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6. 6. 30. 16:42

            

 

 

  

 

 

     옷을 벗으며


           


                                                                                                    - 여강 최재효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달밤에 여인네가 옷을 벗는 소리라고…….
  나는 옷 입는 순간 보다 옷 벗는 시간이 제일 좋다. 물론 누구나 하루를 성실하게 보내고 옷 벗고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리라.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이트가운이나 실크계통의 가벼운 속옷차림으로 와인 한잔 마시고 꿈나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길이 어이 즐겁지 아니하랴.


  직업상 일년에 대부분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차려입고 직장으로 향하는 나는 아침마다 경직된 순간이다. 거울 앞에서 나 아닌 나를 만들고 가꾸고 꾸미며 직장에서 요구 하는 제3의 인물을 창조한다. 타인을 만드는 도구는 당연 옷이다.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날렵한 몸매 덕분에 어떠한 정장도 어울리는 편이다. 정장이 여러 벌이다 보니 당연히 넥타이도 수십 여개가 있다. 이 순간에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넥타이들이 장롱 깊이 잠들어 있다.


  일년에 한번이라도 내 손길을 거친 넥타이는 영광이다. 옛날 수백 수천의 궁녀들이 나라님 눈에 들지 못하면 궁궐에서 늙어 죽듯이 그동안 내 목에 걸려 보지 못하고 유행에 뒤졌다는 이유로 버려진 불쌍한 넥타이가 꽤 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어쩌면 인간을 가식적이거나 속박의 틀에 얽어매는 수단의 하나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으리라. 옛날 계급사회에는 옷으로 사람을 구분 지었다. 왕후장상은 화려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천민(賤民)이나 노비(奴婢)는 무명 치마저고리 한 벌이면 족해야 했다.


  군인들은 군복(軍服)을 입어야 군인답고 경찰은 경찰복을 학생은 학생복을 입어야 제 역할을 하거나 스스로 틀에 맞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교복 자율화를 시도했던 많은 학교들이 어느 사이에 모두 교복 착용을 의무화 했다. 날개를 버렸으니 새가 제대로 날아갈 리가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군인들이 군복이 아닌 청바지에 붉은색이나 파란색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입고 총을 들고 전쟁에 임한다면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


  어린시절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나는 설날이나 추석이 올 때만 기다렸다. 아버지 어머니는 막내에게 설빔이나 추석빔으로 근사한 옷을 사주셨다. 설빔을 입고 동네 집안 어른들과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올렸고 곧 주머니는 두둑해 졌다. 요즘에는 부모들이 명절 날 특별히 아이들에게 옷을 사 입히는 일은 거의 없다. 아이들이 알아서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용돈을 모았다가 알아서 사 입기 때문에 굳이 부모들 손이 필요 없게 되어 버렸다. 어쩌면 부모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요즘 명품이니 모피코트니 하며 수백만 원에서 웬만한 중소도시 아파트 한 채 값과 맘먹는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다 고한다. 그러한 고급 브랜드를 몸에 걸쳐보지 못한 나 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마치 꿈속의 일 같다. 옷이란 사람의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시키며 햇빛이나 바람, 눈비로부터 피부를 보호해 주고 치부를 가려주면 된다.


  거기에 아름답게 무늬를 넣거나 예쁘게 디자인하면 금상첨화가 된다. 그러나 돼지에게 앙드레김이 만든 화사하고 아름다운 고가(高價)의 황금으로 치장한 옷을 입힌다고 돼지가 소가 되거나 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량미달의 돼지가 황금 옷을 입고 용이 되려 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악취를 풍기거나 시각공해(視覺公害)를 유발 시킨다.


  현세에서 아무리 권세와 돈이 많았던 사람이라도 저승에 갈 때는 단출한 수의(壽衣) 한 벌 걸친다. 뼈골 빠지게 일해서 태산처럼 황금을 모아 둔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찌 이승을 떠나 갈 것인가?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본다. 평생 쓸 줄 모르고 모으기에만 인생 을 바친 불쌍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자식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겠지만 정작 본인은 제삿 날이 되어도 배가 고프다.


  내가 아는 친구는 부모가 물려준 억대의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부모 는 제사 때가 되면 종교가 이렇고 저렇다며 새로 영입 된 가족에 의해 그 흔하디 흔한 술 한 잔 받지 못한다. 저승에 간 그 친구의 부모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기가막히겠는가. 두 분이 걸귀(乞鬼)가 되어 다시 찾아올까 걱정이 된다.


  나이가 먹어갈 수록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입어 온 옷들이 얼마나 많던가? 청춘 때 입었던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옷, 시집 장가들면서 입었던 고급스런 옷들 그리고 중년이 되면서 걸쳤던 중후한 옷, 자신이 이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혜택을 입으며 컸다고 생각이 든다면 해마다 한 벌씩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을 줄 알아야 한다.


  그 옷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덮어주고 후배를 위해 가벼워야 하는데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금의(錦衣)를 걸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갈등요소가 음습한 사회의 뒷골목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그들은 분명 천년을 살 것이다.


  나와 아내가 종종 싸움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장롱 안에 마치 수백 년 전통의 가보(家寶)라도 되는 것처럼 쌓아 둔 옷을 내다 버리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앞에 헌옷을 수거하는 대형 플라스틱 통이 있는데 어쩌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장롱에 내 손길이 닿으면 10년 이상 된 두 아이들의 배냇저고리부터 초등학교 때 입던 옷가지 아내가 시집오기 전에 입던 스커트 자켓등 유행에서 멀어지거나 쓸모없어진 아내의 가보(家寶)들이 순식간에 헌옷 수거함으로 이동된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아내는 나와 국지전(局地戰)을 벌이거나 설전(舌戰)을 벌이며 한 동안 집안 분위기가 험악스러워 진다.


  옷을 벗거나 헌 옷을 버리는 일도 때가 맞아야 한다. 너무 늦거나 이르면 자신 뿐 만 아니라 그 옷으로 인해 혜택을 일을 사람들에게 효과가 반감되거나 전혀 효험이 없어지게 된다. 내 나이로 보아서 좀 더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잘 입어 시각공해를 일으키거나 지적(指摘)받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좀 더 때가 지나면 그때는 누에처럼 되고 싶다. 


  보름달이 대지를 밝히는 가을 밤, 서방님을 기다리는 여심(女心)의 비단 치마 저고리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 아름다운 S라인의 모습이 창호지 문에 비치는 환상적인 모습을 그려보며, 오늘도 좀 더 멋진 내일을 꿈꾸며 이 풍진 세상의 먼지가 잔뜩 쌓인 옷을 벗는다.


                                                              2006. 6. 29.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