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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후(2)

* 창작공간/단편 - 우왕후

by 여강 최재효 2014. 6. 30. 23:32

본문

 

 

 

 

 

  

 

                                                   

 

 

 

  

 

 

                                                                               우왕후

 

  

 
                                                                                                                                                                           - 여강 최재효

 

 
                                                                                          2

 

 

 
 “뭐라고? 지난밤에 형님께서 붕어하시고 동생 연우가 태왕의 자리에 앉았

다고. 지금 그 말이 사실이렷다.”


 우왕후가 다녀간 다음날 조반을 먹고 있던 발기發岐 왕자에게 기가 막

소식이 전해졌다. 


 “왕자님, 사실이옵니다. 이미 국내성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집사의 말에 발기 왕자는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냉수를 마시고 정신

이 든 발기 왕자는 집사에게 다한 번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아, 그래서, 그래서 어젯밤에 왕후가 나를 찾아왔었구나. 형님이 붕어

면 다음 태왕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가 되는 것을 묻기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린 나의 불찰이 크도다. 감히 다음 태왕의 서열 순위 일위

인 나에게 형님의 붕어 소식을 알리지도 않고 후순위인 동생 연우를 태왕

의 자리에 앉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 얼른 왕궁으로 들어 연우가 태

왕이 되었다는 결정을 뒤집어 놔야 겠어.’
 발기 왕자는 서둘러 왕궁으로 들었다.


 “왕후를 만나야 겠다. 왕후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왕후는 지금 새로운 태왕 폐하와 대전에 들어 계십니다.”


 “뭐라고? 새로운 태왕이라니. 누가 임명한 태왕이라더냐? 새로운 태왕은

바로 나다.”


 궁인들이 서슬 퍼런 발기 왕자의 눈치를 보며 겨우 대답하였다. 발기 왕자

가 대전에 들자 이미 대소신료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태왕의 즉위식과 왕후

간택에 대하여 연우 왕자와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왕자는 예의를 갖추고 태왕 폐하를 대하시오.”
 “뭐라고? 이놈들아 누가 태왕이란 말이냐? 태왕은 바로 나다. 내가 태왕

이란 말이다.”
 “여봐라, 발기 왕자를 밖으로 모셔라.”


 태왕의 근위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발기 왕자를 대전 밖으로 끌고 나가

려하자 발기 왕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여봐라, 발기 형님을 안으로 모셔라.”
 태왕이 된 연우 왕자는 발기 왕자를 권자權座 바로 아래에 앉게 하였다.


 “연우야, 네가 어찌 감히 불충하게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냐? 어서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발기 왕자는 말을 삼가시오. 감히 태왕 폐하께 그 무슨 불충한 언사란

말이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언성을 높이며 발기 왕자를 꾸짖었다. 


 “뭐라고? 국상, 네놈이 나 몰래 우부인과 음모를 꾸몄구나. 내 네놈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발기 왕자는 군사들에게 양 팔이 잡혀 있으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

며 발버둥 쳤다.


 “나는 이 나라의 국상으로 다시 한 번 경고하겠소이다. 신임 태왕께서는

발기 왕자의 이복 생이나 지금은 대고구려를 이끄실 태왕의 위位에

앉으셨소이다. 어젯밤 남무 태왕께서 갑자기 붕어하시는 바람에 국가의

위급상황을 조속히 마무리하기 위하여 넷째 왕자께서 선왕의 유지有志에

라 고구려 제 십대 태왕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또한 만조백관 모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연우 왕자를 태왕의 자리

오르시는데 찬동하였소이다. 이제부터는 발기 왕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어

태왕을 보필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지엄한 국법에 의해 다스

려질 것이오. 명심하시기 바라오.


 또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소이다. 선대왕의 정비正妃이셨던 우왕후께서

는 곧 길일吉日을 택하여 태왕 폐하와 혼인식을 올릴 예정이오. 이는 고구

려의 아름다운 전통인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에 따른 것인 만발기 왕자

는 신임 태왕 폐하와 우왕후마마의 뜻을 존중해 주셨으면 하오.


 두 분의 혼인 역시 대소신료들과 왕실 어르신들 그리고 5부의 제 수장들

의 뜻을 충분히 반영한 조치입니다. 그러니 발기 왕자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고 물러가서 조용히 있으시오.”
 을파소의 쩌렁쩌렁하누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태왕 남무는 붕어하기 전날 우왕후와 재상 을파소 그리고 계루부와 연

나부의 대신을 침전으로 불렀다. 태왕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늦은 밤 태왕의 주변에 빙 둘러 앉은 우왕후와 대신들의 최대

심사는 ‘태왕이 과연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 였다.


 태왕과 우황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이제는 의식조차 가물가물하

여 옆에 앉아서 병간호하는 왕후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 였다. 태왕에

게는 바로 아래 동생 발기發岐와 둘째 동생 연우 그리고 막내 동생 계수

있었다. 태왕은 동생들을 철저히 배제 시키고 국상 을파소와 왕

그리고 계루부, 연나부 대신만을 침전으로 불렀다.


 “태왕, 정신이 좀 드셔요? 국상과 대신들이 모였습니다.”
 우왕후가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태왕에게 속삭이듯 고했다. 태왕은

크게 숨을 서너 번 몰아쉬더니 들릴 듯 말 듯 왕후에게 말하였는데 무

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태왕, 다시 한 번 말씀해보셔요. 잘 안 들립니다. 태왕, 태왕......”
 왕후는 태왕에게 귀를 바싹댔다. 지난밤만 하여도 태왕의 상태는 그리

위중해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태왕의 상태가 크게 악화되었다.

태왕이 의식이 뚜렷할 때 유지를 받아 놨어야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듯

했다.


 “태왕폐하, 유지를 내려 주소서.”
 “태왕폐하, 어서 유지를 하명하소서.”
 국상과 대신들이 태왕 가까이 다가와 큰소리로 외쳤다.


 “지, 짐-의, 세-동-생, 중-에-서......”
 “태왕, 세 동생 중에서 선택하란 말씀인가요?”
 우왕후가 태왕의 귀에 대소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물었다.


 “세, 동, 생, 중, 에, 서......”
 태왕 남무는 겨우 여섯 마디를 남기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태왕 폐하, 폐하께서 세 동생 중에서 한명을 지명해 주소서.”
 “폐하, 발기 왕자, 연우 왕자, 계수 왕자 중 누구 한명을 지명하소서.”
 “폐하, 세 명의 형제 중 한명을 지명해주소서.”

 그러나 태왕 남무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왕후, 폐하께서는 세 명의 동생 왕자들 중에서 한명을 지명하라 하셨습

니다. 대소신료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태왕께서 아직 살아계신데 회의라니요? 태왕께서 깊이 잠드

셨으니 깨어나시면 정신이 아오실 겁니다. 그때 다시 유지를 받아내야

합니다. 제신들께서는 물러가세요. 내가 태왕 곁에 있을 것입니다.” 


 우왕후의 요구에 대신들은 침전에서 물러 나와야 했다. 대신들이 물러간

뒤 우왕후는 침전에서 나왔다. 시비들이 뒤따르며 불울 밝혔다.


 “너희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어라. 혼자 거닐고 싶구나.”


 ‘지금까지의 전통대로라면 태왕의 세 명 동생 중 발기가 다음 보위寶位

에 오를 가능이 높다. 그러나 발기에게 왕위를 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

다. 내 남자, 연우 왕자가 보위에 올라야 내가 왕후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

어. 고구려에는 형이 동생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를 취하고, 동생이

죽으면 형이 제수弟嫂를 취할 수 있는 오랜 관습법이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우 왕자를 다음 태왕의 위에 올려야 해.’ 


 우왕후는 즉시 사람을 풀어 을파소와 연나부, 계루부의 대표를 은밀하게

다시 불렀다. 우왕후는 태왕이 잠꼬대처럼 한 말을 무시하고 대신들과 모

의하여 다음과 같이 태왕의 유지를 작성하였다. 을파소가 유지의 초안을

써서 왕후에게 보였다.   


 朕無後(짐무후), 弟中宜嗣之(제중선사지)
 짐에게 후사가 없으니 짐의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 보위를 잇도

록 하라.


 “국상, 제중弟中이란 말을 지우고 연우延優라고 정정하세요.”
 “왕후, 태왕께서는 형제들 중에서 선택하라고 유지를 내리셨습니다만?”


 “국상, 정녕 나의 말뜻을 모르신단 말이오?”

  “......”


 “국상, 왕후의 심중心中에는 연우 왕자님이 계십니다. 눈치가 없으십니다

그려.”
 계루부와 연나부의 대신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을파소에게 핀잔을

주었다. 을파소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朕無後(짐무후), 延優宜嗣之(연우선사지)
 짐에게 후사가 없으니 마땅히 연우에게 보위를 잇도록 하라.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내 국상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왕후님의 뜻을 펼칠 때가 되었습니다.” 


 “계루부와 연마부에서 나를 밀어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말

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즉위식 때 나와 새로운 태왕의 혼인식

을 동시에 준비해 주세요. 이것은 연우왕자와 나의 뜻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연나부와 계루부에서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왕후가 대담하게도 즉

위식 때 혼인식을 동시에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놈들, 형님께서 언제 저놈을 태왕의 자리에 앉히라는 유지를 내리셨단 

말이냐? 어서 선대왕의 유지를 가져오너라. 내가 직접 확인해야 겠다. 그리

고 아우가 형수를 취하는 일은 이미 예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풍속이거늘

아우가 태왕의 자리와 형수를 동시에 차지한단 말이냐? 이는 개나 돼지 같

은 짐승들이나 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것을 모르느냐?


 연우야, 네 이놈, 감히 이 형님이 오를 태왕의 자리를 여우같은 우씨녀를

드겨 차지하다니, 네놈은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어서,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나는 네놈들의 처사를 인정할 수 없다.”  


 발기 왕자는 노발대발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우욍후는 태왕의 곁에 앉아서

발기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놈, 네놈이 태왕의 자리를 탐내었다면 벌써부터 마음을 곱게 써서 어

려운 백성들을 위무하고 오부족의 수장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어야 하거늘 매

일 같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불쌍한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더니 꼴좋게 되었

구나. 흥-, 네놈이 내 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바보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이 나라의 왕자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네놈은 이제 죽은 듯 집안에 처

박혀 있어야 할 것이야. 만약에 정신 차리못하고 분란을 일으킨다며 절대

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그까짓 선대왕의 유지는 너에게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그 유지는 간밤

에 나와 연우 왕자 그리고 연나부와 계루부의 몇몇 대신들이 작당해서 작성

한 사실을 네가 알 턱이 있을까? 네놈 머리로는 백번 까무러쳤다 깨어난다

하여도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야. 네놈이 성품이 좋고  머리가 좋았

면 벌써 내가 네놈을 내 치마폭 안에 가두었을 게야. 하지만 이제 모든 것

이 내 뜻대로 된 이상 네놈은 일개 하찮은 주정뱅이에 불과해.


 그래도 네가 왕자라는 이유로 살려두는 것이니 고맙게 여겨야 하겠지. 너

하나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니까. 멍청한 놈.’  
 발기 왕자를 쏘아보는 우왕후의 눈에서 파란빛이 번뜩거렸다.


 “여봐라, 근위대는 무엇하느냐? 어서 발기 왕자를 끌어내지 않고?”
 연나부와 계루부 소속 대신들이 발기 왕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만들 두시오. 예부령은 선대왕의 유지를 발기 형님께 보여드리시오”


 발기 왕자는 예부령이 건넨 선왕의 유지를 보고 또 보았다.
  朕無後(짐무후), 延優宜嗣之(연우선사지)
 “뭐라, 짐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우가 마땅히 뒤를 잇는다고? 이건 말도 안 된

다. 형님께서 붕어하실 때 누가 곁에 있었느냐?”


 “발기 왕자는 말을 삼가하시오. 그 자리에 선태왕의 유언을 듣기 위하여 왕후와

이 사람이 그리고 오부의 수장들이 있었소이다.”
 국상 을파소가 발기 왕자에게 타이르듯 말하였지만 발기 왕자는 더욱 큰소리로

소란을 피웠다.


 “이 연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저 여우와 네놈들이 한통속이 되어 허위로 꾸

민 유지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천벌을 받을 연놈들이로다.”


 발기 왕자는 이미 대세가 연우 왕자에게 기울었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와 가병家

兵과 사병私兵을 모아 궁으로 쳐들어 갈 계획을 세웠다. 이에 발기 왕자의 부인이

말렸지만 발기 왕자는 듣지 않았다. 발기 왕자의 처는 우왕후에게 달려가 지아비

의 음모를 알리고 살려달라고 하였다. 발기 왕자의 부인이 우왕후를 만나고 있을

때 이미 군사 삼백 여명을 거느리고 궁궐 앞에 포진하였으나 궁성을 수비하는 군

사들에게 막혔다. 국상 을파소가 나와 소리쳤다.


 “이미 나라의 주인이 정해졌거늘 이 무슨 행패란 말이오? 태왕께서 그대가 왕자

임을 감안하여 용서하신다고 하시니 어서 물러가시오. 만일 물러가지 않는다면

왕자와 왕자의 식솔들 모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오.”


 “네이놈, 서압록 촌구석에서 땅이나 파먹던 놈이 국상에 자리에 오르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냐? 어서 문을 열지 못할까?”
 발기 왕자가 흥분하여 악을 쓰자 궁성 수비군사들이 화살을 날렸다. 열 명의 군

사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발기 왕자는 치를 떨며 소리쳤다.


 “이놈들, 내가 오늘은 물러가지만 언젠가는 네놈들 목이 내 칼에 떨어질 날이

올 것이다.”
 발기 왕자는 도망치듯 군사를 물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집에 돌아온 발기는

가솔家率들에게 짐을 싸라고 명하였다.


 “어디를 가시려고 아랫것들에게 짐을 싸라고 하는거에요?”
 발기 왕자의 부인이 물었으나 발기는 대답 대신 신경질을 냈다.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아무 말하지 말고 따르기만 하면 되오. 오늘밤 나는

가솔들을 이끌고 야반도주할 거요.”


 “네에? 어디로 야반도주 한단 말씀이에요?”
 “그렇소. 나는 자존심이 너무 상해 국내성에 살 수 없소. 나는 두눌杜訥로 가서

왕 노릇을 하며 살 거요.”
 발기 왕자는 아내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솔들을 이끌고 국내성을 탈

출하여 요동遼東에서 가까운 두눌 땅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고구려

에게 대항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생에게 왕위를 도둑맞았다고 떠들고 다니며 고구려 조정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발기왕자는 두눌에 머물면서 묘책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외세外勢를 이용하여 빼앗긴 태왕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거대한 음모였다. 발기 왕

자는 한나라가 내분으로 혼란하자 독립적인 정권을 세우고 황제 노릇을 하고 있던

손씨公孫氏 가문을 찾아갔다.


 공손씨 가문은 기름진 요동 땅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고구려와 영토문제로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손씨 가문의 수장은 공손탁으로 후한後漢 말 독재자 동탁董卓

으로 부터 요동태수遼東太守라는 직함을 제수받았다. 


 요동은 원래 조선시대 삼조선중 하나인 번조선番朝鮮의 영토였다. 한나라의 권력

투쟁에 밀려 번조선으로 도망쳐온 위만衛滿은 번조선의 기준箕準 왕에게 투항하

자 기준왕은 박사博士라는 직위를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만은 기준

왕을 속이고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 시킨 뒤에 기준이 도읍인 왕험성王險城을 비운

사이에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왕험성을 점령해 버렸다.


 기준 왕은 갈 곳이 없자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막조선莫朝鮮으로 도망쳐

마한에 목지국目支國을 건국하였다. 한나라 도적 출신 위만의 나라가 된 기름진

옛 번조선 땅은 이후 한나라 왕 유철劉徹의 영토 확장 정책에 의해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한後漢 말 유비劉備의 촉蜀, 손견孫堅의 오吳, 조曹操의 위魏로 후한

이 삼분할 되면서 고조선의 옛 영토인 요동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리자 공

손탁이 차지하고 나라도 아니고 지방정부도 아닌 족벌族閥로 정권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정실부인이 된 소서노召西弩는 자신의 몸에서 출

생한 두 아들 비류沸流와 조溫祖가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태왕太王이 되

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몽은 첫 번째 부인 예씨芮氏소생인 유리瑠璃 왕자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요동지

인접한 비류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발기 왕자는 고구려 조정에 불만을

고 있었던 비류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대가 고구려의 발기 왕자가 틀림없소?”
 “요동의 실권자 공손탁公孫度은 고구려의 왕자가 스스로 찾아와 항복을 하면

서 조국 고구려를 치겠다는 말을 하자 믿기지 않았다.”


 “태수님, 저는 고구려 신대왕新大王의 셋째 아들이자 최근에 훙서薨逝한 고구

려 태왕 남무의 친동생 발기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왕자가 어인일로 이 사람을 찾아 온 거요?”
 발기는 자신의 속마음을 의심하고 있는 요동태수 공손탁을 설득해야 했다.



 “태수님, 얼마 전 아버님의 후궁後宮 소생이면서 저의 이복동생 되는 연우

고구려의 태왕 자리를 훔쳤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서열로 보면 마땅히 제가

태왕이 되어야 하나 선왕의 후비인 우씨녀가 연우와 몇몇 고관들을 꼬드겨 선

왕의 유지有志를 허위로 작성하여 태왕의 위를 찬탈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울

분을 삭힐 수 없어 식솔들을 데리고 두눌로 도망쳐 임시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발기 왕자는 고구려의 왕자 신분을 망각한 채 위의 변방을 지키는 일개 무사

인 공손탁에게 엎드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아버님, 국내성에 나가있는 간자間者가 보내온 소식과 저자가 하는 말이

일치합니다. 소자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아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의 좋은 생각이란 무엇이냐?”

 “저자를 이용하여 고구려 서남방 지역인 개마, 구려, 하양, 도성, 둔유, 장령,

서안평, 평곽군 등을 취하십시오.”
 “그럼, 저자에게 군사를 내주란 말이냐?”


 공손탁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아들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확신이 가지 않

는 눈치였다.


 “발기가 아버님을 찾아온 이유는 뻔합니다. 아버님의 군사를 빌려 왕위를 빼

앗긴 앙갚음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 기회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차지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공손탁은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릎을 쳤다.


 “험-, 그대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발기는 공손탁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태수님의 군사 삼만 명을 잠시 빌려 주십시오.
 토끼눈처럼 충혈된 발기의 눈이 반짝거렸다.


 “삼만 명이나 빌려 달라? 그 많은 군사를 빌려 무엇하려는가?”
 “소신이 삼만 명의 군사를 몰고 가 단숨에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태수님에게 바

치겠습니다.”


 “참으로 갸륵하도다. 좋다 내 너에게 군사 이만을 내어 주겠노라. 어서 가서 고

구려를 밟고 오너라.”


 공손탁은 3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접수하겠다는 발기왕자의 맹랑한 소리에 선뜻

허락하였다. 3만 명의 군사로 대국 고구려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공

손탁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수의 군사보다 잘 달련 된 정예병 2만 명으로도 공

손탁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태수님, 이만명이라니요? 적어도 삼만 명은 주셔야 국내성을 깨트릴 수 있습니

다. 이만명 정도로는 도저히 불가합니다.”
 “우선 이만 명을 내줄테니 고구려를 접수하라. 내가 상황을 봐서 친히 구원병을

더 보낼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역시 태수님은 듣던 대로 대인이십니다.”
 ‘멍청한 놈.’
 공손탁의 아들 공손연이 말없이 발기 왕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저, 태왕은 하늘이 내리시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조국 강

토를 지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동서로 말을 달리시고 남북으로 구름을 쫓으시던

선왕은 피곤한 몸을 쉬시려 일찍 가시었습니다. 태왕의 뒤를 이어 신대왕新大王

의 사자四子이시며 하늘이 내리신 연우延優 왕자를 고구려 제10대 태왕으로 받

드오니 하늘이시여, 우리 고구려가 천세만세에 복락을 누리고 영원히 금수강토

를 지킬 수 있도록 굽어 살피소서.


 위로는 천왕랑이신 해모수解慕漱 천제天帝와 주몽 성제聖帝의 피를 이어받은

거룩한 후손이 오늘 다시 새주인으로 태왕에 등극登極하시니 이 나라가 사해四

海로 성덕을 널리 베푸시고 아름다운 그 이름이 천지사방에 스며들도록 하소서.

또한 선왕先王의 은총으로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신왕新

의 정비正妃로 간택되신 연나부椽那部 출신이신 우씨 부인을 왕후로 봉하고자

하나이다.


 이는 하늘이 이미 정해주신 천생연분으로 원앙조차 질투할 금슬이 하해河海

의 백성들 입에 오르내리고 천지에 후덕한 기운을 내리시니 이는 왕실에 경사

요 만백성의 홍복이나이다. 모든 대소신료와 백성들은 두 분을 고구려의 새

인으로 받드오니 극락을 누리소서.


 신대왕의 넷째 왕자 연우는 친형이며 고구려 제10대 태왕 고남무高南武 정비

였던 우왕후를 배필로 맞이하고 만조백관의 축복을 받으며 고구려 제11대 태

왕에 등극하였다. 도저히 태왕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자신을 태왕에 올려놓은

배려로 연우는 같은 날 형수이며 정인情人이었던 우왕후를 아내로 맞이하고

례를 올렸다. 선왕先王 남무를 국내성에서 가까운 고국천원故國川原에 후하

게 장사를 지내고 서둘러 위식 겸 새로운 태왕의 혼사를 치뤘다. 조정에서

선왕 남무의 시호諡號를 고국천왕이라고 지었다.


 왕족인 계루부와 왕비족인 연나부 사람들은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꾸준히

음모론을 주장하던 관나부貫那部, 비류부沸流部, 환나부桓那部 사람들은 아

무 말이 없었다. 고구려의 실세인 계루부와 연나부의 야합野合을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나머지 세부족의 대신들은 또 원루寃淚를 삼켜야 했다.

나머지 3부족이 세를 규합하여 왕과 왕비족에게 대항하려고 하여도 워낙

계류부와 연나부의 힘이 강해 반란反亂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저건 음모가 분명하오. 발기 왕자만 불쌍하게 되었소이다.”
 관나부의 대신이 환나부 대신에게 속삭였다.


 “빌어먹을 놈들. 제 놈들이 북치고 장고치고 다 해쳐먹는군 그래. 헐-.”
 환나부 대신은 뒤돌아서서 침을 뱉었다.


 “그래도 보기는 좋으이......”
 “예끼, 이 사람 배알도 없으이.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게 이 나라가 농락을 당

하고 있음이야. 해모수 천제와 고주몽 성제께서 이 황당한 모습을 보고 계 시는

지, 참으로 기가 막히구나. 기가 막혀.”


 ‘음-, 네놈들이 얼마나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나 보겠다. 계루부와 연나부 놈

들이 미리 짜고 선왕의 유지有志 가짜로 작성하여 유약한 연우 왕자를 왕으로

앉히다니. 허수아비 같은 자를 왕으로 앉혀놓고 이 나라를 말아먹으려 하는구

나. 아, 고구려가 앞으로 어떤 가시밭길을 걸을 것인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

도다.’          
 비류부위 대신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훔쳤다. 낮부터 시작된 주연酒宴은 밤이

깊어도 이어졌다.


 “형수, 아니지. 왕후, 이제 내 여자가 되었소. 우리 해로동혈합시다. 이제부터

지나간 고뇌의 세월은 기억에서 지우고 가슴에서 털어내도록 하오. 그대는 내

사랑스러운 아내며 영원히 내 정인이오. 먼 훗날 내가 죽어 저승에 들더라도

나는 당신을 잊지 않을 거요. 아니지. 저승에 가면 당신이 오기만 학수고대

거요. 사랑하오.”


 “연우 왕자, 아니지. 이제는 내 남자이며 지아비지.”
 우왕후는 침전에 들어서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후, 우리 합환주를 듭시다.”
 “아이, 태왕, 그냥 자면 안 돼요? 하루 종일 술을 마셨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정식으로 만백성 앞에 부부의 연을 맺은 첫날이오. 우리끼리

한잔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가요?”
 우왕후가 따르는 술이 금잔金盞에 넘쳐 내렸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언제나 철철 넘쳐나야 합니다.”
 “태왕만 믿어요.”
 “그럼요. 이 지아비를 믿어야지요.”


 “태왕을 처음 내 처소로 초대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그날은 내 인생을 바꿔놓은 날이었어요.”


 태왕은 그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렸다. 스물네 살의 혈기 왕성한 사내는 말

초신경이 자극을 받으며 금방전신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왕후, 사랑하오.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거요.”

 “태왕, 연우, 내 사랑......, 꼭 안아 주세요. 이 몸이 으스러지도록 곡 안아주세

. 오늘밤은 여느 때보다 달라요. 벌써 몸이 터질 듯 해요.”

 연우는 형수였던 우왕후의 후덕한 육신을 탐하였다. 거대한 뱀이 먹이를 칭칭 휘

어 감고 놀리듯 태왕의 뜨거운 욕망은 풍덕한 무덤과 무성한 수풀 사이를 쉬지 않

고 누볐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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