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아리랑(4)
- 여강 최재효
“선영아, 엄마다. 잠시 거실에 나와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
“얘, 엄마야.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고.”
H가 사정하듯 딸에게 나오라고 하였다.
“저, 내일 시험 있어요.”
“잠깐이면 돼. 시간 좀 내다오.”
큰딸은 마지못해 거실로 나오면서 시큰둥한 얼굴로 TV만 쳐다보았
다. 분명 자신의 몸에서 나온 딸이 분명한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
졌다. H는 자신과 오래 떨어져 있다보니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얘, 넌 엄마가 왔는데 전혀 반가운 기색이 없니? 무슨 기분 나쁜 일이
라도 있는 거야?”
“Oh, No, No. I'm very busy"
"얘, 엄마는 영어 몰라. 한국말로 해.“
“난, 아메리카 랭귀지가 더 좋아요.”
“그래도 넌 엄마가 왔는데 그러면 쓰니? 아무리 내일 시험이 있다고
해도 난 네 어미야.”
“I See, You're my mother. and I'm your daughter."
"얘, 난 영어 잘 몰라. 한국말로 해.“
H의 큰 딸은 계속해서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 쓰면서 H의 시선을 피하
고 있었다.
H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모녀지간에 마치 철의 장막이 쳐진 느
낌이 들었다. 지난봄에 서울에 왔을 때만해도 지금처럼 자신에게 무뚝뚝
하지 않았다. 원래 큰 딸은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거나 정감 있게 말하
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어미에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TV만 바라보고 있는 큰 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무언가 불만이 가
득한 표정이 역력했다.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 때에 두 딸을 유학 보내놓고 H는 많이 울
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음식 낯선 나라의 언어 낯선 얼굴들이 아이
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품을 떠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물
론 큰 고모가 돌봐주고 있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밖
에 없었다. 의사소통도 잘 안 되는 나라에서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
니었을 것이다.
어린 두 딸들을 유학 보내놓고 H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두 딸들을 속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늘 가슴을 억눌렀다.
“선영아, 난, 너를 낳은 엄마야. 네 엄마라고. 넌 왜 엄마를 자꾸만 멀
리하려고 하니?”
“Oh, no, no. I have something to solve through tonight.”
"이 계집애, 너 정말 자꾸 이렇게 나올 거야?”
H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탁자 위에 있던 컵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유리컵이 산산 조각이 나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H의 행동에 겁을 잔뜩 집어 먹은 큰딸은 벌벌 떨면서 H의 눈치를 살폈
다.
“너희들 지금 이 엄마에게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어. 어서 말해봐.
이 엄마에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응?”
“Oh, No. we have nothing for deceiving you."
"이년, 너 끝까지 어미를 우습게 만들려고 해?“
H는 큰 딸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아악-
큰 딸은 비명을 질러대며 H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지만 H는 더
욱 힘을 주어 딸아이의 머리채를 단단히 감아쥐고 윽박지르기 시작 했다.
“말해봐. 너 왜 엄마를 멀리하는 이유가 뭐야? 뼈 빠지게 일해서 네 년들
유학 보냈더니 겨우 엄마한테 한다는 짓거리가 영어나 씨부렁대? 내 그동
안 네년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흘린 땀과 피 눈물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H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큰 딸아이에게 그간의 서글펐던 감정을 폭
발시켰다. 그러나 큰 딸은 그런 엄마가 이상하게 보였다. 서로의 활동영역
이 분명한 외국에서의 생활이 한국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다. 엄마와 딸은 다정다감하면서 모녀 또는 자매같은 분위기여야 한국적일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기대했던 H는 당황하고 있었다.
“너, 말해봐. 아빠, 누구하고 어디간거야?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너 혼날
줄 알어?”
“Oh, No. 정말이에요. 아빠는 여행 갔어요.”
“누구하고 간 거야? 네가 알고 있는데 까지만 말해봐.”
“몰라요. 어제 멕시코 다녀오신다는 전화 메시지만 남기고 떠나셨어요.
정말이에요.”
H의 큰딸은 오버 액션을 취해가며 어설픈 발음으로 한국말로 대답하였다.
순간 H는 지나간 10년이 자신과 딸아이들 사이에 건너다닐 수 없는 큰 강
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아아, 내가, 내가 지난 10년간 바보짓을 하였구나. 이런 꼴을 보려고 했
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왜 딸아이와 말다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야, 이건 분명히 내가 꿈꿨던 것이 아니야. 뭔가 잘못되
었어.’
H는 정신을 가다듬고 큰 딸아이를 안심시킨 후 깨진 유리잔 잔해를 치웠
다. 그리고 다시 큰 딸아이와 이야기를 시도 하였다.
“선영아, 미안하다. 내가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다보니 너무 피곤해
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엄마가 잘못했다. 미안해. 모녀가 오랜만
에 만나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내가 저질렀구나. 용서해다오. 엄마가 이렇
게 사과하마.”
“…….”
“선영아, 너하고 나하고 가슴속에 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 놔보
자. 응 ?”
“…….”
“괜찮아. 난 너를 낳은 엄마야. 무엇이든지 말해도 돼.”
H의 갑작스런 행위에 충격을 받은 큰딸 선영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늘
자상할거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유리잔을 집어던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이었다.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쳐
다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영아, 아까는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스무 살도 넘은 딸이 오랜
만에 만나는 엄마한테 대하는 태도도 잘 한 게 없다고 봐. 지금부터 네가 엄
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봐. 그동안 엄마에게 쌓인 감정이 얼마
나 많겠니?”
선영은 주스 한잔을 마시더니 H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에 독기가 서
린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니, 전 어머니가 미워요.”
“내가, 내가 밉다고?”
H는 큰 딸아이의 자신이 밉다는 한마디에 정신이 아득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 잠깐. 엄마 정신 좀 차리자.”
선영은 H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버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언젠가 만
나면 따지고 싶은 게 많았던 엄마였다. 그러나 자신이 방금 한말 한마디에
나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보자 한편으로는 엄마가 측은하기도 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H는 한숨을 몇 번 쉬더니 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선영아, 이 어미가 왜, 얼마나 미운지 천천히 이야기 해보렴. 넌 내 딸이
야. 내가 열 달 동안 배 아파 낳은 내 딸이라구.”
“엄마, 전 그동안 엄마를 증오해 왔어요. 그건 지영이도 마찬가지예요. 저
희들은요. 유학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엄
마의 강아지들이었어요.”
“강아지?”
“그래요. 엄마가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엄마의 뜻대로 공부 잘하는 엄마의
화려한 장식품이었다고요. 아니 엄마 장난감이었다고 하는 게더 정확할지
모르죠. 나나 지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이곳에 와서 얼마나 힘
들고 괴로웠는지 아세요?
말이 통하나, 글이 통하나 친구가 있나. 어린 소녀들의 소박한 꿈이 어느
날 몽땅 사라졌다고요. 언어를 구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어요.
이 땅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하다
고요. 우리가 왜 어린 나이에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죠?
나는 엄마가 요구하는 법학도가 아니라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지영이는
엄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꿈이었고요. 그러나 그런 꿈은 이
제 추억이 되었고 지금은 마지못해 마음에도 없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전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에 가서 한국 전통 문양을 공부하고 전통 문화
를 연구하면서 한국적인 것을 화폭에 담고 싶어요. 제가 하는 법학 공부
는 아무리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요. 정말이지 이 나라에서 사는 게
흥미가 없어요.”
큰 딸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듣는 내내 H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제대로 숨
을 쉴 수 없었다. 코 앞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딸이 정말로 자신의 몸에서
나온 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아아, 선영아. 이 어미가 잘 못한 거 같구나. 내 진즉에 너희들과 진지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좋았을 것을. 엄마가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가 정말로 잘못한 거 같구나.
그러나 이제 어쩌겠니? 많은 세월이 흐르고 너희들과 이 엄마 사이에
건너 갈 수 없는 강이 놓인 것을 이제 와서 어찌하겠니. 이 엄마를 용서
해 주면 안 되겠니?”
“전, 엄마가 불쌍해요.”
“내가?”
“엄마의 욕심에 저희들뿐만 아니라 아빠도 희생양이 되었어요.”
“아빠도 희생양이라?”
H는 ‘아빠’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영아, 엄마는 너희 두 딸들이 외국에 유학 가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법학박사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랬어. 물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 것에 대하여는 정말로 미안하구나. 그러나 난 우리 두 딸들만큼은 화
려하고 멋지게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랬어.”
“아니죠. 엄마의 인생을 한층 빛나게 해 주는 장식품에 불과했겠지요.
세상은 꼭 법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지금 현실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여 판검사나 대학교수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그 사람들의 일생은 보장된 거 아니니?”
“대한민국의 그 많은 판,검사와가 법학교수들이 자신이 스스로 법학 전
문가가 되겠다고 공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 분들 상당수도 가문
이나 부모의 강요에 의해 마음에 없는 공부를 했을 겁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세요?”
“그래. 이 엄마도 본래 학교 선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란다. 단지
먹고 사는 호구지책으로 교사가 된 것이었지.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하
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네 아빠를 만나 가정을 꾸몄고 너희 자매를 낳았
단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엄마는 자식들의 인생 설계도를 잘못 그
리신 거예요. 이제는 나나 지영이 엄마의 의도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라고요. 공부는 엄마가 원했던 것이니
자식 된 입장에서 끝마쳐야 겠지요.”
“선영아, 내가 너희들에게 차라리 없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나보다.”
아빠를 바보로 만든 엄마, 당신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고요.’ 다. 그래도 자신들을 위해서 헌신 한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이야기 였다.
‘흥, 이미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리 떠났어요. 우리를 강아지로 만들고
선영은 차마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털어 놓은 것이 가슴 아팠
H는 울고 있었다. 딸의 입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말이 나오리라고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딸 아
이들은 철저히 길들여진 강아지 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딸과 서먹한 관계가 당분간 지속되었다. 일주일이 되자 남편이 집에 돌아
오고 둘째 딸 지영이도 돌아왔다. 그런데 멕시코 여행 갔다 돌아온 남편
곁에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H는 그 여인이 남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
는 여인일거라 직감하였다. 아직 법적으로 버젓이 자신이 아내이고 아이
들 엄마인데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수지를 데리고
집으로 온 것이다. 수지는 형욱의 강요로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욱의 집에 들렸다. 신 혼여행이나 다름없는 둘 만의 호젓한 여행이었지만 형욱의 아내가 한국에 서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여자하고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예요?” 형욱의 답변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H는 남편이 예전의 남편이 아니라 는 것을 감지하였다. 갑자기 자신이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었다는 알고 H 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신, 그리고 저 여자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 이라는 것이 있어. 저 여자 당신하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 데. 단도직 입적으로 말해서 당신 저 여자 일부러 데리고 온 거지? 아니 그동안 멕시 코로 여행 갔다고 하더니 저 여자랑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게로군?” 번도 느껴보지 못한 꿈같은 시간이었어. 이왕 말이 나왔으니 솔직하게 털 어놓지 나 저 여자랑 곧 결혼할 거야.” “뭐? 겨, 결혼?” 그러니 당신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며, 거실에 쓰러졌다. 큰 딸이 진정제를 갖다 주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 을 때 남편과 수지는 없었다. ‘아,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말년에 내 인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다니. 안 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동안 내가 제 놈을 믿고 피땀을 흘렸건 만 나를 우습게 만들다니, 절대 연놈들을 용서할 수 없어.’ 게 며칠이 폭풍 전야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여보, 저 여자는 누구에요?”
“응, 친구야. 사업상 만나고 있지.”
“수지, 인사해요. 내가 말한 애 엄마에요.”
“안녕하세요?”
“아니, 당신이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예요? 평생 회사 생활만 하던 분이?
“왜, 여자하고 사업하면 안 돼는 법이라도 있나?”
“무슨 이야기?”
“당신 나를 속이려들지마. 난 다 알아.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모르는 직감
“맞아. 나 저 여자하고 신혼여행 다녀왔어. 당신하고 지금까지 살면서 한
“그래. 당신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저 여자랑 제2의 인생을 시작할거야.
H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정신이 혼미하여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리
H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