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
- 여강 최재효
1
점심식사후 회사에 반가(半暇)를 냈다. 아내와 오후 1시 X마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초겨울의 시내가 무채색으로 덧칠되어 있다. 아내가 나를
발견하고 마트입구에서 손짓을 한다. 어제저녁에 나와 상의하여 오늘 시장 볼
것을 꼼꼼히 적은 메모지가 손에 쥐어져 있다. 작년에는 둘째 형님댁에서 아버님
기일 때 쓸 제수용품을 구입했었다. 메모한 종류만도 이십여 가지가 넘는다.
나와 아내는 카트 한 개씩 끌고 다니며 운동장 같은 마트를 누비고 다녔다. 대형
마트가 생기기 전에는 양손에 제수용품이 담긴 비닐봉투가 여러개씩 들고 시장을
누벼야 했다. 한 시간 넘게 시장을 보고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들어
서자 챠량들이 지체와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내가 피곤 하다고 하자 아내가 운전을
했다. 아내는 나보다 십년 앞선 운전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顯考孺人漢陽趙氏 神位]
내가 사십년 가까이 보아 온 지방(紙榜)이다. 어린시절에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몰
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년 큰어머니 기일이 되면 정성스럽게 제사를 준비하였다. 그
날은 아침부터 온 가족이 발걸음 조차 조심스러웠고 기침소리 내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밤12시가 되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제사를 지냈다. 막내인 내 차례가 되면 술 잔만 올리고 절 두 번하고 나머지 순서는 눈치껏 형님들을 따라 절을 올리면 되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큰어머니가 아버지의 전처(前妻)임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
보다 앞서 부인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는 아버지에게 큰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물으면 아버지는 그냥 '큰어머니'라고만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큰어머니거나 집안 내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어머니가 있었나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세상물정을 어느정도 알게 될 나이가 되자 서서히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삼십이세 나이로 징병되어 낙동강 전투에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이미 딸 둘을 두고 있었고 큰 어머니는 임신중이었다. 얼마후 아버지는 아내가 또 딸을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은근히 아들을 바라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크게 낙담을 하였다. 큰 실망을 안겨준 막내며느리에게 혹독한 냉대가 이어졌다. 아기도 어쩐일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시부모의 차가운 시선, 주변의 비웃음, 홀로 세 딸을 키워야 하는 부담, 남편의 전쟁터
출전으로 인한 미래의 불확신등 이러한 것들이 큰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전쟁중에 막내 며느리의 죽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등 집안내 어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큰어머니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히 알기전까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불만이 많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어머니가 시퍼
렇게 살아계신데 무슨 제사냐고 아버지에게 항의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아왔다.
큰 어머니의 몸에서 출생한 두 이복누이들이 항상 주변에서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고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 누이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느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시원하게 되지않은 상태같았다. 차가 도심을 빠져나오자 시원하게 고속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눈을 감고 조수석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내가 자는 줄 알고 내 어깨를 흔들었다.
"자기야, 저기 저 휴게소에서 좀 쉬었다 가자." 내가 대답도 하기전에 차는 휴게소
입구로 들어섰다. 아내는 차에서 내리자 마자 화장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평일
오후지만 휴게소는 인파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진한
커피향이 파도처럼 온 몸에 퍼졌다. 출발하기 전에 나도 화장실에 들렸다. 몸이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친다. 응달진 노견 중간중간에 간밤에 내린 눈이 약간 쌓여있다.
결혼전 고향집을 가는 길은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하였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또 아버지가 안계신 고향집을 찾는 발길은 쓸쓸했다.
아버지 제사상 앞에 붙을 지방에는 [顯考學生府君 神位] 와 [顯妃孺人漢陽趙氏 神位]가 나란히 씌여질 것이다. 명절 때 차례가 끝나면 아버지는 자식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고조부 내외분과 증조부 내외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와 큰아버지 부인들 까지 일일이 산소를 찾아 다니며 성묘를 했다.
그러나 큰어머니의 산소를 가본적이 없었다.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큰어머니 산소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도 보았지만 그때마다 묵묵부답이셨다. 형님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하였고 누이들도 같은 대답이었다.
누이들도 어린나이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얼굴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산소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를 통해 큰어머님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는 왜 큰어머니의 산소가 존재하지 않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좀더 세월이 흐른후 큰어머니는 화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전쟁 때 집안 어른신들은 젊은 여자가 극약을 마시고 죽은 사실에 대하여
쉬쉬하며 바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한다. 큰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때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이었다. 매년 큰어머니 기일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얼굴
도 모르는 분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질투와 시기라도 해야 할 어머니는 같은 남자를 섬기는 입장으로서 큰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과 살아있는 자식들의 무운을 빌며 제사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 할 수 없었다. 그해 늦가을 추석명절을 보내고 얼만후 어머니
로부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시지 않으셨고 읍내에 있는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다고 했다.
형제들이 다시 십여일만에 고향에 모였다. 아버지는 의식이 정상인과 다름없어
보였다. 동네 주막거리에서 친구분들과 약주를 몇 잔 드시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버스에 치이셨다. 그 버스를 운전하던 기사는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먼 친척벌 되는
갓 결혼한 청년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사실을 알고 그 청년이 경찰서에서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불리하게 진술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저녁에 그 청년의 아버지가 병원으로 문안을 왔다. 자식으로 인하여 우리 형제들
에게 크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날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셨다.
“내가 어제 밤 꿈에 너희들 큰엄마를 만났다. 아무래도 난 오래 못살 것 같구나.”
아버지는 꿈에 자주 나타나지 않던 큰어머니가 현몽한 사실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형들과 누이들은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편치않은 듯 했다. 아버지는 하룻밤 사이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큰형님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큰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며 형제들과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병든것도 아닌데 무슨 큰 병원이냐면서 그냥 읍내 병원에
있겠다고 했다. 또 다시 며칠이 평상시처럼 지났다. 아버지는 황달로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다며 아버지를 큰 병원으로 옮기
자고 합의를 보았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가까운 나와 큰형은 번갈아
가며 밤이면 아버지 병간호를 해야했다. 의사는 노인들은 약간의 상처나 질환에도
합병증세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평생 농삿일로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던 아버지의 몸에 이상증세가 생긴게 틀림
없어 보였다. 당신 스스로 일어나기도 하고 화장실에도 다닐 정도로 건강해 보였지만
하루하루 달라 보였다. 내가 아버지 병간호를 하던 날 새벽이었다. 옆의 빈침대에서
잠을 자던 나는 부스럭 소리에 잠이 깼다. 아버지는 침대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당신이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느끼신 것 같았다. 내가
일어나 앉자 내일 회사출근 하려면 피곤 할테니 더 자라고 하신다.
“네 큰엄마가 또 나타났구나. 네 큰엄마가 나에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리셨다. 다음날부터 나는 큰어머니의 존재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어머니에게 귀찮을 정도로 꼬치꼬치 물었다.
나의 질문에 어머니의 답변은 전에 말씀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누이들에게 큰어머니에 대하여 물어보아도 그 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날이 갈 수록 아버지는 점점 야위어 갔다. 시골서 큰병원으로 옮겨 올
때만해도 건강해 보였었다. 아버지의 뼈만 남은 앙상한 팔뚝에 날이 갈 수록
색다른 링거병이 선을 보였다. 아버지 혼자서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나는 또 어머니에게 언제부터 큰어머니 제사를 지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시집오고 몇 년후라고 하였다.
운전을 하던 아내가 내가 잠이든 것으로 알고 흘러간 팝송 CD를 돌렸다. 비틀즈의
“Let it be"가 차안에 향기롭게 퍼졌다. 실눈을 뜨고 보니 시속130킬로 속력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자는 척 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그냥 계속 자는 척 하기로 했다.
내가 병간호하는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아버지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
나셨다. 갈 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보였고, 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내팔을 의지하며 대변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 큰어머니 또 만나셨어요?”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그러나 대답은 없으셨다.
“아버지, 큰 엄마에 대하여 몇가지 여쭤볼께요.”
좌변기에 앉아 힘을 주던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다.
“큰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화장(火葬)한게 맞아요?”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다리를 바르르 떨며 힘겹게 좌변기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병실로 들어가시더니 창밖을 내다보시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새벽하늘에 보름달이 탐스럽게 웃고 있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 온 저 달.
인간도 저 달처럼 억겁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인간에게 죽음이 있기에
짧은 삶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닌지. 보름달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아버지는
침대에 다시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버지는 힘겹게 한마디 하셨다.
“네 큰엄마는 화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셨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하는 듯 하다.
“네에? 그럼 산소는 어디에 있어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 심장은 쿵쾅거렸다. 분명히 아버지는 큰어머니를 화장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어디에 큰어머니의 묘가 있단 말인가?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맡다시피 했다. 가끔 형수들이 와서 낮 동안 아버지 병실을 지켰다. 어머니의
얼굴빛도 점차 굳어져 갔다. 출근을 하자마자 큰 형님한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한 이야기를 전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답변만 들어
야 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하여도 형님은 믿으려 하지않았다. 아버지 말고 그 누구도
큰어머니의 장례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 큰어머니를 화장하지 않았다면
시신을 어떻게 처리 하였단 말인가? 모든 것을 알고있는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나는 큰어머니가 세상을 버릴 당시의 모든 정황을 생각해 보았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어 있었다. 대구, 부산 함락을 목전에
둔 인민군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아버지는 전장에서 큰어머니의
부음을 접했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 큰어머니 장례를 치루기 위해 고향에 올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등 집안 어른들이 큰어머니 장례를 치루었
을 것이다. 어머니는 큰어머니를 화장하였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큰어머니를 어떻게 장사지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이된다. 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오고 이년후
어머니와 새 살림을 차렸으니 어머니도 큰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것이 된다. 시집와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로부터 큰어머니의 존재에 대하여 대충
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큰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사람들은 모두 고인(故人)이
되었다.
또 다시 내가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날이 되었다. 하루종일 아버지 간호를 하시던
큰형수는 내 얼굴을 보자 해방감을 맛 본듯 한 표정이다. 형수는 아버지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누워만 계셨다고 했다. 이틀전 보다 아버지의 눈은 더욱
깊었다. 푹 꺼진 구덩이 같았다.
검고 생기있던 아버지의 눈동자는 투명하고 맑았으며 회색빛을 띠고 있다.
큰형님이 저녁 때 입원실을 찾았다. 어제 한 이야기가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나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그제 새벽 아버지는 분명히 큰어머니가 화장을 한 것이 아니
라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황당한 말로 일축하던 형님도 최근
아버지가 자주 꿈속에서 큰어머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오던 터라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입원실에는 다른 입원환자 가족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손님들이 모두 나가자
입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침에 아버지 옆 침상에 한달째 입원중이던 육십대
초반의 간암환자가 죽어 나갔다고 했다. 그 침상에는 오십대 중반의 얼굴이
새카맣게 탄 남자가 누워있었다. 옆에서 간호를 하는 그 환자의 부인의 행색으로
보아 시골서 올라온 것 같았다. 남자가 얼굴이 새카맣고 장작개비 처럼 마른
것으로 보아 분명 간(肝)에 고장이 있어 들온 환자임에 틀림없었다.
갓 아기를 출산한 산모나 젊은 사람들이 들어있는 입원실과 노인들이 들어
있는 입원실은 많은 차이가 있다. 젊은층들이 입원해 있는 입원실은 분위기도
쾌활하고 생기가 넘치는 반면 노인환자들이 들어있는 입원실은 조용하며
분위기도 썰렁하며 환자들은 곧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최후의 종착역에 들어온
기차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잠을 주무시는지 약한 숨소리만 날 뿐
미동도 없었다. 형님이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아버지는 눈을 떴다. 형님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화장으로 장례를 치룬게 아니에요?"
형이 조용히 물었다. 형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진위여부를 듣기위해 아버지 직접
여쭤보고 싶어 병원을 들린 것 같다. 나와 형제자매들은 큰어머니의 무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지내왔고, 사촌들과 추석전에 조상님들의 묘소를 벌초를 하면서
한 번도 큰어머니의 산소를 벌초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형님의 질문에
한 참만에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내가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네 할아버지로부터 네 큰엄마를 화장을 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단다. 그리고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네큰엄마 시신을
화장하려 하니까 친정에서 사람들이 와 자신들의 선산에 묻겠다며 큰엄마시신을
운구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나중에 처가집을 방문해 보니 전쟁중에
처남들은 모두 죽고 장모만 혼자 살아 있었는데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결국 나도 네 큰엄마 산소를 찾지 못했지.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 네 큰엄마가 자꾸 꿈에 나타나는 구나."
형님은 충격을 받은 듯 휴게실로 나와 한 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 보며
줄담배를 피워댔다. 오십년 가까이 정성을 다해 처의 제사를 지내 온 아버지가
왜 그런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혼을 하면서 극약을 마시고 죽은 전처의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바르도(2) (0) | 2006.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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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終) (0) | 200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