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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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1)
- 여강 최재효
동료들과 회사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컴퓨터 화면에 메신저 알람이 깜빡였다. 태경이 재빨리 접속하자 쪽지가 한 통 배달되어 있었다. [하얀나비님, 지금 대화하고 싶은데 들어오세요 - 은빛여우]. 은빛여우는 태경이 5개월전 우연히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알게된 40세 초반 직장여성 '미라'의 닉(nick)이다. 아침, 점심, 오후 때를 가리지 않고 그녀는 태경에게 수시로 이메일과 메신저를 이용해 정성을 보였다.
태경도 직장상사에게 좋지않은 소리를 들으면 그녀에게 쪽지를 보내 대화를 신청하곤 했다. 5개월간의 대화속에 이제는 15년을 살아온 아내보다 그녀의 속을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난달 부터는 정식으로 사이버 커플이 되었다. 태경은 그런 미라 좋았고 집에있는 아내에게 보다 신경을 썼다. 집에서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회사에 출근할 때는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날은 미라와 대화를 주고 받으면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이 사이버커플이 되자고 합의 했을 때 어떻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오프라인(Off line)상에서 만남을 가지지 않고, 서로의 연락처나 주소 그리고 인적사항에 대하여 묻지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중년의 남녀가 컴퓨터를 통한 친분을 충분히 쌓은다음 만남을 가지게 되면 10년 지기(知己) 보다 더 친근함을 늘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남이 잦다보면 경계를 넘는 일이 발생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고민과 에너지 낭비가 뒤따를 수도 있다.
서로의 얼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신비감이 유지되고, 긴장감이 일정 수준으로 지속되기 때문에 약간의 따뜻한 대화만으로도 상대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화창을 열자 미라는 고객이 의뢰한 일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하자 그 고객으로부터 불쾌한 말을 들었다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미혼남녀를 연결해 주거나 이혼 또는 배우자가 사별한 기혼남.녀를 연결하여 결혼을 하도록 주선해주는 일명 커플매니저(couple manager)다. 최근들어 급격한 이혼증가추세에 힘입어 홀로된 남녀를 연결하여 결혼에 골인하도록 도와주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고 한다.
미라를 기분 나쁘게한 고객은 돈좀 있는 50대 초반의 이혼한 남성으로 지난달 미라의 고객으로 가입한 회원인데, 그는 30대중반의 키크고 날씬하며 딸린 가족이 없는 여성을 원한다고 했다.
미라는 완전히 이기주의 발상이라고 하면서 그 고객의 철면피 근성에 대하여 실랄하게 성토 했다. 태경은 흥분해 있는 미라를 달래주기 위해 캐롤키드의 “When I dream"을 알프산 어느 계곡에 있음직한 잔잔한 호수사진을 배경으로하여 이메일로 띄웠다. 커플매니져로 5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그녀는 약간 다혈질인 것 같았다. 음악과 배경그림을 잘 감상하였다는 답장이 왔다.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진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이메일 첨부물로 동동주 한 동이와 부추전 한접시를 보냈다. 태경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오후 늦게 거래처를 다녀오니 오후 6시가 되었다. 마침 대학 동창 종수가 술이나 한잔 하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퇴근전에 혹시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봤다. 그녀가 메일을 한통 보내왔다. 남편과 삼일전 부터 자신의 늦은 귀가시간 때문에 냉전(冷戰)을 벌이고 있는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느냐고 했다. 요즘들어 부쩍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이 자주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고 했다.
만나면 특별히 하는일 없이 저녁먹고 아이들 교육문제와 남편들 험담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방 밤12시가 된다는 것이다. 자주 늦게 귀가하다보니 남편이 애인이 생겼나고 하더란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다가 설전(舌戰)이 벌어졌고 결혼초 남편의 바람피운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큰 싸움으로 번졌는데 그후로 말이 없다고 했다.
태경은 그런 그녀가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위로하고 일찍 귀가하여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더욱 정성을 쏟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남편의 마음이 차차 누그러 질수 있다고 했다. 종수한테서 빨리 홍대입구로 나오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중년을 넘기다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의 부부들은 어느정도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건드려 보아야 서로 피곤한 설전이 뒷따르고 장시간 냉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 부딪히지 않으려고 한다.
태경은 요즘 아내에게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집 근처 대형할인마트에서
파트타임제로 일하는 아내는 늘 바쁘다. 신혼 때는 어떻게 하던지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별 희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 아내를 즐겁게 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웬지 거북함을 느낀다. 앞만 바라보며 뼈 빠지게 일해 아내와 두 아이들 부양하다보니 어느새 눈가에 잔주름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일요일 은근히 아내로부터 공원이나 시장을 함께 가자는 제의를 기대해 보지만 최근 몇 년간 그런 제의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동창들과 등산과 친목회를 이유로 집을 비우고 중학생이 된 아이들 또한 도서관을 가거나 학원서 보충수업을 한다며 나가버리면 집에 혼자남아 집을 지키는 강아지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텅빈집에 홀로 누워 TV를 보며 소일하거나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사이버세계를 얼씬거리는 것이 태경이 일요일을 보내는 일과이다.
어쩌다 일찍 퇴근을 하면 더욱 쓸쓸함을 느낀다. 평일날에도 아내는 밤 9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교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달려가고 밤 11시가 넘어야 귀가를 하기 때문에 초저녁 집안을 썰렁하다못해 적막감마저 든다. 그렇다보니 태경 뿐 아니라 태경과 비슷한 요즘의 가장들은 밖으로 걷도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근처에는 간단하게 한 잔 할 수 있는 참치전문점이나 김밥집 같은 곳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태경이 회사일로 바빠 늦을 경우 일주일 내내 아이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먼저 학교를 가고 부석부석한 얼굴로 늘 불만에 찬 아내의 얼굴을 보며 아침을 드는둥 마는둥 집을 나선다. 자주 보지 않거나 대화가 없다보면 자연히 마음이 멀어지게 마련이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되었고 잠자리에서 조차 운우(雲雨)의 정(情)을 거의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버렸다. 종수는 요즘 아내의 잦은 외출에 불만을 토로했다. 전업 주부인 그의 아내와는 캠퍼스 커플로 동창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 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수가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 온다고 하면서 아내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고 한다.
"쓸데없는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게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돼. 너 임마, 신중하게 행동 해."
순간 태경은 미라를 떠 올렸다. 아니 이 시간 자신의 아내도 다른 남자와 채팅을 하면서 자신을 성토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의 섹스를 하는 자신의 불만스러운 이야기를 다른 남성과 주고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태경은 섬짓했다.
태경은 종수에게 자신들이 전에 즐겼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태경은 주말이면 아내를 차에 태우고 미사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라이브 카페를 찾아 맥주나 커피등을 시켜놓고 분위기에 젖어 밤늦도록 취해 보기도 하고, 북한강 줄기를 따라 춘천방향으로 그림처럼 서있는 러브호텔에 들어 둘 만의 오붓하고 색다른 시간을 가져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의 서먹한 관계를 나름대로 슬기롭게 극복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약발이 다 했는지 아내는 다시 목석 같은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태경은 갑자기 미라가 보고싶었다. 그러나 무슨일이 있어도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이버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했다. 종수에게 선생님 같은 훈계조 격려만 해주고 헤어졌다. 오히려 훈계를 받아야 할 자신이 친구에게 훈계를 했다는 사실에 낯이 간지러웠다.
오늘밤에도 미라는 긴밤을 혼자 지내야 할 상황이다. 지방출장이 잦은 남편은 한 달이면 반 이상은 지방출장에서 보낸다. 정작 미라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남편의 살결이 그리운 날이면 어김없이 지방출장이다. 그렇다고 남편을 따라 함께 지방에 내려갈 수는 없다. 그럴 경우 남편은 자신을 못 믿어 아내가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미라의 아이들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다. 학교 다녀오면 학원으로 독서실로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남편이 즐기는 꼬냑을 한 잔 마시며 TV를 보고 있다. 화면에는 아내의 바람으로 파경위기를 맞은 어느 가정사를 다루는 단막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가정법원 판사가 그 부부에게 생각할 말미를 주겠다며 보름후에 다시 결정을 내리겠다고 한다.
차라리 그 여자 주인공이 자신이었으면 했다. 이 시간 남편은 출장을 핑계로 묘령의 여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5년을 넘게 살아온 남편에 대한 신뢰가 어느날 갑자기 물 거품 처럼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미라는 태경을 떠올렸다.
"한번 만나 볼까?"
미라는 미지의 사내 태경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만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과 자신이 먼저 그 약속을 깨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켰다. 자주 가는 '중년의 사랑'이란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가슴 한 구석이 휑한 사람들 30여명이 접속하고 있었다. 닉네임으로 보아 절반 이상이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지금쯤이면 남편이나 가족들과 함께 오손도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때이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 지, 하루만 들어가 보지 않아도 수 백편의 다양한 글들이 카페를 장식하고 있다. 대개의 자작시나 꽁트가 올라오는데 그 내용은 나이의 적고 많음을 떠나 이별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거나 외로움을 은연중에 내 비추는 글들이 많았다. 미라도 가끔은 가명을 이용해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글로 표현해 자작시란에 올리곤 했다.
- 계속 -
판도라 상자(2) (0) | 2006.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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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終) (0) | 2006.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