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공간/자작시 감상실 2
빈 잔
여강 최재효
2006. 4. 18. 08:50
빈 잔
- 여강 최재효
방금 또 한 잔을 채웠습니다
파란 생각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붉은 포도주를 넘치게 따르기도 하면서
그때마다 잔을 세어 봅니다
반생(半生) 동안 채운 잔을 쌓으면
에베레스트 산보다 낮지 않을 듯 합니다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 한통도 담을 수 없는 뱃속에
이미 바다가 들어 앉아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맞는 말씀인 듯 합니다
가만히 잔을 들여다봅니다
욕망의 잔속에
눈 멀고
가엾은
배불뚝이, 한 사내 잠자고 있습니다
서산에 짧은 해지고 나면
북망산(北邙山)에
채우다 만
주인 잃은 빈잔들
괜히 원통해 합니다
지난 가을 나뭇잎 비운
나목(裸木)의 가지끝에
푸릇한 기운이 뜨겁게 피고 있습니다
2006. 3. 17. 23:30