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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도

* 창작공간/단편 - 천성도

by 여강 최재효 2006. 5. 1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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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성도

                                                        

                                                                       - 여강 최재효




                                                                                           1



 “대왕님. 며칠만 기다리시면 소첩이 정성을 다해 모실 수 있을 텐데…….”


 비랑은 술에 대취해 자신의 젖가슴을 지분거리며 금방이라도 덮치려고 안달하는 백제의 왕을 달래고 있다. 왕의 배려로 침전 옆방에 기거하며 꽃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비랑은 마음이 착잡했다.


 “비랑아, 아직 그것이 끝나지 않았느냐? 어서 빨리 너를 안아보고 싶구나. 네 뽀얀 속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못살겠다. 내일은 가능 하렸다?”


 수십 명의 비빈(妃嬪)을 거느리고도 성욕이 차지 않은 음탕한 왕은 백제를 다스리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색(姿色)이 곱다고 소문난 여인이 있으면 기어이 그 여인을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이었다.


 “대왕님, 지아비는 나라에 큰 죄를 저질러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 온데 소첩이 무슨 낙이 있겠사옵니까. 부디 천한 계집을 버리지 마소서.“

 “그래, 내 기다리마. 어서 백옥 같은 네 몸뚱이를 만져보고 싶구나..”
 비랑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왕에게 마음과 다른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쁜 놈,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가 여염집 여인을 취하기 위하여 무고한 제 백성을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 들다니.’
 비랑은 만신창이가 되어 망망한 서해바다를 흘러 다니고 있을 낭군 도미(都彌)를 생각하고 비통해 했다.


 “여보, 비랑. 나는 당신이 백제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갈수록 더 널리퍼져 불안하기 짝이 없소.”


 불행이 자신들에게 닥치기 전 남편 도미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비랑은 남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해보는 소리거니 하고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렸었다.


 “그이는 이미 이런 불행을 예견했었구나.”
 비랑은 두 눈이 뽑혀진 채 귀양을 간 남편에 대한 애틋함에 눈물을 흘렸다.


  “그이는 아직 살아있을까?”
  어제 궁궐에 들어온 이후 한 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비랑이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남편 도미의 생각뿐이었다. 왕이 동침을 하자고 반 명령조로 말 할 때부터 달거리를 핑계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언제까지 갈지 불안했다. 길어야 사나흘 걸리는 달거리 기간을 마냥 기다려 달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방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백제왕도 잠이 들었는지 침전은 조용하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지밀 시녀들만 장승처럼 문밖에 서서 졸고 있었다. 비랑이 소피를 핑계로 침전을 빠져 나오자 시녀 한 명이 따라붙었다. 억지로 소피를 보는 척하고 뜰로 나오자 보름달이 교교하게 전각들을 비추고 있었다. 대궐의 여러 전각들의 지붕이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거대한 흑룡 같았다.


  “여보, 당신 지금 어디에 계세요? 살아 있는 거예요? 아니면…….”
  비랑은 달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몽실한 젖가슴에 왕의 더러운 손때가 묻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사랑하는 도미의 손길에 마냥 행복해 있을 시간이었다.


  소쩍, 소쩍-.
  보름달이 잠시 구름 속으로 숨자, 소쩍새 울음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려왔다. 비랑은 차라리 자신이 저 소쩍새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아, 저 새만이 내 심정을 알아주는 구나.”
  비랑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남편 비록 목수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고 사는 착한 사람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편이 최고인줄로만 알고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강제로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전의 생활에 대하여 약간의 회의가 일기도 했다. 현재의 남편 도미를 만난 이후 에도 많은 유혹이 있었다.


  언제는 도미가 목수일로 집을 며칠 비운 사이 높은 벼슬아치 아들 되는 사람이 금은보화를 가지고와서 비랑을 정실부인으로 삼을 테니 자신에게 시집을 오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비랑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도리어 그 남자에게 창피를 주어 쫓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왕의 유혹은 차원이 달랐다. 어린시절 말로만 듣고 어렴풋이 동경했던 나라님이 사는 화려한 대궐은 비랑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백제왕은 이러한 여자의 사치심을 간파하고 비랑을 대궐로 데려왔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열녀(烈女)라 할지라도 권력과 재물 앞에서 흔들리게 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지순한 사랑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부귀영화를 선택할지를 놓고 비랑은 잠시 흔들렸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며 왕비나 비빈들만 입을 수 있는 비단과 능라로 만든 화려한 옷, 많은 시녀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 등, 왕의 유혹을 모른 척 하고 넘어가면 하루아침에 왕의 은총을 입은 후궁이 되어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두 눈을 뽑혀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도미의 환영이 보였다. 귀신같은 형상을 한 도미는 허공을 향해 손을 저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여보. 여보......”
  퍼뜩 정신이든 비랑이 소리를 지르며 그 환영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점점 슬프게 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비랑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한편 도미는 이틀 동안 겨우 한사람 탈수 있는 나룻배에 실려 서쪽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강제로 두 눈을 빼앗긴 원통함에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누구하나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오랜 가뭄으로 강물이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나룻배는 바람의 의지에 따라 강을 내려갔다 다시 거슬러 오르기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혼수상태에서 겨우 깨어난 도미는 목이 탔다. 칠월의 새벽 밤하늘에는 뽀얗게 은하수가 뿌려져 있고 아기별들이 애처롭게 도미를 바라보고 있다.


 “물, 무울, 물 좀 줘, 물 좀 달라고…….”


 도미는 울부짖으며 물을 찾았지만 들리는 것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어쩌다 갈매기가 날아와 앉았다가 험상궂은 모습의 도미를 보고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도미는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장난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악마 같은 백제왕과 아내 비랑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떠올랐다.


  “여보, 도미. 오늘은 당신 뒷모습이 이상하게 무거워 보여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날 아침 대궐 전각증축 공사장으로 향하는 목수장이 남편인 도미에게 비랑은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 말아요.”
  도미는 바쁘다며 얼른 대문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꿈자리가 뒤숭숭했었다. 한 번도 꿈속에 나타나지 않던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기도 하고 죽은 친구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간밤에도 초저녁에 잠시 비랑을 안아주고는 피곤하다며 잠을 청했다. 예전에는 아내 비랑과 운우의 정을 나눈 뒤면 새벽녘 까지 팔베개를 해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 전날 밤에는 아내가 귀찮은 듯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랑은 마음이 좀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도미는 아내가 자신이 대궐 목수 일에 신경이 쓰여서 그러겠지 하고 이해를 해주기를 바랬다. 이제 도미는 그날 밤의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후회를 했다. 그날 밤이 아내 비랑과 건강한 육신으로 운우(雲雨)의 정을 쌓을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도미는 비랑이 자신의 아내이긴 하지만 대궐에서 본 여인들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궐에 들어와 공사를 하기 전에는 나라님의 여인들은 모두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대궐에서 마주친 여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궐에서 일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마련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대궐에서 마주치는 여인들을 볼 때마다 도미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숙이고 대궐 여인들이 다 지나가도록 곁눈질로 바라 볼 뿐이다. 눈에 비친 대궐의 여인들이 아내 비랑보다 별로 예쁘지 않다는데 도미는 가슴이 뿌듯했다. 도미는 대궐에서 목수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대궐의 여인들보다 더 예쁜 비랑을 안아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여보, 비랑.”
  아내와 저녁상을 마주하던 도미는 은근한 눈길로 아내 비랑의 조각처럼 반듯하고 예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방님? 진지를 드시다 말고요?”
  “아니오, 어서 저녁이나 듭시다.”
  멋쩍은 듯 도미가 웃자 아내 비랑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여보, 대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응? 으응. 오늘 대궐에서 일하다 대궐 여자들을 몰래 훔쳐봤는데, 당신이 그 여인들보다 훨씬 예뻐서 하루 종일 콧노래를 불렀다고.”


  “어머, 정말로?”
  “그럼? 정말이지.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아이 좋아라. 역시 당신이 최고야. 그런데 혹시 나보다 더 예쁜 여인들 있으면 당신이 일도 안하고 그 여자들만 쳐다보면 어쩌지?”


   “에이, 내 이 가슴속에는 오직 우리 예쁜 마누라 비랑, 당신 밖에 없다고.”
  비랑은 수저를 놓고 얼른 도미에게 와서 품에 안겼다.


  “여보, 고마워요. 당신이 나를 그리도 예뻐해 주시니, 정말로 무어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도미는 저녁상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비랑을 안아 주었다.


  “여보. 비랑. 지금 어디 있는게요?”
  도미는 지난 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역시 바람과 파도소리만 들려왔다. 달에 산다는 항아(姮娥) 만큼이나 예쁘다고 근동(近洞), 아니 온 백제에 소문이 자자했던 달덩이 같은 아내 비랑이 보고 싶었다.


  ‘지금쯤 아내가 왕의 가슴에 파묻혀 열락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아아, 내기를 한 내가 바보로다 내가 천하의 못난이로다. 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을 두고 누구를 탓하랴’
  도미는 벌거벗은 아내 비랑이 왕과 한 몸뚱이가 되어 비단금침에서 뒹구는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 같은 놈은 비랑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단 말인가?‘
  다시 고통이 엄습하면서 악몽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마귀 같은 왕의 부하들이 도미의 사지(四肢)를 틀에 묶고 강제로 두 눈알을 뽑으려고 달려들었다. 


  “아악, 이놈들아. 이거 놔라. 이거놔. 놓으란 말이야.”
  도미가 아무리 발버둥쳐보았자 왕의 부하들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한명이 도미의 왼쪽 눈을 집게로 파내고 한 명이 가위로 핏줄을 끊었다.


  “이놈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느냐. 네 이놈들, 천벌을 면치 못하리라. 천벌을......”


  도미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발버둥 쳤다. 이윽고 오른쪽 눈마저 파내자 눈알이 빠져 처참한 도미의 얼굴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렀다. 눈알이 빠진 구멍에 헝겊으로 틀어막고 얼굴을 붕대로 둘둘 말았다.


  “이놈아, 그나마 목숨이 붙어있는게 임금님의 자비인줄 알어.”
  나찰같은 병사들이 깔깔거렸다. 도미는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하여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꿈결처럼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네 마누라가 이 백제에서 최고의 미인이라지?”
 공사장에서 일하다 말고 대전에 불려 온 도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말로만 듣던 대궐의 최고 높은 궁전인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었다.


  “도미, 고개를 들라. 나는 백제의 왕이다. 너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왕이니라. 백성과 왕 사이에 무에 어려울 게 있느냐. 자, 어려워하지 말고 고개를 들라.”


  대신들로부터 목수장이 도미의 아내가 백제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백제왕은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 했다. 백제최고의 미인을 데리고 사는 자가 어떻게 생긴 사내인지 왕은 직접 보고 싶었다.


  “대왕이시여, 제 아내는 그리 잘난 여인이 아니옵니다. 어디서 그러한 풍문을 들으셨는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전 마루바닥에 엎드려 왕의 얼굴도 바라보지 못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도미의 모습을 보자 백제왕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아니다. 아니야. 너에게 무슨 죄를 물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자자, 일어서서 이리 가까이 오라. 백제에서 제일가는 여인을 아내로 둔 너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구나. 자, 이리 가까이 오너라.”
 마지못해 도미가 왕 옆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자, 왕은 시녀를 시켜 따뜻한 술을 한잔 내렸다.


  “연일 계속되는 대궐 증축공사에 노고가 많구나. 내 너의 수고로움을 잠시나마 위로코자하니 주저 말고 마시거라.”
  왕은 도미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대왕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하겠나이다.”
  생전 마셔보지 못한 미주(美酒)였다. 한잔을 마시자 온몸이 허공에 붕 뜬 듯했다. 연거푸 석잔 을 마시자 정신이 몽롱했다.


  “짐이 오늘 너와 내기를 하려고 한다. 어떻냐?”
  “내기라니요? 대왕님, 저는 가진 것이 없는 무지렁이 목수쟁이온데 무슨 내기를 하신단 말이신지요?”
  도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뭐, 내기라서 거창한 게 아니고 요즘 여염집 여인들의 행실에 대하여 이야기 좀 나눠 볼까하고 말이야. 그러니 뭐 크게 신경 쓰지 말게나.”

 도미는 한편으로는 안도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론 여염집 아낙네란 말에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임금이라면 수하에 수많은 신하들이 있어 자신 같은 대궐의 전각을 짓는 일에 동원된 목수 따위를 불러 한담(閑談)을 즐길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려한 금관에 황금색 비단으로 만든 곤룡포를 입은 임금은 보통 인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대춧빛처럼 불그스레하며 구레나룻가 무성하여 한눈에 보아도 호탕한 기질이 보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내가 달 포전에 아차산 계곡으로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사냥터 근처에서 놀러나 온 아낙 두 명을 보았는데 내가 은근히 수작을 걸어 보았지. 술 한 잔 살 테니 가까운 주막에 가서 함께 자리를 하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두 아낙네는 군소리 없이 따라 오더군. 술을 몇 순배 돌리고 금은보화를 보여주자 알아서 옷을 벗더군. 여자들이란, 그저 금은보화를 보면 눈이 뒤집혀, 우리 백제 땅에서 천하제일의 미녀를 데리고 사는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자네 처 말이야?”


  백제왕은 넌지시 도미의 의중을 살피고 있다. 난처한 질문에 도미는 뭐라고 답변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왕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 자네 처도 그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계집들이란 다 거기서 거기지, 암 그렇고 말고.”
  왕은 자문자답하면서 유쾌해 했다.


  “아니올시다. 제 처는 하늘에 해가 두 조각이 난다해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이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도미는 눈을 내리 깔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으래? 네 처가 그렇게 대단한 절개를 지니고 있다 그 말이렷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나하고 내기를 시작하지, 응 ? 내기를 말이야?”
 왕은 자신 있는 말투였다.


 “내기라니요, 대왕님? 무슨 내기를……. ”
 “자네 처가 얼마나 도도하고 절개가 굳은지 내가 신하를 보내어 실험을 해보지. 만약 자네 처가 내 부하들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자네 처는 내 후궁이 되는 거고, 자네처가 정말로 절개가 강한 여자로 판명되면 내 자네에게 황금 천 냥을 상으로 내리겠네. 어떤가? 재미있는 내기 아닌가?”


 도미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백제에서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의 아들이나 부상(富商)들이 아내를 유혹하기 위하여 별 흉계를 다꾸몄어도 한번도 그들의 마수에 넘어간 적이 없는 아내였다. 그러나 도미는 불안했다. 상대가 나라님이기 때문이다. 나라님은 돈과 권력과 백성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분이다.


  “네, 좋습니다. 대왕님. 대왕님 뜻대로 내기를 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너는 지금부터 내기가 끝날 때 까지 이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내기가 끝나면 그때 너는 다시 자유롭게 해주지.”


  왕은 하사주 한 잔을 더 내리고 도미를 감금하고, 내신좌평(內臣佐平) 해부루(解阜婁)를 왕으로 단장 시켜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 내신좌평은 들어라.”
  퇴궐 후, 주점에서 친구들과 흥겹게 놀던 해부루는 영문도 모르고 편전에 불려왔다.


 “폐하, 분부하소서.”
 왕은 백제 조정의 벼슬아치중 해부루가 자신과 얼굴이 비슷하고 풍류를 좀 안다고 판단하였다.


  “그대는 이 길로 도미라는 목수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를 유혹하여라. 반드시 하룻밤 동침하고 그 여인의 속옷을 가져오너라. 그 여인의 남편과 내가 내기를 하였느니라.”
 왕은 도미와의 내기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폐하, 신명을 다 받쳐 수행하겠나이다.”
  해부루도 익히 도미의 아내가 백제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였다.


  “소신이 어떻게 하던지 도미 아내의 아랫도리 속곳을 반드시 가져오겠나이다. 안심하소서.”
  “내 그대만 믿겠소. 그대는 이 나라 제일의 풍류가라 내 예전부터 알고 있소.”


  “그런데, 해 좌평 말이오. 동침은 하되 절대로 그 계집을 건드려서는 아니 되오. 알겠소? 명심하시오. 절대로 그 계집의 몸에 손대지 말고 속곳만 빼내오란 말이오.”


  황족의 한 사람인 해 좌평은 입이 무겁고 행동에 조심성이 있어 만약 일이 그르친다 해도 일반 백성들에게 소문나지 않을 거라 왕은 판단했다.    


  딱, 딱-.
  야경을 도는 궁궐의 수비 군사들이 전각 사이를 오가며 딱따기를 치고 있었다. 밤이슬에 비랑의 옷이 흔건이 젖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새벽녘에 궁궐을 빠져 나간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순라를 도는 병사들에게 발각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장승처럼 서서 비랑을 눈여겨보던 시녀도 비랑의 뒤를 따랐다.


  갈 곳은 다시 왕이 잠든 침전이었다. 밤 고양이처럼 살며시 지밀전(至密殿)으로 들어서자 왕의 코고는 소리가 천정을 울렸다. 왕과 바로 접한 방에 비단금침에 몸을 뉘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비령의 머리에 요 며칠 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너의 남편과 내기를 하여 내가 이겼으므로 너는 이제부터 나의 후궁이 되어 내 명에 따라야 하느니라.”


 조금 전까지 이웃에 사는 과수댁 여리(麗梨)와 골목입구에서 남편 도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들이닥친 왕의 행차에 비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남편이 궁궐에서 일을 하다가 무엇을 잘못하여 자신까지 잡으러 온 줄 알았던 비랑은 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또한 한 나라의 왕이 아무리 한밤중 여염집에 행차를 하기로소니 겨우 말 한 필에 호위무사 한 명만을 대동하고 올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가짜 왕이거나, 무슨 흉계가 있다고 비랑은 판단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혜롭게 넘겨야 했다.   


 “송구하옵니다만, 대왕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소서. 나라님께서 누추한 소첩의 집에 행차를 하였는데 어찌 이러게 궁색한 차림으로 뵐 수 있겠나이까. 목욕을 하고 단장을 한 뒤 다시 찾아 뵐 때 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소서.”


  비랑의 말에 가짜왕은 어쩔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사랑방에 침방을 마련한 비랑은 흐릿한 촛불을 켜놓고 조촐한 주안상을 들였다. 한 참후 칠보단장을 한 여인이 사르르 문을 열면서 들어섰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술로 가짜왕 해부루는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 여인은 비랑이 아닌 이웃집 과부인 이십 중반의 여리였다. 여리는 삼 년 전 남편이 갑자기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독수공방을 하며 뜨거운 욕정을 참지 못해 은근히 동네 젊은 남자들을 꼬여 정을 통하며 외로움을 달래오고 있는 처지였고, 비랑의 간곡한 청에 이끌려 비랑으로 위장하여 꽃 단장을 하였다.


  “대왕님, 대왕님, 소첩 도미의 아내 비랑입니다. 어찌 벌써 주무시는지요?”
  여리는 해부루를 깨워 합환주(合歡酒)를 마시고 자리에 들었다.


  “음, 정녕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로다. 선녀야.”
  술에 대취한 해부루는 비몽사몽간에 여리를 품에 안았고 여리의 속고쟁이를 벗겨내 얼른 벼개밑에 숨겨 두었다.


  “흠, 고년도 별거 아니로고......”
  해부루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폐하의 칭찬을 듣게 되었구먼......”


   아-.
  생전 처음으로 고관대작과의 합방을 한 여리는 해부루가 피곤하니 그냥 자자고 하여도 막무가내로 해부루의 남성을 붙잡고 지분거리며 막혔던 욕정을 불태웠다.


  윽-.
 해부루는 술김에도 남성을 곧추세워 위용을 과시하려 하였으나 임금의 명이 생각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동침은 하되 절대로 건드려선 아니 되오. 아니 되오, 아니 되오......”
  “염병, 임금이고 나발이고. 에라, 모르겠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백제 제일의 계집을 한번 품어보자. 고년 얼굴만 반반한게 아니라 그 것도 끝내주는구먼, 그래.“


  가짜왕은 흡족해 했다. 날이 훤히 밝아 올 때 까지 남녀의 뜨거운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세 번씩이나 만리장성이 쌓다가 무너지고, 다시 쌓였다 무너졌다. 첫닭이 울자 해부루는 곯아 떨어졌다.


  “그래, 여리야. 간밤에 재미는 많이 보았어?”
  “재미는 무슨 재미요? 나라님이 술에 떡이 되는 바람에 이 여인네 가슴에 불만 지피다 말았구려.”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된 여리는 킥킥거리며 비랑에게 무언가 주었다.


  “이건 그 나라님의 속옷입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무슨 증거가 될까 해서 잠자는 틈을 이용해 몰래 벗겨왔지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가짜왕 해부루는 부스스하고 퀭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왕님, 편히 주무셨는지요?”
  비랑이 해맑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해부 루에게 세숫물을 바치며 묻자, 해부루는 은근히 비랑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귀여운 것. 너는 진정 나의 배필로 손색이 없도다. 내 나중에 군사들을 보낼 터이니 궁궐로 들어와 짐과 편하게 한 평생을 살아보자꾸나.”


  해부루는 좋은 옷을 사입으라며 문을 나서면서 금은보화를 한 상자를 비랑에게 안겼다. 그리고 ‘절대로 간밤에 정(情)을 통했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흥, 멍청이 같은 관리. 가짜 비랑을 진짜로 착각을 하고 있으니, 이 나라 장래가 걱정스럽구나.”
  비랑은 자신의 처지가 왜 이리되었는지 한탄했다. 대궐로 돌아가는 해부루의 발길은 가벼웠다. 말위에서도 연신 베로 된 여리의 속고쟁이를 만져보며 속으로 웃었다.


  “흥, 계집들이 아무리 도도해도 내 이 사내다운 외모와 금은보화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란 말씀이야.”
  오후에 왕을 찾은 내신좌평 해부루는 임금 앞에 여리의 속고쟁이를 내보였다 .


  “그래, 이 것이 도미 마누라의 속고쟁이란 말이지?”
  “폐하, 경하 드리옵니다. 이제 백제 제일의 미녀를 후궁으로 두시게 되었습니다.”


  해부루는 왕의 눈치를 보며 입에 침을 발랐다. 한편으로는 도미의 처에게 금은보화를 주었으니 죽을 때 까지 자신과 정을 통한 사실을 입다물거라 생각했다. 백제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부루에게 상을 내렸다.


  “네, 이놈 도미야. 보아라. 이것이 네 계집의 속곳 아니냐? 내 뭐라고 했더냐? 계집은 금은보화에 약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제 너는 나와 분명히 내기를 하였으니 이제부터 네 마누라는 내 것이다. 이래도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느냐?”


  도미는 눈앞이 아찔했다. 백제왕은 도미의 코 아래로 여리의 베로 만든 속옷을 내보였다. 그러나 그 속옷은 분명 아내 비랑의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겉옷은 평범하게 여염집 여인들처럼 입고 다니지만 속옷만은 비단으로 해입었다. 한참동안 속곳을 이리저이 만져보던 도미는 고개를 저으며 대왕에게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이 것은 제 아내의 속곳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아내는 늘 붉은색이나 하얀색 비단으로 속옷을 해입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이 속곳은 제 처의 것이 아닙니다.”
 도미는 절대 아니라고 큰 소리로 변명해 보았지만, 해부루와 왕은 위엄을 보여 가면서 엄포를 놓았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폐하와 내 눈을 속이려 들다니, 네 놈이 정녕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즉시 네놈의 집으로가 네 두 눈으로 직접 네놈의 마누와 그곳을 확인해봐라. 간밤에 그곳이 불이 났으니 지금도 퉁퉁 부어 있을게다.”
 좌평 해부루는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아니, 이보시오, 해 좌평, 속곳만 빼내라고 하지 않았소? 그게 무슨 소리요?”
  순간 좌평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차,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폐, 폐하. 그거 아니옵고.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저놈이 화가 나서 얼른 달려가 저놈 마누라 속고쟁이가 있나 없나 확인해보라 하는 뜻에서 그만, 그런 말을 했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서 합니다. 절대로 건드리지는 않았사옵니다. 소신을 믿어 주소서.”
 순간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네, 놈은 지금 즉시 달려가 네 놈의 마누라를 저녁 무렵까지 대궐로 데리고 오라. 저녁을 넘길시 군사를 보내 강제로 데려오겠다.”
  백제왕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도미에게 명령을 내렸다. 도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혹시 비랑이 자신이 모르는 베로 된 속옷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었다.


  “여보, 도미.”
  “비랑!”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도미의 집 마당에 흘렀다. 도미는 초췌한 얼굴로 아내 비랑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로 아내가 간밤에 좌평이랑 눈이 맞아 몸을 섞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옷을 모두 벗기고 아내의 은밀한 부위를 확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일은 어찌한다?’
 도미는 속으로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배시시 복사꽃처럼 웃고 있는 아내 비랑의 얼굴에는 비감함이나 죄의식이 보이지 않았다.


  “여보. 비랑.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소. 정말로 미안하오. 못난 이 사람 때문에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려. 용서하오. 이제부터는 나는 당신의 남편 될 자격이 없소.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소.”
  남편 도미의 표정에 비랑은 가슴이 다시 한번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 도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니? 그럼 대신이 가져온 속곳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지금껏 한번도 비랑에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도미였다.


  ‘왕의 말대로 정말로 여자들은 돈과 권력 앞에 맥없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아내도 간밤에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단 말인가?’ 도미는 살포시 웃는 비랑을 쳐다보지도 않고 쌀쌀하게 대했다.


  “여보, 그 속고쟁이는 뒷집에 사는 여리의 것이에요.”
  “뭐라고? 여리?”


  비랑으로부터 상세한 사건의 전말을 들은 도미는 방금 전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아내에게 미안해 했다. 그리고 간밤에 지혜로 위기를 넘긴 비랑이 고맙고 귀여웠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었구려. 그러나, 이일을 어찌하면 좋소?”
  “왜요? 도미?”


  “그 흉측한 왕이 속은 것을 알면 우리 부부를 가만두지 않을 거요. 어서 이 땅을 떠야겠소.”


  도미는 왕의 군사들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붙잡아 가기위하여 들이 닥칠것만 같아 불안했다. 한편 여리는 자신이 간밤에 가짜 왕과 동침하며 정을 통한 사실을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다녔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서 저녁 나절에는 임금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좌평을 불러라, 어서 좌평 해부루를 불러들이란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백제왕은 노발대발했다. 영문을 모르는 내관들과 시녀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저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좌평 해부루가 편전에 잡혀오다 시피해서 왕 앞에 엎드렸다. 간밤에 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여리와 육욕의 향연을 벌인 죄가 왕에게 탄로 난 줄로 알고 해부루는 덜덜 떨면서 오줌까지 지렸다.


  “네, 이놈. 해부루야. 어젯밤 네놈의 행동에 대하여 이실직고하렷다. 추호라도 거짓이 있을 경우 네놈의 목을 쳐서 성문에 내걸리라.”
  자존심이 구겨진 왕은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실신할 정도로 몸이 굳어버린 좌평 해부루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소,소신은, 간밤에, 폐하의, 며 명에 따라, 도미처의, 속고쟁이를, 빼낸, 죄밖에, 어, 없사옵니다. 폐, 폐하, 믿어주십시요.”
  좌평은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이놈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네놈이 범한 계집이 정녕 도미 처가 맞느냐 이말이다. 이 미련한 좌평 놈아.”


  좌평 해부루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간밤에 도미의 처로 알던 계집과 몸을 섞은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아침에 통정(通情) 사실을 입막음하기 위하여 금은보화를 한 상자 준 사실까지 기억해 냈다.


  “폐, 폐하, 분명한 것은 제가 그 계집의 속곳을 빼낸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과 또한......”
  좌평은 말을 주저거리며 잇지 못하였다.


  “또, 뭐냐?”
  “네에, 또......”


  “또, 그년을 범했단 말이지?”
  “폐, 폐하. 그것이. 저, 그것이......”
   “이놈아, 너는 나로 위장하고 가서 가짜 도미 처하고 놀아났느냐 이말이다.”


  좌평은 다시 한번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오줌을 질질 쌌다. 어떻게 간밤의 일을 임금이 알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이제는 죽은 목숨이로다. 으이그, 그저. 국으로 마누라 펑퍼짐한 궁둥이나 두둘기며 지낼 것을......’
  “폐하, 주, 죽여 주시 옵소서.”


  “이놈아, 죽이긴 왜 죽여. 네놈이 간밤에 몸을 섞은 년이 가짜 도미 처인데. 네놈이나 나나 백성들 앞에서 얼굴들고 다니긴 다 틀렸다. 이 늑대같은 놈아.”


  “네놈이 살길은 지금 즉시 군사를 이끌고 가서. 두 연놈을 짐 앞에 잡아오는 일이다. 알겠느냐?”


  해부루를 급파한 뒤 왕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임금이지만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백성을 잡아다 족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눈과 귀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무슨 좋은 구실이 없을까?’
  “여봐라, 도미 녀석이 하던 일이 무엇이더냐?”
  “새로이 짓고 있는 전각의 지붕의 서까래 설치를 맡고 있는 목수이옵니다.”
  조정좌평(朝廷佐平) 진사미(眞娑彌)가 아뢰었다.


  “조정좌평은 도미 녀석이 건축부분에서 소홀한 점이 있는지 찾아보고 즉시 아뢰시오.”
  그러나 조정좌평이 아무리 흠을 잡을 내야 잡을 흠이 없었다.


  “흠, 그 놈은 아내를 백제의 최고 미녀를 얻을만한 자격이 있군.”
  진사미는 속으로 도미의 목수기술에 감탄했다. 그런 최고의 목수장이를 무고하게 죄를 묻는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봐라, 읍 덕솔(德率).”
   “네”
   “네가 지붕에 올라가 석가래 한 개를 부러트려 보아라.”


  조정좌평 진사미는 수행한 비서인 덕솔 벼슬을 하는 읍호(邑虎)에게 명을 내렸다. 내신좌평(內臣佐平) 해부루는 목숨을 살려준 왕의 하해와 같은 은총에 감지덕지 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도미의 집으로 바람같이 달렸다.


  “두 연놈을 보면 무조건 포박하여 궁궐로 압송하렷다.”
  “여보, 비랑, 빨리 집을 나섭시다. 오늘 저녁 안으로 이 성을 빠져나가야 하오.”
  도미와 비랑은 값어치 나 갈 만한 금은보화만 챙겨 막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저 두 연놈을 포박하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도미와 비랑을 붉은 오랏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어서 두 연놈을 서둘러 대궐로 압송하라.”
  죽을 뻔했다 살아난 해부루는 서슬 퍼렇게 날뛰었다.


  “이놈들, 이 무슨 행패냐? 놔라”
  “나리, 죄 없는 아녀자를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지요? 이런 법도가 대명천지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비랑이 울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해부루는 눈썹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네년이 네 죄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느냐? 요망한 년 같으니.”
  해부루는 간밤에 열락을 함께한 여인이 아리따운 비랑이 아니라는데 더 화가 치밀었다.


  ‘흠, 저런 기가막히게 예쁜 계집을 두고 내가 간밤에 엉뚱한 년하고 그짓을 했다니 내 눈이 멀었었구나. 빌어먹을......’
  내신좌평 해부루는 백제 최고의 미녀를 앞에 두고 건드려 보지 못한 것이 속이 아팠다.


  ‘그것참, 분명히 간밤에 내가 안아본 계집년은 분명 기루(妓樓)에 있는 계집보다 훨씬 예뻐 보였는데.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여우에 홀렸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로다’


  도미와 비랑이 포박을 당하여 마차에 실려 대궐로 잡혀 간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동네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근동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2


  “나라님도 이상하지 가짜 임금을 보내 비랑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자 억지 죄를 씌워 잡아가다니. 그저 여자는 적당히 예뻐야지 너무 예쁘면 괜한 흉사를 당한다구. 에구”


  한 아주머니가 넋두리처럼 한마디 내뱄었다. 성민들은 나라님이 무고한 백성을 잡아간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관리들은 함구(緘口)로 일관했다.


  “그래, 무슨 흠이라도 찾아 냈느냐?”
  “폐하, 도미 녀석이 책임자로 되어있는 건물 서까래 한 개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하를 우습게 본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만약 그 전각에 폐하가 납시었다가 눈, 비가 내려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 봉변을 당하실 뻔 했습니다.“


  조정좌평은 멀쩡한 서까래를 분질러놓고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이라도 찾아낸 양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으래? 그 놈이 짐이 머물 전각을 그리 허술하게 지었다 이말이지? 사실이렷다?”
  왕은 빙그레 웃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옳거니, 이놈 제대로 걸려들었겠다. 내 이놈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왕은 어떻게 하면 도미의 처에게 당한 망신을 만회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봐라, 그 미천한 목수 놈을 혼내줄 묘책이라도 있느냐?”
  조정좌평의 곁에서 왕의 눈치만 엿보던 덕솔 읍호가 아뢰었다.


  “폐하, 일찍이 한(漢)나라 황제 무제(武帝)는 태자공 사마천(司馬遷)에게 남자의 거시기를 까는 궁형(宮刑)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죄인들의 두 무릎을 절단당하는 형벌, 코를 자르는 형벌,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형벌, 죄인을 끓는 물에 튀겨 죽이는 형벌, 벌에 달궈진 구리 기둥위를 걷게 하는 형벌 등이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매를 치거나 주리를 트는 형벌 등 다양하옵니다.“
 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더 잔인한 형벌을 없느냐?”
  “예, 이 형벌은 아주 흉악무도한 죄인에게 주는 형벌인데 양쪽 눈을 빼내는 형벌로 죄인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형벌입니다.“
  왕은 읍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 형벌을 주면 사람이 죽지 않느냐? 난 여자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명예스러운 말은 듣고 싶지 않다.“


  “폐하,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무서운 형벌을 준다 하여도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하옵니다.“


 “그으래? 그럼 이 괘씸한 놈의 두 눈을 빼버린다?”
 그러나 왕은 백성들의 눈이 무서웠다. 왕이 무능하거나 악정(惡政)을 저질러 백성들에게 마음을 잃어 왕위에서 쫓겨난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영리한 백제왕은 도미가 형벌을 받게 되면 백성들은 분명 자신이 도미 처를 탐내어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고 손가락질 할 거라고 판단했다. 왕은 도미가 전각의 지으면서 부주의로 서까래를 잘못 설치하여 그에 상응하는 죄를 주었다고 백성들의 눈을 가리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서까래 하나 잘못썼다고 목수의 두 눈을 뽑는다면 백성들이 나의 처사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할거야. 그래, 그거야.‘ 왕은 무릅을 탁치면서 자신이 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왕은 조정좌평을 가까이 불러 귓속말로 어명을 하달했다.


  “지금 즉시 서까래가 부러졌다는 그 전각을 몽땅 허물어라.”
  조정좌평 진사미와 읍호는 군사들을 동원하고 서까래가 부러진 전각으로 달려갔다. 해질 무렵이 되자 내신좌평(內臣佐平) 해부루는 도미와 비랑을 압송하여 대궐로 들어섰다.


  “폐하, 두 연놈을 잡아왔습니다.“
  “그래? 내신좌평은 지금 즉시 형틀을 마련하라.”


  “몇 개를 마련할까요? 폐하.”
  “몇개라니? 하나면 충분 하느니, 저 계집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형틀이 마련되자 왕은 친히 도미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네 이놈, 도미야, 신성한 대궐 전각을 지으면서 어째서 엉터리로 서까래를 설치하였느냐?”
  “엉터리라니요? 폐하? 소신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전각을 지었사옵니다.”


  “네놈이 벌건 대낮에 짐을 기망하려 드는구나? 내 먼저도 네놈과 내기를 하여 네놈을 이겼지만 짐이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하려했는데, 이번에는 네놈이 책임자로 있는 전각의 서까래가 부실하여 그 전각이 무너졌느니라. 네놈이 짐을 능멸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도미는 전각이 무너졌다는 소리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그럴 리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태풍이 불어도 수백 년은 끄떡없을 만세반석같은 집이었다. 분명히 왕이 자신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술책이라고 생각했다.


  “대왕이시여, 저는 믿을 수 없사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은 수백채의 집중에서 비바람에 무너 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사옵니다. 하물며 여염집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목재를 써서 지은 전각이 무너지다니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소인은 승복할 수 없사옵니다.“


  도미는 자신이 있었다. 대궐 증축 공사장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성을 다했으며 어떠한 술수를 부려 공사를 대충 마무리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여봐라, 저 두 연놈을 데리고 그 무너진 전각을 보여주고 오너라.”
  도미와 비랑은 폭삭 주저앉은 전각을 보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여보, 도미.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에요? 어찌......”


  도미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손톱으로 자신의 팔뚝을 꼬집어보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제야 도미는 간악한 왕의 흉계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 간악한 왕이로다. 내 어찌하다가 이런 몹쓸 나라에 태어났더란 말이냐?’
  도미는 속으로 통탄했다.


  “여보, 도미.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에요?”
   비랑은 가슴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여보, 비랑, 이 모든 것은 나를 함정에 빠트려 당신을 차지하려는 왕의 모략이오. 나는 이제 어떤 형벌을 받고 죽을지 모르오. 나는 결백하오.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전각은 멀쩡하게 서 있었소. 마치 만세반석 처럼 말이오. 내가 혹 형벌을 받고 멀리 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당신 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주어야 하오. 비랑......“
  도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도미......”
  “비랑......”


  ‘천벌을 받을 왕이로다. 천벌을 받은 나라로다.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백성의 처를 탐내어 이 같은 함정을 파놓다니.’
  도미는 속으로 한탄했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화를 모면 할 길이 없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어이해야 합니까? 이대로 앉아서 저 흉악한 왕의 계책에 넘어간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요? 정말로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옵니다. 한 지어미를 만나 한 세월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꿈이 깨져야 한단 말입니까? 정녕 하늘이 있고, 정의가 살아 있다면 저를 이 고난에서 구해주소서. 천지신명이시여 !’


  “여보, 도미. 저는 말이에요. 죽어도 다른 남자의 여인이 안 될 거에요. 절대로 안 될 거에요. 그러니 안심해요. 도미.”
  비랑을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그래, 이놈, 도미야,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느냐? 내가 네놈에게 거짓말을 하였더냐?”
  왕은 느물느물 웃으면서 도미와 비랑을 번갈아 보았다.


  “왕이시여, 결단코 이 몸은 전각을 지을 때 털끝만큼의 하자가 있다면 제 몸이 가루가 되는 형벌을 받아도 달갑게 받겠으나, 이건 아니옵니다. 불과 며칠 전 제 스스로 말끔히 공사장을 정리할 때만 하더라도 손톱만큼의 틈도 없었사옵니다. 이건 누군가 저를 모함하기 위한 술수입니다.


 왕이시여, 다시 한번 철저히 전각이 무너진 연유를 정밀히 조사하여 주시고 그 원인을 철저히 밝혀 주소서. 백성들은 대왕님의 영명하신 판단력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나이다. 불쌍한 백성의 소리를 외면하지 마소서.”
  도미는 울면서 애원조로 왕에게 사정을 하였지만 왕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대왕님, 이 여염집 여인이 무엇을 알겠소이까마는, 지아비는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개미 한 마리 함부로 죽이지 않고,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살 한 톨 주워 본적이 없는 착한 사람입니다. 또한 지아비의 목수기술은 전 백제의 백성들 입에 자자하게 칭송을 받아왔나이다. 그런데 하물며 대왕님께서 거처하실 전각을 함부로 지어 무너지게 할 수 있겠나이까? 이는 어떤 음모가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힘없고 가엾은 백성의 소리를 들어 주소서. 대왕이시여!”


  비랑 또한 울면서 왕에게 애원하였으나 왕은 못들은 척 할 뿐이었다. 왕은 당장 어젯밤 자신의 뜻에 의해 가짜 왕 해부루가 당한 일을 입에 올리고 싶었지만 여러 신하들이 보는 가운데 왕의 입장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었기에 꾹 참았다. 형틀이 준비되어 있고 나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봐라, 저 못된 목수쟁이놈의 볼기를 치고 옥에 가두어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광장으로 끌어내어 두 눈을 뽑아내고 멀리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또한 저 계집은 죄가 없으니 일단 방면토록 하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미의 엉덩이가 까내려 가고 볼기치는 소리가 대전 앞뜰에 가득했다. 음흉한 왕의 명령이 방면이지 실제로 비랑은 방면되지 않고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별궁으로 갔다. 왕은 지아비 도미의 엉덩이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장면을 보여 줄 경우 자신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별궁으로 인도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 밤 도미의 처 비랑을 품어 볼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흠, 고년 엉덩이와 젖가슴이 흐벅진 걸 보니 육덕이 괜찮겠는걸. 오늘 밤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계집년을 안아보게 되었구먼,’
  눈앞에서 도미의 엉덩이가 터지고 피가 튀기 시작 했으나 왕은 오히려 즐거워하며 오늘 밤 이불속 일을 그려보았다.


  “네 이놈 바른 대로 대렷다. 네놈이 폐하를 우습게보고 전각을 허술하게 지었겠다?“
  달솔 읍호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내 네놈들의 소행을 다 알고 있다. 네놈들이 대왕께 이실직고하고 죄 없는 나를 어서 풀어라.”


  도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매를 치는 나졸들과 읍호에게 대들었지만, 점점 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내신좌평 해부루와 조정좌평 진사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여보, 내신좌평, 폐하께서 여색에 정신이 팔려 죄 없는 백성을 쳐 죽이는 거 아니오. 이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앞으로 이 백제국은 어찌되는 거요?”
  조정좌평 진사미도 자신의 죄에 속으로 가슴 아파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니, 저놈의 죄를 크게 부풀려 백성들이 믿게 해야지요. 잘못 하다가는 우리들의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외다.”
  두 좌평은 도미의 비명을 들으며 착잡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비랑, 이왕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마음 고쳐먹고 대왕님의 분부에 고분고분 따르세요. 비랑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비랑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오늘 밤은 차분히 쉬면서 잘 생각해봐요.”
  깊고 깊은 별궁으로 인도되어 지밀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비랑은 온 통 지아비 생각뿐이었다.


  “아, 지금 쯤 그이는 어찌 되었을까? 이 모든 일이 나로 인하여 일어났구나. 만약 나 같은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도미가 그 같은 가혹한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 천지신명이시여, 어찌하여 우리 부부에게 이리도 혹독하신지요?”
  욕조 통에서도 비랑은 흐느끼며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통탄했다.


  “비랑, 울지마오. 눈 한번 딱감고 마음만 돌리면 왕의 총애를 받을 터인데, 어차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아닌가요? 잊으세요.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봐요. 이 궁궐에는 그대처럼 대왕님의 눈에 띠어 하루아침에 부귀영화를 거머쥔 여인들이 얼마든지 있다오. 그들도 그대처럼 모두 지아비가 있던 몸이지만 이제는 다 잊고 대왕님의 하해와 같은 총애를 먹고 사는 화초가 되었다오.”


  지밀시녀는 비랑의 애통해 하는 마음을 달래보려고 달콤한 말로 달래보았으나 비랑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엉덩잇살이 너덜너덜하게 걸레가 된 도미는 감옥에 갇혔다. 한 없이 자신이 백제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실이 원통했다. 지금이라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면 아내와 이웃나라 신라나 북쪽의 고구려로 월경(越境)하여 도망치고 싶었다.


  당시 백제는 위로 고구려의 막강한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고 동으로 신라의 빈번한 침략으로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고구려나 신라로 야반도주하는 백성들이 갈수록 늘었다. 백제왕과 고위 관리들은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백성들이 국경에서 잡혀 올 경우 광장에서 많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참수형(斬首刑)에 처했다. 공포 정치에 억눌린 백성들은 이 같은 공포 정치 속에서 마음을 졸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왕과 고관대작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 한 채 환락의 생활에 빠져있었다. 여색에 눈이 뒤집힌 왕까지 나서서 여염집 아녀자를 겁탈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고위 관리들도 왕의 엽색행각을 본받아 얼굴 좀 반반하다 싶은 여인은 처녀이거나 지아비가 있는 유부녀라도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행위가 빈번히 일어나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폐하, 경하 드리옵니다. 드디어 백제 제일의 미녀를 손아귀에 넣으셨습니다.”


  왕은 측근들과 어울려 조촐한 주연을 즐기며 비겁하게 비랑을 얻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축하고 있었다. 왕의 명을 어기고 지옥에 가까이 갔다 온 내신좌평 해부루는 거품을 입에 물고 왕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이에 질세라 조정좌평 진사미는 한술 더 떴다.


  “이는 하늘이 대왕을 도우심입니다. 무릇 영웅호걸은 계집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습니다. 백제 땅 제일의 미인(美人)인 도미의 처를 얻으셨으니 폐하께서는 걸출한 영웅호걸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경사스러운 일입지요.”


  대신들의 달콤한 입발림에도 왕은 왠지 개운하지 않았다. 도미의 처가 스스로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내어 마음을 바꾸었다면 덜 찜찜했겠지만 강제로 무고한 백성을 함정에 넣은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이 일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말없이 술잔을 들고 있던 왕은 입을 열었다.


  “대신들은 짐의 행동에 무슨 하자라도 있다고 생각하오?”


  “당치도 않으십니다. 폐하의 조처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일벌백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적절한 조처 이었사옵니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그저 짓밟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기어오르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다루어야 하옵니다. 진시황은 말을 듣지 않는 유생들을 생매장하였고 모든 책들을 거두어 불태웠사옵니다. 진시황은 폐하도 잘 아시다시피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걸출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지않사옵니까.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백성들을 무섭게 다루어야 하옵니다. 지금 위로는 고구려가 호시탐탐 우리 백제를 노리고 있사옵니다. 비록 백제를 건국한 온조대왕께서 고구려를 세운 주몽왕의 아들이지만 그들은 우리 백제를 차지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사옵니다. 또 신라는 고구려와 내통하며 우리의 등줄기를 물어뜯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때 백성들에게 온화한 정책을 쓸 경우 백성들의 기강 뿐 만 아니라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저하 될 수 있사옵니다. 이 산하는 대왕의 것이 옵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취하고 십은 신 것이 있으면 하명만 하소서. 영명하신 폐하의 지도력으로 속히 우리 백제가 삼국을 통일해야 하옵니다.”


  내신좌평은 번드르르한 이야기로 왕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왕은 속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술을 해부루에게 하사했다. 주연석 끝자리에 앉아있던 4품벼슬인 덕솔 읍호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폐하, 소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어, 읍 덕솔. 해보오.”


  “진시황은 아방궁을 지어 수천 명의 궁녀를 두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대내외적으로 영웅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국의 천자로 아직까지 이름을 휘날리고 있사옵니다.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 또한 걸출한 호걸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그 또한 수많은 비빈을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미녀들을 하사하였사옵니다.


 그의 손자인 한무제 유철(劉徹)은 할아버지에 뒤지지 않고 50여 년 동안 한나라를 통치하면서 수많은 미녀들을 손아귀에 넣고 온갖 호사를 다부렸사옵니다. 영웅이 계집을 마음대로 취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옵니다. 또한 이는 종족을 번식시키고 황실의 안위를 튼튼히 하는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도미의 처를 얻으셨음에 마음이 편치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전혀 개의치 마소서. 백성들은 잡초와 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살아 갈 뿐이옵니다. 다시 한번 폐하께서 백제 최고의 미인을 후궁으로 들이신 일에 대하여 감축 드리옵니다. 부디 백제 황실을 중흥시키소서.”
 

  달솔은 유창하게 혀를 놀려가면서 왕의 입맛에 맞는 말만을 골라 했다. 기분이 좋아진 왕은 술에 취하고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흐뭇해 했다.


  “참, 그대의 벼슬이 뭐였더라?”
  “덕솔이옵니다.”


  “자네 같은 유능한 사람이 겨우 4등급 덕솔이라니 안타깝구려. 이보시오 해 좌평. 읍호를 지금 당장 달솔(達率)로 진급 시키도록 하오.”


  “폐하 두개 등급을 뛰어 넘어 진급 시킨 적이 없었사옵니다.”
  “어허, 말이 많소. 그리 하라면 하오. 내 말은 곧 이 나라의 법이오.”
  “분부 거행 하겠나이다.”


  “자, 여러분, 오늘 백제 최고의 미인을 후궁으로 얻은 폐하의 만수무강을 의미하는 뜻에서 건배를 권하오. 우리 모두 폐하와 황실의 안녕을 위하여 건배 합시다.”
  진사미의 말에 상하 대신들은 모두 일어나 하례했다.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내 경들의 충심을 깊이 새기리다.”


  다음 날 아침, 대궐 앞 광장에는 도미가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두 눈알이 뽑히는 형벌을 받는 다는 소문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수천 명의 백성들이 구경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오시(午時) 쯤 되자 병사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도미를 부축하고 광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바지는 피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광장 가운데 어린아이 키 정도의 단을 만들고 단위에 십자모양의 형틀을 만들었다.


 둥-. 둥-.
 북이 울리자 운집한 군중들은 조용해지고 군관이 단위로 올라가더니 도미의 죄목을 적은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백성들에게 짐의 마음을 알리노라. 짐은 대궐 공사를 맡은 도미가 지극정성으로 짐에게 충심을 다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노라. 그런데 불미스럽게도 대궐 전각이 무너지는 바람에 황실에 큰 환란이 닥칠 뻔 했다. 이에 짐은 마땅히 도미를 참수(斬首)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그간의 도미의 충성심을 깊이 헤아려 죽음만은 면해주기 위하여 간단한 형벌로 일벌백계를 삼고자 하노라. 짐은 백제의 모든 백성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할 것을 다시 한번 만 백성에게 선언 하노라.”
  군관이 왕의 교서를 큰 소리로 읽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 미친 임금 같으니라고. 천벌을 받지, 천벌을. 백성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무고한 제 백성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다니. 저런 쳐 죽일 놈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이냐.”
  한 노인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다리 한쪽이 없는 젊은 남자가 거들었다.


  “염병할 내가 저런 놈을 믿고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해 싸우다 다리 병신이 되다니, 망할 징조다. 망할 징조야. 빌어먹을......”
  젊은이는 목발을 높이 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보오, 젊은이 목숨이 몇 개나 되오. 말 조심하구려.”
  도미가 단위로 옮겨졌다.


  “대역죄인 도미에 대한 형을 집행 하겠다. 백성들은 잘 보거라” 
  군관이 오른손을 높이 들자 병사들이 도미의 사지(四肢)를 형틀에 묶었다.


  “시행하라.”
  군관의 명이 떨어졌다.


  “이놈들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이야.”
  도미가 발버둥을 치자 도미의 입에 헝겊을 틀어막고 병사 네 명이 사지를 꼼짝 못하게 잡았다. 강제로 두 눈알이 뽑힌 도미가 실신하자 군관은 다시 명을 내렸다.


  “저 놈을 배에 태워 강에 띄워 보내라”
  얼굴을 붕대로 둘둘 감은 도미가 손바닥만 한 배에 실려 강에 던져졌다. 강둑에는 도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우는 백성들도 있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어여쁜 임을 두고 저리 떠나가는 저임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리 무심히 떠날거나. 어허, 어허 세상인심 야속타. 부디 멀리멀리 가시거든 고은 임 다시 만나 이승에서 하지 못한 인연일랑 청실홍실로 이으시오. 어이 할거나, 어이할거나. 세상 말세로다. 임금이 백성의 아내를 탐하니 어이, 이 나라가 태평할꼬......”
  어느 노파는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배에 송장처럼 실려 강물에 떠나가는 도미를 위로 했다.


  “아, 도미는 지금 쯤 어찌 되었을까?”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비랑은 충혈 된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지밀시녀가 임금이 드는 수라상을 차려 들여왔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나요? 얼굴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자, 얼른 아침 드시고 대왕님에게 아침 문안 가셔야지요.”


  지밀시녀는 새로이 임금의 총애를 얻게 될 비랑에게 미리 잘 보이기 위해서 아양을 떨었다.  비랑은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뜨고 편전으로 들어 왕을 알현 했다. 싫다고 안 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궁궐에 들어 온 이상 목숨을 쥐고 있는 왕에게 일단은 잘 보이리라고 마음먹었다.


  ‘우선 이 위기를 모면하고 후일을 기약 해야 돼.‘
  비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 차려 입으니, 항아가 달에서 내려 온 듯 하구나. 어떠냐? 간밤에 잠은 잘 잤느냐?”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왕이 기분 좋은 듯 허풍을 떨었다.


  “하해와 같은 대왕님의 은혜를 입어 소첩 잘 잤나이다.”
  비랑이 왕에게 절을 하자 왕의 큰 입이 양귀에 걸린다.


  “비랑아, 네 지아비는 적당히 혼만 내서 내 보냈느니라.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멀리가서 혼자 편히 잘 먹고 살도록 조처를 취해 놓았느니. 그러니 너는 이제 까지의 일을 모두 잊고 나와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아 보자구나.”


  왕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지밀시녀에게 비랑을 깍듯하게 모시라고 명을 내렸다. 하루가 이처럼 지루하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임금의 침궁에서 하루 종일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던 비랑은 갑자기 울컥하고 서러움이 복 받혔다.


  “도미. 어찌하면 내가 이 못된 왕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네에? 대답 좀 해보세요?”


  비랑은 울다가 웃다가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시녀가 가져온 점심과 저녁도 거르면서 도미 생각만 하면서 울었다. 낮에 비몽사몽간에 비랑은 두 눈이 빠진 도미가 배에 탄 채 어느 섬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망가는 거야. 야반을 틈타 도망가는 거야. 도망가서 사랑하는 내 낭군 도미를 찾아 고구려로 도망가는 거야, 고구려로, 도미는 분명 죽지 않고 살아있을 거야. 분명히 죽지 않고......’


  비랑은 지밀시녀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대궐문을 출입하는 방법과 여러 사정에 대하여 물었다. 시녀는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상세히 일러 주었다. 늦은 밤이 되었다. 대궐 내 정원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비랑은 마음이 울적해 지고 부모형제들 얼굴이 환영처럼 스쳤다.


  오늘 밤 유부녀로서 임금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얄미웠다. 도미 한 남자만을 낭군으로 모시고 한 백년 살고자 했던 소박한 꿈이 산산 조각이 난 이 시점에 새로이 다른 남성(男性)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 다른 남성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황제 폐하 납시오.” 
  내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이 침전으로 들어섰다.

  “오, 비랑아 많이 기다렸겠구나. 이제부터 너는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란다. 오늘 밤 나와 열락의 밤을 보내자꾸나.”
  이미 술에 취한 왕은 역겨운 술 냄새를 풍기며 한 떨기 백합처럼 피어있는 비랑에게 덤벼들었다.


  “대왕님, 어이 이리도 성급하세요? 합환주도 없이......”
  “아, 그렇구나. 미안, 미안. 여봐라, 속히 합환주를 들이 거라.”


  대취한 왕은 술잔을 비우자마자 비랑을 안고 침대로 가더니 털썩 내려놓고 비랑의 상의(上衣)를 벗기기 시작 했다. 비랑의 뽀얀 속살이 드러나자 왕은 마른 침을 삼켰다.


  “대왕 마마 송구하옵니다. 며칠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꽃물이 모두 마르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소서. 길어야 이삼일 이옵니다”
  “흠, 그래? 그럼 짐이 참아야지. 기다리마. 어서 네 몸뚱이를 안아보고 싶구나.”


  겨우 왕의 성욕을 잠재운 비랑은 침전을 빠져 나왔다. 보름달이 하늘 높이 서녘을 향해 흐르고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튿날도 역시 왕은 술에 대취하여 비랑을 괴롭혔으나 간신히 속옷에 빨간 양념을 묻혀 왕에게 달거리가 한창 진행이라고 속여 왕과의 잠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코를 크게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보름달이 거의 서산으로 숨을 즈음 비랑은 살며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몰래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진기한 패물을 옷속에 감추었다. 다행히 왕의 키가 크지 않아 비랑에게 꼭 맞았다. 시녀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왕관을 쓰고 긴 칼을 차고 살며시 침전을 빠져 나와 대궐 정문이 아닌 서쪽에 나있는 쪽문을 향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달이 서산에 잠기어서 대궐 안은 무덤속 같은 암흑세계였다. 정문과 달리 쪽문은 경비가 허술하여 겨우 병사 두 명만이 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안에서 문을 두드리자 밖에 있던 병사가 문을 열었다. 졸던 병사들은 번쩍거리는 황금색 곤룡포에 왕관을 쓴 비랑을 보고 왕으로 착각하여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수고들 많구나. 야간 순찰을 돌아야 겠다. 한 명은 나를 호위하거라.”
  “예이.”
  왕을 가까이서 본적이 없는 터라 병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너는, 며칠 전 도미라는 사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앞장서서 땅바닥을 보고 걷던 병졸이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미는 눈알이 뽑힌 후 배에 태워 바다로 흘러갔나이다. 폐하.”
  비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꾹 참고 다시 물었다.


  “그래, 너는 그가 배에 태워져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소인의 생각으로는 아마, 지금 쯤 미추홀 앞 바다나 아니면 그 주변 천성도로 흘러갔을 겁니다.”


  “그래? 천성도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성 밖에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됩니다.”
  “그럼 너는 짐을 나루터까지만 수행하렷다.”
 

  위례성(慰禮城)은 여름 밤 새벽 안개에 자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밤잠이 없는 매미가 울어 대고 달이 숨은 밤하늘에는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은하수가 머리위에서 흐르고 있다. 비랑은 마음이 급했다. 두 식경쯤 걸으니 나루터가 나왔다. 병사에게 금 한량을 주고 돌려보냈고 잠자는 뱃사공을 깨웠다. 화려한 복색의 귀족을 보자 사공들은 넙죽 엎드렸다.


  “나는 왕의 동생이다. 내 급히 왕의 명으로 볼 일이 있어 천성도를 가야하니 빨리 배를 저어라. 내 너희들에게 뱃삯은 넉넉히 주겠다.”
  비랑이 사공 여섯 명에게 금 한 덩이씩 주자 사공은 입이 벌어졌다.


  “여기서 천성도가지 얼마나 걸리느냐?”
  “족히 한 나절 이상 걸립죠. 순풍이 불면 바람을 타고 두서너 식경 후면 당도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역풍이 불면 하루는 족히 하루는 잡아야 합지요.”
  나이가 가장 많은 듯한 사공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좋다. 내 너희들에게 가장 높은 뱃삯을 줄 터이니 가장 빠른 배를 대령하렷다.”
  사공들은 자신들 끼리 뭐라고 소곤대더니 큼지막한 배를 대령했다.


  “나으리, 이 배는 비상시에 군선(軍船)으로 사용하는 배입니다. 이 배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사온데 나으리는 나라님의 동생이라 하오니 특별히 저희들이 대령하였나이다.”
  돛대가 달리 쾌속선처럼 보이는 배는 10명 이상이 충분히 탈 수 있어 보였다.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라. 최고로 빠른 속도로 나아가라. 가면서 혹시 조그만 나룻배가 보이거든 배를 멈추어라.”
  여섯 명이 젖는 배는 화살처럼 강을 달렸다.


  ‘그이가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여봐라, 사공들은 빨리, 더 빨리 노를 저어라“


  남장을 하고 칼은 찬, 비랑의 서슬에 눌려 뱃사공들은 전속력을 냈다. 날이 맑아오기 시작했다. 희부연 물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천성도에 도착해야 했다. 분명히 도미는 천성도에 있을 거라고 비랑은 확신했다. 만약 정오 안으로 도미를 찾지 못하면 추격해오는 백제수군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도미, 여보, 제발, 제발 살아만 있으세요. 당신의 아내가 지금 가고 있답니다. 여보, 도미 제발 살아만 있으세요. 여보......’
비랑은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배가 뱀처럼 서해(西海)를 향해 바람을 갈랐다. 다시 한 식경을 달렸다. 안개가 완전히 걷힌 강 저 멀리 희끄무레한 점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으리, 섬입니다요. 천성도 입니다요. 나으리.”
  “아, 천성도(泉城島)!”
  배는 더욱 빨리 바람을 뒤로했다.


  “사공들은 어서 빨리, 조그마한 나룻배를 찾아 보거라. 어서”
  비랑의 서슬에 사공들은 천성도를 빙 돌며 나룻배를 찾았다.


  “저기다, 저기 뭔가 있다.”
  젊은 사공이 소리쳤다. 분명 배였다. 도미가 타고 있는 배가 분명했다. 비랑이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였다.

                                 

                                                                                                                    -끝-





             





 『삼국사기(三國史記)』 도미전(都彌傳)을 보면 백제 개로왕(455~475)이 도미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도미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한 후 배에 실어 띄워 보냈고, 이후 도미 아내가 도

망하여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 도미를 만났다고 한다. 천성이라는 지명이 확인되

는 것은 5세기 중엽이며, 천성은 대체로 한강 하구에 위치한 지금의 오두산성(烏頭山城)으

로 비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