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3)
- 여강 최재효
“경수 오빠, 왜 대답이 없는 거예요?”
“…….”
“분명 경수오빠가 맞죠? 여보세요? 여보세요? 오빠, 뭐라고 말씀 좀 해보
세요. 오빠아…….”
수화기에서 여인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듣고있다기 보다는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득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수화기에서 여인의 절규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경수
는 전화기를 닫았다.
‘아, 분명하구나. 그녀가 미연이가 분명해. 어찌한다 ? 미연이를 이리
나오라고해서 만나볼까? 아니면 내가 다시 미용실로 찾아갈까? 아니야,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않았기 때문에 미연이는 단지 직감으로만 나일 것이
라고 짐작하고 그렇게 이야기한 게 분명해. 그렇다면 어찌해야하나?’
1,000씨씨 호프 잔이 다시 테이블위에 놓였다. 호프집에 들어서면서 계
속 피워댄 담배가 재떨이에 수북했다. 호프집 여주인은 무언가 몹시 괴로워
하는 경수의 표정을 훔쳐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님, 뭘 그리 고민하시는 겨? 아직 초저녁이라 손님도 없는데 말동무나
되어드릴까?”
“…….”
“아니면 그만두고요.”
“아주머니, 아니 사장님.”
“하이고, 지는 사장도 좋고 아줌마도 좋고 누이도 좋습니다. 아무렇게나 부
르이소.”
여주인은 얼른 경수의 맞은편에 앉더니 경수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지금, 사랑 때문에 속앓이를 하시고 계신갑네요 잉?”
“네에? 어떻게 제 속을 ?”
“제 눈은 못 속인다 아임니꺼?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무척 가슴시린 사
연이 있을 것 같은데 저에게 말해주시면 안될까예? 혹시 압니꺼 좋은 해답을
줄지…….”
경수는 단숨에 호프잔 반을 비우고 천정을 향해 담배연기를 훅하고 뿜어 내
고 호프집 여주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보다 인생을 더 많이 산 것처럼 보이는 이 여인에게 내 속내를 털어 놓으
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길 수도 있을 거야.’
“저어, 사장님은 첫사랑이 있으세요?”
“세상에 첫사랑 없는 바보도 있답니꺼?”
“…….”
“지는 예, 첫사랑이 지금 같이 사는 웬수 아임니꺼?”
“예? 웬수라뇨?”
“첫사랑은 그저 첫사랑으로 끝나야지 괜히 나중에라도 다시 만났다가는 두 사
람 다 망가질 수 있지예.”
“두 사람 다 망가지다뇨?”
경수는 호프집 여주인의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점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장님, 두 사람 다 망가진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들어보실랍니꺼?”
“네에. 말씀해주세요.”
여주인은 여고시절 윗동네 사는 한살 많은 남학생을 짝사랑하다가 결국 그
남자와 연분이 닿아 연인관계가 되었다. 얼마 후 남자가 대도시에 있는 대학
에 진학하는 바람에 인연이 그만 끊어졌었는데, 결혼하고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배우자는 관심
밖으로 돌리고 열애에 빠지면서 가정불화가 시작되었고 결국은 각자 이혼하
고 1년 뒤 재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밀애를 즐길 때는 그렇게 사랑스럽고
다정했던 사이가 일 년이 지나자 이혼 전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두 사
람은 환상에 젖어살다가 현실에 눈을 뜨게 되니 자신은 주변에서 지탄받는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외톨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배우자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지고 있던 재산의 대부분을 주고
나와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었지만 예전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서로
가 서로에게 실망을 느낀 나머지 이제는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사장님,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는데 다시 이혼을 결심하시
다뇨?”
“제가 나이 오십 넘도록 헛산 거죠.”
“…….”
“아이들 낳고 첫 남편과 잘 살아야하는데, 저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난데
없이 나타나 잘 사는 가정 깨트리고 결국은 이 꼴이 되었다우. 보아하니 댁도
어떤 여시에게 혹해서 고민하고 계신 듯 한데, 정신 차려야 해요.”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내속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거야? 그것 참…….’
“사람은 나이를 먹으나 안 먹으나 사랑이라고 하면 혹하는 경우가 있지요.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있다면 목석이나 돌
부처겠지.”
경수는 호프집 여주인에게 자신의 지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여인
에 대한 옛 추억 때문에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았다. 여인은 경수
의 이야기가 마치 지금의 남편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며 경수의 이야기 도중
에도 테이블을 탁탁 쳐가며 맞장구를 쳤다.
“어쩐지, 내 처음 손님을 척 보니 가을을 심하게 앓는 분 같더라니…….”
“사장님은 독심술(讀心術)을 지니고 계신가봅니다?”
“독심술?”
“…….”
“맞아요. 여자나이 오십 넘으면 능구렁이가 되죠. 세상 풍파를 모두 겪다
보니 세상만사가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지요.”
“그럼, 지금 나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현명한 처사가 될까요?”
“세상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봐요. 손님께서 현재 부인이 있고 아이
들도 있지요?”
“네에.”
“그럼, 현재의 부인을 사랑하시나요?”
“네에.”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생각하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세요.
올라가셔서 부인과 아이들을 불러내 가장 맛있는 불고기 집으로 데리고 가
한턱 쏘세요. 그리고 부인과 아이들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그럼 뭔가 이
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일 겁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손님이라면 파랑새를 보겠지요.”
“파랑새?”
“네에. 파랑새, 팔색조가 아닌 오로지 손님만을 믿고 따르는 파랑새를요.”
‘파랑새라? 나를 믿고 의지하는…….’
경수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미연과 빼어난 미모를 지닌 아내 그리
고 두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 어쩌면 이 여자 말대로 모든 것을 잊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일
지도 모르지. 이제 와서 미연이를 만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나? 그저 만
나서 눈물이나 흘리고 그간의 사정을 들으며 ’내가 미안했다’ 든가 아니면 ‘이
못난 오빠를 용서해 달라’든가 하는 말 밖에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을 거야.
그러다가 지난 25년간 묻어 두었던 사랑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올라 용광로
처럼 불덩이가 되고 그러다가 두 가정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서로에게 탐닉하
겠지. 한동안 잊혀졌던 존재를 눈앞에 두고 사랑하다 다시 뼈아픈 추억을 만들
뿐일 거야. 이 여인의 말대로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자. 미연이가 내 전화
번호를 알 지 못하니 그나마 천만 다행이지.’
경수는 호프집 여자의 말이 현재의 자신에게는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
하면서 나머지 잔을 비우고 호프집을 나왔다.
경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미용실
에서 본 미연이의 얼굴이 하루 종일 눈앞에서 아롱거렸다. 그럴 때 마다 경수
는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위안을 삼곤 했다. 지난여름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여행 사진 속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활짝 웃는 아내의
사진이 클로즈업 되었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의 미모였다.
‘아내도 첫사랑의 남자가 있을까? 있을 테지. 호프집 여자가 첫사랑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그랬어. 나도 첫사랑이 있으니 아내도 첫사랑이 분명히 있을
거야. 분명히 있을 거야.’
경수는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아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아내의 휴대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 나야. 갑자기 당신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뭐에요? 난 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했어요?”
“남편이 마누라에게 전화도 못하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마. 병나요. 자주 쉬어가면서 일해요. 디자인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당신 요즘 무척 피곤해 보여.”
“자기나 건강관리 하세요. 요즘 당신 밤잠을 잘 못자는 거 같은데? 어떤 날은
잠꼬대까지 하고…….”
“그래? 내가 잠꼬대까지 했어?”
“누구를 애타게 찾고 있는 거 같은데?"
아내의 수줍어하는 목소리를 듣고 경수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잠자
면서 누구를 애타게 찾는다면 분명 미연일 일 텐데. 옆에서 아내가 자는 것도
모르고 미연이 이름을 불렀다면 보통 큰일이 아닐 것이다.
‘아내가 그럼 미연이란 존재에 대해서 의아해 할 텐데?’
경수의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아내가 미연이란 존재를 알고 있으면
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으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거란
판단에 이르자 경수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냐. 아닐 거야. 내가 잠꼬대하면서 미연이 이름은 부르지 않았을 거야. 그냥
헛소리나 하고 말았겠지. 발음도 불명확하게 웅얼거리면서…….’
그러나 경수의 뇌리에서 입력된 일주일 전에 본 미연이의 색기가 자르르 흐르
는 모습이 자꾸만 시야를 어지럽혔다. 미연이의 사진이 다시 보고싶었다. 자신
도 모르게 컴퓨터에 즐겨찾기에 추가해 놓은 미연이 미용실 홈페이지를 클릭해
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메인 화면만 뜨고 게시판이나 갤러리, 고객의 목소리
란같은 것을 비롯해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가운데 커다란 글씨로
사정상 곧 홈페이지를 폐쇄 할 예정이란 안내 문구만 보였다.
“아니, 폐쇄라니? 갑자기 왜?”
홈페이지 맨 아래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을
걸어도 전화는 뚜우 뚜 소리만 날 뿐이었다. 서랍 속에 있던 미연이가 건네준
명함을 보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고객의 사정상 통화가 불가하다는 멘
트만 나올 뿐이었다.
‘아, 미연이 에게, 미연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지?'
경수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좌불안석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이라고 생각했다. 손에 볼펜을 쥐고도 부하 직원에게 볼펜을 가져오라고 하
였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있기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일까? 아아, 답
답해. 미연이 에게, 내 첫사랑 미연 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
야? 도대체 무슨 일이?’
경수는 연거푸 물을 마셔대고 흡연실로 달려가 줄담배를 피워댔다. 다리가 후
둘 거리고 속조차 메스껍더니 구토증상까지 나타났다.
“김 대리, 나 아무래도 병원 좀 다녀와야겠어. 갑자기 구토증세가 나고 머리가
띵한 게 몸살이 났나봐. 오후에 조퇴처리 좀 부탁해. 상무님에게는 내가 말씀
드릴게.”
일주일 전의 일이 되풀이 되었다. 경수는 다시 S시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실었
다. 마치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미연이 에게, 미연 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절대로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절대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이 일주일 전에 보았던 산 같지 않았다. 만산홍엽에 산
불이 난 것처럼 온산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전철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남
으로 달렸다.
경수가 앉은 좌석 앞에 30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녀가 앉아있었다. 남자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여자와 눈을 맞추고 있었고, 여
자 역시 보조개가 인상적인데 남자의 팔을 잡고 무척이나 행복스러운 미소로
응대하고 있었다.
남작 뭐라고 여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면 여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마치 25년 전 미연이와 데이트 할 때의 모습 같았다. 눈앞의 두
남녀가 현재의 자신과 미연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철은 굼벵이 같았다. 생각 같
아서 전철에서 뛰고 싶었지만 뛰어 본들 그 자리 아닌가? 경수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염병, 이놈에 전철이 왜 이리 느린 거여?’
자꾸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서울을 떠나 한 시간
이 지나 S시에 도착하였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걸어 올
라가며 앞 사람과 옆 사람 어깨를 툭툭 쳤다. 마치 뽕을 맞은 사람처럼 흐느적
댔다.
“아저씨, 빨리요. 빨리가요. 어서요.”
“손님,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미연네 미용실로요. 어서요.”
“네에? 손님, 미연네 미용실이 어디에 있는데요?”
“왜 안가요? 이 택시 고장 났어요?”
“손님, 미연네 미용실이 시내 어디 있느냐고요?”
“그냥 출발해요. 가면서 생각나면 알려 드릴 테니 어서 가자고요.”
기사는 백미러로 경수를 바라보면서 못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무조건 택시를
출발시켰지만 경수의 기억에 미용실이 있는 곳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택시는 이십여분 이상 역앞 분수대를 뱅뱅돌기만 할뿐이었다.
“기사님, 이제 생각났어요. 역에서 12번 버스타고 가다가 네 번째 정류장이
라고 그랬어요. 거기가 미연네 미용실입니다. 맞아요 12번 버스. 어서 달리세
요. 어서요. 요금은 따블로 드릴 테니 빨리, 최대한 빨리 달리세요. 기사님
부탁드려요.”
“네에. 알겠습니다.”
택시가 신호대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경수는 안절부절 못했다. 경수가 겨우
미용실 앞에 내렸을 때 경수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가게 셔터가 내려지
고 당분간 사정으로 휴업이라고 안내표지가 붙어 있었다.
“아-, 휴업이라니. 평일인데 휴업이라니…….”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도대체 왜 휴업이란 말이야. 왜?”
경수가 철제 셔터를 아무리 두들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웬 미친 남자가 울면서 남의 가계 문을 두드리고 있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경수를 바라보았다. 정장차림에
넉타이를 맨 점잖게 보이는 남자가 울면서 미용실 셔터를 두드리고 있는 광
경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되면서 얼마 되지 않아 주민신고를 받은 경찰차량이
나타났다.
“이봐요, 아저씨. 이 미용실과 어떻게 되시는데 문을 두드리는 거죠?”
“여기는 미연이네 미용실이라고요.”
“네에? 미연이가 누구죠?”
“미연이요. 이 미연이. 내 첫사랑 이 미연이라고요. 이 미용실 주인이요.”
“안되겠어요. 여기서 소란피우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기는 미연네 미용실인데 내가 어딜 간단 말이에요?”
“아저씨, 자꾸 소란스럽게 하시면 경찰서로 압송하겠습니다.”
“네에, 알겠습니다. 조용히 할 테니 가만 내버려두세요.”
겨우 출동한 경찰들을 돌려보내고 경수는 미용실 앞에 주저앉은 채로 담배를
피워 댔다. 날이 어둑해지면서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흐려
지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거리는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아, 내가 바보로다. 그때 미연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건데. 내가 바보였어.
바보 멍청이. 세상에 나 같은 바보가 또 있을까? 25년 만에 찾은 미연이
를 눈앞에 두고도 모른 체하였다니…….”
빗방울이 제법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미연아-, 미연아, 나를 용서해 다오.”
비에 흠뻑 젖은 경수는 몸이 후둘 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면 경수는
한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대로변에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바삐 달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석고상이 된 경수의 존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렇게 네 시간 넘게 경수는 눈을 감은 채 오로지 미연이의 얼굴을 그리며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점점 경수의 몸이 굳기 시작했다.
‘나같이 비겁한 놈은 세상 살 자격이 없어. 그때 그 호프집 여자의 말만 듣지
않았어도 지금 쯤 미연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바보, 바보.
나는 바보야. 용기도 없는 좀팽이, 멍청이, 미연아, 미연아 ,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아 휴업을 하고 어디로 도피한 거지? 맞지? 미연아, 정말 미안
해. 이 바보 같은 오빠를 용서해다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늦가을 비에 가로수 낙엽들이 떨어지며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었다. 바람이 불 때면 한기(寒氣)가 뼛속까지 스며들었
다. 경수는 고개를 푹 숙여 양 다리사이에 파묻고 숨소리조차 죽이고 점점 의
식을 잃어갔다. 경수가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때 보라색 세단 승용차
한대가 미용실 앞에 멈추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