간간히 적막을 깨트렸다. 다행히 박 씨네 원두막은 발이 내려져 있고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박씨는 매일 원두막에서 밤을 새우지는 않았다. 낮에 잘 익은 참외를 한 차례 따서 읍내 장으로 내갔기 때문에 참외 밭에는 덜 익은 참외만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밤이슬에 해주의 하얀 얼굴이 반짝였다.
초승달이 자취를 감추자 대포산은 마치 거대한 마왕의 모습처럼 앉아서 원두막을 바라보고 있다.
"기정아, 우리 저 원두막으로 올라가자."
"남의 원두막에 올라가면 혼나지 않아?"
"어휴, 얘는? 이 밤에 누가 있다고 그래? 박씨 아저씨도 없는 빈 원두막인데. 참외만
안 따먹으면 되지?"
해주가 먼저 원두막에 오르자 기정은 머뭇거렸다.
"어서 올라와 , 밤이슬 피하기는 그만이야."
어색한 긴장 속에 조용히 긴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소쩍새 우는 소리와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우는 소리 기정이의 가빠진 숨소리만 원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기정과 해주의 방향은 달랐다.
기정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얻으며 오로지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지상최대의 목표였고, 해주는 중학생 시절부터 교내의 각종 동아리나 그룹 활동을 하면서 공부보다 친구들과의 친목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었었다. 해주가 정신을 차리고 대학에 가려고 하였으나 고3이 된 입장에서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있었다.
"기정아?"
"응?"
"넌, 이 다음에 꿈이 뭐니?"
"누나처럼 예쁜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들 딸 많이 낳고 잘사는 거."
"뭐?"
갑자기 원두막과 참외밭에 한바탕 여자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울려 퍼졌다. 동시에
원두막 근처 뽕나무 밭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원두막으로 다가왔다.
"기정아, 나. 나말이야."
해주는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뭔데, 누나?"
"지금부터는 나보고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해주’라고 불러. 그리고 나 말인데
너를 좋아하면 안 되니? 나 실은 그 동안 너를 무척 많이 생각했어. 너희 집에서 누에를 치는 일을 거들면서 나는 늘 네가 궁금했어. 이제는 너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 오늘 밤 너를 보자고 한거야."
해주는 살며시 기정의 손을 잡아주었다. 기정이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자 얘들로부터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정이었다. 늦은 밤 산속 원두막에서 해주의 고백은 그런 기정의 머릿속을 온통 몽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정아, 우리 맥주 한잔 하자. 내가 맥주 두병하고 오징어 좀 사왔어. 그냥 앉아 있는
거보다는 맥주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 하면 좋잖아. 나, 술은 못 마시는데 그냥 사와 봤어."
"누나, 아니 해주……."
"바보, 해주씨 하고 불러."
"으응, 해주씨, 우리 건배하자. 나도 술은 잘 못 마시는데 오늘 해주씨 덕분에 마셔보네. 요즘 꽉 짜여진 시간표대로 입시공부에 시달리다 보니 한번 쯤 취해보고 싶기도 했어."
"밤에 씹는 오징어 맛도 괜찮은데."
"자. 해주씨, 한 잔 더 받아."
"알겠사옵니다. 서방님. 이제 보니 학생이 술도 잘 마시네. 공부는 안 했나봐?"
기정은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서방님이란 말은 결혼한 여자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에 기정은 강력한 전류가 전신에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상해? 꼭 결혼한 사이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냐. 혹시 아니? 너와 내가 먼 훗날 결혼 할 사이가 될지 ? "
잘 마시지 못하는 맥주를 연거푸 두어 잔 마신 해주는 약간 들떠 있었다.
"나 올 연말 쯤 서울로 다시 올라갈 거야. 취직을 하던 공부를 하던 이곳에서는 못
살겠어. 내가 마치 점점 시골뜨기가 되가는 느낌이야. 이런데 처박혀 있자니 답답해
서 미치겠어. 넌 공부 잘 하니까 내년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할거 아니니?"
해주는 다시 술잔을 입에 댔다.
해주가 기정에게 기대어 왔다. 달도 없는 밤 산골의 원두막에 이제 막 성(性)에 눈 뜨기 시작한 기정과 이미 많은 연애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해주의 은밀한 시간은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시골서 아무리 공부 잘해야 서울 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아직은 장담 못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나 추워, 기정아."
숨 막히게 흘러가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기정은 금방 취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차씨 부인이 보약을 달여 먹이고 있던 기정이었다. 약한 맥주에
도 기정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술이란 참으로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금방 싸움을 하던 친구들이나 연인들도 술 한 잔 나누면 만사가 막힘없이 풀
려나가곤 한다.
기정이 술에 취해 원두막 바닥에 눕자 해주는 윗도리를 벗어 기정을 덮어 주고 무
릎을 베고 눕게 했다. 얇은 반팔 티셔츠만 걸친 모습의 해주는 이슬을 머금은 잘 익
은 산딸기 같았다. 불룩한 젖가슴이 기장이 팔에 닿자 기정은 부르르 떨었다. 그때
갑자기 원두막 근처에서 산비둘기가 짝을 찾는지 구구거리며 돌박지의 적막을 깼다.
논에서도 개구리들이 한층 더 목청을 높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산촌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원두막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검은 그림자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
금 원두막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원두막 문은 사방으로 열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해
주는 앞 문만 빼꼼하게 열어 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