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6. 8. 17. 18:25

 

 








 

                 

 

 

판도라 상자(2)

 


 


                                                                                                                                                                                       - 여강 최재효


 


  금요일 오후는 늘 마음이 설레곤 한다. 미라는 친구나 혹은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초조해했다. 그러나 그의 초조함과 달리 한통의 전화나 문자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괜히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남편과 대학교 동창들이 있지만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호출하는 사람은 남편 이외에 한 명도 없었다.

 

  앞에 있는 미스장이라 불리는 유부녀인 동료는 오후가 되자 화장을 짖게 고치고 고객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응대하는 목소리가 변했다. 약간의 신경질적인 말투가 애교있는 말쏨씨로 변하면서 은근히 미라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는 보란 듯 공공연히 애인을 만나서 중년여인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미라는 그런 미스장이 늘 부러웠다.


  그때 컴퓨터의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태경이었다.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메일을 보냈으니 열어보고 소감을 보내 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내린 봄비로 태경은 고교시절 첫 사랑의 가슴 아픈 추억을 반추하고 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늘 그리워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명절날 고향에 갔을 때 친구들을 통해 그녀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달려가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녀와 자신이 이미 다른 남녀의 배우자라는 사실과 이미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 그녀의 감정이 어떤지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런 울적한 심경을 읊은 황조가를 써서 미라에게 보내왔다. 그 글에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배경음악으로 하고 비오 는 날 남녀가 우산을 쓰고 바닷가를 거니는 사진을 이미지로 넣어 태그로 편집하여 미라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   훨훨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   암수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염아지독)  -   외로운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비 내리는 어느 봄날 저녁 은빛여우에게 헌시합니다.


  미라는 태경으로부터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종종 받아었지만 한시(漢詩)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태경이라는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만나서 자신이 태경의 곁을 떠난 여인의 역할을 해주싶었다. 미라도 대학교 1학년때 만나 줄곧 캠퍼스 커플로 친구들 사이에 소문났던 대현이 그리웠다.


  군대를 제대하고 막 복학한 대현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리고 남이섬으로 MT를 갔던 어느 봄날 그와의 첫 정사(情事)가 생각났다. 그날도 오늘 처럼 비가 내렸다.

 

  남학생들은 비가 내리자 점심 때 부터 술판을 벌였다. 저녁 때쯤 대부분의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은 술에 취해 일찍 떨어지기 시작했고, 대현은 미라를 데리고 인근의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에 대취한 미라와 대현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였고, 근처 여관을 찾았다. 미라의 대학졸업이전까지 자주 대현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었다.


  미라는 태경이 보내준 이메일에 대한 답장을 쓰면서 보고싶다는 표현을 은연중 비쳤다. 그러나 그 뜻을 태경이 알 수 있을지 미지수 지만 태경으로부터 만나자는 답장이 오기를 내심 바랬다. 태경은 퇴근 할 즈음 미라로부터 답장이 없자 종수에게 술 한잔 하자고 전화를 걸었다. 홍익대앞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미라에게 답장이 없자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메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바랬었다. 태경은 사무실을 막 나가려고 하다 이상한 에감이들었다. 다시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이메일함을 체크해보았다. 편지 한통이 도착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가 보낸 답장이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을 시키고 한자로 쓰여진 미라의 편지를 천천히 음미했다.

 

月樓秋盡玉屛空(월누추진옥병공)  -  다락에 가을깊어 옥병풍은  비어있고

霜打蘆洲下暮鴻(상타노주하모홍)  -  서리내린 갈대밭에 기럭이 앉네.
瑤瑟一彈人不見(요슬일탄인불견)  -  거문고 한 곡조 알아주는 님 없네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  서리맞은 연꽃 연못위에 소리없이 시들어 가네


  雨요일 저녁 우울한 은빛여우 드림


   허난설헌의 규원(閨怨)이라는 여인의 쓸쓸함을 읊은 한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태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을 그리워하는, 아니 남정네를 그리워 하는 미라의 고도로 정제된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왔다. 갑자기 미라가 보고싶어 졌다.


  "만나자고 해 볼까?"
  태경은 종수와의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리고 지금 1:1 채팅창을 열테니, 들어오라는
쪽지를 띄웠다. 태경에게 이메일을 보내 놓고 미라는 10분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의 한문 실력과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메일을 보낸지 8분이 되었다.


 창밖으로 비바람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태경의 한자실력과 여성의 섬세한 면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미라가 막 컴퓨터를 끄려고 할 찰라 메신저의 알람이 울렸다. 태경에게서 온 쪽지였다. 잠시후 채팅창이 열렸다.



- 하얀나비 : 미라씨, 아직 퇴근 하지 않았으면, 저와 이야기 해요. 아직 회사에 계신거죠?
- 은빛여우 : ᄒᄒᄒ 네에. 나비님. 아직 퇴근하지 않고 나비님 답장 기다리고 있었어요.
- 햐얀나비 : 미라씨, 우리 사귈래요? off- line 에서요.
- 은빛여우 : 어머? 나비님, 우리 절대 만나기 없기로 약속 했잖아요. 절대로요 ?
- 하얀나비 : 그렇긴 하지만, 보고 싶어요. 지금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 하는거에요.
- 은빛여우 : 데이트 신청이 너무 간단하다. 적어도 편지 정도로 신청해야 하잖아요.
- 하얀나비 : 쓸쓸히 거문고 타는 미라씨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요.
- 은빛여우 : 꾀꼬리를 보며 외로워 하고 있을 태경씨가 어떤 모습인지 저도 보고싶네요.


- 하얀나비 : ᄒᄒᄒ 감사해요. 그럼 제 데이트 신청을 받아 주시는거죠?
- 은빛여우 : 아뇨. 마음이 그렇다는 거에요. 우리 스스로 한 약속을 깨면 어떻게 해요.
- 하얀나비 : 우리 두사람 공동으로 만든 규칙이니 공동으로 개정하면 되잖아요.
- 은빛여우 : 개정이요? ᄒᄒᄒ
- 하얀나비 : 국회에서 법을 만들고 그 법이 잘못되었을 때 국회의원들이 고치잖아요.
우리도 고치면 되지요?
- 은빛여우 : ᄒᄒᄒ 정말 이렇게 법을 쉽게 고치는 사람은 지조도 없을 것 같은데.
- 하얀나비 : 미라씨, 비록 사이버상에서 부부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정이 있고 피가 흐르는 인간이잖아요. 로보트가 아닌이상. 만약, 우리가 로보트라면 영원히 만날 일이
없겠지요. 안그래요?


- 은빛여우 : 어휴, 정말 나비님의 궤변은 못 당하겠어요. 
좋아요, 우리 딱 한번만 만나기에요 그럼, 아셨죠?
- 하얀나비 : 오우케이. 아이고,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 은빛여우 :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셔야죠? 너무 황송해 하지마시구요.
- 하얀나비 : 아네, 오늘 오후 6시30분. 장소는 어디가 좋을지. 미라씨 직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어디로 정해야 할지. 전 서소문동에 있습니다만...
- 은빛여우 : 아,그러세요. 그럼 우리 이태원에서 만나요. 늘 그곳이 가보고 싶었어요.
- 하얀나비 : 그럼,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 도로를 건너 이태원소방서우측 골목길로 50미터
쯤 이슬람사원쪽으로 올라가면 샹그릴라라는 바(BAR)가 있어요. 거기서 만나요.


- 은빛여우 : 알겠어요. 시간에 맞춰 나갈께요. 그런데 난 나비님 인상착의를 모르잖아요.
- 하얀나비 : 제 키는 177cm, 상하 군청색 싱글정장, 머리는 스포츠형, 얼굴은 미남.ᄒᄒᄒ
혹시 저를 못 찾으실 경우 010-9890-0000 으로 전화 하세요
- 은빛여우 : ᄒᄒᄒ 자알 알겠습니다요. 전 키 160cm, 밤색 버버리 코트,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얼굴은 샤론스톤 비슷. 이정도면 되었죠?


  약속시간보다 5분 빨리 나온 태경은 초조하게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휴대폰 디지털 시계가 7시를 알리고 있었다. 분명히 채팅할 때 6시30분이라고 했지만 미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여자 날 놀리는거 아냐?"
  태경은 담배를 길게 빨며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았다. 반쯤 피우다 버린 담배가 바닥에
널려있다. 혹시 미라라는 여자가 진짜 여자가 아닌 남자일 수도 있고,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거짓 약속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5개월간 주고 받은 수 많은 대화중에서 미라가 남자라고 느낄 만한 점은 없었다. 약속시간 30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약속이 이미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태경은 밤 12시가 되더라도 기다릴 작정이었다.


  비는 잠시 그쳤다. 비를 흠뻑 맞은 도심의 골목길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태경은 혼자 지나가는 여성들을 유심히 쳐다 보았지만, 40대 초반의 긴 생머리르 하고 밤색 버버리코트를 입은 여성은 없었다. 골목길로 용산미군기지에서 근무하는 흑인병사들 서너명이 엉덩이가 유난히 커 보이는 흑인여성들과 골목길로 들어섰다.

 

  종종 원색적인 화장을 한,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든 한국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지나가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많다고 하는 이태원의 밤거리는 아직 초저녁이라 달구어지지 않았다. 이태원은 밤 12시간 넘어서야 활기를 찾는다. 대개 다른 지역에서 술을 마시던 젊은층들이 12시 넘어 2차 혹은 3차로 이곳으로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이슬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골목길 입구에서 노란 우산을 든 한 여인이 서서히 올라 오고 있었다. 여인은 단발 머리를 하였으며, 키는 170cm정도 되보였는데 상당히 이지적인 인상이다.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갑자기 태경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분명 40대 초반의 여성같지만 미라의 인상착의와 전혀 달랐다. 그 여인은 태경의 모습을 천천히 뜯어보며 걸어왔다. 점점 태경과 가가워 지면서 태경의 외모와 인상착의를 세심하게 관찰하듯 했다. 그 여인이 앞을 지나갈 때 상큼한 향수냄새가 태경의 후각을 자극했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로군."

   미라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10m터쯤 골목길로 들어가다가 다시 되돌아 나왔다. 이곳에 나오기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미라는 태경을 알기전에도 인터넷카페에서 우연히 알게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남자는 자신을 상당한 미남이라고 자신을 소개를 하였는데 막상 만나보니 약간 대머리에 평범한 이웃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미라가 원하는 이상형이 아니었기에 한번의 만남으로 끝냈던 별로 기억하고 싶지않은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인상착의로 다르게 이야기 해주었다. 만약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그냥 돌아올 작정이었다. 지금 미라는 태경의 모습에 흔들리고 있다. 상당히 준수한 외모에 지적인 마스크를 지닌 매력적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해밀턴 호텔주변을 걸으며 고민을 하고있다.


 "그래, 만나보는 거야."
  미라는 공중전화로 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경의 휴대폰에서 메로디가 흘렀다. 가뭄에
장대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에 나타난 발신자 번호는 일반 전화 번호였다. 


  "여보세요? 차태경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은빛여우에요."

   휴대전화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경은 200볼트 전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미라는 오는 길이 차량정체가 너무 심해 늦었다며 해명을 하고 지금 해밀턴 호텔앞에 있다고 했다.

 

  벌써 빈 소주병 세 개가 식탁위에 자랑스럽게 진열되있었고, 한 병은 반쯤 비워져

있었다. 미라의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 태경은 미라를 만나자 곧장 호텔옆에 있는 갈비집으로 데리고 왔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던 미라도 계속되는 태경의 권유에 못이겨 한 두잔 마시다 결국 태경과 같은 정도로 수작(酬酌)을 하게 되었다. 미라는 자신의 인상착의를 일부러 다르게 이야기한 사실을 해명 하자 태경은 웃으며 그녀의 치밀한 성격에 은근히 경계를 하였다.

  "미라씨,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정말로 샤론스톤이 제 앞에 앉아있는 듯 합니다."

태경의 달콤한 칭찬에 미라가 하얀 치아를 드려내며 배시시 웃었다.
"태경씨미 ㅁ남이세요. 전 골목길에서 태경씨를 보고 첫 눈에 반했거든요.
"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마치 수십년 동안 우정을 나눠 온 친구를 만난 듯 했다. 소주병이 바닥을 보이자 태경은
 근처 호프집에가서 입가심으로 한 잔 만 더하자고 미라를 유혹했지만, 미라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사양을 하였다. 결국 태경의 감언에 미라는 딱 한잔만 더 하기로 하고 자리를 옮기기로했다. 초저녁보다 굵은 빗줄기가 도심을 촉촉히 적시며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주말 밤이지만 지나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국의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중년 백인남자의 팔장을 끼고 앞서 걷고있었다. 미라의 발걸음이 약간 자연스럽지 못하자 태경이 미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태경이 택시를 잡았다. 전에 몇번 가보았던 한남동에 있는 스칼렛이란 칵테일 전문점으로 향했다.

  "어머, 여긴 호프집이 아니잖아요?"
  미라는 시원한 생맥주나 한 잔 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태경이 이왕이면 분위기 좋은
바에서 이렇게 비오는 날 어울리는 칵테일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바의 분위기는 모두 검정색으로 치장된 듯 했다. 바닥과 천장도 온통 검정색으로 되었고 바텐 아가씨도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벽과 천장에 별처럼 빨간 꼬마전등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엘비스플레슬리의 'Love me tender'가 조용히 홀내를 더욱 움울하게 했다. 홀내에 세쌍의 남녀가 서로 이마를 마주 대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 한다. 미라는 칵테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핑크레이디나 진토닉 정도만 알뿐이었다. 태경이 마티니를 주문하자 미라도 핑크레이디를 주문했다.

  "미라씨, 칵테일 자주 마시세요?"
  미라가 잘 모른다고 하자 태경은 칵테일의 기본에 대하여 설명을 하며 제법 아는 척했다.


  "양조주와 발포성탄산음료나 과즙, 시럽등을 넣고 혼합해 마시는 것은 칵테일 이라고

부르지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칵테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독한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보다 이렇게 순화된 술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도 좋아요, 값도

저렴하고요. 저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즐겨마셨던 마티니를 좋아해요. 약간 쌉쌀한 맛이 아주 일품이거든요."
미라는 다소곳이 미소를 지으며 듣고만 있었다.

  비, 술 , 달콤한 음악 그리고 중년의 아름다운 남녀, 이들을 포근히 감싸안은 아기자기한
 카페와 도심의 끈끈한 밤. 도시의 촉촉한 밤은 태경과 미라에게 무슨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미라가 핑크레이디 잔을 비우자 태경이 바텐더아가씨에게 귀속말로 속삭였다. 미라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가씨한데, 특별히 맛 있는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들어 보시면 아실거에요."
  태경이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라씨는 기혼의 중년 남녀가 각자의 배우자 몰래 이렇게 밤 늦은 시간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 지요?" 태경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미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소리없이 웃기만 했다.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바텐더아가씨가 라임쥬스가 9부정도 채워진 칵테일을 미라 앞에 내놓았다. 레몬과 체리가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잔 밖에 영롱한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 주르르 흘러 내렸다. 일본의 이와츠마유미가 부르는 엔카 '코히비토가' 홀내에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떠나간 애인을 그리워 하는 여가수의 애절하고 절규에 가까운 음성이 바(bar)안을 더욱 촉촉한 분위기로 장식했다. 

  촉촉한 음악이 마치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최소한 키스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창가에 앉아 있던 20대 후반의 연인들은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을 의식하지 않고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태경이 말보로 한 개피를 입에 물자 바텐더아가씨가 번개처럼 라이터 불을 켰다. 검정색 천장에 태경이 뭉게구름을 만들었다. 그 구름에서 금방이라도 이슬비가 내릴 듯 했다.

  "사실은 생전 처음보는 남자와 늦은 밤 술을 마시며 있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정말로
오늘 밤은 오랫동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 것 같아요. 마치 처녀시절로 돌아가 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아요."

  미라는 창밖을 보며, 지방 출장가 있는 남편을 생각했다. 창밖에서 자신과 태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경이 마음에 맞는 남자라면 그냥 저녁이나 간단히 하고 집에 가려고 했지만, 의지대로 되지않고 자꾸만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꾸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편과 15년을 넘게 살아 오면서 무의식중에 꿈꿔왔던 바람이라는 것이 자신앞에 펼쳐지자 미라는 당황히고 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라임쥬스가 들어 상큼하게 보이는 칵테일 잔을 반쯤 마셔버렸다. 달콤하면서 약간은 알콜냄새가 나는 듯 했다. 처음 대하는 칵테일이었다. 곁에서 태경이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바라보고 있다.

  휴대폰 디지털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에서 자신의 귀가를 시큰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 시각 아내보다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미시에게 더욱 신경이 가고있었다. 미라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져 가고있었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무뎌지고 집 걱정도 잊었다. 마냥 이렇게 자유스러운 분위기속에서 한 마리 새가 되어 훨훨 날고싶었다.

  "태경씨, 우리 오늘밤 연애할래요?"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미라가 한마디 던지며 나머지 칵테일을 마셔 버렸다. 태경은 갑자기
뒷통수를 맞은 것 처럼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빨리 반응이 온 다 싶었는데 자신이 미라에게 의표를 찔린 것 같았다. 역시 술을 강력한 마력이 있어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강심제가 되고, 마음이 허허로운 사람에게는 그 허전함을 채워주는 묘약이 틀림 없는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