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15.10.26. (14:00 - 18:00)
-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운길산 수종사
- 카메라 : SONY - HX 300
며칠전 부터 가을이 손짓을 하여 오늘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산26-22에 위치한 수종사에 다녀왔습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면 다녀오는 가람이 수종사랍니다. 탁 트인 전망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빼어난 풍광이랍니다. 수도권에 계신분들 시간내셔서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꼭 한번 가보소서.
2015. 10. 26. 늦은밤
_()_ 인천서 여강 최재효 合掌
- 배경음악 : 금강경
운길산역에서 수종사 까지 걸어서 대략 1시간 40분 정도 걸립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수종사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은 두물머리(강 건너) 한자로 양수리(兩水里)
강 건너기전 운길산 역이 보이고
어제 황사 현상이 있어 사진이 깨끗하지 않네요
응진전
대웅전 부처님
대한민국 최고의 멋진 다헌(茶軒)인 삼정헌(三鼎軒) - 차는 무료로 마실 수 있지만 교양있고 예절을
아는 분이라면 1인당 5,000원 정도는 성금으로 내는 미덕을 발휘하면 좋을 텐데 ........
부처님이 주시는 차를 공짜로 마시고 가는 얄미운 사람들도 부지기수
500년 된 은행나무
_()_ 부처님의 사랑으로 어려운 서민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해주소서
_()_ 천상천하의 모든 유정무정의 인연들이 평안하고 여여하게 하소서
수종사(水鍾寺)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있는 수종사(水鍾寺)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자세한 창건 연기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초 세조 임금이 행차하여 중창한 뒤 은행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그 뒤 왕실의
원당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어 정의옹주의 부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조의 왕명으로 동
종이 조성되고, 성종의 후궁 명빈 김씨가 목기 등을 시주하여 오층석탑에 봉안하였다.
수종사는 물맛 좋기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이곳에 찾아와 차를 다려마셨다. 조선 초기의 서
거정(徐居正)과 조선 후기 다산의 정약용(丁若鏞)은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1939년과 1962년, 석조
부도와 팔각 오층석탑에 대한 조사 및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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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水鍾寺)는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雲吉山)의 정상 부근에 위치한 봉선사의 말사이다.
광주산맥이 남서로 내려오면서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운길산은 웅장하지 않지만 그윽함이 감도는 명
산이다. 특히 수종사에서 바라본 풍광은 빼어난데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한강으로 합류하
기 직전의 북한강의 물길이 장관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땅을 파서 샘을
찾고, 혹은 종을 발견했다고 해서 수종사라 하였다고 전하며 1939년 석조 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
종 21)에 조성된 부도로 확인되어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종사는 여러 해를 거치면서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오랜 세월로 인해 대웅전과 요사채가 무너지고 불
상 또한 그 사정이 참담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풍계혜일(楓溪慧一)화상이 고종에게서 내탕금 8000
냥을 받아 3월 27일에 중창을 시작해서 6월 28일에 마쳤고, 이듬해 3월에는 4000냥을 더 받아 불상 4존
(尊)과 탱화 3축(軸)을 새로 봉안하였으며, 대법당·나한전·어향각(御香閣), 그리고 산왕각(山王閣)을 단청
하였다.
1939년에는 주지 일조태욱(日照泰旭)이 대웅전·선루(禪樓)를 1940년에는 영산전(靈山殿)·독성각(獨聖
閣)·산신각·어영각(御影閣) 등을 중건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1975년 혜광(慧光)스님이
대웅보전을 복원하여 사세를 확장해오며 1999년 주시 동산(東山)이 선불장과 삼정헌을 중창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다.1972년 팔각오층석탑(제22호)과 1995년 부도(제157호)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
존되어 오고 있다.
【창건과 역사】
절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은데,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
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 직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폐사되
었던 것을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해 중창되어 법등을 이은 듯하다.
그 뒤 1493년(성종 24) 왕의 후궁 명빈(明嬪) 김씨가 팔각 오층석탑에 사리장엄을 시주했는데, 이것은
1962년에 발견되었다. 이 사실로 볼 때 당시 수종사는 왕실의 원찰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628년(인조 6)에는 대왕대비가 금동 비로자나불좌상을 시주하기도 했으니, 근
130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왕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근래까지의 자세한 연혁은 여전히 전하지 않는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890년(고종 27)에 풍계
혜일(楓溪慧一)이 당시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한 이래, 1936년과 1939년에 각각 태욱(泰旭)에 의해 중수되
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당우가 전부 소실되었다. 그 뒤 1962년 오층석탑에 대한 발굴조사
가 이루어지면서 사리장엄 등이 발견되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75년 혜광(慧光) 스님이 대웅보
전을 복원하였고, 1980년 대응 스님이 종각과 산신각을 지었다. 1999년 동산(東山) 스님이 절 입구에
서 있는 석조 미륵대불을 비롯하여 응진전과 선불장ㆍ삼정헌 등을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창건 설화】
수종사는 세조(世祖)와의 깊은 관련을 빼고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절의 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고자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
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에 밤이 되었으므로 이곳 양수리에서 물 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 때 옆
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세조는 신하를 보내 숲 속을 조사해보도록 하니 천년 고찰의 폐허가 있었고, 바위 벽에는 16나한상이 줄
지어 앉아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는 발심하게 되어 지금의 이 자리에 절을 복원케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
【운길산 수종사 일원(南楊州 雲吉山 水鍾寺 一圓)】
명승 제109호.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송촌리·시우리·진중리 일원.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
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
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
였다고 전해온다.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
점으로 자연경관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봄·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러우며,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
운 전망을 지니고 있는 조망지점으로서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
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
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며,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
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가람 배치】
현재 절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약사전·응진전·산신각·종각, 그리고 선불장(選佛場)을 비롯한 요사
4동 등의 건물이 있으나 대부분 최근에 중건된 것들이다. 주차장에서 절 경내로 오르다보면 현재 공사
중인 일주문 못 미쳐 1999년에 봉안한 커다란 석조 미륵입상부터 만나게 된다.
석조 유물로는 일명 수종사 다보탑으로 부르는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삼층석탑 및 석조 부도가 있고,
근래 경내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한 자리에 옮겨놓았다. 현재의 절이 있는 마당과 절에서 약 200m
가량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길이 50m에 달하는 대규모 석축과 절터가 남아있다. 이 절터에는 옛
기와조각들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그것으로 보아서는 조선 초 무렵 절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1975년에 지은 건물이다. 안에는 비로자나·아미타·석가 여래를
모신 삼세불상 및 칠성탱 앞에 나한상 존상 1위가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도를 비롯해서 지장탱·칠성
탱·신중탱 등이 있다. 그밖에 근래에 조성한 범종 1구가 있다.
【대웅보전 삼존불(大雄寶殿 三尊佛)】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석가여래를 모신 삼세불상(三世佛像)을 봉안하고
있는데, 모두 최근에 금동으로 조성하였다. 삼불상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고, 각 불상의 특징을 상징하
는 손 모습인 수인(手印)이 다르다
【산신각(山神閣)】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건물로, 1980년에 지었다. 안에는 1980년에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
어 있다.
【석조부도(石造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
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상·중·하의 3단으로 구성되는데 이 부도는 간략하게 2개의 돌로
만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탑신의 몸돌은 둥근 형태가 변하여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용의 모습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
장식받침) 위로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돌 윗면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조선 세종 21년(1439) 왕실에서 뜻을 모아 이 부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 안에서 고려시대 청자로 만든 항아리와 은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6각의 단지(보물 제
259호)를 발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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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임금의 다섯째 딸인 정의(貞懿) 옹주의 부도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 238㎝다. 지금은 팔각 오층석탑과 같은
자리에 있지만 본래는 경내에서 왼쪽으로 벗어나 있는 산비탈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부도이지만 신라 말 고려 초 부도의 일반적 형태인 이른바 팔각원당형을 기본적 구조로 한 이
부도는 사각의 지대석과 팔각의 이중 기단부 위에 세워져 있다. 지대석 옆면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었
고, 하층기단 옆면에도 각각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상층기단 팔각 모서리에는 개구리 또는 두꺼
비처럼 생긴 동물이 배치되어 있어 흥미롭다. 원형(圓形)의 탑신 표면에는 화려한 구름무늬가 장식되었
고, 그 위에 팔각의 옥개석과 앙화·복발·보주 등의 상륜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같은 형태의 조선시대 부도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보물 제97호 충청북도 충주
시 청룡사터 보각국사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이나, 혹은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부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건실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도는 옥개석 옆면에 남아있는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탑시주□□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시월일
입(太宗太后貞懿翁主舍利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入)’의 명문에 의해 1439년(세종
21) □□유씨와 금성대군이 시주가 되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의 옹주는 평소 불교를 돈독히 믿었
는데 다비 뒤에 사리가 나왔으므로 이렇게 사리탑을 만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1939년 이 부도에서
청자유개호 1점, 금동제 구층탑 1점, 은제도금 육각감(六角龕) 1점이 나와 현재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
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
보물 제259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견지동).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
엄구(南陽州 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는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수종사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
된 유물들이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가 발견되었고,
당시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는 높이
31.2㎝, 아가리 지름 26㎝로 세로로 골이 파진 것처럼 몸 전체가 장식되었고, 뚜껑은 아름다운 꽃 덩굴
무늬가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의 가장 가운데에는 모란 꽃송이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청자호의 색깔은 몸체와 뚜껑의 색이 다른데, 몸은 녹청색이고 뚜껑은 녹황색을 띠고 있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안에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과 함께 들어 있었던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는 높이 17.3㎝로, 이 중 의 연꽃무늬가 있는 기단에 연꽃 무늬와 칠보 무늬를, 면마다 번갈아
뚫어 조각한 6각의 몸체 위에 6각의 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 위에 보주가 장
식되어 있다. 이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 안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공모양의 사리병이 들
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을 뚫고 사리를 모셨다.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은 높이가 12.9㎝인 작은 탑으로, 정사각형으로 된 평상 모양의 기단 위에 있다.
1층 탑 몸체에는 한 면에 꽃잎 모양의 출입구가 3개 있고, 나머지 면에는 격자무늬 창문이 표현되어 있
으며, 2층 이상에는 정면에만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각층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사슬을 꼬아 달고 탑의
맨 꼭대기에는 덩굴무늬 장식이 있다.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금제구층탑(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金製九層塔)】
보물 제259-2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견지동). 수종사 석조 부도를 고쳐
세울 때 발견된 유물들이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가 발견되었고, 당시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이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은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세워진 9층의 작은 탑으로, 1층 탑신은 3면에 꽃모
양의 출입구를 만들고 출입구의 양쪽 벽에는 격자 무늬의 창을 뚫어서 조각해 놓았다.
2층 이상의 각 층에는 앞쪽에만 하나씩의 출입구가 있으며, 나머지 쪽에는 격자문과 난간형 모양의 장
식이 있다. 각 층의 지붕돌 모서리에는 목탁모양의 장식을 사슬로 꼬아 달았으며, 탑 위에는 4면에 세워
서 장식한 꽃잎이 한 개씩 있다.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은제도금사리기(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銀製 鍍金 舍利器)】
보물 제259-3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견지동). 수종사 석조 부도를 고쳐 세
울 때 발견된 유물들이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
金 舍利器)가 발견되었고, 당시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과 함께 들어 있었던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는 두드려서 만든 이중
의 연꽃잎 장식이 있는 2층의 기단 위에 연꽃과 덩굴·칠보석무늬가 면마다 조각되어 있으며, 윗쪽에는
6각형의 지붕이 있다. 이 상자는 도금한 색이 아직도 잘 남아 있으며 각 부분의 비율도 아름답다. 이 육
각감 안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공모양의 사리병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을 뚫고 사리를 모셨다.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청자유개호(水鐘寺 浮屠 舍利莊嚴具-靑磁有蓋壺)】
보물 제259-1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견지동).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
금제구층탑(金製九層塔), 은제 도금 사리기(銀製 鍍金 舍利器)가 발견되었고, 당시 금제구층탑과 은제
도금 사리기는 청자유개호 안에 들어 있었다.
청자유개호(靑磁有蓋壺)는 짙은 녹청색의 청자로 세로로 골이 져 있으며, 뚜껑에는 커다란 연꽃과 덩
굴이 새겨 있고, 안쪽에는 모란이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또한 몸체와는 다르게 녹황색이다. 이 항아리
의 장식과 유약의 질로 원나라 말기나 명나라 초기 중국 용천지방에서 만들어진 청자로 추측되고
있다.
【약사전(藥師殿)】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의 건물로, 근래에 지었다. 안에는 약사불상과 관음보살상 및 약사 후불
탱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근래에 지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상과 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 보살상, 그리고 아난·가섭을 비롯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팔각오층석탑(八角五層石塔)】
‘팔각오층석탑’보다는 ‘수종사 다보탑’으로 더 유명한 이 탑은 현재 대웅보전 옆에 별도로 마련한 공간
에 석조 부도 및 삼층석탑과 함께 있지만, 본래는 경내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는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330㎝다.
탑의 양식을 보면, 팔각형의 2중 기단 위에 세워져 전체적으로 마치 목조 건물을 돌로 표현한 느낌을 준
다. 특히 팔각의 모서리 부분에 표현된 기둥 모양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옥개석 받침은 3단씩 정제된
솜씨로 나타냈으며 탑 전체의 균형도 흠잡기 어려울 정도다.
기단부에 조각된 안상과 연꽃무늬도 화려하며 각 층의 팔각추녀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철사구멍과 철사
가 아직도 남아있다. 탑신부는 1층 탑신에서만 탑신과 옥개가 서로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고 나머지 2
층 이상은 탑신과 옥개석이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5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 보륜 등의 상륜
부가 일부 남아 있다.
이 탑은 바로 산 너머에 있는 묘적사(妙寂寺) 팔각 석탑과 닮은 곳이 많은데, 특히 상륜부는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주목된다. 두 탑이 모두 조선 초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작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탑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탑 안에서 나온 소형 불상들이다. 이 불상들은 두 차례
나 탑을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모두 18점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6점
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불상 가운데는 1493년(성종 24)과 1628년(인조 6)의 명문이
각각 새겨진 것이 있어 이 탑의 창건과 보수 시점을 말해주고 있다.
불상들은 대체로 서로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크게 표현되었고 다소 웅크린
듯한 형태 등에서 조선시대 금동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탑 앞에는 가로 110㎝, 세로 65㎝
가량의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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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808호.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433번길 186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수종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145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모이는 양수리 지역
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
에 옮겨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나 북한지역 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
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층,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1493)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구(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구)와 인목대
비(정의대왕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보살상들, 숭정원년(1628)에 화원[조각승] 성인(性仁)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대좌바닥에 명문음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
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형태는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이 올
려져 있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額)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眼象)을 표현하였다.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연판(蓮瓣)에는 고려중기
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隅柱)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은 목조 건축을 석
재로 옮긴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정상부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
려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출토된 사리
장엄과 명문을 볼 때, 건립연대는 늦어도 1493년에 건립된 이래 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왕
실 발원의 석탑임도 확인된다. 또 양식을 보면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온전
하게 유지된 조선시대 유일의 팔각오층석탑으로서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팔각오층석탑 출토유물 일괄(八角五層石塔 出土遺物 一括)】
보물 제1788호. 소재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견지동).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
유물 일괄은 조성 발원문과 불상 대좌 밑면에 새t겨진 명문을 통하여 조선시대 15세기 후반과 조선시대
1628년경에 각각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감은 많이 부서지긴 하였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불감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불감 안팎에 표현된 도상들을 통하여 당시 불교 도상 연구에
기준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불감 내부 정면에 표현된 삼신불의 도상, 가늘고 긴 조선시대 초기 탑의 조형, 불감 외부 양 옆면의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의 그림, 뒷면의 불설법도 등은 조선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도상들과 연관된
다.
함께 발견된 조성 발원문은 이들 일괄품이 조선시대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데, 특히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바닥에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이 불상의 발원자가 정의대왕대비
(貞懿大王大妃)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에 기록된 화원 성인(性仁)은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조
각가로서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을 만든 사람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있어서 주목된다.
15세기 불상으로 보이는 일련의 상들은 고려 후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듯하며, 17세기 불상
으로 편년되는 웅크린 자세의 무거운 존상들은 비례가 맞지 않아 약간은 해학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시대상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수종사 불감 및 불상 일괄은 수종사 탑에 납입될 조선시대의
상황과 발견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없고, 함께 봉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상태이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왕실 불교미술을 대표하고, 발원문과 명문도 수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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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金剛經) - 영인스님 독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