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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 누(3)

* 창작공간/중편 - 반야의 누

by 여강 최재효 2019. 7. 3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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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강 최재효




                                               3



 
 남녀 사이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체적 접촉 없이 마음만으로 과연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것인지. 물질이 바탕이 되고 그 바탕 위에서 사고

(思考)가 생겨날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다 하겠다. 사람은 일

정한 나이가 되면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상(理想)과 동시에 이성

(異性)을 찾게 된다. 어쩌면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의 교묘한 섭리가 사람

의 심신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왕과 반야의 첫 방사(房事) 이후 왕은 밤낮으로 반야를 그리워하였다.

사나흘을 간격으로 왕은 신돈의 집을 찾았다. 왕이 신돈의 집으로 행차

하는 일이 잦아지자 명덕태후 홍씨의 귀에 반야라는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후는 왕의 그러한 일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태후는 왕이 마음

붙일 데가 없어 방황하던 차에 한 여인에게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

할 뿐이었다. 한 달, 두 달, 석 달 그리고 반년이 지나도 왕의 신돈 집 행차

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하, 어찌하면 좋습니까? 지난달부터 소비에게 꽃물이 끊겼습니다. 어

제부터는 딸꾹질과 함께 *오조증이 심해 하루 세끼 식음을 넘기기도 어렵

습니다. 자꾸만 시큼한 것이 먹고 싶습니다.”
 “이 아이가 분명 과인의 아기가 맞느냐?”


 “전하, 소비는 그런 하문을 들으니 죽고 싶습니다. 이 아이는 전하의 용종

(龍種)입니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다. 의심이 아니라 너무 기뻐서 하는 말이다.”


*오조증(惡阻症) - 입덧


 왕은 후비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후궁이 수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자신의 생식 능력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야가

임신하자 왕은 믿기지 않았다. 반야는 왕을 만나기 한 달 전에 잠시 꽃물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신돈의 아이를 밴 줄 알았지만, 다음 달 다시

꽃물이 비치면서 그녀는 안도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같은 사실을 신돈에

게 알리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는 전하의 씨앗이 맞다. 전하와 첫날밤을 치른 이후에 거의 석

달 동안 편조님 하고는 합방을 한 적이 없었어. 나는 그 석 달 동안 열 차례

이상 전하와 관계를 맺었으니, 이 아기는 용종(龍種)이 맞아. 행여 편조님이

이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믿고 있는 게 아닐까?’ 


 임신 사실을 기뻐하는 왕을 옆에 두고 반야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애초에

는 신돈이 자신의 씨앗을 잉태한 반야를 왕에게 합방시키려고 하였으나 사실

은 임신이 안 된 상태였다. 반야는 사실을 말하면 신돈에게 핍박을 받을까 두

려워 진실을 숨겼다. 반야는 일단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전하, 경하드립니다. 이는 전하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 더 나아가 고려 만

백성의 홍복이옵니다.”


 “모든 게 청한거사 덕분입니다. 경이 아니었다면 과인이 어찌 오늘 같은

경사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왕은 신돈을 크게 칭찬하며 어주(御酒)를 내렸다.


 “전하, 소비가 얼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오, 그래? 그럼, 태몽이구나. 어떤 꿈을 꾸었느냐?”
 왕은 반야의 꿈이 무척 궁금하였다. 


 “소비가 눈 덮인 산에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흰 코끼리 한 마리가

소비의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 뱃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일

어나보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답니다. 생전 본적도 없는 코끼리가 왜 소

비 뱃속으로 들어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반야는 산에 오르다 정체불명의 동물을 본 꿈을 부풀려 왕에게 말했다.

왕은 반야의 꿈 이야기를 듣더니 반야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대견스러워

했다. 


 “네가 부처님 꿈을 꾸었구나.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임신했을 때에도 그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흰 코끼리는 석가모니의 현신이나 다름없단다.

이는 고려 왕실의 경사가 아닐 수 없구나. 고려는 불교의 나라가 아니더냐.

너의 이름이 반야(般若)이니 부처님께서 어미와 자식에게 수승한 자비를

베푸셨음이야.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전하, 이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 모르는데요?”
 “네가 흰 코끼리 꿈을 꾸었으니 분명히 아들이 틀림없다. 장하다. 정말로 장

한지고.”


 왕은 반야의 임신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였다. 얼마전에 왕비도 어렵게 임

신을 하였지만, 태몽을 꾼 적이 없었다. 반야가 코끼리 꿈을 꾼 사실을 왕은

일종의 신의 계시(啓示)로 생각하였다. 왕은 곧장 모후인 명덕태후에게 달

려가 반야의 임신 소식을 고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태후 홍씨는 크게 반

가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요? 일단 왕실에 좋은 일이 일어났군요. 축하합니다.”
 “태후마마께서는 기쁘지 않으십니까?”


 “기쁘지요. 기쁘다마다요. 그렇지만 지금 왕비가 임신 육 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왕께서 너무 자주 궁궐 밖 출입을 하십니다. 자제하셔야 합니다.

괜히 왕비의 태중에 있는 용종이 부정을 탈까 저어됩니다. 밖에서 자식을 보

신다면 그 아이는 왕비가 낳을 아이보다 한 단계 격이 낮습니다. 이 점을 분

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태후의 말 속에는 왕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왕은

 모후(母后)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슬며시 태후 전을 나왔다. 왕이 대전으로

들자 왕이 밖에서 자식을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종친 몇 사

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반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고 나머지

종친들의 얼굴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경복흥도 있었다.


 “전하,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감축하나이다. 이는 고려 왕실의 경사이지만 더 두고 보면서 반드시

정리할 바가 있사옵니다.”


 경복흥이 묘한 말을 하였다. 경복흥은 태후 홍씨의 질녀(姪女)와 혼인하여

태후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경복흥은 태후가 반야의 임신 사실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정리할 것이란 바로

반야가 신돈의 조카라고 소문이 났지만 이미 몇몇 중신들은 반야의 출신과

신돈과의 관계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경복흥 역시 반야가 천

출(賤出)이며 신돈과 묘한 관계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녀의 직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였다.


 “과인은 반야를 궁에 들여 후비의 직첩을 내리고자 합니다.”
 갑작스러운 왕의 말에 종친들은 기가 막혔다.


 “전하, 반야는 천출이라 하옵니다. 천출이 어찌 비(妃)의 첩지를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전하, 반야라는 여인은 신돈의 비첩(婢妾)이란 풍문이 있사옵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신 후에 첩지를 내리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종친 중에서 신돈과 척을 세우고 있는 자들이 왕의 뜻을 정면으로 반박하

고 나섰다. 왕도 반야가 신돈의 비첩이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몇몇 사람들이 신돈을 시기하여 지어낸 말이라고 치부하고 싶

었다. 마침 신돈은 대전에 있지 않았다.


 ‘뭐라, 반야가 청한거사의 비첩이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왕의 안색이 밝지 않았다.


 “전하, 근거도 없이 함부로 반야를 매도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그

녀가 아무리 천출이라 하여도 용종을 잉태한 이상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

셔야 마땅하옵니다.”
 왕은 공양군 왕요(王瑤)의 말에 분기를 석삮일 수 있었다. 


 “과인이 여러분에게 어명(御命)을 내리겠습니다. 오늘 과인과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당분간 외부에는 철저하게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

니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가면 정국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 수 있

습니다.”
 종친들이 물러간 뒤에 왕은 신돈을 별도로 불러 반야와의 관계에 관하여 물

었다.


 “전하, 혹시 시정잡배들이 반야에 대하여 이상한 말을 하였다면 그들의 말

에 조금도 신경 쓰지 마소서.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소신과 관계된 일이라

면 무조건 반기를 드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반야는 소신의 먼 친척뻘 되옵니

다. 소신이 일찍이 전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현화사(玄化寺) 주지로 있을

때 데리고 와서 조용히 수신(修身)케 하고 예문(藝文)과 기예(技藝) 등을 익

히게 하였나이다. 반야는 본성이 사슴처럼 착하고 재주도 많은 아이입니다.”


 신돈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반야를 두둔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자칫 진상이 밝혀지면 신돈과 반야는 기군망상(欺君罔上)으로 거열형에 처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과인도 그리 믿고 있습니다. 경의 말을 잘 알겠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돈은 왕 앞에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청한거사는 반야가 잠시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알아봐 주세요. 행여

반야를 해하려는 음흉한 무리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반야가 마음 편히 지내

면서 몸을 풀 수 있는 조용한 곳이면 좋겠습니다.”


 왕은 종친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반야가

천출이라며 왕의 의견을 무시하고 후비의 첩지 제수를 반대하는 그들이 행여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전하의 성은이 태산 같사옵니다. 마땅히 명을 받잡겠나이다.”
 신돈은 조정에 출사하기 전에 친분이 있던 친구 능우(能禑)를 집으로 불렀

다.


 그는 인성이 착하고 입이 무거운 승려였다. 또한, 죽은 왕의 후비 한씨(韓

氏)와 먼 인척 관계이기도 했다. 능우는 신돈이 왕의 신임을 얻어 조정의 중

신이 된 것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자신도 신돈처럼 되고 싶은 욕망은 있지

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는 신돈의 능력에 한참 못 미쳤다. 능우는 개경에 오

면 꼭 신돈의 집에 들르곤 하였다.


 그는 반야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능우가 신돈의 집

에 들르는 날이면 반야는 능우에게 독한 곡차(穀茶)와 맛있는 고기를 대접

하였다. 능우는 개경에 올 때마다 신돈의 집에서 열흘 정도 묵새기다가

났다.


 “내가 자네에게 소임을 하나 주겠네.”
 “나무아미타불. 편조, 아니지 이제는 왕이 지어준 이름이 청한거사이니 나

도 그리 불러야 하겠군. 청한거사, 나 같은 땡중에게 소임이라니?”
 능우가 시큰둥한 낯빛을 하였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반야가 지금 용종을 품었네.”
 “나무관세음보살. 그럼, 그 아이가 왕의 씨앗을 잉태하였단 말인가? 그

아이는 자네의 비첩 아니었던가? 그새 그 아이를 왕에게 시집보낸 거야?

자네는 재주도 좋으이. 애첩을 왕에게 시집보내다니.”


 능우가 신돈의 재주에 놀라워하였다. 그가 신돈의 집에 들를 때마다 신돈

이 반야와 합방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신돈도 능우에게 반야와 상합

(相合)한 이야기를 자랑하듯 해주곤 했었다.


 “아무튼 일이 그리되었네. 그 아이가 몸을 풀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적당

한 곳에 숨겨 주시게. 그 아이가 잘못되면 나는 죽은 목숨일세.”


 “나무석가모니불. 알았네. 자네가 나에게 처음 하는 부탁이니 받아들임세.

자네는 조정의 중신이고 그동안 금은보화를 긁어모았을 테니 나에게 반야

를 보살피는 대가로 재물이나 두둑이 내놓으시게.”


 신돈은 오천 냥을 능우에게 건넸다. 능우에게 건넨 돈은 미래를 위한 투

자였다. 능우는 임신 5개월째 접어든 반야를 양광도 양주목(楊州牧)에 사

는 그의 모친에게 위탁하였다. 능우의 본가는 깊은 산골에 있어서 일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집 앞뒤 산에는 온통 단풍 천지였다.

산불이 난 것처럼 산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가씨, 여기는 첩첩산중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안심하세요. 나는

능우의 어미랍니다. 저를 친정어머니라고 생각하시고 마음 푹 놓으세요. 아

가씨가 대왕님의 총애를 받고 아이를 잉태했다 들었습니다.”


 능우의 노모 최씨는 배가 약간 불러 보이는 반야를 친절하게 대했다. 그

녀는 반야를 마치 시집간 딸처럼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반야가 점점 배가

불러갈 즈음이었다. 반야도 최씨를 ‘어머니’라 부르며 딸처럼 행세하였다.

최씨는 나중에 반야가 왕자라도 낳으면 나라님에게 큰상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최씨는 음식 솜씨가 있는 식모 한 사람을 집안에 들여 하루 세끼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반야에게 제공하고 수시로 보약을 지어주기도 했다.

해가 변하고 추운 2월 말경에 능우가 본가로 찾아와 왕비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게 정말이어요? 보탑실리 왕비님이 아이를 낳다 돌아가셨다고요?”


 “나무아미타불. 반야야, 왕비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너에게는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겠구나. 왕비가 열흘 전에 난산(難産) 끝에 돌아가셨구나. 이제 너

도 몇달 후면 출산을 할 테니 각별히 몸조심해야 한다. 네가 잘못되는 날이면

우리 모자는 죽은 목숨이다.”


 ‘왕비가 죽었으니 이제 전하의 씨앗은 내 복중의 아이밖에 없구나. 살다 보

니 이런 복 받는 일이 다 있구나. 이 아이가 사내라면 나는 장차 전하의 비(妃)

가 되고 이 아이가 왕위에 오르면 나는 대비가 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참으

로 복 받은 인생이야.’


 보탑실리 왕비가 난산 끝에 숨을 거두자 고려 왕실은 큰 충격에 빠지고 왕

은 식음을 전폐하였다. 왕이 비록 반야를 총애하였지만, 보탑실리 왕비에 대

한 사랑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왕비가 죽자 왕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고 원

나라 황제는 그녀에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추증하였다. 왕은 공

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공주를 그리

며 대성통곡하였다. 


 ‘그것참 이상하다. 지금쯤 반야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

다니. 이달 중순이면 그 아이가 임신하고 정확히 십 개월이 된다. 그런데 능

우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시 반야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거 아닌

가? 답답해 죽겠구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양주목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

릇이다. 이 사람 능우는 언제 개경에 오려나?’


 신돈은 손가락으로 반야의 출산 예정일을 계산해 보았다. 10개월이 넘어

가도 반야에게서 아무 기별이 없자 신돈은 불안하였다. 신돈은 사람을 양광

도 양주로 보냈다. 사흘 뒤에 양주에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 신돈에게 말했다.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정도 더 있어야 한답니다. 반야 아가씨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뭐라, 두 달 더 있어야 한다고. 아기가 열두 달 만에 나오는 일도 있는가?

뭔가 이상하다.’
 신돈이 아무리 반야의 출산일을 계산 해봐도 아리송할 뿐이었다.


 당장 반야에게 달려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신돈은 기다

리기로 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산파(産婆)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성인(聖人)

들의 경우 10달을 훨씬 넘겨 출생하는 예도 있다는 답변을 듣고 안도하였다.

고려의 여불위를 꿈꾸는 신돈이었다.


 음력 7월 7일 칠석날, 땅거미가 기어 다닐 무렵 본격적으로 진통을 시작하

였다. 반야는 아침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지기 시작하더니 오후 들어 꼼짝

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능우의 어미는 여러 번 출산을 한 경험이 있

고 다른 여인들의 출산을 거들었기 때문에 아이를 받아내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반야 아가씨, 조금만 더 힘을 줘요.”
 능우의 어머니 최씨가 반야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 아랫도리가 찢어지는 거 같아요. 너무 아파서 못 견디겠어요.

아기 낳다 죽는 거 아니죠? 무서워요.”


 반야는 눈앞이 노랗고 생살이 찢어질 듯한 통증에 몸서리치면서도 자신

이 왕의 자식을 낳고 있다는 기쁨으로 진통을 상쇄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진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다 이내 잔잔해지고 다시 더 큰 파도처럼 밀려들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반야는 이를 악물고 피땀을 흘려가며

빨리 아기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샅이 선홍색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진통이 시작될 때만 하여도 반

야는 금방 아기를 낳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진통이 길어지자 점점 쇠모해져 갔

다. 그녀가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떴다. 


 “반야 아가씨, 여자는 출산을 해봐야 진정한 여인으로 태어나는 거랍니다.

머리가 반쯤 나왔으니 이를 악물고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내가 곁에 있으

니 염려하지 마세요.”


 최씨는 잠시도 반야의 하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의 머리가 다 빠져

나오고 몸통이 서서히 나오는 중이었다. 반야가 힘을 줄 때마다 아랫배가 꿈

틀거리면서 아기의 머리가 조금씩 밀려 나왔다. 탯줄이 달린 아기가 거의 자

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직은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묘

려(妙麗)한 반야의 온몸에서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보니불, 나무약사보살. 부처님들, 반야가 순산하

도록 도우소서. 고려의 희망이 지금 진통의 마지막 단계에 있습니다. 부디

반야가 왕자를 생산하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능우는 행랑채에 들어 경을 읊으며 부처님의 명호를 연호하였다. 능우에

게도 반야가 낳은 왕의 자식이 무척 중요하였다. 반야가 왕자를 낳으면 신

돈에게 단단히 한몫을 챙겨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전하, 소비가 아기를 낳고 있습니다. 제발 딸이 아닌 아들을 낳도록 해주

셔요. 소비 역시 공주보다 왕자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만약 제가 딸을 낳더

라도 저를 미워하지 마셔요. 저는 지금 죽을힘을 다해 진통을 견디고 있답

니다. 소비가 왕자를 생산하면 보상해 주셔야 해요. 아래가 너무 아파서 못

견디겠어요.”
 반야는 마치 왕하고 대화를 나누듯 땀을 뻘뻘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기가 거의 다 나왔어요. 조금만 더 힘을 줘요.”
 아기가 산도(産道)를 나오면서 흘러나온 산혈(産血)이 솜이불을 빨갛게

적셨다. 반야가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고 기를 쓰며 몸부림쳤다.       

  
 “오, 왕자님이시다. 반야 아가씨, 왕자님입니다. 고추입니다.”


 반야는 왕자라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반야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비가 난산으로 죽고 5개월 만에 반야가 왕자를 출산한 것이었다. 반야의

어머니 최씨와 능우는 마치 자신들이 자식을 본 것처럼 기뻐하였다. 최씨

는 왕의 씨앗을 직접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반야야, 봐라. 깔밋하게 생기신 왕자님이다. 네 몸에서 고려국의 왕자

님이 태어나셨다. 이제 우리는 한시름 놓게 되었구나. 고맙다. 정말로 고

마워.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부터 너는 왕자의 어미다. 전하에게는 유

일한 아드님이시니 이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면 너는 장차 왕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축하한다.”


 “스님, 고마워요. 그동안 스님과 어머님께서 돌봐주셔서 제가 순산할 수

있었어요. 이 소식을 어서 편조님과 전하께 전해드려야죠?”
 반야는 왕보다 신돈을 먼저 찾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 길로 집을 떠나 내일쯤 개경에 도착하는 대로 편

조 스님에게 왕자의 탄생 소식을 전할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두세 달가량

있으면서 몸을 추스르거라. 절대 집 밖으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그리고 왕

자의 탄생은 외부에 비밀로 해야 한다. 네가 왕자를 낳았다는 소문이 나면

너와 왕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명심해라.”   
 능우는 반야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 밤길을 떠났다.


 ‘그 아이에게서 소식이 올 때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청한거사

도 아무 말이 없다. 혹시 반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왕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반

야의 임신하고 난 뒤의 근황이 궁금하였다. 왕은 즉시 신돈을 찾았다. 그러

나 그에게서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청한거사, 반야가 지금쯤 몸을 풀었을 거라 하셨소?”
 “전하, 이삼일 내로 반야에게서 희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

다려 주소서.”


 신돈은 왕에게 반야가 양광도 양주목에 있는 친한 벗의 집에 잘 있다는 소

식만 전해야 했다. 신돈 역시 반야의 출산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지만,

소식이 오지 않자 답답해하였다. 왕은 왕비가 죽고 나자 이제 희망은 반야밖

에 없을 것 같았다. 반야가 만약에 왕자를 낳는다면 왕은 중신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반야를 궁으로 불러 후비의 첩지를 내릴 계획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