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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집 - "요석궁에 내린 비" 서평

* 소 개 글/작가 프로필(Profile)

by 여강 최재효 2019. 5. 21.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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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간 : 2019.5.23일

            - 전국 서점 및 인터넷 구입 가능일 : 2019. 6. 20일 경






      [ 서 평 ]

 

    역사의 즐문토기, 도저한 훈고訓詁정신으로 빚다

 

 

                                                                    -  한 기 홍 / [인천펜문학회장]

  



  

 1. 역사소설가의 종맥宗脈을 잇는 소명召命

 

  20세기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핼릿 카 (E.H Carr)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다. 아울러

 역사는 현재에서 재해석된 것이고, 또한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이 가능하다

고 하였다. 그는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의 영국의 역사학자 로빈 조지 콜링

우드(R.G Collingwood)역사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그가 연구하는 역사

에 대한 생각이 재구성 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역사에 대한 논의 예를 더 들어 보자. 역시 20세기 이탈리아 철학자이며 역사가

인 베네데토 크로체(B. Croce)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고 선언했다.

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과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

이며, 역사가의 주된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명제다.


역사는 시대, 주의자主義者의 관점과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E.H 카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단순히

서책 속에만 가둬두면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역사는 과거와 현

재 그리고 미래가 끊임없이 소통하고 서로의 시대적 면면을 비춰보면서 더 발전

된 미래상을 제시해야 가치가 있다. 한 사건을 두고 500년 전에는 A가 정답이

었는지 모르지만, 500년이 지난 뒤에는 B가 정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B

일정한 세월이 흐른 뒤에는 또 다른 정답인 C가 될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2010년대의 필자 주변 문단 생태는 어떠한가. 필자의 편협한 소견을

적어본다. 현역 문인들은 주로 가벼운 일상을 다룬 에세이를 쓰거나, 사물시

事物詩에 천착해 있는가 하면, 물질과 공허가 깃든 오늘날의 시류를 비판하

거나 냉소하는 경향에 몰두해 있는 듯하다. 일각에서는 해체의 파편에 여전

히 종속되어 있는 사슬들도 보인다. 어찌 보면 뉘엿뉘엿 해가 지는 어느

남미의 해변 가 카페를 어슬렁거리는한가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문인들은 이 맥 빠진 한가함이 주는 안일한 독소를 경계해야한다.

치열한 춘추필법을 휘두를 지경은 아닐지라도 날선 비평과 문학적 담론의

왕성한 융기隆起, 끊임없는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그 이면의 인물들에 대한

창조적 부활 속에서 문학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데 작금의 한심스러운

현상은 태생조차 모호하고 난삽하기조차 한, 배설위주의 저작들도 횡행하고

있다. ‘작자 자신도 설명 못하는사금파리 조각류의 작품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강 최재효 작가(이하 여강으로 기술). 그는 이 시절에 흔치 않은 역사소설

가의 맥을 잇고 있다. 그가 묵묵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근 10여 년

동안 천착해 온 역사소설의 집필은 위 언급한 문단상황에서 볼 때, 매우 독자

적이고 창조력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사실 문인들 사이에서는 역사를 테

마로 작품을 구상하는 사례가 빈번하지만, 실제로 창작에 올인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만큼 자료준비와 정확한 고증, 발품을 팔아야하는 역정이 수반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여강은 마치 역사의 현장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연인을 만

나러 가는 것처럼흔연히 답사한다. 원고지에 불러내어 생명의 부활을 이룬

옛사람들의 숨소리 하나, 손짓 하나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오류에 빠지기 쉬

현재적 의장儀裝의 함정을 불식하기 위한 노력이다. 모름지기 정통 역사

소설을 쓰는 작가의 필수 덕목이다.


역사의 현장에 발품을 팔면서 행하는 집필가로서의 행위 또한 신선하게 다

가온다. 여강의 창작공간 사진첩과 비망록을 일별해보면, 유적지 현장에서

작중의 주인공 묘소에 술을 딸아 올리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시대를 앞서

가며 이야기 소재를 제공해 준 선인들에 대한 지극한 경외지심의 발로가 아니

겠는가. 진정 칭송할만한 창작활동의 자세이다. 이 또한 여강의 철저한 훈고

訓詁정신과 민족의 부흥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든 소명의식의 발로로 볼 수도

있다. “방씨 부인전집필을 끝내고 토로한 작가의 말을 들어본다.

 

필자는 본 작품을 탈고(脫稿)하고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자락

에 부인과 영면하고 계신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 술을 올리고 용서

를 빌었다. 행여, 무명의 졸필(拙筆)이 두 분의 명성에 흠이 되지 않았을

까 늘 노심초사 한다.

    

 

 

2. 치열한 창작정신을 문열文悅의 방편으로 삼다

 

여강의 집필에 대한 열정은 문단에서도 알아줄 만큼 왕성하다. 밤을 새워

가며 일필휘지로 원고지를 채워가다가 급기야 탈이 나서 장기간 병원신세를

진적도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집필 삼매경에 빠져있다면, 이야말로 문사

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문열文悅이라 할만하다. 필자가 그간 여러 자리에서

일별한 여강 작가의 모습은 언제나 빨리 집에서 가서 펜을 잡아야 하는데

표정이었다. 집필을 위한 연찬과 발품은 그를 명실상부한 박람강기의 문인

으로 서게 했다고 믿는다

 

이렇게 치열한 창작정신을 구현한 작가가 있는가. 금세 떠오르는 분이 있다.

바로 작년(2018)에 별세한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집

필정신이다. 선생에 대한 너무나 유명한 일화로 수십 년간 거의 하루도 거르

지 않고 그 유명한 ‘1200자 원고지 20장의 글쓰기에 몰입했고, 비평가로

입신한 이래 200자 원고지 10만 장을 웃도는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생산했다"

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기억하는 인상적인 선생의 집요하리만치 철저한

실증주의적 창작정신에 대한 글 일부를 소개해본다.

 

지속적인 쓰기가 가능하려면 물론 먼저 자료 수집이 충분히 돼야 합니다.

내가 일본에 가서 이광수 자료를 찾아 헤맨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 헤맴

끝에 개조(改造)잡지에서 일본어로 된 만 영감의 죽음을 찾아들었을 때,

, 이제는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획된 여정을 남겨

놓고 세밑에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는 정초부터 썼어요. 쭉 써

가는데, 4월이 되면서 붓방아를 찧었지요. 자료 조사가 미진했던 겁니다.


춘원이 빛날 때가 아니라 어두울 때, 춘원이 뻗어갈 때가 아니라 주춤거릴 때,

그를 붙잡아 준 사람을 찾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춘원이 위태로울 때 안식을 찾던 홍지동 산장, 봉선사 근처를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돌아보고 기웃거렸는데, 거기서 춘원의 삼종제 이학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유월이 되니까 또 막히는 거지요. 총독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광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으로 집필을 중단하고 한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혔습니다. 경성일보

매일신보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는 이 신문들의 사장이자, 총독

부 고문이었던 아베와의 관계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광수의 후기

행적이 다시금 선명해질 수 있었지요.

 

                -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의 집필에 얽힌 뒷얘기

                    중에서 -

 

김윤식 선생의 위 사례를 반추하면서 여강의 집필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실로

경탄할만한 문단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다소 과찬이랄 수 있게 높이 평가하는

점은 역사소설의 경우, 전고典故의 피력에서 역사적 인식을 상이하게 서술한

경우나 그 해석 범위를 벗어나는 행위에는 엄청난 논란의 여파가 일기 때문이다.

굳이 존재론과 인식론의 충돌을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강의 경우, 춘추

필법의 용례를 존숭하고 정론직필의 정신이 충일하기에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

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설에서의 구성 또는 플롯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사용한

미토스(mythos)라는 말의 번역에서 유래하였다. 소설의 구성은 이야기를 이어

가는 기술과 방법을 말한다. , 사건의 전개와 행위의 구조를 통해 구체화되는

이야기의 짜임새를 말한다. 소설의 구성은 인물과 사건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

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전개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야기 전개 방식과 관련된 사건

과 행위의 구조를 뜻하는 것이다.


역사소설의 경우, 전기적傳記的인 요소에 작가의 창조적 재해석을 가미하여 불변

원칙의 사료史料를 더욱 풍요롭게 인식케 하는 흥미로운 작업이요, 새로운 역사의

준거를 태동케 해준다. 따라서 역사로부터 빌려온 사실과 소설적 진실성을 지니는

허구를 접합하여 역사적 인간의 경험을 보편적 인간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문학 양

식이다. 이러한 전환에 필요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의도를 조절하는 주제는 역사적

사실을 변형, 수정, 가감하는 기준이 된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핼릿 카 (E.H

Carr)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언급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명제가 웅변해준다. 역사는 현재에서 재해석된 것이고 또한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

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창조노력을 면면히 이어나가고

있는 역사소설가 여강의 행보에 경의를 표한다. 이번에 상재하는 소설집 요석궁

에 내린 비는 대체로 중편소설로 분류될 네 편의 작품을 상재했다.


여강이 지난 10여 년 동안에 국내 주요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원효대사

와 요석공주, 명문장가 최치원과 고려말 충렬왕의 비() 시무비 이야기이다




 

3. 오래된 미래 - 삼한과 고려, 그리고 조선

 

동아시아 3국 중 중일(中日)은 자국의 역사를 개조하여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

시키고 있다. 3국이 역사 전쟁을 하는 시점에서 로빈 조지 콜링우드(R.G Colling

wood)의 말처럼 역사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그가 연구하는 역사에 대한 생각

이 재구성 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공감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데토 크로체(B. Croce)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주

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동아시아 3국만 역사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늘 역사 전쟁을 하고

있었다. 자국에 상당한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면 어제의 남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

라고 가로 챘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많은 호사가

好事家들은 특정 인물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특정한 장군의 경우

영화나 TV 사극에서 3-5년의 주기를 두고 등장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 단 두세 명의 장군만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삼국사

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유심히 살펴보면 수많은 한민족의 자랑스러

운 장군과 영웅이 있다. 이제는 역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역사 이야기를 듣

는 사람이나 시야를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작가 여강은 현존하는 사료와 전적들

을 두루 섭렵하고, 그 토대 위에 작가적 상상력을 문학성으로 치환하여 지난 십여

년 동안 국내 주요 문예지에 끈기 있게 작품 활동을 전개해 왔다.

 

첫째 이야기 <방씨 부인전>은 청년 이순신과 아산 토호土豪 방진方震의 무남

독녀인 연꽃아씨가 주인공이다. 청년 이순신이 연꽃아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임진

왜란, 정유재란의 결과가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끔찍하다. 작가는 본 작품

을 탈고하고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자락을 찾아갔다. 부인과 영면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 술을 올리고 용서를 빌었다 한다. 행여 작품 속

에서 두 분의 명성에 흠이 되는 묘사가 있지는 않았을까 늘 노심초사 하며 집필했

다고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장군이

부인 상주방씨를 만나 혼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오랜 시간 문과文科를 공부

하던 장군이 무과武科로 전향하는 과정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해 본다. 어느 날 연꽃아씨는 우연히 바람처럼 스치듯 지나간 헌헌장부 청년

이순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방진 대감의 무남독녀인 그녀는 1년 넘게 가슴

앓이를 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본 작품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청년 이순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왜군을 물리

친 무인보다 인간미 넘치는 청년 이순신을 만나보는 일도 꽤 유의미하다. 선비에

서 호반虎班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연유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일부분

을 인용해 본다.

 

청년은 헛간에 앉아 서애 유성룡의 말을 곰곰이 반추해보았다. 유성룡은

지난해 문과에 입격해 진사의 신분으로 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년은

한양 마르내골(건천동)에서 죽마고우로 함께 유년을 보낸 유성룡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상님들께 면목이 없었다.

여해(汝諧)가 갑주(甲冑)를 입고 외적을 막고, 내가 필묵으로 나라 살림

을 맡으면 조선 삼천리 강토는 대대손손 평안할 걸세.”

유성룡의 말에 청년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중략)


청년은 그때 유성룡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마치

청년에게 주문을 걸듯 반복해서 장차 조선을 위하여 문무(文武)를 나누어

조정을 경영하자고 하였다. 청년은 유성룡의 말이 거북스럽기만 했다.

물론 유성룡은 청년과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던 막역지우였지만, 자신

이 먼저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하니 청년에게는 깔보는 말투로 들리

기도 하였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구국의 선봉에 섰던 이순신을 줄기차

게 옹호하고, 의심 많은 선조에게 이순신의 청렴과 충성을 보증했던 조정의

중신이었다. 서해와 여해(이순신)가 청춘시절, 막역지우로 교류하면서 조국

의 장래를 위해 청운의 꿈을 꾸었고, 또한 실제로 국난이 일어나자 합심했던

 실제상황이 하늘의 뜻 인양 서술되고 있다. 기실 이 두 사람의 영웅적인

헌신으로 조선의 위의는 그런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사료된다.


대개의 전기적 역사인물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영웅이 겪게 되는 필연적인

이적현상異跡現象도 등장한다. 어찌 보면 동서고금의 역사소설치고 영웅의

족적에 대한 신비화나 우상화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이점은 국수주의나 편협

한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이른바 속해있는 나라의 근본에 대한 정통성과 더불

어 국민의 자긍심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국가 시조 탄생설화와 같은 맥락이다.

이순신의 영웅적 행로에도 기인이사奇人異事가 당연히 등장한다.

 

청년은 2년 전 일을 회상했다. 세 청년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고승대덕을

만나 인생 공부를 할 요량으로 금강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청년이 한 암

자에서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중 잠시 머리를 식힐 겸 금강산 천선대(天仙

)에 올랐다. 갑자기 사방이 짙은 운무에 휩싸이더니 보랏빛 운거(雲車)

를 탄 한 선인(仙人)이 청년 앞에 나타났다.


나는 진()나라 노생(盧生)이다. 조선의 금강산이 산세가 수려하고 청

정하다는 말이 있어 옛 신라의 친구들과 노닐고자 왔노라. 그런데 그대를

자세히 보니 그대는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인 하괴성(河魁星)의 정기를

받은 몸이 분명하다. 문보다 무예를 숭상하고 무인(武人)의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이다. 장차 조선에 환란이 있어 그대를 크게 쓸 것이니 세파의 흐

름을 거역하지 말라.”


청년은 감히 선인을 쳐다볼 수 없었다. 청년은 그 선인에게 예의를 갖추

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 할 때 바람 소리와 함께 도인은 사라

지고 병법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청년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꿈이

아닌 생시의 일이었다. 청년은 선인이 나타난 이야기를 벗들에게 들려

주었다.

 

중국 진나라의 선인 노생이 현신하여 이순신의 비범함을 칭송하며, 장차

조선을 위기에서 구할 동량임을 예언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사실 여타 위인

을 조명한 역사 전기소설들이 그렇듯이 신이神異는 꼭 필요한 요소이다.

주인공의 초인적 업적이 가능키 위해서는 이런 선험적 장치가 중요한 것이

.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노생이 선물했다는 비급秘笈(병법서)의 후일 향방

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훗날 이순신의 전공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보

이지 않으니, 궁금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비급과 관련하여 또 다른 창조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소설이 탄생

될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신비한 역사의 소재거리다. 후세에 거룩한 위인으로

칭송하고, 만인의 표상으로 받들어지는 인물일수록 그 신이의 궤적과 빈도는

많아지게 마련이다. 혹자는 역사소설에 이런 요소들을 도입하여 신비화,

또는 우민화의 과장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사불란

하게 사건이 전개되며, ‘하여가何如歌식의 기승전결에 독서의 맛이 함몰된

다고 말하기도 한다. 권선징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여강의 역사소설 집필에 대한 주관은 비교적 또렷하다. 사실에 기

초하며 소설로서의 흥미를 두텁게 하는 문사정신이 명확하게 배어있다.

이른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같이 춘추필법의 용례를 따르기 때문이다.

간결한 문체와 지루하지 않은 사건의 기승전결도 무난하다. 이점은 발군의

창작능력과 더불어 다년간 역사소설에 전념해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요석궁에 내린 비>는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그의

둘째 딸이면서 과부인 요석공주 그리고 원효대사를 등장 시켜 통일신라 이

후를 걱정하는 김춘추의 다급한 심리를 다루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았을

, 공주와 불제자의 혼인은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대사건이었다. 지금도

스님이 여염의 딸과 혼인을 한다면 만인의 냉소와 백안시할 것인데 1360

년 전에 그 같은 일이 있었다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요석공주가 단순히 길고 긴 밤을 전전반측하기 힘들어 출가한 사내

를 요석궁으로 끌어 들여 한바탕 질펀한 육욕의 향연을 벌이려는 목적은 아

니었을 것이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원효대사가

지어 서라벌 저자거리를 다니며 부르고 다닌 노래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지탱할 기둥을 깎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강은 이 상투적인 해석을 두고 많이 고민했다 한다. 상투적인 해석이라면

단순히 불자가 육욕肉慾을 탐할 수 있는 뜻이 되기에, 대중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장광설長廣舌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인식론적 접근을 한

. 원효대사가 지은 이 노래는 600년 넘게 신라의 하늘을 지탱해온 진부한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깨트리겠다는 뜻이었다는 귀결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도끼에 단단한 손잡이를 만들어 끼우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원효스님은 요석공주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저는 오늘 스님을 파계시키고자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요석공주는 다리를 꼬고 요염하게 앉아 빨간 입술에 연신 술잔을 가까이

댔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요석공주의 미끈한

종아리와 허벅지가 스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스님, 제 이야기 좀 들어보셔요.”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붉은 입술사이로

감주를 흘려 넣었다.

제가 스님을 파계시키고자 함은 조국을 위한 저만의 헌신이랍니다.

머지않아 부왕께서 삼한을 일통하시면 요동치는 삼한의 불쌍한 백성들

의 등을 스님께서 따뜻한 말씀으로 다독거려 주셔야 합니다. 저의 지아

비는 일찍이 조천성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타소 언니도 형부 김품석과 함께 대야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백제는 우리 신라의 원수라고 하지만 백제를

다스리는 백제왕과 대소신료들 그리고 일부 군관들이 원수일 뿐 순진하고

착한 백제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아비를 잃고 많은 밤을

전전반측하며 보내야했습니다. 스님은 이 불쌍한 여인을 먼저 위로해 주

셔야 해요. 아버님과 제가 일방적으로 통혼을 요구하여 송구했어요.

용서하시어요.


그러나 스님께서 먼저 신라 왕실에 청혼을 하셨으니 크게 송구해 할 것

도 없겠지요. 저는 스님께서 신라를 떠받칠 천주(天柱)를 만들어 주시겠

다고 저자거리를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다니실 때부터 스님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일부 세상 사람들은 단지 스님께서 색욕(色慾)이 동하여 그

런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고 비난하지만 아버님과 왕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라 왕실에서는 스님께서 나라를 걱정하시어 미래

를 훤히 내다보시고 삼한일통 후에 나라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하기위하

여 큰 인재를 왕실에 선물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단순히 생각하였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랜 세월

이 신라라는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각종 악습과 적폐를 일소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답니다. 오늘밤에는 스님이

아니라 저의 낭군님이세요. 타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일부러 문천

교에서 떨어지셨어요.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제가 풋풋한 사과가 아니

고 농익은 홍시라서 실망하신 것은 아니시겠죠. 이 방에 들어오신 이상

오로지 저에게 모든 걸 주셔야 해요. 앞으로 사나흘은 자루 빠진 도끼

에게 든든한 자루를 만들어 끼울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봅니다.


이 방에서는 부처님도 보살님도 통하지 않는 답니다. 욕정에 사로잡힌

벌거벗은 남녀가 있을 뿐이라고요. 이제부터 스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출가하기 전의 이름인 서당이라고 부르겠어요. 설서당(薛誓幢). 신라의

자랑스러운 화랑 출신 설서당이 이 밤에 신라왕실 여인이 머무는 요석

궁에 드셨습니다. 이 요석궁은 미로 속에 있어서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

갈 수 없답니다.”

요석공주의 도저한 말에 원효스님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 소설의 핵심을 요약한 요석공주의 토로 부분이다. 실로 당당하면서도

기가 막힌 공주의 용기요, 구국의 결단이다. 이날 밤의 방사에서 태어난 자

식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두 사람의 인연에 의해 결국 신라 10현의 한 사람

이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3문장三文章으로 불리게 되었

으니, 김춘추와 요석공주가 의도한 바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지 않았나 생각

한다. 설총은 통일신라의 전제 정치 하에서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을 주

창하여 신라 유교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신문왕 때 국학國學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여강의 무리 없는 스토리 구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작가의 인터뷰에 의

하면, 기존에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룬 아류亞流들이 있었다며, 또 하나의 아

류가 첨가되는 것은 아닌지 황송하다고 했다. 역사소설가가 역사학자와 다

른 점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다. 창작요소를 가미해야 하는

역사소설 집필에 대한 고뇌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진솔한 고백이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짝이 있게 마련이다. 인연이란 짝을 만나면

서로 끌려 허락하는 것이니 뭇 짐승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인연이란 말은 좋은 뜻

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인연은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부부

의 인연도 이와 같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난 것이고 그 만남이 좋은

결실이 되든지 또는 악연이 되든지 하는 것은 그 후의 인연과에 의해

서 밝혀진다.


성인聖人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고 했다. 힘 센 자가 자기와 인연이 없는 사람을 아무리

탐한다 해도 그 인연은 결코 맺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오욕五慾

의 문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바로 감관의 문 앞에 놓인

음욕淫慾이다. 선지식善知識들이 애욕을 끊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나지 말라고 하는

말속에는 헌신적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시작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

어 있다.

 

이 소설을 통하여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다. 한편 여강의 소설에는

그 시대적 배경에 걸 맞는 누항(陋巷)의 언어들이 생생히 사용되고 있어

감칠맛을 준다. 대부분 현대에는 쓰지 않는 고어古語, 방언, 토속어들

이지만 소설의 문맥상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된다. 역사소설의 특성상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정황에 녹아들게 하는 최고의 양념이랄 수도 있다.


 적절한 고어사용과 사료상의 언어 인용 등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어 신선하다. 예를 들자면 흥글방망이놀다’(남의 잘 되어가는 일에 심술

을 부리고 훼방을 하다.) 같은 표현은 요즘 21세기에 갑질하는 자들을

기막히게 연상케 한다.

 

세 번째 <격황소서>와 네 번째 소설 <의녀 시무비>는 간략히 작가의 집필

동기와 스토리를 분석하는 정도로 평을 대신할까 한다.

 

<격황소서>86812살에 신라 견당유학생에 뽑혀 당나라에 건너가 6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한 해운海雲 최치원의 당나라 체류기간 중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과거 급제하여 당나라의 선주宣州

수현위漂水縣尉로 잠시 봉직하다가 더 높은 고위직을 위해 사직하고, 박사

굉사과博士宏詞科를 공부한다.


그러나 874년 소금장수 황소黃巢가 일으킨 민란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는 황소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은 절도사 고변高騈의 휘하에 들어가

종사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때 최치원은 격문을 지어 전국에 뿌리니 황소는

격문을 읽고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병에 든다. 최치원은 율수현위로 봉직할

때 우연히 두 여인의 무덤 앞을 지나가다 사연을 듣고 시를 지어 비석에 붙

인다. 그 인연으로 두 여인의 혼령과 연을 맺는다. 이 내용은 고려중기 문신

인 박인량朴寅亮이 지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에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

가 소재로 십분 활용했다. 여강작가의 말을 옮겨본다.

 

혼령과의 신비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필자는 본 작품에 접목시켜 재미를

더했지만 행여 명현名賢의 명성에 흠이 될까 조심스럽다. 그러나 신라인

최치원이 격서를 써서 난을 종식시켰다는 내용은 전설이 아닌 사실(史實)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한중간 외교의 가교 역할로 가장 적합인

인물로 해운 최치원을 꼽고 있으며, 2007년 중국 양주시에서는 그의 공적

을 기리는 기념관도 건립하였다. 사드문제로 인하여 외교관계가 묘한 상태

에서 필자는 양국의 우호友好를 바라는 뜻에서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다.

베네데토 크로체의 주장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의녀 시무비>는 전라도 태인 출신으로 고려의 충렬왕의 총비寵妃였던

시무비柴無比가 원나라 쿠빌라이의 딸로 고려의 왕비가 된 홀도로게리미

忽都魯揭里迷失을 독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40여 년간 강화도

로 피신해 있던 고려 조정은 원종元宗이 원에 항복하면서 고려 왕실은

이후 100여년 가까이 고난과 질곡의 험난한 길을 가야 했다. 원종이 붕어

하고 원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그의 아들 왕거王昛가 보위를 잇는다. 왕거

는 이미 정실부인이 있었으나 원나라 공주와 강제로 혼인해야 했다.


고려의 왕비가 된 홀도로게리미실의 안하무인격 행동과 고려백성을 착취

하는 천인공노할 행위는 백성들의 원성을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고려의

수많은 무인과 문인들은 속으로 끌탕만 하고 있었지만 의녀 시무비는 치밀

한 계획 하에 원나라 공주를 제거한다. 그녀는 결국 홀도로게리미실의 아들

인 왕원王謜에게 처형되었다. 간결한 필치와 박진감 있는 전개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케 하는 작가의 집필의도를 들어보자.

 

여인의 몸으로 거대 제국에 맞서 싸운 그녀의 의기義氣700여년이 지

난 지금에도 많은 것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시무비는 잘 알려져 있지 않

. 그러나 이제라도 그녀의 의로운 행동을 크게 알려서 원통하게 목숨을

잃은 그녀의 원혼 넋을 달래보고자 했다.”

 

 

4. 나가는 말 -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완성을 기대하며

 

여강 작가의 역사소설 작법에는 정형율定型律이 있다. 첫째는 사료와 전거

典據에 대한 준엄한 신봉정신이요, 두 번째는 그 사료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

는 최대의 범주 내에서 가공(창작)의 스토리를 재생산해 냄이요, 그리고 세

번째로 그 형상화 된 가공의 요소에 깊은 철학적, 문학적 승화의 길을 모색

해 감이다. 실로 정공법이랄 수 있는 창작 자세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의

해석에 방만과 분식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됨을 웅변하고 있기도 하다.


여강을 읽는 즐거움은 고전적 문체의 농밀함과 유쾌한 묘사의 감득感得

한 몫 한다. 작중의 인물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행태와 더불어 은밀한 색담

色談, 고담준론, 누항의 이야기들이 시공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탄탄한 사료

고증의 힘과 고전의 적절한 인용이 빚어내는 앙상블이다. 이 점은 한번 펜을

잡으면 시간을 망각한 채 일필휘지하는 작가의 필벽筆癖에 기인 할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소설에서는 지나칠 정도의 호국정신 고양高揚이나 숭배지향

의 너울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강의 작품세계는 안정된 균형을 득

하고 있고,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현聖賢을 향한 냉철한 경모敬慕

정이 흐르고 있어 짙은 공감을 준다. 바라건대, 대다수 문인들이 안착하기

주저하는 한국 역사소설계의 바통을 잇는 견인작가가 되어주길 희망한다.

작품 속의 신라시대 최치원과 설총을 보라. 붓 한 자루로 시대를 풍미하고,

민족의 혼을 부여잡은 만고의 표상으로서 빛나고 있지 않은가.


여강의 춘추필법이 더욱 웅혼하고 디테일해지길 고대한다. 현재의 경지

에서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역사소설계의 종맥을 잇기를 기대한다. 작가

의 손끝에서 부활하고 재탄생된 역사는 현재와 미래에 무한한 의문과 숙

제를 남겨주게 된다. 역사의 즐문토기에 새로운 인식의 빗금이 그어질 때,

문학과 철학과 과학은 부르르 몸을 떤다. 그래서 훈고정신의 발현은 생경

하면서도 오래된 미래DNA를 세상 위에 철퍼덕 던져놓는 파격이기

도 하다.

여강 최재효. 이 작가의 등장은 특정 지역의 잊혀 진 사적史蹟과 인물을

부활시켜 21세기형 새 모델로 조명시키기도 했다. 바로 인천시 남동구에

재탄생 된 고구려 유민이자 백제건국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弩의 등장이

. 여강은 펜으로 소서노를 부활시켜 지역의 옛 뿌리를 되찾아주고, 지역

경제와 관광의 메카니즘으로 발전시켰다. 바로 일필휘지 펜의 힘이다. 여강

작가가 새로운 지평 위에 우뚝 설 그날을 위해 건필을 기원한다. 펜을 놓으

며 창밖을 보니, 벚꽃의 산화가 장관이다.

 

 

 

                                                          [2019晩春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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