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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제4시집 발문/서평/작가의 변

* 소 개 글/작가 프로필(Profile)

by 여강 최재효 2009. 12. 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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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출판 기념회 안내 ] 

 

 


                                    ○ 일시 : 2009년 12월 8일(화)  저녁 7시부터

                                 ○ 장소 : 인천시 남동구 만수6동 1014-1번지

                                               - 만수3지구내 남동농협 4층 - 

                                                    [ 아름다운 뷔페.웨딩홀 ☎ 032-461-7777 ]

                                             송내역에서 만수3지구가는 103번 좌석버스 타시고 만수6동

                                                    사무소 앞에서 하차

 

                                 ○ 출판작품집

                                                              - 달하 노피곰 도드샤 (제3시집) - 도서출판 진원

                                                       - 꽃 피고 지는 사연   (제4시집) - 도서출판 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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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집

 

 

 

 

- 跋文 -

 

 

 


 달을 사랑하는 사람


                                                                                                                     김윤식 / 시인․인천광역시문인협회장



 여강 최재효 시인의 원고(原稿)를 받고는 놀랐다. 우선 그가 소설(小說)을 쓰는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소설집이 아닌 시집(詩集)을 낸다는 사실과, 또 그 시집에 실릴 시들이 온통 달을

찬미(讚美)하고 달을 노래한 것들 뿐인 까닭이었다. 달 투성이!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시를 못 쓸 이유가 없을 터이고, 전편(全篇)이 오로지 달을 주제로,

소재로, 제목들마다 달이라 이름 붙였다고 해서 이상해 할 하등의 까닭이 없으니, 기실 나의

놀람은 지나치게 상식(常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다는 자성(自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요즘에 누가 이렇게 자상하게, 애타게, 순진하게, 너그럽게, 다정하게, 사랑

스럽게 달을 쳐다본단 말인가. 누가 달을 껴안고, 달에 기대고, 달을 베고, 달을 업고, 누가

달에게 이토록 곡진(曲盡)한 마음을 준단 말인가.

 

 달이 임이라니? 이 21세기에, 달에 로켓이나 쏘아 올려 물을 찾네, 무얼 찾네, 하는 마당에,

이다지도 지극하게, 가슴 아프게, 뼈마디에 사무치도록 달을 임으로 알아 몸살 앓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또 한 명 이백(李白)이 세상에

났다고 해야 할까.

 

 이백이 정신의 자유를 찾아 세속을 넘어 꿈과 정열로 주유(周遊)했다면,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면, 그리고 마침내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면, 여강 최재효 시인의 가슴에 품은 저 달에 대한 로맨티시즘은 그 정체가 어떤

것일까.

 

 그는 비교적 큰 체수에 평소 말수가 적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얼핏 알 수 없는 한없이

과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옛날 김영태(金榮泰) 시인이 시에 쓴 그 ‘무광택(無光澤)’에 진배

없는 그가 오늘 한꺼번에 저 밝은 달에, 초승달에, 그믐달에 풍덩 빠져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 땅에서 384,000km 거리에 있는 임, 나는 부모를 정점(頂點)으로 돌고, 임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며, 지구는 해를 공전하고, 태양은 은하의 블랙홀을 중심으로 돌고 돈다. 그야

말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다.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혹은 지구의

그림자에 묻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로 우리는 곁에 있는 임을 소홀히 하고 있다.

달은 사바(裟婆)의 이 어리석은 밥 벌레에게 희망이며, 청운의 꿈이며, 찬가이며, 미래이며,

삶의 존재 이유이며, 행복이다. 동시에 임은 또한 슬픔이며, 연가(戀歌)이며, 비가(悲歌)이며,

이별이며, 독주(毒酒)이며, 영결(永訣)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가 자서(自序)에 적어 놓은 달에 빠져든 이유이다. 그렇다면 달에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거기서 희망과 꿈과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그의 공력(功力)

이 부럽다.

 

 “눈물이며, 비가이며, 독주이며, 영결”이라는 그의 관조가 놀랍다. 그저 평범하게 달을 사랑

하면 이룰 수 있는, 그러나 무릇 범인(凡人)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만의 터득(攄得)이

여기서 한없이 빛난다.  그래서 그의 달에는 감월(感月), 우월(雨月), 정월(情月), 탄월(呑月),

영월(詠月), 환월(換月), 흡월(吸月)이 있는가 하면, 가월(嘉月), 소월(蕭月), 설월(雪月), 수월

(水月)에다가 독월(毒月) 난월(亂月)까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월(影月), 심월(尋月)의 풍류, 아취(雅趣)를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여월(侶月), 시월(詩月), 백월(白月)을 읊은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의 달사랑, 달 흠모가 실로

깊어 읽는 자의 마음에 달을 전염시킨다.

 

 그리고도 모자라 추월(秋月), 취월(醉月), 운월(雲月)을 읊고, 원월(怨月), 사월(死月), 허월

(虛月), 누월(淚月)의 허망함에 눈물 젖는다. 풍월(風月), 몽월(夢月), 불월(佛月)을 노래하면서

한편, 사월(斜月), 파월(破月), 망월(忘月), 과월(過月)을 통해 일상의 부침을 토로한다. 그러나

끝내는 효월(曉月), 주월(酒月), 만월(万月), 선월(仙月)의 높은 정서로 끝맺으니 그는 진실로

달로써 삶을 살고 생을 좇는 시인이 아니랴. 진정 달을 사랑하는 사람, 여강 최재효 시인!

 

 “더 늦기 전에 임을 청하여 수작(酬酌)도 좋고 대작(對酌)도 좋으니 그럴듯한 구실을 핑계로

자주 독대(獨對)를 하려한다. 혹시 천국행 차표를 줄지도 모르니까.”

 

 분명 이백(李白)이 다시 살아와도 그와는 같지 않을진저! 그를 일러 월선(月仙)이라 해야 옳을까.

 무릇 인류(人類)는 그의 시들을 낡은 정조(情操)로 치부하여 진부하다고 할지 모른다. 필경

그런 험은 지니고 있으되, 그의 시들은 이미 우리가 구식으로 생각하고, 낡은 것으로 계산해

버리는 것들을 다시 진정한 가슴으로 껴안으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의 과묵(寡黙)이 이런 시를

낳으니 누가 그것을 막으랴. 무엇을 더 덧붙이랴.

 

 작가에서 시인으로, 결코 허튼 방향 전환이 아니되게 오로지 더욱 정진, 정진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이 저녁 그의 달을 마음껏 더듬었으니 나는 달나라에도 다녀온 듯

하다.



 

 

 

 

 

 

 


[ 詩集 평설 ]

 


 

  예토穢土를 보듬는 월광곡月光曲, 그 돈오頓悟의 미학美學

                              - 여강 최재효 3시집 상재를 맞이하며 -

 

 

 

                                                                                漢比 한기홍 (갯벌문학 주간)

 

 

 

 

  1. 프롤로그 - 달에 다가가기

 


  신종플루라고 명명된 이종독감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혹자는 말세의 도래로 이야기

하면서 종말론적인 비관으로 인류에게 닥친 대재앙의 서막으로 설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연의 순기가 빚어내는 섭리로서 한 시대를 휘도는 기상현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직도 끽연가로서 기관지가 약해 환절기만 되면 통과의례처럼 한바탕 감기를 겪어야

하는 필자로서는 연일 방송에서 떠드는 신종플루의 확산을 가볍게 흘려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필자의 직장과 거주지 동네에서도 환자가 발생되고 있어 위기감이랄

까, 막연한 불안감이 심중에 자라나고 있다. 한 모금 담배연기가 허공에 흩어져 늦가을

깊은 하늘에 찍혀있는 낮달로 향하고 있다. 이 땅 모든 생령들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오묘하고 거룩한 순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2009년도 10월 말의 변화 속에서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지난 반년 동안 병중病中이었다. 위장수술로 장기간 병치레 하던 그를 최근에 본 것은 

지난 9월에 있었던 갯벌문학 창간20돌 기념식장에서였다. 동문학회의 주간으로 있는 필자

의 추천과 심사위원회의 인준을 거쳐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는 ‘2009년도 갯벌작가’로

선정되어 행사장의 연단에서 작가패를 수여받게 되었기 때문에 병중인 몸으로 참석

했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했던 그의 육신은 흡사 젓가락과 같이 메말라 있었고, 오랜 병상

생활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는데 형형한 눈빛만이 여강 시인(작가)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때

그의 눈빛을 보고 같은 길을 걷는 문학인으로서 안심할 수 있었는데, 그의 지독하고 치열한

창작정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통화에서 작가는 “곧 셋째 딸을 출가

시키려는데, 필자의 주례사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시 99편을 보냈으니 평설評說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셋째 딸의 출가는 세 번째 시집출간을 뜻함이었다. 그가 여타 평론가들을 거론하지 않고

필자에게 청탁하는 내심을 익히 알면서도, 필자의 최근 여러 가지 정황상 사양하였으나 재차

부탁하는 터라 할 수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여강 시인(작가)와 필자의 문학 인연상 한마디로

사양할 계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달이 되고자 날고 있는 21세기 *이카루스 여강

 


  99편의 시들은 모두가 달을 주제로 쓴 두 음절 제목의 작품들이다. 해박한 한학漢學실력과

풍부한 전고典故의 활용은 이미 문단에서 정평이 나있는 여강 시인(작가)이다. 보내온 시집

원고 ‘달하 노피곰 도드샤’를 우선 일별하려고 주욱 시편들을 넘기다가 지난 4월에 병실에서 쓴

그의 비교적 최근 작 ‘병월病月’에 눈이 멎었다.

 

 

 

                     病月

 

 

 

                   누가 임에게 달이라는

                   단순하고 외로운 것을 명명命名했을까요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스인 조르바?

                   크로마뇽인?

                   제3의 인물?

 


                   용서하소서

                   자주 임의 존호尊號를 남발하였습니다

                   겨우 산마루를 넘어 내달리던 중에

                   돌부리에 걸렸습니다

                   소년의 괘씸한 언동言動에 그만

                   마음이 많이 상하셨던 게지요

 


                   속죄하는 심정으로

                   합장合掌한 채 여명黎明에 젖습니다

                   다시주신 기회에

                   생명을 담보로 하겠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천둥을 치시고

                   섬광을 보이시어

                   찰나刹那가 영원같게 해주신다면

                   지상의 어떤 생령은

                   고루 선하게 될 것으로 믿사옵니다

 

 

 

                   - 창작일 : 2009.4.29. 03:30

                       인천 길병원 7015호실 병상에서

 


                                                      - 시 ‘병월’ 전문

 

 

 

 


                                                                                              

*이카루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을 설계한 다이달로스의 아들로서, 커다란

날개를 달고서 태양을 향해 비행했다가 날개가 태양에 녹아 추락하여 죽음. 언제나 인간욕망의 대명사로서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진취적 기상의 전범典範. 혹자들은 몽상가라고도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병마와 싸우면서, 자의든 타의든 달을 척박한 예토穢土에 있게 만든

자신의 심상에 대한 처절한 절규로 받아들여져 시 ‘병월’을 여러 번 읽어 내렸다. 소설가로서

시인으로서 그간 폭넓은 문학세계를 선보여 오던 여강 시인(작가)가 이렇게 달에 천착하고

문학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데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용서하소서/ 자주 임의 존호尊號를 남발하였습니다/ 겨우 산마루를 넘어 내달리던

중에/돌부리에 걸렸습니다/ 는~ 그동안 솟아오르는 필력으로 본인의 내면에 녹아있는 달에

대한 환몽과 탄생의 모티브에 도취되었던 본인에 대한 성찰이다. 밤에 현신하지만 음양이원

陰陽二元의 으뜸으로서 만물을 전제하여 이면裏面의 신화와 전설과 상징의 창조로 모든

역사의 씨앗을 잉태하는 달.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달밤이기에 은일隱逸함이 넘쳐 도피와

은둔, 속리俗離의 애상을 품을 수밖에 없는 달.

 

  이 거룩한 달님을 그동안 거침없는 표현과 인식으로 일필휘지해온 여강 시인(작가)으로

서는 자신에게 닥친 병고病苦야말로 달님의 준엄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그간 방만

하고 거침없었던 바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의 함축이랄 수 있다. 즉 위절제 수술이라는

생애 최대의 병고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그려온 표상인 달에 대한 경외 속에서, 혹여 달에

대한 ‘남발창작’이 미완의 지식으로 표출되어 기고만장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까 깊게 회의

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달, 병고를 내려 주의를 환기 시켜주는 달, 보이지 않는

주재자의 거대한 힘으로 섭리를 이끌어 가는 달~ 여강 시인(작가)는 신병을 얻어 고생하면서

그동안 내면으로만 삼켜왔던 송구함을 비로소 토로하면서 달에게 고해성사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2연 4~5행의 ‘소년의 괘씸한 언동言動에 그만/ 마음이 많이 상하셨던 게지요’ 는 이를 잘

토로하고 있는 부분이다. 시인(작가)의 이런 내밀한 심적 성찰과 ‘뒤 돌아보기’는 영원히

만월을 향해 날기를 염원하는 21세기 이카루스로서의 가녀린 희원이랄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치열한 성찰의 귀감이요, 문사로서의 양심적 책무의 이행이라 할만하다.  

             


  달에서 태어나 달에서 한 세상 살다가 달에 뼈를 묻어달라고 유언장을 지니고 다니는

나에게 知人들은 失笑를 금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달을 어미로 두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직도 달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生靈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허파와 심장 그리고 뇌수에 임의 발자국이 나이테로 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임을 한낱

閑談의 소재로 삼고 있는 무례한 妄靈 또한 얼마나 많은가.

 

                                                                                      - 시집 서문 중에서

 


  여강 시인(작가)에게 달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위 서문에 술회한 그의 달에 대한 소회를

보면, 그 숭배의 정도를 잘 알 수 있다. 그에게 달은 그의 고고성과 삶의 부침을 있게 한 유일

신인 것이다. 그의 심금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생명의 밧줄은 둥그런 월령月靈에 동여져

있다. 그의 달은 근원적으로 동양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달은 길을 가다가 단애를

잘못 디뎌서 추락하다가 붙잡은 나뭇가지 너머 얼핏 보인 동혈洞穴 가에서, 빙긋 웃는 한 떨기

무명화無名花의 웃음을 보고 ‘제법무상諸法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탄식하는 불가적佛家的

윤회의 달이요, 월광곡이 뿜어 나오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려지는 두레박줄에 흐르는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예지가 배어있는 유가儒家의 달이기도 하다.

 

  또한 한줄기 연기처럼 홀연히 피어올랐다 사라진 영화榮華나, 슬픔에 차 꺼이꺼이 울다가

돌 틈에서 맛본 감로수에 화색이 돌 듯 변화무쌍한 풍진을 휘적휘적 장삼자락에 날리며 걸어

가는 도가道家의 달이기도 하다. 중세 구라파 어스름한 달밤, 어느 강가의 고성 일곽에서 퍼져

오는 드라큐라 백작의 발걸음 소리도 아니요, 구름 낀 달밤 도나우 강변 어느 갈대숲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프랑켄슈타인의 눈알에 투영된 달도 아니다. 그의 달은 우주를 비추면서도

동방 시방정토十方淨土 위에서 교교히 빛나는 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과 서를 아우르는 한님뿐인 달. 그 달 속에 깃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성

이나 괴테의 꿈들 또한 원융무애圓融無碍로서 시인의 정수리에 서방정토의 달빛으로 녹아

들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천국과 누항을 모두 품고 있는 만화경萬華鏡 사바세계의 징소리로서

존재하고 있는 시인의 달. 생멸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면서도 존재의 이유에 치열해지는 모순의

달덩이야말로 우리 즘생들의 게시판이요, 희망의 징표로서 천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시 ‘월월月月’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사점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月月

 

 

                   불혹을 넘어서

                   내가 달이었음을 깨달았지

                   많은 벗들은 

                   아직도 자신을 별(星)로 알고 있지만 

 


                   오늘처럼 국향菊香에

                   눈이 시린 날

                   자네와 은밀히 시선을 맞추고

                   화주火酒로 이 밤을 불사르고 싶다네 

 


                   지상의 닭들은 이제

                   새벽이 되어도 울지 않고

                   배부른 이웃들은

                   천국행 차표를 얻으려 혈안이며

                   공맹孔孟의 제자들마저

                   푼돈과 절개節槪를 맞바꿨다네

                   더 말하면 무엇하겠나

 


                   우리 술이나 치세

                   연꽃 띄워, 저승에 들어야 만날

                   그 애를 그리며 나 한잔

                   황국黃菊을 띄워 자네 한잔

 


                   요즘 이승에서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귀신이 분명 할 걸세

 


                  

                                                     - 시 ‘월월’ 전문

 

 

 

 

 

 

   3. 시적역설詩的逆說이 흐르는 여주강驪州江 소나타

  

  시인(작가)의 아호인 여강驪江은 그의 고향인 경기도 여주를 흐르는 여주강에서 따왔다고

한다. 평원과 산록이 어우러진 여주 땅을 굽이굽이 흐르는 여주강 이야말로 그에게는 당나라

이백李白이 뛰어 든 채석강이요, 싯다르타가 설법했던 항하恒河(갠지스강)로 각인되어 있다.

유년시절 여주강에서 멱을 감으며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달떡(月餠)을 먹으며 호연지기를

키운 여강 시인(작가)에게 여주강은 그 무엇보다도 지고한 이상향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중년기 삶의 이정표로서 그의 그리움 향로에 연기를 피워 올리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여강 시인(작가)의 심연에 깊게 찍힌 화인火印이기도 하다.

  아래 시 ‘죽월’은 천만 개의 얼굴을 가진 달의 변용을 치열하게 천착하여 변용變容의 미학이

깃든 중층 열거법으로 창작하고 있는 수작이다.   

   

 


                       竹月

 


                   울산 반구대 고래가 삼켰던 임

                   여강驪江 잉어가 뛰어올라 환호하던 임

                   잉카 제사장이 소녀의 가슴 절개하고

                   심장 꺼내들 던 밤, 가슴 치던 임

                   대취한 이태백 유혹하던 임

                   임진년, 동래성이 함락될 때 모르쇠 했던 임

                   어머니 자궁에 나를 심어놓았던 임

                   하늘과 지옥에도 동시에 현신하는 임

                   내 몸이 산화散華하는 날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실 임

                   그런 임이 허공에서

                   초저녁부터 불콰한 얼굴로 나타나시어

                   파안대소하시는 것이다

                   어제의 일도 까맣게 잊은 자손들은

                   내일도 변함없이 임께서 인자할 거라고 믿으며

                   순진한 위안을 구걸하고 있다

                   귀신이 필요한 데 귀신으로

                   천사가 요구되는 곳에 천사로

                   창녀를 찾는 곳에 창녀로

                   죽음을 동경하는 곳에는 차사差使로

                   임께서는 그렇게 달빛 그림자로

                   자손들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나투시는 것이다

                   해서, 당신께서는

                   얼굴이 가장 큰 날 변함없는 뚝심을 보이려

                   천년을 갈구하는 똑똑한 자손들 등뼈에           

                   갑골문자를 새겨 넣기 위해

                   분노를 억누르며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창작일 : 2008. 02. 21.

                           戊子年 대보름 인천 소래에서

 


                                                                           - 시 ‘죽월’ 전문

 

 

 

                                                                                              

*시적역설詩的逆說(*Poetic Paradox)~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 시인은 표면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작품에 내면화 시키고, 이 모순관계에서 야기되는 의미론적 긴장 속에서 詩的 가치를 창조한다. 대표

적인 시로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들 수 있는데, ‘님을 고이 보내드리지만’ 사실은 원망과 슬픔 속에서

다시 돌아오기를 갈구하는 내면의 희원을 그린 시로 분석한다.  

 

 

  여강 시인(작가)에게 달님은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지척에서 비통과 연민을 하소연하는

푸념상대로서의 친근한 동무이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을 연상케 하는 시

‘우월雨月’은 시인의 달님에 대한 존숭과 응석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독자의

눈에 시인의 시적역설을 통해 바라 본 달님을 상징적으로 구현 시키고 있는 울림이 큰 작품

이다. 시적역설詩的逆說(PoeticParadox) 은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로서, 시인은 표면적 의미

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작품에 내면화 시키고, 이 모순관계에서 야기되는 의미론적 긴장 속에서

시적詩的 가치를 창조하는 기법이다. 이번에 여강 시인(작가)이 상재하는 달님 시리즈 연작시

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의 독특한 창조력이다.

 

 

 

                        雨月

 


                   하늘의 통곡

                   그임 이별의 고통

                   어떤 사내, 임 그리워 사무친 눈물

 


                   낮부터 휑하게 뚫린 잿빛 입에서

                   쉴 새 없이 슬픈 곡조가 들리고

                   맑은 시어詩語가 떨어지고

                   감로수 흘러내리고

                   천지간에 임 잃은 한 사내

                   취선醉仙되어 무정세월 낚고

 


                   바람 불면 풍월風月 되시는 임

                   구름 가득하면 운월雲月되시는 임

                   천해天海에 슬픔일면 우월雨月되시는 내임

                   언제 임이 떠나신 적 있었던 지요

 


                   아, 임께선

                   언제 어디서나 임이셨고

                   어린 영혼은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고통은 오히려 환희로 다가옵니다

 


                                                                   - 시 ‘우월’ 전문

 

 

 

  3연을 보면  ‘바람 불면 풍월風月 되시는 임/ 구름 가득하면 운월雲月되시는 임/ 천해天海에

슬픔일면 우월雨月되시는 내임/ 언제 임이 떠나신 적 있었던 지요’ 라고 피력하고 있다. 만해

선생 역시 불가의 승려로서 몰락한 조국에 대한 애모를 토로하면서도 시편에 적시하는 절대

자로서의 ‘님’의 후광後光이야말로 몽매에도 못 잊는 피안의 세계, 정토淨土를 갈망하는 화엄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지향이었다고 필자는 분석해 보는 것이다. 

 

  4연의 ‘아, 임께선/ 언제 어디서나 임이셨고/ 어린 영혼은 눈이 멀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고통은 오히려 환희로 다가옵니다’ 의 귀결은 그래서 만해 선생과 여강 시인(작가)의 심중

지향점이 일치하는 대목이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만해 선생의 조국애에 대한 만고명편

萬古名篇이 어찌 여강 시인(작가)의 개인사적 대망待望과 일치할 수 있겠냐는 비평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감득感得하는 두 사람의 님을 그리는 고통과 일념의 순도는 동일시된다고 진단

하는 것이다.    

 

  21세기 첨단문명의 전개 하에서 고풍古風의 발현은 진부하고 식상할 수밖에 없다고 치부

하는 작금의 세태다. 그러나 어찌 그러한가? 언제나 진보를 꽃피우고 살찌웠던 하드웨어는 훈고

訓詁의 바탕 속에서 비롯되었다. 여강 시인(작가)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에서 치열한 훈고의 강물

위에 따듯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띄워놓았다. 그가 해체하려는 것은 달빛은 단지

밤에만 비춘다고 투덜대는 항간의 오해와 편견, 무지들에 대한 통렬한 펀치가격의 작업이다.

 

  여강 시인(작가)의 달빛은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선발대가 아니라, 태양 옆 대낮 정오의 찬란함

속에서도, 폭풍우 치는 장마전선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정수리에 교교히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달님을 사랑하고 책망하며, 끌어안는 의미는 무얼까. 아마도 그는 이미 달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토의 황금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요’의 토로가 그러하다. 이처럼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세계관에서 배출하는 그의 정신세계는 깊고 맑기만 하다. 

     

 

 

                                      蕭月

 


                   억 만년을 살아오신 임이나

                   겨우 반백년도 못 넘긴 중생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라는 사실이

                   참으로 원통하면서도 또한 다행입니다

 


                   예토穢土의 황금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요

                   어떤 중생에게는 오로지

                   두 임만 곁에 계시면 그 뿐이랍니다

 


                                                   - 시 ‘소월’ 중 4~5연

 

 

 

  

 

4. 에필로그 - 달빛 푸르러 오늘인 것을

 


  여강 최재효 시인(작가). 그의 문명文名은 이미 문단의 주목을 넉넉히 받을 만큼 낮 설지 않다.

강직함 속에 유연함을 감추고 있고, 뼈를 깎는 창작혼을 가지고 있기에 현금 문단의 흔치않은

재목이라고 감히 피력한다. 이번에 상재하는 ‘달하 노피곰 도드샤’는 여강 시인(작가)으로 하여금

‘달님시인’이라는 별호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느 누가 이처럼 달에 대하여 깊이 천착

하고 망배望拜 하였던가.

 

  미사여구가 아닌, 심원한 그리움의 표상으로서의 달을 심안에서 사출射出해낸 작가의

비범한 창작혼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후생을 점쳐 본다면 이백李白처럼

달을 쫒다가 강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경기도 여주의 여강驪江에서

승천하는 한 마리의 용이 달빛 속으로 비상하여 달과 함께 한 몸이 될 때, 마침내 그의 수행기

修行記는 완성 될 듯 하다. 그의 달 노래는 교교한 달빛아래 펼쳐지는 삼라만상의 데쟈뷰

(Deja-vu) 파노라마다. 고해 속의 열락은 억만년 반복되는 영상映像이기 때문이다. 

 

  여강 시인(작가)의 깊고 푸른 창작혼이 더욱 절차탁마되어 천강千江의 달빛처럼 밝게 빛나

기를 염원한다. 그에게서는 지난 고래古來역사의 향기로운 기운이 면면히 이어지고, 고락에

젖은 돈오頓悟의 냄새가 얼핏얼핏 맡아지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열반의 세계에 필자 또한

‘특별승차권’을 배당 받았으면 좋겠다. 마무리하면서 필자로서 격려를 위한 소회를 보인다면,

여강 시인(작가)의 달빛이 승乘하기만하여 99개의 달이 99칸의 고대광실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보는 푸르른 달빛은 만 년 전과 같은 섭리의 빛인

것이다. 

 

  아직도 여강 시인(작가)에게는 니르바나(Nirvana)에 이르는 준령이 남아 있다. 현미경에

망원경을 장착하여 우주적 세계관을 볼 수 있는 춘추필법이야말로 피안의 보리수요, 천강

千江을 휘돌게 하는 여울목의 감람나무인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장차 여강 시인(작가)의

성취가 각고刻苦의 점수漸修에서 발원한 돈오頓悟의 미학으로서 부지불식간에 다가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2009 . 12 .   桃源齋에서 한비]

 

 

 

 

 

 

 

 

 

 

 

 

 

 

 

 

 

 

 

 

 제4시집 - "꽃 피고 지는 사연"

 

 [ 작가의 변辯 ]




 시(詩)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란, 시적재능(詩的才能)이

있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보통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나타낸 글 가운데 산문(散文-줄글)이 아닌 운문(韻文-마디

글)의 형태로 된 글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졸시(拙作)를 쓰느냐 아니면 명작(名作)

을 쓰느냐의 차이는 있겠지요. 저 또한 졸시(拙詩)를 생산하는 입장에서 드릴 말씀은 못되

지만 말입니다.

 

 시작(詩作)을 한다는 것은 보다 명확히 말한다면 ‘무엇에 관해 시작을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때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소설, 희곡, 수필

등 다른 언어예술의 장르와 다른 시적언술(詩的言術)을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시적언술의 특성을 살리는 창조적 표현에 임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형식으로 시는 창작되어

집니다. 그래서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저는 창조자(創造者 )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움직임과 모습을 범인(凡人)이 아닌 시인(詩人)의 냉철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그것들의 성질을 그려낼 수 있는, 즉 천기(天機)를 누설할 수 있는 시각과 혜안을 지닌 자를

시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남들이 찾아냈거나 혹은 남들이 먹다 버린 사과 조각을

발견하고 희희낙락한다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시를 쓰는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있겠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본 것, 생각한 것들을

언어로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즉시 언어로 표현해 작품화 시켜놓지 않으면

 곧 소멸하고 말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감(靈感)을 방치하지 않고 언어화 한다는 것은

일정한 대상이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나 태도를 나름으로 표명하는 행위이며, 우리는

그와 같은 언어행위를 창작이라고 합니다.

 

 결국 시란 궁극적으로 어떤 세계에 관한 시인의 의사표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한 사람이 연출해낸 시적화자(詩的話者)나 시적청자(詩的聽者)의

Feel을 지면(紙面)이나 화면(畵面)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

습니다. 시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는 분명 다릅니다. 시 속의 나는 어디까지나 창조적 공간

속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시속의 나는 객관화 된 나이며, 어떤 국면속의 형식화 된 인간으로서의 나입니다.

프리드먼(M, Friedman)의 ‘서정시(敍情詩)의 나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

에서 지향적 운동을 하는 나이다’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시속의 나는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는 일상적 자아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는

유형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알면서 아직도 시속에 일상적 자아,

유형화되지 않은 나를 끌어 들이고 있는 점이 자탄(自嘆)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한 언어의 화자(話者)가 어떤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하여 일상적인 또는 보편적인

그 언어의 의미와 그 단어의 연결체로부터 벗어나는 표현 형태를 비유(比喩) Figure라고 에이

브럼즈(M.H Abrams)는 말했습니다. 이렇듯 시는 특수한 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다양한 비유의

기법(技法)으로 일상적인 언술을 시적언술로 만드는 고난도의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 뿐만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독자 역시 다반사(茶飯事)의 밋밋한 맛

보다 은밀하며 가슴 뛰는 함축적인 시어(詩語)에 더 몰입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면 하는 마음

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죠. 즉, 연시(戀詩)를 쓴 사람에 의해 사랑의 부재가 어떤 새로운 의미 또는 어떤 깨달음을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시에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상식이거나 개인적 감정이겠지요.

저도 수많은 연시를 쓰고 있습니다만, 행여 상식 수준의 하찮은 그것을 짓고 있을지 모를 일

입니다. 그래서 늘 가슴이 답답하고 체증(滯症)에 시달리고 있나 봅니다. 물론 시인이 쓴 글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정 반열(班列)에 올랐던 시인도 노안(老眼)이 되거나 혜안

(慧眼)에 성에가 끼면 폐풍월(吠風月)을 서슴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그의 저서 ‘현대시학 입문’에서 시를 음악시(Melopoia). 회화

시(Phanopoia). 의미시(Logopoia)로 나누었습니다. 시가 언어의 음악적 성질, 회화적 이미지

(Image), 의미(意味)로 되어 있지 않는 만큼, 이는 어떤 시가 어떤 것을 중요시 하고 있느냐에

따른 구분이죠. 왜냐하면 이에 따라 시의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음악성을 강조하던

우리의 전통시나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던 시들은 요즘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형시(定型詩)의 리듬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압운은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詩行)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기교입니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라는 점입니다. 그 체계는 음절단위(音節單位)를 기초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첨가어(添加語)인 우리말은 언어의 음절의식이 약해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 정형시는 압운형태(押韻形態)의 구조를 주장하기

힘들지요.

 

 자유시는 정형시와 달리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정한 틀이 없기 때문에

시의 행(行)과 연(聯)이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즉 시의 리듬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창작자

에게 달려있습니다. 모르스 부호나 화성인(火星人)의 언어쯤으로 치부되기 쉬운 요즘 산문시

(散文詩), 자유시(自由詩)는 상당히 전통의 파괴를 느끼게 하지요. 중년 이후의 세대들 중 상

당수는 최근에 발표되는 시를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미당(未堂)이나 소월(素月)의

정서가 그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며, 연륜이 쌓이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 또는

두려움의 유발(誘發)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모든 분야가 변모하는 만큼 시 역시 정체의 늪에서 향수(鄕愁)만 고집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자세로 우리는 모르스 부호를 해득(解得)해야 하고, 뽕짝

이나 트로트와 병행하여 비보이(B-boy)들이 웅얼거리듯 거칠게 토해내는 랩송(Rap song)도

들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어떤 정형화 된 틀에 가두어 두고 그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단(異端) 쯤으로

몰아 부치는 유취(乳臭)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형(無形)

의 형(形)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삼라(森羅)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 않던가요.

 

 저는 대학에서 영미시(英美詩)를 공부하였습니다. 한때 청춘남녀의 심금(心琴)을 울리거나,

밤잠을 잊도록 한 셱스피어, 워즈워드, 바이런, 프로스트 등 수많은 시편들 속에서 허우적

대던 적도 있었고, 나름 시를 쓴답시고 유행가 가사 같은 잡문(雜文)을 남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잡문을 여전히 생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슴을 치기도 한답니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시라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절필(絶筆)한 뒤에 심한 몸살을

앓기도 하고, 남들의 작품을 보고 위안을 삼기도 하였으며, 천부(天賦)를 지니지 못한 탓을

조상님들에게 돌리기도 했습니다. 큰마음 먹고 용(龍)을 그리겠다고 다짐하였는데 또 이무

기를 그렸다는 자괴(自愧)에 그만 밤새 눈물을 흘리며 애꿎은 술과 담배를 낭비하기도 했

습니다. 새해에 각종 매스컴에서 대서특필되는 신춘문예(新春文藝)에서 화려하게 각광

받은 신인들의 작품과 시평(詩評)을 수십 번씩 읽어보며 냉가슴 앓기도 하였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속내를 타인들에게 모두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자칫 자신이 쓴 글로 인하여 천형(天刑)

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천기(天機)를 함부로 누설하면 하늘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 벌은 시인이 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대신 내릴

수도 있지요.

 

 그래서 시인은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음)이 가능

하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언행에 조신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외국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는 시인이 하늘에 별만큼 많은 이유를 모르겠다고요’ 그의 말대로라면

한국은 바야흐로 르네상스시대라야 합니다. 그러나 대형서점 서가(書架)에 자랑스럽게 한 자리

를 차지하고 꽂혀있던 시집(詩集)들이 차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현상에 일조(一助)했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나열함으로서 감수성 예민한 계집애들 눈물샘이나 자극하는 부류의 빈껍데기 만들라면 저는

박주산채(薄酒山菜) 벗 삼아 낮잠이나 자겠습니다. 작가가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과정은

치열합니다. 물론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다르고, 경험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르며, 주변 환경

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나 초고(草稿)에서부터 얼마간의 퇴고(推敲)를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퇴고를 거치면서 본의 아니게 변질되어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이 가장 두려우면서도 틀에 박힌 뇌리(腦裏)의 돌연변이를 기대합

니다. 그러나 흘린 땀에 비례(比例)하지 못해 늘 가슴앓이를 한답니다.

 

 나름 시(詩)라고 글을 지어놓고도 선뜻 내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과연 내가 쓴 것이 시가 맞는가. 타인으로부터 정을 맞거나 비판을 받으면 어찌하나. 온갖

잡념들의 협박에서 수많은 고뇌를 거친 후 돈키호테가 되겠다고 다짐하면 마음이 편합

니다.

 

 고사(故事)에 완벽(完璧)이란 말이 있습니다. ‘완벽’이란 말은 본래 중국의 고대 전국(戰國)

시대에 ‘화씨(和氏)의 구슬‘이란 기가 막힌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로 ‘완전한 구슬’이

아니라, ‘구슬을 다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完)이 벽(璧)을

꾸미는 형용사가 아니라 벽(璧)을 목적어로 갖는 동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완벽의 본래 뜻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흠을 내지 않고 손을 대지 않는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본래 티가 하나도 없는’, 또 만일 ‘티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런

것이 없도록 손을 쓰고 가공하는’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있는 그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티가 하나도 없도록 ‘손을 적극적으로 대서 가공하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완벽이란 말을 본래의 뜻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죽은 의미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과연 완벽한 시가 존재할까요. 완벽한 시를 창작하겠다고 수주대토(守株待兎)하는 사람

보다 시행착오(施行錯誤)가 다소 있더라도 자주 업그레이드하기 위하여 이정표(里程標)를

만들고자 이번에도 모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화씨의 구슬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의 나태(懶怠)를 꾸짖으며 오늘도 하늘을 우러릅니다. 본 작품집에 전문 비평가(批評

家)의 서평(書評)을 싣지 않는 까닭은 불경(不敬)하게도 이 작품과 인연이 닿은 여러분에게

평가(評價)를 맡기고 싶은 저의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 2009.12.  . 인천 소래신도시 뜨란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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