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유별이란 무엇의 의미하는가? 부부 사이에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분명 사내들이 제2의 오락을 찾기 위해 억지로 규정해 놓은 은밀한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유학(儒學)을 체계화시킨 사람들의 애초 취지를 자세히 음미해보면 부부 사이의 분별이 아니라, 지아비와 지어미가 평생 배우자만 은애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성인(聖人)일지라도 인간의 원초적 욕구인 정욕(情慾)을 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의로서 조절하지 않으면 인간사회가 금수(禽獸)의 세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도덕적 규범을 세웠을 것이다.
부자가 영명궁을 찾은 뒤로 벌휴공은 마치 안방 드나들 듯했고, 이매랑 역시 그미의 처소를 마치 기루(妓樓)에 다니듯 했다. 벌휴공은 그미를 찾으면 보통 한두 *시진(時辰) 정도 머무는데, 이매랑은 온종일 영명궁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날은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에 귀가하는 때도 있었다.
부자가 영명궁에 겨끔내기로 드나들기 시작한 지 서너 달이 지나자 야릇한 소문이 나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그 소문은 어느새 대소신료들 귀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아달라이사금은 전혀 그러한 소문을 모르고 있었다.
“파진찬(波珍飡), 내례부인에 관한 소문 들으셨습니까?”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입니다. 이 소문이 이사금 귀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벌찬(伊伐飡)께서 나인들과 내시들에게 특별히 주의를 시키세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리 신료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렵습니다.”
“*대아찬(大阿飡), 뭘 그리 걱정하세요? 벌휴공은 탈해이사금의 손자이고, 이매는 벌휴공의 아들 아닙니까? 한때 나라를 다스렸던 석씨(昔氏)입니다. 그들이 무슨 헛된 짓이야 하겠습니까? 내례부인께서 이사금과 사이가 틀어지고 나니까 말동무도 없고 적적하시니 외부 사람을 들이는 게지요.”
“*잡찬(迊飡) 말씀이 맞아요. 나인들이 쓸데없이 흘리고 다니는 말에 우리 중신들까지 꺼둘리면 되겠습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하자고요.”
신료들은 아침에 입궐하면 요즘 궐내에 떠돌고 있는 소문에 대하여 왈가왈부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중신들은 근거도 희박한 이야기를 가지고 중론화하다 헛소문이라고 판명될 경우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소문은 금방 저잣거리까지 번져 나갔다. 서라벌의 삼척동자까지도 궁중에서 들려오는 요상한 소문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잡배(雜輩)들이나 아낙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미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한 시진 - 대략 2시간 정도
* 파진찬 – 계림 국위 17 관등 중 네번째, 이벌찬 - 첫 번째 등급, 대아찬 –다섯째 등급, 잡찬 - 세번째 등급.
“가실아, 어제도 이매랑이 영명궁에 다녀갔다며? 얼마나 머물렀다 갔니?”
그미의 처소에 소속된 가실은 요즘 궁궐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인이 되어있었다. 신실하지 못한 그녀의 입방아로 인하여 궁궐 내 궁인들은 영명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십여 년 넘게 그미의 시중을 들고 있는 고참 나인이었다.
그녀만큼 그미의 사생활을 잘 아는 나인이 없었다. 영명궁에는 열 명의 나인들이 그미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실이 나인들의 대장 역할을 하며 영명궁의 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다.
“쉿-,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해. 소문나면 난 죽은 목숨이다. 어제 이매랑님께서 점심때 오셨다가 오늘 새벽에 귀가하셨어. 나는 밤낮으로 식사와 술 그리고 안주를 대령하느라고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단다.”
“두 분이 그리 오랫동안 붙어서 도대체 무얼 하고 지낸 거야?”
“잘 들어봐라. 어제는 말이다. 대낮에 두 분이 술 한잔 드시고…….”
가실이 입방정을 떨자 어느새 나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나인들이 몰려들자 가실은 더욱 들뜬 상태로 본인이 목격한 이야기를 하느라 신이 났다. 본인이 목격한 것을 배로 부풀려 말하는 그녀의 말재주에 나인들은 탄성을 질러대기도 하고 한숨을 토해내기도 했다.
“어머, 어머. 그럼, 내례님과 이매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어쩐지, 하여간 남녀가 장시간 함께 붙어있으면 반드시 붙어먹는다니까. 내가 내례님이라도 이매님에게 빠져들고 말 거야.
선풍도골의 훤칠한 키에 날렵한 몸매, 하얀 살갗, 붉은 입술, 백옥보다 흰 치아.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 뇌쇄적이고 따뜻한 미소, 아-, 나는 언제 그런 사내를 만나볼거나. 서라벌 여인 중에 이매님에게 홀리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을까?”
“내가 보기엔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는 이미 넘었어. 저러다가 함께 궁 밖으로 도망가는 거 아냐?”
“이사금을 두고 유부녀가 가긴 어디를 간다는 거야? 고구려나 백제 또는 왜국으로 도망치면 몰라도 계림국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잖아.”
나인들이 가실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으면 군졸들이나 *관속(官屬)들도 살며시 다가와 그미 소식을 물어보곤 했다.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만들어 냈다. 궁성의 나인들과 관속들은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미와 이매랑의 야릇한 이야기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시시각각 들려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다시피 한 벌휴공과 이매랑의 영명궁 출입에 처음과 달리 신경 쓰는 나인들이 차츰 줄어들었다. 부자가 영명궁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지 어언 이태가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각간, 내례부인에 대한 소문 들으셨습니까?”
“방금 잡찬한테 들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큰일입니다. 군주가 죽은 뒤에 허전해진 비빈(妃嬪)들이 종종 궁실 사내들과 통정(通情)을 했던 적은 있었지만, 이사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통정하다니요? 천벌을 받을 짓입니다. 소문의 진위(眞僞)는 가려야겠지만, 아직은 좀 더 지켜보는 게 상책일 듯 합니다.”
* 관속 – 궁궐이나 지방 관아에 배속된 하급관리나 하인.
그미가 결국에는 이매랑의 씨앗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 사실은 각간을 비롯한 중신 서너 명과 영명궁에 소속된 나인들만 알고 있었다. 각간은 가실을 불러 그미의 임신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시켜도 비밀은 누설되게 마련이었다. 중신들은 그미의 임신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달라이사금에게 그미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특히 각간은 그미 집안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터라 중신들과 궁인들 입 관리에 골몰했다.
‘이사금이 이 사실을 아는 날이면 피바람이 불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사금보다 내례부인의 정치적 역량과 배경이 더 막강하다. 이제 중신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사금이냐 아니면 내례부인이냐. 이사금과 내례부인은 같은 박씨 가문의 사람이면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사금은 박씨 문중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데 비해 내례부인은 박씨 문중 뿐만 아니라 김씨들과 석씨들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석벌휴와 그의 아들로 인하여 석씨들은 모두 내례부인 편이 되었다. 나는 어디로 붙어야 하나? 이사금 측과 내례부인 측간의 혈전이 임박하고 있는데…….’
각간은 한숨만 푹푹 쉬며, 자신의 장래 일을 걱정하였다.
“이매랑, 나는 이제 그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은애합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중에 나의 아이까지 자라고 있으니 항상 몸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넉 달입니다. 넉 달만 견디면 됩니다.”
“사람들이 나에대해 어떤 말을 할지 걱정입니다.”
“그대는 이사금만 신경 쓰면 됩니다. 어차피 이사금과 한바탕 피 터지는 싸움을 해야 할 겁니다. 아버님은 김씨 문중 사람들과 석씨 가문 사람들을 규합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미와 이매랑이 한 차례 운우를 나누고 나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매랑은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미의 복부를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귀족 가문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군주 부인을 건드려 임신까지 시켰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매랑은 그미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만큼 고민도 함께 커갔다. 대낮인데도 남녀의 대담한 밀애는 거칠 것이 없었다. 가실은 문 안팎을 두리번거리며 행여 외부인이라도 들어올까 봐 잔뜩 긴장된 얼굴로 이리저리 바장였다. 영명궁 나인들은 말 대신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평상시처럼 행동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차피, 나와 이사금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한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사금을 죽여야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고 뱃속에 든 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매랑은 무서운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석씨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면 ‘곧 석씨의 세상이 될 것이다. 탈해 할아버님이 우리를 비호하고 있다.’며 알쏭달쏭한 말을 흘리곤 했다. 벌휴공은 그미가 이매랑의 자식을 잉태한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펄쩍 뛰었으나, 이제는 석씨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매랑보다 한술 더 떠서 ‘곧 석씨 가문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며, 천지신명이 모두 석씨의 편을 들고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석씨 가문과 김씨 가문 그리고 그미와 연대하고 있는 박씨 가문 사람 중에서 눈치 빠른 자들은 벌휴공이 세상을 구할 성인이라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이보시게, 이매가 내례부인 몸속에 씨앗을 뿌렸는데 말이야, 그 씨앗이 아들이라면 장차 어찌 되는가?”
“지금 아달라이사금에게는 다른 후궁 몸에서 나온 아들 둘이 있는데 병약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한대요. 그런데 내례부인이 아들을 낳는다면 일이 복잡해지지. 우선은 아달라이사금이 불륜을 저지른 부인을 그냥 놔둘 리가 있겠는가? 부인이나 이매 둘 중에 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할 거야.
다행히 부인이 아들을 낳고도 무사하다면 그 아들이 장차 보위를 이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전에 아달라이사금의 후궁이 낳은 두 아들을 어찌해야겠지.”
“어찌한다? 그럼, 후궁 자식들을 죽여야 한다는 건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일세그려. 하지만 운이 좋으면 부인도 살고, 이매도 살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 그 아들도 산다면 우리 석씨 가문에 광영이지. 암 그렇고말고. 탈해 할아버지께서 붕어하신 이후에 우리 석씨들은 거의 백 년 동안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지.”
석씨 문중 사람들은 이매랑과 그미의 관계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매랑의 대담한 행동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석씨 가문의 중흥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미가 이매랑의 아이를 뱄다는 소식은 서라벌 귀족들 사이에 은밀히 전파되면서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장차 벌어질 일에 대하여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신들이 어찌 행동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김씨들은 무조건 벌휴공과 이매랑을 밀어야 하네. 벌휴공은 점성가로도 유명하고, 서라벌 사람들에게 성자(聖者)로 추앙받고 있다네. 또한, 그는 예언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어. 여태껏 그가 예언한 말이 틀린 적이 없었대. 헐벗은 사람들을 보면 적선하고, 고관대작이나 귀족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서민들을 위해 송사(訟事)를 대신 떠맡아 주기도 한다니, 참으로 하늘이 낸 사람이네.
하여간, 서라벌 사람들은 벌휴공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성인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네.”
“아달라이사금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오죽하면 박씨 문중 사람들도 아달라보다 내례부인을 더 지지하겠는가?”
“참으로 한심한 일은 이사금과 내례부인 둘 다 박씨인데도 서로 아웅다웅 갈등을 겪고 있으니 조만간 큰일이 터질 거야. 그 와중에 내례부인이 이매랑과 사통하여 아이를 잉태했다는데, 앞으로 일이 어찌 전개될지 자못 기대되네그려. 내가 볼 때는 이사금이 그 사실을 알면 내례부인을 죽이려고 할 거야.”
김알지의 후손들도 모이기만 하면 그미와 이매랑 사이의 야릇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벌휴공과 이매랑에게 기울고 있었고, 두 사람이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그게 정말이냐? 내례가 벌휴의 손자를 잉태했다고? 그년이 제정신인가?”
“내례부인과 이매를 당장 잡아다 물고를 내야 합니다. 살려두면 장차 이사금에게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계림국 이사금의 정비(正妃) 신분으로 외간 남자와 사통하여 임신까지 한 사태는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일입니다.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합니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의 귀에 그미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고 말았다. 이사금의 최측근 중신들은 그미와 이매랑을 성토하며, 두 사람을 벌주라고 주청했다. 조정에도 석씨 가문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뜻이 다른 인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석씨들의 행동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부 중신들은 지금이 조정에서 석씨들을 축출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아달라이사금은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그년이 나와 여러 해 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못하더니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보쟁이니 기가 막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부정한 씨앗까지 잉태했다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냥 두면 내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그년의 뒷배경이 나보다 더 막강하니 이를 어쩐다?’
아달라이사금은 딱히 묘수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이사금께서 이일을 어물쩍 넘기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국기를 문란하게 만든 장본인인 내례부인을 처벌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내례부인을 그냥 두면 이사금의 위신이 땅에 떨어집니다. 부정을 저지른 내례부인을 처형하여 이사금에게 각을 세우고 있는 일부 박씨들과 석씨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절대로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이사금의 심복들은 거듭해서 아달라이사금에게 그미의 처벌을 주청했다. 그러나 아달라이사금은 신중했다. 심복들 말대로 그미를 당장 처벌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라벌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박, 석, 김씨들의 핵심인물을 포섭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자신이 궁녀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고 후궁들과 등하색을 즐기는 사이에 세 명문가 사람들과는 소원한 관계가 된 것이었다.
”당장, 이매를 잡아 와라.“
그는 이매랑 한 사람만을 처벌하여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아달라이사금이 그미를 처벌한다는 것은 지아비로서 무능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벌휴공은 이미 서라벌 백성들의 우상(偶像)이 된 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사금이라 하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매랑이 오랏줄에 꽁꽁 묶여 형부에 잡혀 왔다.
“이놈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느냐? 어서 오랏줄을 풀지 못할까?”
“네 이놈, 네가 정녕 잡혀 온 이유를 모른단 말이냐?”
이매랑이 거칠게 항의하자 아달라이사금이 달려와 이매랑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형부 앞마당에 형틀을 준비해놓고 아달라이사금과 중신들이 국문을 직접 주관하였다. 아달라이사금은 이매랑이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식의 태도로 나오자 분을 삭이지 못했다.
“내례는 나의 사람입니다. 이사금께서 헌신짝 버리듯 한 사람을 내가 은애를 했을 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사금께서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지아비로서 지어미를 이유 없이 오랫동안 방기(放棄)한 것도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어서 나를 풀어주십시오.”
“이놈, 나는 이 나라 군주이니라. 네놈이 간이 부었구나. 오늘 내가 네놈을 죽이고 말 것이다. 감히 군주의 지어미를 건드려 임신을 시켜? 네놈은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매랑은 잡혀 올 때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아달라이사금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달라이사금이 이매랑의 말에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한 여인을 가운데 두고 계림국의 군주와 귀족 청년이 사랑싸움하는 광경에 중신들과 형리(刑吏)들은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나라가 세워지고 군주와 백성이 연적(戀敵)이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 나라의 지존이면 지존답게 행동하시오. 지존이 인덕이 없으니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지요? 군주라는 자가 국사는 내팽개치고 허구한 날 계집들 치마폭에 사여 주지육림에서 살고 있으니 나라 꼴이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매랑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그의 말에 일부 중신들은 속으로 시원함을 느꼈고 형리들도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뭣? 이노옴-.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하였구나. 여봐라. 저 역적놈이 죽을 때까지 매를 쳐라.”
대낮에 궁성에서 매를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매랑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러쳤다 깨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매를 치는 형리들도 지쳤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신들도 지쳤다. 한나절 매를 맞던 이매랑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십 중반의 청춘이 아달라이사금의 내례부인에 대한 복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