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 최재효 2006. 5. 15. 14:03

 

 

 













            바르도


 

 

 

                                               

                                                                                                                                                                          - 여강 최재효

 

                                                                      2


 

  형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형님과 나는 다음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시집오기전의 상황을 물었다. 어머니는

그제서야 나와 형제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으셨다. 3남6녀를 두신

할아버지께서는 늘 아들이 귀한 것을 걱정하였다.

 

  큰 아들은 공부를 하겠다고 서울로 갔지만 공부보다는 다른일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데 실망을 하셨고, 둘째 아들이 경찰 노릇을 하고있는 것에 대하여 늘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계셨으며, 고향을 떠나지 않고 당신의 곁에서 묵묵히 일을 돕는

막내인 아버지를 애지중지 하셨음은 물론이다.

 

  갑오경장 때 할아버지는 파평윤씨를 아내로 맞아 빈손으로 살림을 시작 하면서

한눈 팔지않고 많은 전답(田畓)을 장만하였다. 봄부터 추수가 끝날 때 까지 아버지는

 별을 보고 들녘에 나가셔서 별을 보고 집에 들어 올 정도로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런 아버지가 믿음직스러웠던 할아버지는 막내 아들에게 큰 기대를 하였다.

해방되고 얼마뒤 아버지는 큰어머니를 맞아들이고 살림을 차렸다. 큰어머니는 이듬해

큰누님을 낳으셨다. 은근히 아들을 기대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실망은 곧 행동으로

나타났다.

 

 집안의 대소사 때 은근히 큰어머니를 멀리하였고 큰어머니는 큰죄를 지은 죄인이

되어 늘 가슴을 졸여야 했다. 얼마후 큰어머니는 둘째누이를 낳으셨다. 아버지 형제

들은 장가를 가자마자 모두 첫번째로 딸들을 낳았다. 크게 낙담한 증조부는 막내인

아버지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내리 딸만 둘을 낳은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실망은 충격에

 가까웠다.


  세 아들 모두가 딸만 안겨주니 얼마나 실망을 했을지 이해가 간다. 둘째누이가

막 걸음마를 시작 할 때 한국전쟁이 전쟁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셋째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실망은 분노로 변했다.

 

 실눈을 떠 아내를 보니 계속 하품을 해대고 있다. 졸음이 쏟아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아내는 운전면허를 취득한지 이년밖에 안된 나에게 핸들을 맡기지

않는다. 나도 역시 운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여보, 우리 어디 쉬었다 갑시다."

  지체와 정체가 심한 이 상태로 다음 휴게소 까지 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 될 것

 같았다. 넓은 노견이 나타났다. 장거리 운전자를 위한 장소 같았다. 차를 잠시 노견에

멈추게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히더니 눈을 붙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트에서 제수용품을 살 때부터 약간 피곤해 보였다. 맑은 서녘하늘에 은백색의 낮달이 떠있다. 겨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소생의 계절이 아닌 죽음의 계절이라고 생각을 하는 까닭에

연유하는 것 같다.

 

  시댁 어른들의 냉대에 숨막히게 하루하루를 살던 큰어머니를 죽음으로 몰던 것은

인간의 사소한 욕심에 기인한다. 아니 어쩌면 이 땅에 유교사상을 뿌리깊게 한 역사속의 위정자들이 원인제공자가 아닌가 싶다. 여자보다 남자를 선호하는 우리의 사상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을 해보았다.

 

  무엇이든지 남자가 있어야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여자 몸에서 탄생

되어 세상의 햇빛을 본다. 물론 씨앗은 남자가 뿌리지만, 그 씨앗을 가꾸고 돌보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고대국가의 풍습을 보면 여자들의 영향력이 남자들 보다

우월했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일정기간 남자는 처갓집 살이를 해야 신부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모계사회의 풍습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신라 왕조에서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고려시대 까지도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정도

보장이 되었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여자의 사회적 위치는 땅에 추락하고 만다.


 여자는 시집와서 아이낳고 남편 뒷바라지만 하면 되는 남자들의 부속물에

지나지않았다. 그리고 시집와서 아들을 출산하지 못할 경우 소박을 맞고 쫓겨나는

 불운을 여성들은 감수해야 했다. 조선말 태어 난 할아버지도 아들선호 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리라.

 

  휴대폰 알람이 오후 세시를 알린다. 이 속도로 고향까지 가려면 오후 다섯시가

 넘어야 할 것 같다. 아내는 코까지 골며 단잠에 빠져있다. 깨우기가 미안했다.

조금만 더 자게 하고싶었다. 차량들의 정체와 지체가 좀 풀린 것 같았다.

 

  종합병원에 입원한지 이십여일이 넘었을 때 였다. 아버지 담당의사는 큰형님만

 조용히 불렀다. 의사는 아버지가 기력이 쇄하고 담도(膽道)에 이상이 생겨 황달이

 생기고 염증이 야기되어 결국 암으로 발전하여 길어야 앞으로 한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형제들은 의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한달후면 아버지는 저 세상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형제들은 체념을 해야 했다.

병원입원 한달이 되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고 소변조차 침대에서 용기를 이용해 받아 내야

 했다. 하루가 다르게 아버지의 몸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갔으며,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했다. 내가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어느 날 밤이었다. 새벽 2시경 아버지는 소변용기를 찾으셨다. 볼 일을 마치신

아버지는 모기소리 만하게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낮에도 네 큰엄마가 나를 데릴러 왔었다. 얘, 내 부탁 좀 들어 줄래? ”

 아버지는 퀭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말씀해 보세요."

 " 내가 죽기전에 네 큰엄마 행방을 알고 싶구나. 네가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니?"

 아버지는 조용히 천정을 응시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버지

눈가에 이슬이 맺혀있다. 아버지는 마지막 부탁을 나에게 한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없었다.

큰형과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부탁을 말씀드려야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오십년 가까이 큰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드리고 있지만

우리 가문에 원한을 풀고있지 않다고 추측을 해보았다. 큰형님과 어머니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지만 제사도 꼬박꼬박 지내드리는데 무슨 소리냐며 당치도 않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다.

 

 “아니야, 분명히 큰어머니가 지금의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고향에 있는 둘째 형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다음날 몸이 아프다는 핑게를 대고

일찍 회사를 나와 곧장 고향으로 차를 몰았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둘째형도

반신반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에 작은 형도 더 이상 아무 이의가 없었다.

오래전 세상을 버린 큰어머니의 족적을 찾는 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읍사무소에서 아버지의 호적등본을 떼고, 거기서 큰어머니의 이름과

본적을 알아냈고 즉시 인접한 Y시로 차를 몰았다.

 

  Y시 B읍사무소를 찾아 큰어머니의 옛 주소와 친족들의 이름과 그들의 주소를

알아냈지만 이미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읍사무소 호적계에 전후

사정을 말하고 부탁을 하자, 고민을 하던 담당직원이 두툼한 대장을 꺼내왔다.

큰어머니의 부모와 형제들의 이름을 알아냈지만 큰어머니의 아버지와 두 오빠

들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큰어머니의 어머니도 전쟁이 끝나고

얼마안되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큰어머니의 부모형제는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들의 자손도 없었다.

 

  나는 큰어머니의 흔적을 찾았다는 것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큰어머니의 이름과 외조부와 외조모의 성함을 적었다. 작은형과 나는

큰머어니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읍사무소직원에게 다시 한국전쟁 당시 인근에 살고있던 다른

 조씨성을 가진 분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읍사무소 직원이 여러권의

당시 인근 주민의 기록이 적힌 고색창연한 대장을 여러권 꺼내왔다.

 

  나와 둘째 형님은 흐릿하게 기록된 인적사항이 적힌 대장을 하나하나 검색해

나갔다. 대장에서 큰어머니와 비슷한 번지수에 살았던 조씨성을 가지신 분 네명을

 찾아냈다. 물론 지금은 거의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분들의 자손들

이름도 함께 기록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주소는 지금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다.

깊은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다니다 거대한 암벽과 맞닥트린 느낌이었다. 호적

담당 직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사정을 해보았다.

 

  직원은 관련규정을 한참동안 찾아보더니 나와 둘째형님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전국 온라인 전산망을 통해 그 네명의 자손들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잠시후

그 직원은 두 명의 자손들 인적사항을 알아 냈다. 서울에 한명 부산에 한명이 거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분의 인적사항을 알려달라고 하자

직원은 주소와 기타 사항등 개인신상정보는 본인의 승낙 없이 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분께 먼저 연락을 취한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잠시후, 그 직원은 상대방의 승낙이 있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서울에 거주하는

분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여보세요? 여기는 B읍사무소입니다. 방금전 이곳 직원으로부터 전화 받으신

분이시죠?”
“네에, 그럽습니다만, 뉘신지요?”


 70대 노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그러나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몇마디 그분과 통화를 하고 만날 약속을 했다. 나는 그분께 큰어머니의

성함을 대며 아느냐고 묻자. 집안 누님인데 나보고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아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전화상으로 곤란하여 그분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제가 두 시간전에 어르신께 전화드린 사람입니다.”

 나는 전화를 하게된 경위를 설명했다. 큰 아들되는 사람과 함께 약속장소인 한정식

식당으로 나온 노인은 나와 형님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노인께 자초지종을 말하자 노인은 눈을 감고 뭔가를 한참 생각하는 듯 했다.

술 석잔을 연거푸 마시던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누님은 우리와 이웃해 살고 있었지, 아주 참하고 인정도 많았었어. 벌써

오십년이 지난 이야기네 그려. 그 누이가 자네 아버님에게 시집을 가시고 얼마안돼

돌아가셨다고 하더군. 약을 먹었다고 말야.”

 노인은 다시 술잔에 손을 대려고 하자 아들이 눈치를 주었다.

 

 “그때는 젊은 사람이 자살을 하면 집안 창피하다고 쉬쉬하며 처리를 했어. 자네들

 큰어머니도 자네 집안 어르신들이 화장을 한다고 해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 모시고

왔네.”


 나는 그 이야기가 몇칠전 아버님한테 전해들은 이야기와 일치하는 점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은 담배를 한대 피우고 나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집안 어르신들이 마차로 누님을 모셔와서 선영(先塋)에 장례를 지냈네.”

 노인은 무엇인가를 그리워 하는 눈빛이었다.


 “어르신, 그 산소가 지금 어디 있나요?”

갈증이 났다. 곁에 있던 노인의 아들이 거들려고 하자 노인은 제지를 하였다. 그리고 기침을 몇 번하고 소주를 한잔 비웠다.


 “자네들 한테는 정말 안돼었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않돼었다는 말은 무언가 잘 못되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B읍에 있는 자네 큰어머니 주소를 찾아가보았다면 알겠지만, 이십년전

그 곳 일대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 조씨선영 조상들이 수난을 겪었

다네. 백여기 이상되는 조상님들의 산소를 모두 이장하거나 화장을하여 우리 조씨

가문의 납골묘으로 모셨지. 자네들 큰어머니도 납골묘에 모셔져 있을걸세.”


 노인은 두어번 기침을 하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가로등이

훤히 밝아있었다. 밤에 납골묘에 찾아 간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싶어 다음날 찾아

보기로 했다. 휴대폰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애야, 네 아부지가 혼수 상태란다. 빨리 와야겠다.”

 다급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작은형과 나는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가늘게 숨소리만 내며

누워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큰형내외와 둘째 셋째누이내외, 여동생 내외등 모두

 와있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하루하루 지날 수록 악화되 가고 있었다. 하루 세끼의

식사도 못하시고 링거만 맞는 상태였다. 큰형이 급히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담당 의사선생 말로는 집으로 모셔서 조용히 임종을 맞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한다.”


 어머니와 대부분의 가족은 의사의 말대로 고향에서 조용히 임종을 맞도록 해드리

자고 하는 의견이었다. 나와 작은형은 당장 투약을 멈추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니 좀더 두고 보자고했다. 결국 이삼일 정도 더 병원에 계시도록 하는 것으

로 합의를 보았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가족들에

게 공표를 했다. 형제자매들은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요즘들어 아버지가 계속해서 큰어머니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버지 꿈에 자주

나타나신다는 이야기와 아버지가 큰어머니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어머니의 납골을 모셔와

합장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다행이 어머니가 안계서 눈

볼 일은 없었지만, 어머니가 아신다면 서운해 하실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큰어머니 몸에서 출생한 두분의 누님이 계시고 두분 누님이 난 조카들이

여러명이나 되는 현실을 감안 할 때 그냥 대충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누이들 조차

자신들을 낳은 어머니의 산소가 있었다는 말과 현재 납골되어 있다는 사실에 큰 충

격을 받은 눈치였다. 나중에는 어머님도 아시게 되었지만 아버지 돌아가시면 큰어

머니의 유골을 모셔와 합장을 하는 방향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지체와 정체로 인하여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아내도 자꾸 시간을 보며

짜증을 냈다. 동서들 보다 늦게 도착하면 시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을 것이 기 대문

이다. 아내는 그냥 가자고 하는 것을 잠시 휴게소에 들려 볼 일을 보자고 하였다. 커피

한잔을 뽑아 아내에게 주며, 이번부터 내가 핸들을 잡겠다고하니까 미덥지 않은 표정

이다.


 다음날, 나는 큰형님과 둘째누이 그리고 작은형님과 서울의 그분을 다시 찾았다.

누님이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자 그 분은 누님의 손을 잡고 마치 큰 어머니의 분신을 만난 듯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네가 정녕 누님몸에서 나온 내 조카가 맞느냐? 내가 오래살다 보니 조카를

다 만나보는구나. 오래 산 보람이 있구나.”


 그분은 누이가 큰어머니를 꼭 빼닮았다고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누이와 우리

형제들을 별도로 분리하여 대하는 것 같았다. 누님은 자신들 가문 사람의 몸에서 태어

났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이해했다. 누님을 함께 데리고 간 것은 그 분들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보다 누이가 큰어머니의 납골함을 모시고 오는데 데 유리할 것 같은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외삼촌 죄송합니다.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어요. 용서하세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누이는 어깨를 들석이며 흐느꼈다. 감정을 진정한 누이가 차분하게 그분께

 ‘아버지는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분이며, 아버지의 꿈에 갑자기 어머니가 자주

현몽하면서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묘소에 합장을 해드리려 한다는 뜻을 전하자 그분은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대로 혈족의 유골을 함부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형님은

아버지가 길어야 삼사일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씀과 아들의 입장으로서

꼭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분은 이틀정도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